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금 세탁소
“접니다. 김영석이라고 기억하시나요? 영진빌딩을 최진수 씨에게 매각한 영진빌딩의 전 건물주 말입니다.”
어라? 그러고 보니, 생각이 났다. 영진빌딩, 그러니까 강남에 처음으로 산 신사동의 그 빌딩은 급매로 나온 것을 싸게 구입했었다. 이전 주인은 급하게 해외로 간다고 하고 말이다. 그래서 영국 왕실에서 쓴다는 해스텐스 침대도 공짜로 받아서 아직도 종종 잘 이용하고 있었고 말이다.
그때 기억으로는 김영석은 40대 초반의 깔끔한 인상의 남자였다. 하지만 무슨 고민이 있는지 꽤나 어두운 얼굴이었던 걸로 기억했다. 어쨌든 외국으로 급하게 도망치는 느낌이었는데, 지금은 필리핀에 있는 것 같았다.
“필리핀에 계신 거죠?”
“예, 마닐라에 있습니다. 혹시 기억하시나요? 전에 제 펜트하우스의 가구과 집기를 공짜로 넘겨드리는 조건으로 나중에 만나면 술 한잔 사라고 했던 거요?”
음, 그랬었나? 그런 것 같기도 하고 말이다. 어쨌든, 행운의 과자에서 나온 번호니까, 김영석을 만나는 게 황금을 매각하는데 도움이 될 것 같았다. 아무튼, 일단 김영석을 만나보기로 했다.
***
마닐라, 요트 클럽
“맥주와 와인이 있는데 어떤 걸로 드시겠습니까?”
“맥주로 하죠.”
날씨가 더워서 시원한 맥주가 어울리는 날씨였다.
“요트가 멋지네요. 요트 이름이 뭡니까?”
“이름요? 베네티 클래식 수프림 132죠.”
“하하, 모델 이름 말고, 요트에 따로 이름은 없나요?”
물론, 요트에 이름 같은 건 없었다. 무생물일 뿐인 요트에 무슨 이름이 따로 필요해?
김영석은 예전 기억과는 달리, 날카롭던 인상이 많이 무뎌져 있었다. 맥주 한 잔을 하며 듣기로는 영진빌딩을 나에게 매각하고 바로 필리핀으로 왔었던 모양이었다.
“그런데 지금도 궁금해서 그런데, 갑자기 빌딩을 팔고 필리핀으로는 왜 오신 겁니까?”
“하하, 호기심이 많으시군요. 그보다는 어떻게 내 전화번호를 알았는지 그것부터 말해야 하는 거 아닙니까?”
이유라? 행운과자에 나온 전화번호로 전화를 걸었다고 할 수는 없고 뭐라고 둘러대지? 그래, 어차피, 김영석은 지금 나의 최대의 고민, 야마시타 골드를 현금화하는 걸 도와줄 사람이다. 사실대로 말하면 되겠지, 적당히 각색을 해서 말이다.
“그게, 어떤 사람이 김영석 씨가 금 전문가라고 해서 말입니다.”
“금 전문가요? 하하..하하하...누가 그러던가요?”
“누가 그런 게 아니라, 몇 다리 거쳐서 들은 풍문이죠. 사실인가요?”
김영석은 금 전문가냐는 나의 질문에 약간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틀린 말은 아니군요. 정확하게는 재벌들을 위해서 해외재산 도피를 도와주는 일을 했었지만 말입니다.”
“해외재산 도피요?”
“예, 재벌들은 비자금이 필요한 경우가 있거든요.”
그렇지, 여러 가지로 비밀 자금이 필요한 일이 있기는 하겠지.
“그럼, 재벌들의 비자금을 만들어 주는 그런 거 말입니까?”
“일종의 돈세탁이죠. 예를 들면 필리핀 같은 곳에 호텔이나 리조트를 한국의 기업에서 투자를 하는 겁니다. 형식적으로요. 하지만 실제로는 투자 가치가 없는 그런 곳에 천억쯤 투자를 하는 거죠.”
“그러면 어떻게 되는데요?”
“원래 투자 가치가 없던 곳으로 투자된 돈은 그냥 공중으로 날아가는 거죠.”
