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얀 성벽
싱가포르, one 15 마리나 클럽.
“정말, 플라잉 폭스를 구매하시겠다는 겁니까?”
“가격만 적당하다면 말이죠.”
현재 플라잉 폭스를 소유한 것은 임페리얼 요트라는 세계적인 요트 판매, 대여 업체였다. 플라잉 폭스를 비롯한 다양한 요트들을 개인들에게 대여하는 일종의 바다의 렌터카 업체라고 할 수 있었다.
임페리얼 요트의 오너는 제라드 칸이라는 프랑스 인이었다. 원 15 마리나 클럽이 있는 센토사 코브는 싱가포르의 대표적인 부존 지역이었다.
싱가포르 시내에도 홀랜드 빌리지라는 부자들이 사는 동네가 유명하지만, 싱가포르에서도 진짜 부자들은 이곳 센토사 빌리지 살고 있다는 말이 있는 한국으로 치면 강남중의 강남 정도 되는 곳이다.
“칸요? 왕이라는 의미 아닌가요?”
“하하, 왕족이면 좋았겠지만 왕족은 아닙니다. 그냥 성이 칸일 뿐이죠. 프랑스어로 왕이라는 의미도 아니고요.”
제라드 칸은, 40대 후반 정도로 보이는 금발의 키가 큰 남자였다. 피부는 백인치고는 약간 구리빛으로 운동을 좋아할 것 같은 느낌적인 느낌이었다.
날씨는 화창하고 제라드 칸은 흰색의 섬머 재킷과 역시 흰색의 바지 차림이었다. 뭔가 여유로운 유로피언 스타일이 물씬 풍기는 분위기였다.
요트는 확실히 아시아인들보다는 유럽인들이 잘 어울리는 느낌이었다. 여유롭게 인생을 즐기고 바다를 항해하는 그런 고급스럽고 럭셔리한 감성 말이다.
“요트라면 역시 유럽이 본 고장이죠? 요트를 즐기는 사람들도 많고 말입니다.”
“그렇기는 하죠. 요트를 생산하는 요트 제조사들도 많고, 모나코 같은 휴양지는 요트를 타고 즐겨야 제대로 즐길 수 있다는 말도 있으니까요. 하지만 이제는 확실히 아시아의 시대인 것 같습니다.”
“아시아의 시대요?”
“저희 임페리얼 요트가 싱가포르로 본사를 옮긴 것도 아시아의 수요가 크게 늘어난 덕분이죠.”
“그래요?”
제라드 칸의 말로는, 아시아 특히, 중국의 부자들을 요트를 구매하거나 렌트하는 경우가 많다고 했다.
“아시는지 모르겠지만, 중국에만 억만장자가 천 2백 명 이상입니다. 백만장자는 셀 수도 없을 정도고요.”
“억만장자가 천 명이 넘는다고요?”
억만장자라면, 미국 달러 기준으로 1억 달러 이상을 소유한 자산가를 말한다. 천억 이상의 개인 자산을 보유한 사람이 천 명이 넘는다는 것이었다.
물론, 최소 1억 달러니까, 실제로는 수조에서 수십조를 가진 재벌들도 많고 말이다. 당장 알리바바의 마윈 회장 정도만 해도 이미 세계적인 자산가로 알려져 있고, 그 외에도 국제적으로 알려지진 않은 중국 재벌들의 숫자도 어마어마하다는 말을 들어보기는 했다.
“예, 실제로 중국의 고급 요트 수요도 급증하고 있습니다. 요트뿐 아니라, 유럽의 고급 소비재 시장의 최대 고객은 중국과 한국 같은 아시아 시장의 큰손들이죠.”
중국과 한국? 한국도 포함이 되는 건가?
“한국보다는 일본이 더 큰 시장 아닌가요?”
제라드 칸은 싱긋 미소를 지어 보였다.
“요트는 일본 쪽 시장이 더 크지만, 에르메스나 루이비통 같은 명품들은 이미 한국이 일본을 추월했다고 하더군요.”
“그..그래요?”
