30조 재벌
일단은 주문을 하고 식사부터 하기로 했다. 간단한 인사치레가 오고 가고 음식들도 비워질 때쯤, 장태식이 본격적으로 이야기를 꺼냈다.
“최진수 사장이 그 정도 재력가인지는 몰랐는데, 아무튼 대단한 사람이었군요.”
“최근에 사업이 잘돼서 여유자금이 좀 생긴 정도입니다.”
“사업요? 무슨 사업을 하시는데요.”
“필리핀에서 땅을...”
“필리핀에서 땅을?”
필리핀에서 땅을 파서 금괴를 찾았다는 말을 하려던 것이었지만, 그런 말을 할 수는 없는 일이고 말이다.
“땅을 개발 중입니다. 하하...무슨 말인지 아시겠죠. 땅도 파고, 건물도 짓고 그런 일이죠.”
“호텔이나 리조트 같은 거 말인가요?”
“그렇죠. 필리핀에 리조트도 만들고 있고요.”
“알고 보니 대단한 사업가였군요.”
장태식은 흥미롭다는 표정이었지만 대기업 총수답게 더이상 디테일한 호기심을 보이지는 않았다.
“그나저나, 장태식 회장님 소유의 빌딩을 제가 인수하게 될 줄이야. 하하, 저도 잘 믿어지지 않네요.”
“빌딩이든 뭐든, 돈만 있으면 사고파는 물건일 뿐이죠. 안 그런가요? 지난번에는 내가 최진수 사장의 문위우표를 샀는데, 이번에는 내 빌딩을 최진수 사장이 사게 되는군요.”
“그런데 빌딩은 왜 매각하시는 겁니까?”
내 질문에 장태식 회장은 씨익 미소만 지을 뿐이었다.
“사업을 하다 보면, 특히 나처럼 큰 사업을 하다 보면, 여러 가지 비공식적인 자금이 필요합니다. 그룹의 경영권 같은 것도 복잡하게 얽혀있고, 지주회사들 중심으로 순환출자를 많이 하는 한국 재벌기업의 특성상 회장들의 개인 자금이 필요한 일들도 있고요.”
“오, 순환출자 말이군요.”
장태식 회장은 민감할 수도 있는 이야기였지만, 나를 같은 재벌 3세쯤이라고 생각하는지 별다른 거부감 없이 비자금을 만들기 위해 빌딩을 매각한다는 이야기를 술술 이어가고 있었다.
하긴, 어떤 교수님 말씀이, 재벌 3세의 필수과목이 바로 순환출자라고 하니 말이다. 아무튼, 정확히 돈이 어디에 필요한지는 말하지는 않았지만, 장태식 회장의 뉘앙스로 볼 때, 대성그룹의 순환출자 구조의 정점에 있는 지주 회사의 주식 매입을 위한 돈이 필요하다는 느낌적인 느낌이었다.
하지만 그런 재벌들의 폐습이 한국경제의 문제인 것은 분명했지만, 내가 국가 경제까지 신경 쓸 일은 없고, 장태식 회장이 요구한 대로 조용하게 빌딩을 구매해서 시세 차익을 얻고, 무엇보다 여의도에 대형 오피스 빌딩의 건물주가 되는 것으로 만족하기로 했다.
“내 조건은 간단합니다. 빌딩 인수에 대해서 언론이든 지인이든 함구해 달라는 거죠.”
“그거라면 걱정하지 마십쇼. 원래 제가 과묵하기도 하고 빌딩을 샀다고 어디에 자랑하고 다니는 사람도 아닙니다.”
“그럴 거라고 믿겠습니다.”
장태식 회장과는 그렇게 식사와 함께 건물 인수문제도 매듭이 지어졌다. 실무적인 계약서 작성 같은 것은 장태식의 대리인과 따로 진행하기로 하고, 그렇게 장태식 회장과 나는 여의도 동화 빌딩을 2천 2백억의 가격에 인수하는 계약에 합의한 것이다.
***
그렇게 식사를 마치고, 솔베이지의 VIP룸을 나왔다.