“왜 그런 이상한 투자를?”
“대신에 재벌 기업의 총수는 자기가 투자한 호텔에서 비자금을 리베이트 받는 겁니다.”
“일부러 망할 곳에 투자를 하는 척하면서 그 투자금을 개인적으로 되돌려 받는다는 거군요?”
“그렇죠. 기업 입장에서는 손해지만, 기업의 오너 입장에서는 개인적으로 이익을 보는 방식이죠. 이런 리베이트 거래를 하려면 한국에서는 너무 위험하고 필리핀이나 동남아시아가 적당하죠. 이런 곳에 투자를 한다고 해도 한국의 언론이나 검찰에서는 큰 관심은 없을 테니까요.”
“그 후에는 어떻게 하는 겁니까?”
“그 후에는 돈세탁을 해야죠. 어쨌든, 자기가 투자한 곳에서 돈을 돌려받을 수는 없으니까, 그렇다고 금융기관을 통해서 거래를 할 수도 없고, 중간에 홍콩의 금 거래상을 통해서 금으로 리베이트 대금을 받는 겁니다.”
“금요? 홍콩의 금 거래상?”
듣고 보니, 김영석은 재벌 기업들의 회장님들의 개인 자금을 만들어 주는 해외 리베이트 브로커였던 모양이었다.
아무튼, 해외에 사기성 투자를 해놓고, 거기에 투자한 기업의 돈을 기업의 오너가 리베이트를 받는 방식, 그리고 돈세탁을 위해 리베이트 대금은 홍콩의 금 거래 조직으로부터 금으로 받아, 일본의 후쿠오카의 금 매입상에게 되팔아 현금화를 하는 일을 하는 것이었다.
“홍콩과 후쿠오카에 그런 금을 거래하는 큰 조직이 있나요?”
“그렇습니다. 아시아에서 금을 거래하는 곳으로는 홍콩과 후쿠오카가 유명하죠, 둘 다 삼합회와 야쿠자의 근거지로 유명한 곳이니까요.”
그리고 지리적으로도 동남아시아 국가들과 가까운 곳이어서, 예로부터 황금의 삼각지로 불리던 곳이라고 했다.
“황금의 삼각지라면?”
“아시아의 대표적인 금 생산지는 인도네시아와 필리핀이죠. 특히, 인도네시아는 전통적으로 유명한 금광이 많은 곳입니다. 지금도 그라스버그 광산은 세계 최대의 금광이죠. 세계에서 가장 많은 황금이 채굴되는 광산 말입니다.”
“수마트라 금괴가 유명한 게 그런 이유군요?”
“수마트라도 금이 많이 생산되는 곳 중에 하나고요. 아무튼 아시아의 황금들은 주로 중국과 인도네시아에서 생산되는 것이죠.”
그렇게 동남아 일대에서 생산된 황금들이 홍콩의 범죄 조직들을 거쳐 중국이나 일본, 그 외에 미국 같은 곳으로 이동한다는 것이었다. 그중에서도 후쿠오카는 전통적으로 황금의 거래가 많이 되는 지역인데다가, 일본의 경우에는 금괴에도 8%의 소비세가 붙는 문제 때문에, 한국이나 동남아보다 금의 가격이 항상 비싸게 형성되어 있다. 그래서 동남아의 황금들이 홍콩을 거쳐 일본으로 밀수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었다.
“그런 식으로 돈세탁을 하는 건가요?”
김영석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튼, 홍콩의 조직을 통해서 리베이트 자금을 금괴로 받고, 그걸 밀수로 일본으로 보내서 후쿠오카에서 처분을 하면 일본의 소비세만큼 추가 이익이 생기니까요.”
어차피, 그런 리베이트 자체가 불법이라, 거기에 김영석은 한국을 거쳐 후쿠오카로 밀수까지 했었다는 것이었다. 그런 식으로 재벌들의 돈세탁 자금을 관리해주며, 평범한 은행원이었던 김영석은 홍콩과 동남아의 금 밀거래 조직과도 연관이 되면서 어둠의 길로 들어선 것이었다.