“예, 중국은 말할 것도 없이 최대 소비 시장이고요. 덕분에 루이비통을 소유한 루이비통 모에 헤네시 그룹의 베르나르 아르노 회장이 유럽 최고의 부자로 떠올랐죠.”
한국에서도 중국의 한류 덕분에 케이 뷰티라는 이름으로 화장품이 수입되면서 화장품 회사의 오너가 재벌 순위 10위권에 들어갔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는데, 루이비통도 아시아 매출이 급증하면서 오너인 아르노 회장이 유럽 최고의 주식 부자가 되었다는 모양이었다.
하긴, 여자들 백 하나에 원가가 얼마나 한다고, 그걸 수백에서 천만 원이 넘게 팔고 있다니 그런 걸 파는 명품 회사들은 돈을 끌어모을 수밖에 없을 것 같기는 했다.
“슈퍼카들도 한국에서 엄청나게 수입한다고 하더군요. 최 사장님도 젊으신 분이니 람보르기니 같은 슈퍼카도 좋아하시겠죠?”
“예, 저도 람보르기니 아벤타도르 로드스터를 최근에 한 대 샀죠. 한정판으로 말입니다.”
제라드 칸은 고개를 끄덕였다.
“상당한 재력가시라고 들었는데, 람보르기니 정도야 당연히 여러 대 가지고 계시겠죠.”
뭐, 람보르기니를 여러 대? 난 한 대뿐인데, 그런 차가 여러 대가 필요한가?
“임페리얼 요트의 고객들은 주로 어떤 분들입니까?”
“엄청난 부자들이죠. 유럽의 부자들도 있고, 중동과 러시아의 올리가르히들도 많고요.”
“올리 뭐요?”
“올리가르히는 러시아의 신흥재벌들을 말하는 겁니다. 소련이 붕괴한 이후에 공산주의 체제가 자본주의로 전환되면서 많은 국유 기업들이나 산업 시설들이 민영화가 되었죠.”
“오, 그래요?”
“그때, 러시아의 주요 산업들을 불하받은 사업가들이 있었는데, 대부분 자본주의가 정착되지 않은 시절이라, 말도 안 되는 헐값에 불하를 받은 사람들이 대부분이었고, 그런 식으로 막대한 이권을 장악해서 엄청난 부자들이 된 거죠.”
“로만 아브라모비치 같은 사람들 말이군요?”
“예, 보통 그런 사람들이 운이 좋아서 그렇게 된 건 아니고, 당시 러시아 대통령이었던 옐친과 깊은 관련이 있는 사람들이죠. 러시아 공화국 초기에는 정치적으로 혼란스럽던 시절이었는데, 옐친은 고르바초프가 붕괴시킨 소련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던 러시아를 이끌던 인물이죠.”
“옐친이라? 들어본 것도 같네요.”
“아무튼, 옐친은 그렇게 자기 측근들이나 자기에게 협조적인 인물들에게 소련 시절의 주요 이권들을 넘겨주고 그들을 신흥재벌들로 키웠죠.”
“일종의 정경유착 그런 거 아닌가요?”
“그런 셈이죠. 올리가르히들은 옐친의 정치 자금을 담당하는 경제계 쪽의 세력이었고, 또 그 외에 구소련의 정보부, KGB 출신이었던 푸틴은 옐친 밑에서 정치와 내부 분야를 담당하던 세력의 수장이었습니다.”
“푸틴요? 러시아의 독재자 푸틴이 옐친 밑에서 일하던 사람이군요?”
“그렇습니다. 올리가르히는 경제를 그리고 푸틴은 정치를 양분해서 옐친 시대에는 서로 공생관계였던 사람들이죠. 하지만 심장 질환으로 옐친이 조기에 퇴진하고 푸틴이 권좌에 오르고 푸틴의 권력이 강화되면서 올리가르히들과의 관계가 깨진 거죠.”
“왜요?”