“그럼, 잘 부탁드립니다. 최진수 사장님만 믿고 있겠습니다.”
레스토랑 주차장으로 나오면서 장태식 회장은 나에게 악수를 청했다.
“앞으로도 사업에 관해서 종종 만나서 이야기를 하기로 하죠. 오늘처럼 내 부탁을 들어주면 고맙고요.”
“아, 예...”
장태식 회장은 건물 매각이 만족스러운지 나에게 다가와 친근하게 어깨를 두드리기도 하고 유쾌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렇게 장태식 회장이 차를 타고 사라지자, 진수는 약간 멍한 기분으로 기지개를 켰다. 몸에서 약간 두둑거리는 소리가 나며 몸이 기분 좋게 스트레칭 되는 느낌이었다.
“선배님.”
“뭐..뭐야?”
이 목소리는 강북에서 들어도 민영민, 강남에서 들어도 민영민의 목소리였다. 뒤를 돌아보니, 민영민과 민소희 그리고 중년의 남자 한 명이 서 있었다.
“어, 영민이랑 소희구나, 그리고..”
“안녕하세요. 진수 오빠, 최진수 오빠라고 영민이 오빠, 학교 선배님이에요. 그리고 이쪽은 김준수 사장님, 우리 기획사 사장님이세요.”
“아, 처음 뵙겠습니다. 최진수라고 합니다.”
“드림 엔터테인먼트, 김준수입니다. 아까, 그분 장태식 회장님이시죠?”
“아, 그..그렇죠.”
장태식 회장이라면 TV에 매일 나오는 연예인 같은 사람이니까, 어지간한 사람들도 장태식 회장을 잘 알고 있었다. 물론, 연예인과는 나오는 장르가 다르지만 말이다.
“와, 역시, 최진수 선배님은 대단하시네요. 워렌 버핏과도 친분이 있다는 건 알았지만, 장태식 회장님과도 같이 식사하러 다니시는 사이셨군요?”
언제나처럼 민영민이 호들갑스러운 목소리로 떠들고 있었다. 예전부터 장태식 회장도 나와 친하다는 소문은 있기는 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공식 석상에서 우연히 한 테이블에 앉았다는 정도였는데 오늘은 둘이서 같이 식사를 하고, 그리고 장태식 회장이 나와 악수를 하고 앞으로도 부탁을 들어주면 고마울 거라는 말을 한 걸 민영민 일행도 들었으려나?
“어, 그냥 별 건 아니고. 우연히 만나서 식사 정도를 같이 한 거지.”
“저도 봤습니다. 아까, 장태식 회장님이 악수를 먼저 청하면서, 정말 고맙네, 최진수 사장 덕분에 큰 도움이 되었어, 앞으로도 협력하자고, 이런 말도 하지 않았나요?”
민영민이 뭔가를 보고 들은 것은 사실인데, 약간 실제 상황과는 차이가 있는 내용이었다.
“뭐, 그거 비슷한 이야기가 있기는 했지. 나랑 협력 정도는 아니고.”
“뭐 하시는 분인지 모르겠지만, 대단한 분인 건 확실하군요. 윙크윙크의 화보 촬영을 위해서 요트를 빌려주신 바로 그분이시죠?”
김준수 사장도 나에 대해서 이미 알고 있는 것 같았다. 세 사람이 오늘 솔베이지에 모인 이유는 지난번 윙크윙크 화보 촬영으로 고생한 민영민에게 식사를 대접하기 위해서라고 했다.
“겸사겸사, 소희도 같이 와서 셋이 식사하러 온 거였죠. 그런데 여기서 최진수 선배님을 만나게 될 줄이야.”
민영민과 더 길게 얘기를 해서 좋을 것은 없을 것 같았다. 어차피, 장태식 회장이 부탁한 것도 빌딩 매각 같은 문제는 최대한 조용히 진행하자는 것이었으니까 말이다.
“아직 식사 안 하신 거죠? 그럼 맛있게 식사하세요. 전, 먼저 가보겠습니다.”