하지만 부정한 일을 하는 대가는 달콤한 것이었다. 돈세탁 자금인 금괴를 환전하는 과정에서 김영석에게도 막대한 커미션이 생긴 것이었다.
“그럼, 신사동의 영진 빌딩도, 그런 돈세탁으로 번 돈으로 산 거였군요?”
김영석은 고개를 끄덕였다.
“저는 최진수 사장님처럼, 재벌 3세나 그런, 금수저가 아닙니다. 평범한 집안에서 태어나서 그럭저럭 열심히 공부해서 안정적인 은행원이 된 케이스였죠. 하지만 은행에서 능력을 인정받아서 VIP들을 상대하게 되면서 일이 꼬인 거죠.”
은행에서 능력을 인정받아서, VIP 고객들의 자금을 담당하게 되었고, 그것은 위험한 유혹으로 김영석을 이끈 것이었다. 결국, 한국 검찰에서 김영석의 자금 세탁을 의심하고 소환장이 곧 발부될 거라는 소식에 김영석은 급하게 한국의 재산을 처분하고 필리핀으로 도피를 할 수밖에 없었다고 했다.
“저는 제가 그냥 운이 좋아서 영진 빌딩을 헐값에 구입한 줄 알았는데, 그런 사연이 있었군요.”
“하하, 뭐, 자랑스러운 이야기는 아니지만, 그게 저의 인생입니다. 흙수저 주제에 금수저들처럼 되려다가, 결국 추락해 버린 거죠. 이카로스처럼 말입니다.”
김영석의 인생이야기가 흥미롭기는 했지만,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어쨌든, 김영석은 한국의 재벌들의 해외 비자금을 돈세탁 해주던 인물로, 홍콩이나 후쿠오카의 국제 금 거래상들과 선이 닿아있다는 그런 말인데? 그렇다면 내가 가진 야마시타 골드를 처분하는 것을 도와줄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 한국에는 못 가시게 되었고, 필리핀에서는 뭘 하고 계시나요?”
“특별히 하는 일은 없습니다. 빈둥거리면서 남들과 비슷하게 살죠, 도박도 하고 술도 마시고 아시죠? 필리핀은 그런 곳 아닙니까?”
“그래도 돈은 충분하신 모양이네요?”
“그렇지도 않습니다. 한국에서 가져온 돈으로 세부의 리조트에 투자를 했는데 리조트에 문제가 생겨서 돈을 거의 다 날리고 말았죠.”
“오, 그래요? 그럼, 돈이 좀 필요하시겠네요?”
“그런 셈이죠. 뭐, 제가 할만한 일이 있을까요?”
***
김영석은 다행히 아직도 홍콩의 금 거래 조직과 거래를 할 수 있는 인맥을 가지고 있었다. 김영석에게는 야마시타 골드에 대해서는 이야기하지 않고, 필리핀에서 구입한 금괴와 금화들을 현금화하는 일을 도와달라는 정도로만 설명을 했다. 김영석도 그 이상은 묻지 않았고 말이다.
김영석도 한국을 떠날 때 가져온 도피자금이 상당했지만, 세부의 리조트 투자 실패와 카지노 등에서 상당한 돈을 탕진해서 거의 빈털터리가 된 상태였다. 그러던 차에 내가 대량의 금괴를 처분해 달라고 부탁을 하자, 김영석은 망설일 것도 없이 나의 금 거래를 돕기로 했다.
그렇게 무이무이섬의 야마시타 골드들은 홍콩의 금 밀거래 조직을 통해서 팔려나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렇게 현금화된 자금들은 한국의 은행이 아니라, 말레이시아의 쿠알라룸프르의 은행들로 보내졌다.
김영석의 설명으로는,
원래 돈세탁이라는 말은 미국 마피아들이 불법적인 자금을 합법적인 것으로 위장하기 위해 세탁소를 운영한 것에서 나온 말이다, 코인 세탁소를 운영하면서 범죄 자금을 합법적인 것으로 위장한 것이다.
