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를 타고 온 사람들
“브라질까지요? 브라질이라면 어디로 말입니까.”
“어디? 아, 그러니까, 일단은 리우데자네이루가 좋겠네요.”
“음, 리우데자네이루라? 그런데 브라질까지 가는데, 한 달은 걸리는 건 알고 계시죠?”
“한 달이나요?”
“브라질까지 가려면 태평양을 가로질러야 하니까요. 태평양은 가장 큰 바다죠. 가장 넓고 말입니다.”
“그거야 그렇겠죠. 아무튼, 브라질에 갈 생각이니까, 준비해 주세요. 참, 일단 플라잉 폭스를 먼저 보내고 나는 비행기를 타고 가기로 하죠. 한 달이나 배를 타고 싶지는 않으니까요.”
배를 타고 해안 지대에서 유유자적 시간을 보내는 거라면 몰라도 태평양을 항해하면서 한 달을 보내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그래서 일단 이동에 시간이 걸리는 플라잉 폭스를 먼저 보내기로 한 것이었다.
***
한남동 프레스티지 힐, 김덕수 소장의 자택.
“그래, 드디어 브라질로 출발한다고?”
“아직은 아닙니다. 플라잉 폭스 호를 먼저 보내고 저는 나중에 비행기로 갈 생각이니까요.”
“그래, 브라질에 가는 방법에는 비행기를 타는 방법도 있고 배를 타는 방법도 있지.”
“그렇죠, 배를 이용하면 한 달 이상이 걸린다니까요.”
“우리나라 사람들이 브라질에 정착한 과정을 보면, 처음에는 배를 타고 왔고 그다음에는 비행기, 그리고 다시 배, 그다음에는 비행기라고 하더군.”
“무슨 말씀이십니까?”
“한국인들의 브라질 이주 역사 말이야. 1958년에 인도를 거쳐서, 에어프랑스를 타고 수십 명의 한국전쟁 포로들이 브라질에 도착했어. 그들이 도착한 곳이 바로 리우데자네이루였네.”
“오, 그런가요?”
“그래, 한국전쟁에서 포로가 된 사람들이지. 그 당시에는 정치적으로도 혼란스럽고, 사람들의 정체성도 혼란스러웠던 시기였어, 한국이냐? 북한이냐? 는 선택의 문제에서 대부분은 어느 한쪽을 골랐지만, 개중에는 둘 다 거부한 사람들도 있었으니까.”
“그러니까, 한국전쟁 포로 중에서 북송을 거부한 사람들이라는 거죠?”
“그래, 맞아, 북송도 거부하고 남한에 남기도 거부한 사람들이었지, 중국군 포로들 중에서도 중국 송환 혹은 대만행 두 가지 선택지를 거부하고 제3국을 원한 사람들도 있었고. 사람들은 다양하니까, 그런 일들이 있었던 거지.”
“그럼 그들이 브라질로 간 건가요?”
“미국행을 바라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미국이 거절을 해서 유엔사령부에서는 인도와 남미, 두 가지를 선택할 기회를 주었지. 많은 숫자는 당시의 중립국이었던 인도로 갔지만 인도행을 거절한 수십 명은 결국 브라질행 비행기를 탈 수 있었다고 해.”
“그럼, 그 사람들이 최초의 한국인 이주인 건가요?”
“그건 아니야, 제3국 행을 택한 한국전 포로들이 브라질에 갔을 때, 이미 3명의 한국인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네, 아오키 상, 미타 상, 그리고 택시 운전기사라고 불리던 김 씨였지.”
브라질에 가겠다고 인사차 들렀던 한남동 프레스티지힐에서 김덕수 소장은 뜬금없이 브라질 이주 역사를 설명하고 있었다.
“그런데, 아오키 상이라면 일본인들 아닌가요?”
“아니야, 그 세 명은 모두 한국인들이었네, 물론, 한국을 떠난 지 오래돼서 일본어밖에는 할 줄 모르는 사람들이었지만.”
