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요한 일
이건 민영민?
뒤를 돌아보니, 역시나 상상 속에서 봐도 민영민, 현실에서 봐도 민영민이었다.
“선배님, 필리핀에 계신 거 아니었어요?”
“귀국했어.”
“와, 그런데 저한테 얘기도 안 해주시고.”
그걸 내가 보고라도 해야 하냐? 딴 사람도 아니고 너한테..
“그나저나 영민이 네가 여긴 어쩐 일이야? 여기 아무나 들어올 수 없는 곳일 텐데.”
“김준수 사장님도 여기 사시잖아요, 그래서 김준수 사장님 집에 왔다가, 제가 누굽니까? 도산 파파라치 아니겠습니까? 프레스티지 힐의 주차장을 그냥 넘길 수는 없어서 몰래 촬영하러 온 거죠.”
민영민은 언제나처럼 카메라를 어깨에 메고 있었다.
“최진수 사장님 친구분인가요?”
“아, 이쪽은 김덕수 소장님이셔. 이 친구는 민영민이라고 제 학교 후배입니다.”
“반가워요.”
“민영민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선배님은 어쩐 일로? 혹시, 여기 프레스티지 힐에 집을 가지고 계신 것은 아니죠?”
“아니, 처음 와보는데. 여기 김덕수 소장님이 이곳 입주민이시지.”
“역시, 최진수 선배님은 지인들도 다들 럭셔리한 분들이네요.”
민영민은 나의 예상대로 고급 슈퍼카들과 럭셔리카들이 즐비한 프레스티지 힐의 주차장에서 몰래 자동차들의 사진을 찍고 있었다.
“자동차 사진은 많이 찍은 거야?”
“예, 그렇지 않아도 대충 촬영은 끝났어요. 신형 고스트가 있어서 한 번 찍고 있었는데, 정말 멋지지 않아요? 안쪽도 찍고 싶은데, 그건 무리고.”
민영민은 한쪽에 주차된 롤스로이스 고스트를 가리키며 말했다.
“그건 내 차인데 맘에 들어요?”
“예, 이게 선생님, 아니 소장님 차인가요?”
민영민이 특히나 마음에 들어 하던 신형 롤스로이스 고스트의 주인은 뜻밖에도 김덕수 소장님이었다. 고스트라면 6억이 넘는 차로 알고 있는데, 하긴, 내가 송금해 준 돈이 수백억이니 돈은 충분했을 것이다.
거기에 딸을 위해서 고급 빌라도 사고 고급차도 사고 그랬다고 하니까, 그동안 야마시타 골드를 찾느라 가족에서 소홀했던 김덕수 소장님이라면 딸인 혜진 씨를 위해서 그만한 투자를 할 수도 있은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좋은 아버지가 되기 위해서 말이다.
“최진수 사장님 후배라면 뭐든 못 해줄 게 없지. 나에게 은인이거든.”
“은인요? 최진수 선배님이요?”
“맞아요. 최진수 사장이 도와주지 않았으면 나는 아마 정신병원에 있었을 거야. 완전히 망해버렸을 나의 인생을 최진수 사장이 구해준 거니까.”
민영민은 나보다 한참 위의 연배인 김덕수 사장이 나에게 그런 말을 하면서 감사해하는 것을 감탄 어린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니까, 이 차가 마음에 들면 사진도 마음대로 찍고, 최진수 사장이랑 드라이브도 하고 와요. 여기 키는 주고 갈 테니까.”
“괜찮습니다. 소장님. 이러실 필요 없습니다.”
소장님, 정말 괜찮거든요. 이건 절 도와주는 게 절대 아닙니다. 민영민과의 드라이브라뇨...
“괜찮아요. 아까 하던 사업 이야기는 오후에 천천히 하기로 하고 후배분하고 좀 즐기다 오세요.”
김덕수 소장은 롤스로이스 고스트의 키를 건네주고는 사라져 버렸다.
“와, 정말 좋으신 분이네요. 인상도 좋으시고. 저분이 선배님에게 빚진 게 있으신가 봐요?”
빚이 아니라 내가 야마시타 골드를 찾는 일을 도와준 거지, 그리고 그 대가로 수익을 좀 나눠 드렸고 말이야.
“그런 건 아니고, 사업을 하면서 서로 도움을 주고받는 사이지. 김 소장님이 내 사업을 도와주시고 나는 뭐랄까? 금전적인 부분을 도와드리고.”