“올리가르히들의 경제력이 커지자 자신의 권력을 위협할 세력이라고 인식한 거죠. 뭐, 원래 전쟁이라는 게 그런 거 아닙니까? 예전 왕들도 옆에 영주들의 세력이 커지면 자신의 위협이 된다고 보고 제거하는 일들이 많았으니까요. 아무튼, 러시아의 신흥재벌들이 푸틴과의 관계가 틀어지면서 런던 같은 유럽으로 많이 피신하러 온 거죠. 로만 아브라모비치도 그런 케이스입니다.”
덕분에 유럽에는 러시아의 신흥재벌들이 푸틴의 정치적 탄압을 피해 대거 유입되고 그로 인해 요트나 슈퍼카, 그 외에 런던의 고급 주택 시장은 상당한 호황을 누렸다는 것이다.
“그리고 요즘은 중국이 비슷한 상황이죠. 중국도 자본주의가 도입되면서 정치적으로는 공산주의의 머리에 자본주의의 몸통을 가진, 기괴한 정치체제를 하고 있는데, 역시 어느 정도 돈을 벌어서 권력이 강해진 신흥부호들과 정치 군사를 장악한 공산당 엘리트들 간에 알력이 생기고 있는 겁니다.”
“아직은 돈보다는 총이 더 강한 곳이 중국이죠?”
“그럼요? 최근에 알리바바 주가가 떨어진 이유도, 마윈 회장이 공산당과의 관계가 안 좋다는 소문 때문이고요. 이제는 알리바바 대신 텐센트 그룹이 떠오르고 있죠. 포브스를 보시나요?”
“포브스요?”
포브스라면 부자 순위를 매기는 그런 잡지 아닌가? 난 포브스보다는 플레이보이나 그런 쪽이 취향이라.
“저는 포브스를 정기 구독해서 보고 있습니다. 항상 세계 경제 특히, 자산가들의 자산이 어떻게 변하는지 또 어떤 분야의 부자들이 떠오르고 지는 지, 그런 문제에 집중하는 거죠.”
센토사 빌리지 주위에는 3백 척 이상의 고급 요트들이 늘어서서 장관을 이루고 있었다. 주로 흰색의 요트들이라, 하얀색의 성벽이 싱가포르 부자들의 성인 센토사 일대에 장벽을 만들어 주고 있는 느낌도 들었다.
싱가포르에 본사를 이전해서 고급 요트의 판매와 대여 사업을 하고 있는 임페리얼 요트의 사무실이 있는 곳으로는 적당한 위치라고 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런 고급 호화 요트 사업을 하려면 주요 고객들인 세계적인 부자들의 동향도 파악해야 할 테니 말이다. 제라드 칸 사장이라면 그런 면에서 플레이보이보다는 포브스를 정기 구독하는 것이 맞는 것 같기는 했다.
“중국 최고 부자는 그럼 이제 마윈이 아닌가요?”
“예, 이제는 아까도 말씀드린 텐센트 그룹의 마화텅 회장이죠. 마화텅 회장이 가지고 있는 위챗이 중국 정부의 공인 인증서를 장착해서 중국인들이 거의 필수적으로 쓰게 된 이유도 있고요. 아시겠지만, 중국은 전자 상거래가 세계 최고 수준으로 발달한 곳입니다. 일본은 아직도 동전을 많이 쓰지만, 중국은 완전 다른 세계죠. 덕분에 IT 분야에서 새로운 부자들도 많이 나오고요.”
“그렇겠네요. 러시아도 그렇고 중국도 신흥 부자들이 많군요? 그런 사람들은 칸 사장님의 주요 고객이겠군요?”
“예, 로만 아브라모비치도 유럽으로 와서 이클립스를 저희 임페리얼 요트를 통해서 구매했었죠.”
“정말요?”
“예, 이클립스는 저기 보이는 플라잉 폭스와 쌍둥이 같은 배죠. 워낙 규모가 큰 요트라 크로아티아에 있는 조선소에 직접 주문해서 건조한 배입니다.”
“크로아티아에서 배를 만드나요?”
