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산토리니 (96/200)

산토리니

“여긴 풍경이 너무 아름다운 것 같아요.”

민소희는 흰색의 하늘거리는 원피스 차림이었다. 뭔가 샤랄라한 음악이 어디선가 들려올 것 같은 분위기,

“키스하고 싶으면 하세요.”

“예?”

민소희의 도발적인 눈빛,

“당신은 그걸 원하고 있잖아요. 난, 남자의 눈을 보면 마음을 읽을 수 있는 능력자거든요.”

“하하, 무슨 웹소설의 주인공 같은 이야기네요. 하지만 당신 같은 뜨거운 여자라면 키스를 하지 않은 것은 직무유기이겠죠.”

“어머, 그게 무슨 아재 개그예요?”

“아재 개그든 말든, 난 지금 당신과 키스를 해야겠어.”

거칠게 민소희를 끌어안은 나는 바둥거리는 민소희에게 열정적인 키스를 퍼부...

“컷..”

아니, 왜 컷이야? 분위기 좋은데..

“키스 씬은 나중에 다시 찍기로 하죠. 오늘은 여기까지.”

“수고하셨습니다.”

“수고했어요. 소희 씨. 연기가 많이 늘었는데.”

산토리니의 아름다운 언덕 위에서 영화 촬영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물론, 내가 연기를 하는 건 아니었지만 나도 모르게 영화 촬영에 몰입이 되어 상상을 해버리고 말았다.

영화 촬영이라는 게 구경하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마치 연극을 보는 느낌도 있었다.

“채 감독님, 오랜만입니다.”

“아, 최진수 사장님. 브라질에 가셨다고 하시던데, 일은 잘 되신 겁니까?”

“예, 브라질 쪽 일은 잘됐죠. 아주 성과가 좋아요.”

브라질에서 2주 동안의 작업으로 12조를 벌었으니 잘 된 정도가 아니라 대박이라고 할 수 있었다.

지금 채은성 감독을 비롯해서 여러 배우들과 스텝들까지 사람들이 바글바글한 이 영화의 제작비가 2백억이니까. 이런 영화를 600번은 찍을 수 있는 돈이었다.

채은성 감독이 그 사실을 알면 기절을 하지 않을까?

“민소희가 생각보다 연기를 잘하네요?”

“뭐, 민소희에 맞추어서 대본 수정을 했으니까요. 대사 처리가 잘 안 돼서, 결국, 민소희의 말투에 맞게 대사를 고쳐야 했어요.”

“그래요?”

잘했네, 민소희의 연기가 어색하다면, 대본을 고치면 되는 거잖아? 이거야말로 역발상 아닌가?

“하하, 그런 방법이 있었군요. 아무튼, 채은성 감독님이 노련하게 잘 대처하시는 것 같아서 다행입니다.”

채은성 감독이 만들고 있는 영화는 산토리니의 사랑이라는 제목처럼 그리스의 유명한 휴양지인 산토리니가 배경이었다.

덕분에 촬영장에 온 건지, 유럽 놀러 온 건지 분간이 안 갈 정도였다.

먼저 그리스에 와 있던 윤아영 전무도 비슷한 기분인지, 평소와는 달리, 하늘거리는 원피스를 입고 촬영장 주위를 돌아다니고 있었다.

“아영 씨, 영화 제작은 잘 되고 있는 거죠?”

“예, 보시다시피요. 민소희랑 채은성 감독도 케미가 괜찮고요. 그리고 여기는 바다도 예쁘고 건물들도, 마을도, 언덕도, 카페나 레스토랑도 다 예뻐서 그냥 찍기만 해도 예술 작품이 될 것 같다고요.”

“그렇기는 하네요.”

유럽에서도 아름다운 관광지로 유명한 산토리니, 사실, 뭐 그다지 특별할 것은 없다고도 할 수 있었다. 원래는 가난한 어촌 마을이었다고 하는데, 고즈넉한 분위기에 매료된 유럽의 부자들이 찾기 시작하면서 유명해진 곳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 후에는 산토리니의 관광자원을 이용하려는 업자들도 가세해서 분위기 있는 레스토랑이나 카페들이 생겨나고, 숙박 시설도 만들어져서 지금의 산토리니가 된 것이라고 할 수 있었다.

나와 함께 산토리에 도착한 민영민은 여기저기 사진을 찍느라 정신이 없었다.

하지만 생각보다 그다지 볼거리가 많은 것 같지는 않았다. 화려함보다는 소박하면서 아기자기한 느낌들이라, 근처에 있는 요트 마리나도 규모가 작은 편이고 말이다.

“영민아, 사진 찍기에 괜찮은 것 같아?”

“최고죠. 찍기만 하면 다 작품입니다. 바다도 하늘도, 심지어 공기까지 다 카메라에 담고 싶은데요.”

공기까지 말인가? 아무튼, 공기를 찍을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바람이 시원하고 들이마시는 공기가 폐 속에 들어와서 뭔가 상쾌해지는 느낌적인 느낌이었다. 아무래도 서울 같은 대도시와는 공기 자체가 다른 것은 분명했다.