민소희와 김준수 사장에게 인사를 하고 주차장으로 가자, 레스토랑 직원이 나의 람보르기니 아벤타도르를 대기시켜 놓고 있었다.
뒤에서는 김준수 사장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 친구 뭐 하는 사람이야? 돈이 그렇게 많은가? 요트도 갖고 있다는 거지?”
“예, 맞아요. 베네티라는 회사에서 만든 요트인데 요트 가격이 2백억 이상이라는 것 같더라고요.”
“그래? 재벌 3세 정도 되는 사람이겠지? 장태식 회장과도 친한 것 같고.”
“김준수 사장님은 왜 그렇게 관심이 있으신 겁니까?”
“나야, 저런 부자들 보면 다 관심이 생기지, 혹시 투자라도 받아볼까 하고 말이야. 우리 회사도 그리 자금 사정이 좋지 않은 거 알잖아?”
“아, 그렇군요. 하긴, 최진수 선배가 돈은 많으신 분이니까요. 보시면 아시겠지만, 장태식 회장님과 호형호제하는 사이인 걸 보면, 역시 최진수 선배님 아버님이 엄청난 재벌이라는 소문이 맞는 것 같습니다.”
“호형호제? 그런 사이야 둘이?”
“아까, 못 보셨나요? 둘이 악수하고 그러면서, 형님, 동생 이렇게 말하던데요.”
민영민은 기억력에 문제가 있는 건지, 상상력이 뛰어난 건지, 방금 본 일에 대해서도 망상에 가까운 기억의 오류를 보이고 있었다.
어쨌든, 계단 위의 세 사람은 내가 다 듣고 있다는 것을 인식하지 못 하는지, 나에 대한 이야기를 자기들 나름대로 소곤거리며 이야기하고 있었다.
“형님 동생이라? 그렇다면 역시 재벌가 쪽이라는 건데? 아무튼, 흥미로운 친구군. 소희가 저 친구 잘 꼬셔봐.”
“어머, 사장님, 꼬시긴 누굴 꼬셔요?”
“우리 기획사에 투자 좀 하게 꼬시라는 말이야. 그러면 소희도 좋은 거잖아.”
“그 정도로 자금난이 심각한 겁니까?”
“그래, 좀 어렵게 됐어. 저 최진수라는 친구, 재력이 상당한 것 같은데 투자를 좀 받으면 좋을 것 같아서 말이야. 어떻게 방법이 없을까?”
“그거라면 제가 말해보겠습니다.”
“영민이가? 최진수랑 친한가 보지?”
“하하, 그럼요. 저 역시도 호형호제하는 사이라고 할 수 있죠.”
“오, 그래?”
더 이상 위에서 들려오는 쓸데없는 소리도 듣기 싫고 그대로 모른 척 람보르기니의 시동을 걸었다. 람보르기니는 성난 황소처럼 소리를 지르며 천천히 주차장을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
문화대학교 교정.
“장태식 회장과 형제라고? 최진수는 최 씨고, 장태식 회장은 장 씨잖아?”
“의형제라는 것 같아.”
“의형제? 대성 그룹 장태식 회장과? 장태식 회장과는 나이 차가 꽤 있는데.”
“그..그렇지, 하지만 뭐 레벨이 비슷한 사람들이니까, 일반인들이야, 사회생활하면서 나이라는 것도 중요하고 그렇지만, 극소수의 재벌가의 사람들끼리 어울리는 그런 작은 커뮤니티에서 나이 차는 중요하지 않을 수도 있지.”
“나이 차가 중요하지 않으면 뭐가 중요한데?”
“그보다는 서로 간의 재력이 엇비슷하면 친구처럼 지낸다는 것 같아.”
“그럼, 최진수 선배와 장태식, 대성 그룹 회장이 재산이 비슷하다는 거야?”
“뭐, 그런 식으로 민영민이 이야기를 하더라고, 동급이고 호형호제하는 사이라고..”
“동급에 호형호제? 왠지 너무 나간 이야기 같은데..”