“그래요?”
“아마도 일본인들이 브라질로 데려온 한국인들이었던 모양이야. 어렸을 때, 브라질로 와서 일본인들과 생활했기 때문에, 이미 한국어로는 의사소통이 불가능했다고 하더군, 하지만 한국인이라는 건 분명히 기억하고 있었어. 놀랍지 않나?”
“하하, 신기한 이야기군요.”
“그렇게 브라질 땅을 밟은 한국전 포로들은 두 번째, 한국인들이었어, 그리고 60년대가 되자 본격적인 한국인들의 이주가 시작되었지, 60년대는 브라질 경제가 호황기였기도 하고 1300명 이상의 한국인들이 다시 리우데자네이루로 배를 타고 도착했지, 이번에는 58년에 도착한 한국전 포로들이 그들을 맞아 주었어.”
“배, 비행기, 배, 그리고 그다음은 다시 비행기인가요?”
“그 후로 70년대에는 모두 시간이 오래 걸리는 배 대신 비행기를 타고 이주를 했지. 최초의 일본인들과 같이 온 한국인들은 배로 왔다고 하니까. 배를 타고 온 사람들이 비행기를 타고 온 사람을 맞아 주고, 다음에 배를 타고 온 사람은 비행기를 타고 온 사람의 환영을 받았고, 그다음은 배를 타고 온 사람들이 비행기를 타고 온 사람들을 맞아 준 거야.”
브라질 교포 사회에서는 흔히 배를 타고 왔는가? 비행기를 타고 왔는가? 로 이주 시기가 구분된다고 한다. 배를 타고 온 사람들과 비행기를 타고 온 세대로 구분이 된다는 말, 물론, 그건 60년대와 70년대 이후를 구분하는 개념이라고 한다.
“음, 50년대에 한국전 포로들이 브라질에 갔을 때, 이미, 브라질에는 최초의 한국인들, 일본어를 쓰는 한국인들이 있었다?”
“그래, 내 생각에는 그들 중에는 야마시타 골드와 관련된 사람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야.”
“야마시타 골드요?”
“58년에 브라질에 도착한 안창수라는 한국전 포로는 브라질에 정착해서 말도 배우고 사업가로 성공했지, 그리고 나서 흥미로운 책을 하나 남겼네.”
“책요?”
“그래, 포르투칼어로 쓰여진 그 책은 한국에는 수입이 되지는 않았어. 하지만 흥미로운 내용을 다루고 있어서, 나는 그 책을 어렵게 구해놓았지.”
김덕수 소장은 책장 구석에서 낡은 외국어 서적을 하나 꺼냈다. 김덕수 소장의 말대로 포르투칼어로 쓰여진 책이었다. 물론, 포르투칼어 같은 건 읽을 수가 없었다.
“뭐라고 쓰여진 겁니까?”
“황금 동굴의 비밀이라고 쓰여진 거야.”
“황금 동굴의 비밀요?”
“그래, 흥미롭지 않나? 이 책은 일종의 자선전 성격의 책이야. 나도 포르투칼어에는 서툴러서 포르투칼어 전공 학생에게 번역을 부탁하기는 했는데, 아무튼, 첫 장은 이런 내용이네, 리우데자네이루에 도착한 한국전 포로들은 난생 처음 보는 아름다운 바다와 해변의 풍경에 너무 놀라고 말았어.”
그리고 포로들이 놀란 것은 단순히 아름다운 리우데자네이루의 바다와 해변 때문은 아니었다. 그들을 마중 나온 3명의 한국인들 그리고 그들에서 들은 흥미로운 이야기들이었다.
안창수를 비롯한 포로들의 환영 만찬이 열리고 술이 몇 잔 오고 간 후였다. 취기가 돌기 시작하자, 택시 기사를 하고 있는 김 씨가 안창수에게 다가와 이야기를 꺼내기 시작했다.