“요트의 사이즈에 따라서 다른데, 중형급 정도라면 최진수 사장님도 소유하고 계신 베네티 요트 같은 회사를 통해서 생산한 후에 유통만 담당하기도 하고, 이클립스나 플라잉 폭스 같은 초대형급의 요트는 직접 조선소에 의뢰해서 제작을 하는 거죠. 이클립스와 플라잉 폭스 모두 크로아티아에서 생산한 배들입니다.”
“아드리아해는 아름다운 바다라더니, 럭셔리 요트들도 대부분 그쪽에서 만들어지는군요.”
“하하, 아드리아해에 가보셨습니까?”
“아뇨. 유럽에는 가본 적이 없습니다.”
유일하게 가본 외국은 필리핀과 말레이시아 정도였다. 그리고 이제 앞으로 브라질도 가볼 테지만 말이다.
“그나저나, 러시아와 중국 모두 공산주의였던 국가들인데, 이제는 신흥부호들이 많이 나와서 고급 요트의 주요 고객이 되고 있다니 아이러니한 일이군요.”
“하하, 뭐, 원래 다 그런 거죠. 자본주의라는 것이 본질적으로 부의 대물림 아니겠습니까? 두 나라의 차이라면, 아버지가 아니라 정치 권력으로부터 부를 물려받았다는 정도겠죠. 최진수 사장님도 마찬가지일 테고요.”
“아, 저 말입니까?”
무슨 소리야? 나는 내 힘으로 땅을 파서 번 돈이라고..
“유럽이나 미국의 부자들도 사실 자수성가한 케이스는 드물어요. 일부가 있기는 하지만 대부분 대대로 부자들이 경우가 많죠. 자본주의의 속성이죠. 원래 자본주의라는 것이 부를 대물림해서 점점 더 빈부격차를 키우는 거죠. 자본의 힘으로 버는 돈을 노동으로는 따라잡을 수가 없거든요.”
“자본주의가 그래도 좋은 거 아닌가요?”
“솔직히 말하면 저는 회의적입니다. 자본주의는 구조적으로 물려받은 자본이 없는 사람은 가난을 벗어날 수 없는 구조 거든요. 싱가포르도 그렇고 홍콩도 그렇고 중국의 자본이 들어와서 부동산이나 물가가 크게 오른 곳들이죠. 그나마 싱가포르는 부동산 규제가 많아서 그래도 어느 정도 유지가 되지만 그런 규제가 없는 홍콩은 그야말로 지옥이 되고 있습니다.”
“홍콩이 왜요? 살기 좋은 아시아의 부국 아닌가요?”
“하하, 그럴까요? 돈이 있는 사람들에게는 그럴지도 모르겠지만, 중국 자본이 부동산을 폭등시켜서 대부분의 서민들은 닭장 같은 집에서 비참하게 살아가고 있죠. 결국, 마르크스의 주장이 맞았던 겁니다.”
“마..마르크스라면 빨갱이?”
“하하, 공산주의 체제가 실패한 거지 공산주의 이론이 실패한 것은 아니죠. 자본주의의 본질이 노동자를 착취한다는 것은 정확하다고 봅니다.”
“부자들에게 요트를 파는 분이 그런 말을 하니까, 좀 이상한 기분이네요.”
“그런가요? 하지만 마르크스가 전적으로 옳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마르크스가 간과한 것이 있거든요.”
“그게 뭔가요?”
“저길 보시죠.”
제라드 칸은 마리나에 정박된 플라잉 폭스를 가리켰다. 3백 척이 넘는 호화 요트들이 정박해 있는 원 15 마리나 클럽에는 40미터 이상급의 슈퍼 요트들도 20여 척 넘게 있었지만, 그중에서도 136미터 달하는 플라잉 폭스의 위용은 그야말로 압도적인 것이었다.
“바로 저겁니다. 인간의 욕망 말입니다. 마르크스는 경제학으로 자본주의의 본질을 꿰뚫었지만, 자본주의의 심연에 보다 근본적인 인간의 욕망이 있다는 것은 간과한 겁니다. 플라잉 폭스 같은 초화화 요트는 모든 남자들의 로망이고 욕망을 강력하게 자극하는 욕망의 대상 그 자체죠. 이제 본격적으로 배를 보러 가실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