민영민이 입을 다물 거라는 기대는 애시당초 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이번에는 재벌 3세라는 소문에 더해 구체적인 나의 재산에 대한 이야기까지 소문의 대상이 되고 있다는 것이 좀 다른 점이었다.
학교에 도는 소문을 취합해 보면, 장태식 회장의 주식 자산이 대략 18조 정도, 하지만 비상장 주식도 상당히 보유하고 있고, 그런 비상장 주식회사들은 순환출자를 통해 대성 그룹을 지배하는 지주 회사들로 그 가치까지 합치면 31조 정도의 재산이라는 평가가 있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장태식과 동급으로 호형호제하는 나의 재산이 30조는 넘을 것이라는 소문이 돌고 있었다.
“최진수 선배가 나이도 어린데, 장태식 회장이 동급으로 대할 정도라면 그만한 재산이 있으니까 가능한 거 아니겠어? 장태식 회장이 그렇게 호락호락한 사람도 아닌데, 진수 선배의 손을 꼭 붙잡으면서, 이번에 꼭 좀 도와주게, 그랬다고 하더라고.”
“와, 그 정도라면, 최진수 선배의 자산도 30조 이상이라고 봐야겠네? 민영민이 직접 봤다니까, 신빙성도 있는 이야기고 말이야.”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문들이 내 귀까지 들려오는 것이었다. 하하...민영민이야 원래 그런 놈이니까, 헛소문을 퍼뜨리는 게 당연하다고 치고..
그걸 믿는 다른 녀석들은 또 뭔지? 내가 장태식과 호형호제를 하고, 내 재산이 30조가 넘는다니 이게 말이 돼? 말이 되는 소리냐고?
아니지...
재산이 30조라고? 필리핀 여기저기에 묻혀 있는 야마시타 골드를 다 찾는다면, 대충, 아니 최소한 그 정도는 되지 않을까?
물론, 그걸 찾는 과정에서 삽질을 하는 내 허리가 버텨 준다면 말이다. 막대한 황금이 존재하고 그걸 찾을 수는 있지만, 다른 사람 도움 없이 그걸 캐내서 현금화 하는 것이 쉽지는 않은 일이다.
하지만 강인한 의지와 군대에서 배운 삽질로 용기를 가지고 도전한다면 불가능한 일도 아니다.
상상이 되었다. 필리핀의 무이무이섬의 리조트 지하에 만들고 있는 거대한 금고가 완성되고, 거기에 필리핀의 여러 무인도들에서 찾은 금괴와 금화, 다이아몬드 같은 보석류까지, 일본군의 약탈 보물들이 가득 들어차게 된다.
그 보물들의 가치는 30조가 넘는 그야말로 막대한 보물들, 황금으로 가득 찬 금고의 금들을 처분해서 30조 이상의 현금을 손에 넣는다면 한국 최고의 재벌기업의 회장인 장태식의 재산 수준의 자산가가 되는 것이다.
말 그대로 장태식과 동급의 존재가 되는 것이다. 물론, 돈으로 한 인간을 평가할 수는 없는 법이지만, 현대 자본주의 시대에 한 인간이 가진 자산은 인간을 평가하는 척도가 되는 것이 사실이다.
그가 가진 자산에 의해서 한 사람에 대한 평가는 판이하게 달라질 수도 있다. 그런 생각을 하자, 내가 대단하게 생각하는 대성 그룹 장태식 회장도 결국, 그가 가진 돈에 의해서 고평가를 받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만약, 장태식에게 30조의 자산이 없다면? 평범한 중소기업의 과장이라고 해도, 장태식을 사람들이 그렇게 떠받들까? 그와 반대로 편의점 알바생이라도 30조의 자산이 생긴다면? 어느 누구도 그 알바생을 무시하지는 못할 것이다.
현대 자본주의 시대에 인간의 가치는 그가 가진 자산으로 평가를 받으니까 말이다.
그래, 허리가 부러지는 한이 있더라도 필리핀의 야마시타 골드를 모두 찾아서, 30조의 재벌이 되고 말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