“사업 파트너군요?”
사업 파트너라? 황금을 발굴하는 일이 나의 비즈니스라면 사업 파트너인 셈이기는 했다.
“아무튼, 굉장합니다. 어마어마한 금수저라는 건 알았지만, 나이 차도 많은 분 같은데, 최 선배님에게도 대하는 태도가 깍듯하고 역시 자본주의 시대에는 돈이 최고인가요?”
“헛소리 그만하고, 어때? 정말 이 롤스로이스 고스트로 드라이브를 할 생각이야? 이런 차는 드라이브용은 아니지 않아?”
민영민은 어느새 키를 받아들고 롤스로이스 고스트 문을 열고 실내를 촬영하고 있었다. 녀석 말로는 이렇게 차의 안쪽까지 찍을 기회는 흔히 않다는 것이었다.
“저야 언제나 차의 외관을 찍을 뿐이죠. 그것도 아주 멀리에서요. 실제로 차 안의 내부가 어떤지 그런 건 볼 기회가 없거든요. 그런데 오늘은 선배님 덕분에 이렇게 부자들의 세계의 안쪽까지 와보게 되네요.”
“뭐, 별거 없지 않아? 오히려 겉만 그럴 듯한 거 아닌가?”
말은 그렇게 했지만, 역시 럭셔리의 끝판왕이라는 롤스로이스 고스트의 내부 인테리어는 뭔가 숨길 수 없는 고급스러움이 있었다. 흔히 고급차들은 화려한 실내 인테리어를 자랑하는 편이지만, 롤스로이스는 그런 어지간한 고급차들과도 차원이 다른 최고급 세단의 대명사였다.
“롤스로이스는 자기들이 고급이라는 걸 드러내지 않는다고 하더라고요.”
“그래? 왜?”
“드러내지 않아도 드러나는 고급스러움이 진짜 럭셔리라는 거죠. 그리고 일부러 보이려고 노력하지 않아도 고급스럽다는 걸 알아챌 정도로 롤스로이스는 진짜 뼛속까지 고급차거든요.”
람보르기니나 페라리 같은 고성능 퍼포먼스에 집중한 차들과는 또 다른, 실내 인테리어와 승차감 같은 것이 발군인 럭셔리 세단의 왕자 롤스로이스, 그중에서도 고스트는 좀 더 젊은 취향의 오너들을 위한 차였다.
롤스로이스의 감성을 유지하면서도 동시에 좀 더 젊어진 느낌을 살린 것이다.
“선배님, 촬영은 다 됐고. 이제 차를 타고 나가보죠.”
꼭 그럴 필요가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기왕 이렇게 된 거, 롤스로이스 고스트를 타고 드라이브를 해보기로 했다. 차를 타고 시내 여기저기를 돌아다녀 보기로 한 것이다.
처음에는 민영민과 드라이브라니? 한숨이 절로 나왔지만, 막상 고스트를 운전하고 나와 보니, 날씨도 좋고 나쁘지 않은 기분이었다.
특히, 차를 타고 사람들이 많은 곳을 지날 때 사람들이 시선이 쏠리는 것도 재밌고 말이다. 주로, 젊은 사람들이 많은 홍대 쪽으로 향하자, 지나가는 젊은 여자들이 진수가 타고 있는 롤스로이스 고스트를 신기한 듯 쳐다보는 것이었다.
“진짜, 사람들이 많이 쳐다본다.”
“그렇죠. 롤스로이스라면 최고급 자동차의 끝판왕이지 않습니까? 저라도 지나가다 롤스로이스가 보이면 바로 사진부터 찍는데요. 그런 롤스로이스를 제가 이렇게 타고 홍대를 누비고 있다니 말입니다.”
내 또래의 젊은 대학생들이 많은 곳인데 다들 내가 타고 있는 고스트를 부러운 듯 쳐다보는 느낌적인 느낌이었다.
남자들은 남자들대로 부러울 것이고, 여자들은 여자들대로 남자와는 또 다른 선망의 시선을 보내는 것 같았다. 옆자리에 않은 민영민이 아쉽기는 했지만,
상상을 해보았다. 민영민 대신, 민소희라면 어떨까?
상상만으로 가슴이 펴지고 답답했던 기분이 상쾌해지는 기분이었다.