“택시 기사였던 김 씨는 리우데자네이루에서 택시 운전을 하고 있었는데, 아무튼, 술이 한 잔들어 간 김 씨는 안창수에게 일본군들의 비밀 동굴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는 거야.”
“야마시타 골드를 숨긴 그런 곳이었겠군요?”
“맞아, 그 자리에 있던 3명의 한국인들은 모두 일본군과 관계가 있는 사람들이었지.”
“정말로 그들이 야마시타 골드를 숨긴 동굴에 대해서 알고 있었다는 걸까요?”
김덕수 소장은 사뭇 진지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물론, 정확한 위치는 알고 있지 못했겠지, 안 그래? 아마도 그들은 직접 야마시타 골드가 묻힌 동굴에 갔던 사람들은 아니었을 거야. 만약에 그랬다면, 일본군들이 그들을 살려 두었을 리가 없었겠지.”
“그러면?”
“아마도, 직접 황금을 매장하는 작업에 까지는 참가하지 않는 운이 좋았던 생존자들이었지.”
“예, 그럼? 설마?”
“맞아, 택시 기사였던 김 씨는 일본군이 황금을 어디에 숨겼다는 것과, 그 작업에 적지 않은 한국인과 일본인들이 동원되었다는 이야기를 했던 거야. 하지만 그 작업에 동원된 사람들은 아무도 돌아오지 못했어.”
“끔찍한 일이군요. 필리핀에서 8번 게이트 사건에 대해 들었던 적이 있는데, 브라질에서도 역시 같은 일이 있어났을 거라는 말씀이신 거죠?”
“그렇지, 나도 예전에 그 이야기를 듣고, 진위를 가릴 수 없는 주장이라고 생각했지. 너무 막연한 주장이기도 하고, 그때는 브라질에 설마 야마시타 골드가 있을 거라는 생각까지는 할 수 없었으니까.”
“그럼 그 사람들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글쎄, 야마시타 골드의 비밀을 지키기 위해서 8번 게이트에서 폭사당한 사람들처럼 비참한 최후를 맞지 않았을까?”
“아무튼, 야마시타 골드가 브라질에 있는 것은 분명한 것 같군요. 그리고 운이 좋다면 제가 그걸 찾을 수도 있을 테고요.”
“나도 그러길 바라네.”
***
한 달 후,
플라잉 폭스에서 연락이 왔다. 리우데자네이루에 무사히 입항했다는 것이었다.
드림 엔터테인먼트 사장실
“사장님, 약속을 잊으신 것은 아니죠?”
민소희의 솔로 앨범 작업은 거의 마무리단계였다. 곡의 녹음까지 마친 상태라 이제 믹싱과 마스터링을 마치고 앨범 자켓과 필요한 뮤직비디오 정도면 거의 솔로 활동 준비가 완성되는 것이다.
“약속?”
“플라잉 폭스에 태워 주신다고 하셨잖아요.”
민소희에게 그런 말을 하기는 했었다. 하지만 뭐 그동안 솔로 앨범 작업을 하느라 민소희가 바쁘기도 했고 플라잉 폭스도 머나먼 브라질로 출발해야 했기 때문에 민소희에게 플라잉 폭스를 구경시켜 줄 기회는 없었던 것이다.
“그건 그런데. 플라잉 폭스는 이미 브라질에 도착했다고 이제 나도 브라질에 가볼 생각이고 말이야.”
한국에서 민소희와 한은정의 앨범 준비가 한창이었고, 윙크윙크의 2집 작업도 시작되고 있었지만, 그런 일이야, 윤아영 전무가 알아서 하면 될 테고, 나는 더 중요한 야마시타 골드를 찾기 위해서 이제 브라질로 떠날 생각이었다.
영진 빌딩의 펜트하우스에서 잠시 머물었던 스바딜파리도 이미 플라잉 폭스를 타고 리우데자네이루에 도착해 있었다.