마피아는 세탁소를 운영했지만, 기업가들이나 부자들은 주로 스위스 은행 같이 비밀보장이 잘 되는 은행들이나 버진 아일랜드 같은 조세 피난처를 이용하기도 했다. 유럽에 스위스 은행이 그런 곳으로 유명하다면, 아시아는 자유무역항이었던 싱가포르가 그런 역할을 했었다. 2천 년대 전까지는 말이다. 하지만 싱가포르도 금융 규제가 강화되면서 현재는 말레이시아의 쿠알라룸프르가 그런 역할을 하고 있었다. 아시아의 검은 비자금들이 돈세탁이 되는 곳들 말이다.
나는 김영석의 제안으로 야마시타 골드를 매각한 자금을 쿠알라룸푸르의 은행들로 보내서 관리하기로 했다.
김영석은 은행원 출신에 이런 해외 비자금의 전문가라 홍콩과 말레이시아를 오가며 금괴의 매각과 쿠알아룸프르 은행을 통한 자금 세탁까지 모든 일들을 완벽하게 처리해 주었다.
물론, 김영석도 상당한 커미션을 챙겨서 쿠알라룸프르에 고급 아파트까지 사들였다.
***
쿠알라룸프르 엠버시 가든, 레지던스
한국 평수로는 28평쯤 되는 레지던스 아파트였다. 침실 세 개와 욕실 두 개로, 신사동에 있던 영진빌딩 펜트하우스에는 크게 못 미치는 곳이었지만, 64층 규모의 대형 레지던스 아파트로 쿠알라룸푸르의 전경이 내려다 보이는 뷰는 아주 멋진 곳이었다.
“아주 큰 아파트는 아니네요?”
“예, 여기는 쿠알라룸프르 중심가에 있어서 금융업무를 보기 좋은 일종의 사무실이죠.”
김영석은 금 거래로 받은 커미션으로 시 외곽에 근사한 저택도 하나 샀다고 했다. 수영장과 정원이 딸린 그림 같은 저택을 말이다.
어쨌든, 커미션으로 얼마를 챙겨가든 그다지 신경은 쓰지 않았다. 내 통장에 30억 달러, 우리돈으로 3조 3천억의 돈이 들어왔으니 그걸로 만족이었다.
물론, 무이무이섬의 야마시타 골드를 다 처분한 것도 아니었고, 아직 찾아야 할 황금들도 많이 남아 있었다.
일단, 자칭, 해외 돈세탁 전문가인 김영석과 야마시타 골드의 일부를 처분해서 돈세탁을 해 놓은 상태였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쿠알라품프르의 은행 계좌에 30억 달러, 한화, 3조 3천억이 입금된 것이다.
예전에 계좌에 한 번에 천억이 들어와서 놀란 적이 있었는데, 3조 3천억이라? 물론, 계좌들은 여러 개로 쪼개져 있어서 한 계좌에 다 들어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어쨌든, 총액으로 3조 3천억이 넘는 현금이 나의 계좌들에 들어있는 것이었다.
말 그대로 비현실적인 상황이었다. 그리고 앞으로 야마시타 골드를 더 매각해서 이 돈은 3조가 아니라, 30조 이상으로 늘어날 예정이었다. 나의 체력이 버텨준다면 말이다.
“쿠알라룸프르로 아시아의 부자들이 모여드는 이유가 다 있군요.”
“그렇죠. 최진수 사장님도 그렇지만, 이곳 쿠알라품프르는 어떤 돈인지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모든 해외의 자금들을 받아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중국을 비롯해서 출처 불명의 아시아의 자금들이 말레이시아로 몰려들고 있죠. 그래서 부동산 투자도 활발한 곳이고요.”
“그래요?”
“예. 최 사장님도 한 번 말레이시아에 투자를 해보는 것도 괜찮을 겁니다. 어쨌든, 말레이시아로 아시아 전역의 부자들이 돈이 몰려들고 있으니까, 서울의 강남처럼 이곳 부동산도 지속적으로 상승할 가능성이 큰 곳이죠.”
“강남처럼요?”
물론, 아직 쿠알라품프르를 서울의 강남에 비교하기에는 좀 그렇지만, 발전가능성이 높은 도시임에는 틀림이 없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