“오빠? 필리핀에는 왜 그렇게 오래 있었던 거예요? 많이 보고 싶었단 말이에요.”
“하하, 그래? 소희가 많이 보고 싶었던 모양이지? 오빠는 말이야, 돈을 벌어야 해서 땅을...”
“땅요? 그럼 오빠, 땅에 투자를 하신 거예요?”
“뭐, 그렇지. 땅을 여러 가지 형태로 개발을 하고 그런 건데.”
“그럼, 건물을 짓고 그러는 거 말이죠?”
“건물도 좀 지었고, 땅을 파서 돈을 많이 벌었지.”
“와, 그럼, 선배님, 필리핀에 건물도 올리시고, 지하자원 개발도 하고 그러신 겁니까?”
상상이 깨져 버렸다. 그리고 다시 현실이었다.
“내가 필리핀에서 뭘 하든 네가 뭔 상관인데? 내가 그런 것까지 일일이 보고 해야 하나?”
“아, 그게 아니라, 물론, 선배님이 하시는 일이시죠. 그냥 궁금해서 물어본 겁니다. 헤헤..”
민영민은 하지만 그것 말고도 하고 싶던 말이 더 있었던 모양이었다.
“사실은 김준수 사장님이 선배님에 대해서 궁금해하시더라고요.”
“김준수 사장이?”
지난번에 한 번 만난 적은 있었지만, 별다른 이야기를 한 것은 없었다. 솔베이지라는 이탈리안 레스토랑 주차장에서 한 번 스치듯이 만난 것뿐이었다.
아니지, 내 뒤에서 민소희 보고 날 꼬셔보라고 했었지...
“예, 혹시 최진수 선배님이 엔터테인먼트 사업에 관심이 없으신가? 궁금해하시더라고요.”
“엔터테인먼트 사업?”
그러니까 나보고 자기 기획사를 인수해 달라는 건가?
“그 드림 엔터테인먼트라는 회사 다 망해가는 회사 아니야?”
당연한 이야기지만, 잘 되는 회사를 팔려고 하지는 않을 테고 말이다.
“그 정도는 아닙니다. 거기 소속으로 소희도 있고요. 소희도 이제 솔로로 독립할 생각인데, 솔로 앨범이 잘 나오면 지금보다 더 잘 될 수도 있고요.”
“민소희가 솔로로?”
“예전부터 솔로 한다고 했었거든요. 원래 걸그룹 그런 게 아무리 친해도 사이가 안 좋아지게 마련이기도 하고, 연예인들은 다들 개성이 강하잖아요. 어지간한 재능이 있으면 솔로를 하고 싶어 하죠.”
“그래? 영민이 네가 보기에는 그 기획사를 내가 인수하면 괜찮을 것 같아?”
“인수하실 생각이 있으신 겁니까? 인수하시면 나쁘지 않을 것 같은데 말이죠.”
민영민도 정확하게 드림 엔터테인먼트의 경영에 대해서는 알지 못하는 것 같았다. 하긴, 민소희 때문에 김준수라는 사장과 친분이 있는 정도라고 할 수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연예기획사 하나쯤 인수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은 들었다. 나는 이미 3조 이상의 자산가였고, 앞으로도 돈이 얼마까지 불어날지는 예상할 수도 없었다. 나의 행운은 이제부터 시작이니까 말이다.
롤스로이스든, 연예기획사든, 고급 아파트든, 돈이면 안 되는 게 없는 자본주의 시대였다. 돈을 가진 자는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살 수 있었다. 물론, 상대가 팔 의사만 있다면 말이다.
김준수라는 사람이, 드림 엔터테인먼트를 팔고 싶어 하는 것은 분명해 보였다.
“그러니까, 투자라기보다는 통째로 인수를 원한다는 거지?”
“예, 김준수 사장님은 이제 엔터테인먼트 쪽에는 흥미가 없나 봐요.”
“왜?”
“그거야 모르죠. 할 만큼 했다는 걸 수도 있고, 생각만큼 사업이 잘된 건 아니거든요. 선배님도 아시겠지만, 요새 대형 기획사들이 워낙 많잖습니까?”
“그래?”
“주식 가치를 기준으로 빅 5는 시가총액만 해도 엄청나죠.”
“어느 정도인데?”