“사장님은 놀러 가시는 거죠?”
“놀러?”
무슨 소리야, 나는 어디까지나 중요한 비즈니스를 위해서 브라질 출장을 가는 길이었다. 무이무이섬에서 찾은 비밀문서의 좌표에 나오는 섬들과 해안 지대를 둘러볼 생각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건 나의 비밀스러운 사정이었고, 그런 이야기를 민소희에게 설명할 수는 없는 일, 민소희나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는 호화요트인 플라잉 폭스를 타고 브라질로 놀러가는 일이라고 보일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그리고 그편이 비밀을 지키는 데는 더 자연스럽기도 했다. 아무튼, 플라잉 폭스는 리우데자네이루 항에 입항해서 마리나 다 글로리아라는 요트 마리나에 정박 중이었다.
“그런 호화요트를 타고 브라질 갈 일이 뭐가 있는데요? 요트를 타고 브라질의 섬들에서 여행을 즐기시려는 거잖아요?”
“음, 맞아. 인생이 뭐 있어. 젊었을 때 놀고 즐기는 거지. 그래, 소희 말대로 놀러 가는 거야.”
“그래서 말인데, 저도 같이 가요.”
무슨 말이야? 같이 가다니, 뭐, 같이 가도 상관은 없을 것 같기는 했다. 요트를 타고 브라질의 리우데자네이루까지 놀러 간 척 위장을 해야 하는데, 혼자 가는 건 좀 이상하기도 하고 말이다.
“소희는 일 해야지 안 그래? 솔로앨범 준비를 해야 하잖아.”
“앨범은 이제 후반 작업이잖아요?”
“사진하고 뮤직비디오는?”
“그러니까요. 그걸 브라질에서 찍는 거예요. 플라잉 폭스에서요? 그냥 스튜디오에서 촬영하거나 한국에서 찍어봐야 특별한 것도 없잖아요.”
“브라질에서 뮤직비디오를?”
“예, 브라질의 멋진 해변과 섬들, 그리고 플라잉 폭스를 배경으로 뮤직비디오를 찍으면 최고의 퀄리티가 나오지 않겠어요?”
듣고 보니 그럴듯한 이야기였다. 민소희의 솔로 앨범은 컨셉이 섹시한 댄스들과 라틴 뮤직이 많이 가미되어 있어서, 브라질과 잘 어울리는 느낌도 있었고 말이다.
거기에 플라잉 폭스야 화려함의 극치로 뮤직비디오는 뭐든 찍으면 다 그림이 되는 배니까. 거기다 지금은 리우데자네이루의 마리아 다 글로리아라는 곳에 정박 중인데,
선장이 보내온 마리아 다 글로리아 일대의 풍경은 정말 기가 막힐 정도로 아름다운 풍광이었다. 리우데자네이루라면, 조빔의 대표곡 이파네마에서 온 소녀의 배경이 된 이파네마 해변도 있고 주변이 아름다운 해변과 바다가 너무 아름다운 곳이니, 뮤직비디오든 촬영하기에 좋은 곳이기도 하고 말이다.
“사장님, 제발 부탁이에요. 저도 좀 놀러가고 싶다고요.”
“뮤직비디오 찍으러 가는 거라면서?”
“그러니까요. 일도 하고 놀기도 하고요.”
탑클래스의 아이돌 가수, 민소희가 나에게 애원을 하고 있었다. 애원이라기보다는 아이들처럼 칭얼거리는 느낌적인 느낌이었지만, 어쨌든, 유명 여자 아이돌 가수가 나에게 뭔가를 그렇게 간절한 표정으로 부탁하는 것도 나쁘지 않은 기분이었다.
“뭐, 좋아. 소희가 그렇게 간절한 눈빛으로 부탁을 하는데 거절할 수 없잖아. 같이 가자고. 리우데자네이루로 말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