갑자기 궁금해졌다, 연예기획사들의 시가총액이 얼마나 될지 말이다. TV에서 유명 기획사들의 CEO들이 엄청난 주식 부자가 됐다는 뉴스는 자주 나오는 편이었는데, 실제로 대형 기획사라면 어느 정도 규모일까?
현대 자본주의 시대에 가치의 척도는 돈이고, 기업이라면 주가라고 할 수 있었다. 대충 주가나 시가총액을 보면 어느 정도 규모의 산업인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1위가 5조가 넘죠.”
“시총이 5조가 넘어?”
“예, 1위는 원탑이라 좀 독보적이고, 그 외에 2위와 3위는 1조 이상, 4위는 8천억쯤 되는 것 같더라고요. 그리고 5위는 확 떨어져서 천 오백억 정도.”
“편차가 크네.”
“원래, 연예계 쪽이 그렇죠. 큰 대형 기획사 몇몇이 다 해 먹는 구조라, 대형 기획사 몇 개를 제외하고는 영세해요.”
“그럼, 드림 엔터테인먼트는 얼마에 인수 가능한 거야?”
“김준수 사장님 말로는 5백억 정도면 넘기겠다는 것 같더라고요.”
“5백억?”
다른 대형 기획사들에 비하면 확실히 낮은 가격인 것은 확실했다. 하지만 민소희 정도를 제외하면 유명 연예인들도 별로 없는 것 같은데, 그만한 가치가 있는지는 알 수가 없고 말이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 다시 한남동 프레스티지 힐로 돌아오는 길이었다. 차를 지하 주차장에 세우고 내리는데, 뒤에서 누군가가 인사를 해왔다.
“이게 누구십니까? 최진수 사장님 아니십니까?”
누구지?
뒤를 돌아보니, 한성금융그룹의 마철우 회장이었다.
마철우 회장이 여기는 무슨 일로? 아니지, 프레스티지 힐에는 재벌들이나 기업인들이 많이 산다더니, 마철우 회장도 프레스티지 힐의 입주민인 모양이었다.
“마철우 회장님 아니십니까? 여기에 사시는 모양이군요.”
“예, 하하, 저도 프레스티지 힐에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최진수 사장님이 여기는 어쩐 일입니까?”
“지인이 이곳에 살고 계셔서요. 잠시 방문했습니다.”
마철우 회장은 차를 타고 막 출발하려던 모양이었다.
“그럼 다음에 뵙겠습니다. 앞으로도 종종 만나서 사업 이야기도 하고 그러기로 하죠.”
“아, 예, 다음에 뵙겠습니다.”
한눈에 보기에도 대기업 회장님 포스가 느껴지는 마철우 회장과 내가 인사를 나누는 걸 옆에서 지켜보던 민영민이 호기심 어린 목소리로 물어왔다.
“저분은 누구십니까?”
“어, 있어. 한성금융그룹이라고”
“한성금융그룹요? 거기 뭐 하시는 분인데요. 잠깐, 아까 회장님이라고 하셨죠? 이름이, 마철우?”
민영민은 스마트폰으로 바로 마철우라는 이름을 검색해 보고 있었다. 성이 마 씨라 흔하지 않은 이름이었다.
거기에 포털 사이트에 검색을 해보니, 마철우 회장의 정보가 바로 나오는 모양이었다.
“와, 한성금융그룹의 마철우 회장님, 바로 그분이군요.”
“그걸 뭘 검색을 해봐.”
“선배님은 역시 어마무시한 금수저, 아니 다이아몬드 수저, 재벌 3세셨군요. 한성금융그룹의 마철우 회장님이 지나가다 인사를 먼저 할 정도로 말입니다. 나이도 많으신 분 같은데.”
민영민은 약간 들뜬 목소리로 호들갑스럽게 말하고 있었다.
“먼저, 인사는, 그냥 지나가다 아는 체 한 것 같던데.”
“아는 체라뇨? 선배님에게, 최진수 사장님 아니십니까? 이러면서 막, 정중하게 대하시던데요.”
“하하, 그런 이야기는 그만하고, 일단 오늘은 먼저 가봐. 나는 아까 김덕수 소장님하고 할 이야기가 있어서.”
그랬다. 민영민이 중요한 게 아니라, 김덕수 소장님에게 아마존 문서에 대해 자문을 구하기 위해 여기에 온 것이었다. 민영민 덕분에 시간만 낭비했군. 나는 김덕수 사장의 집으로 다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