그렇게 산토리니에서의 촬영은 며칠 동안 계속되었다.

***

산토리니, 촬영팀 숙소 레스토랑.

“큰일인데요.”

“뭐가요?”

배우들과 스텝들이 통째로 빌려서 전용 식당으로 이용하는 레스토랑에서 아침을 먹고 있을 때였다. 유럽 현지 가이드 겸, 섭외 담당인 크리스티나 킴이 연신 휴대폰으로 어디론가 전화를 걸고 있었다.

“예? 그러시면 곤란해요. 다음 주면 프랑스 촬영인데.”

“무슨 일이에요? 크리스티나?”

“최 사장님, 저기 프랑스의 샤또에서 연락이 왔는데, 샤또 촬영을 못 하겠데요.”

사또? 프랑스에도 사또가 있나?

“사또요? 무슨 암행어사 출도요? 그럴 때, 혼쭐나는 지방 수령 말인가요?”

“아뇨, 그런 사또가 아니라 프랑스에서는 고성이나 대저택을 샤또라고 불러요. 한마디로 고풍스러운 고급 주택들이죠.”

“아, 샤..샤또..”

난또 한국의 사또인줄 알았네. 그나저나 뭔가 촬영장을 예약했는데 취소가 되었다는 건가?

“그런데 예약은 왜 취소가 된 거예요?”

“그게, 원래는 호텔로 개조해서 영업하던 곳이라 우리가 빌리기로 한 곳이었는데, 갑자기 호텔이 팔려버렸데요.”

“호텔이 갑자기 팔려요?”

“예, 중국에서 온 부자가 고성이 마음에 든다고, 즉석에서 거액을 제시하면서 계약하자고 했다는 거예요.”

“아니, 아무리 그래도 선진국이라는 프랑스 사람들이 그렇게 약속을 안 지키면 쓰나? 분명히 우리가 먼저 촬영하기로 예약한 거 아닙니까?”

“그건, 위약금을 주겠다고 하는데, 아무튼, 다음 주에 촬영은 어렵다는 거예요. 그 사람들도 이제 자기들 소유가 아니라 어쩔 수 없다는 말만 하고요.”

“아영 씨, 다음 주 촬영을 하러 프랑스로 가야 하는 겁니까?”

“예, 일정이 그렇게 잡혀 있어요. 뭐, 민소희도 그렇고, 다른 배우들 일정도 있고요. 해외로케라 비용도 많이 들지만, 다른 스케줄 문제도 있어서 시간이 없는데 큰일이네요.”

“뭐, 꼭 프랑스에 갈 필요가 있어요? 여기 산토리니도 좋아 보이는데. 여기서 찍으면 되지.”

“그건, 채은성 감독에게 말해보세요. 영화 촬영은 감독 소관이잖아요.”

***

“예, 프랑스 고성 예약이 취소되었다고요?”

“그래요. 뭐, 어쩌겠어요. 그쪽에서 일방적으로 취소한 거라, 달리 방법도 없고,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위약금을 청구하는 정도라서...”

채은성 감독은 갑자기 머리를 쥐어뜯기 시작했다.

“아니, 왜 그래요? 캄 다운...진정해요.”

“그 프랑스 저택 장면은 이 영화에서 정말 가장 중요한 핵심적인 장면이라는 말입니다.”

“다른 곳에서 찍으면 안 되나요?”

“안 돼죠. 영화 설정 자체가 남자 주인공이 프랑스 억만장자에게 입양된 한인 입양아라는 설정인데, 프랑스의 양아버지가 있는 대저택 장면이 꼭 필요하다는 겁니다.”

“대충 비슷한 다른 곳에서 찍으면 되죠. 영화 관객들이 대충 고급 주택이면 부잣집인가보다 하겠죠. 프랑스인지 그리스인지 어떻게 알겠습니까?”

“최 사장님, 너무 하시는 거 아닙니까? 저는 그래도 최 사장님의 입장을 생각해서 발연기를 하는 민소희를 위해서 대사도 다 수정하고 노력할 만큼 했다는 겁니다. 그런데 드림엔터테인먼트에서는 제작 지원을 한다고 일일이 촬영에 간섭을 하면서, 이런 장소 섭외하나 제대로 못 하는 건가요?”

아니, 너무하는 거 아니야? 우리가 일부러 그런 것도 아니고, 그 샤또인지 사또인지를 무슨 중국 부자가 와서 샀다고 하는데, 그걸 나더러 어쩌라고?

아니지, 뭐 그런 걸로 얼굴 붉힐 일은 없잖아? 프랑스에 고성이 거기 하나만 있는 것도 아닐 테고, 다른 곳을 알아보면 되는 거 아니겠어?

“아, 채 감독님, 좀 진정하세요. 고성이지 샤또인지 다른 곳을 섭외하면 되는 거 아닙니까?”

“그게 쉽겠습니까?”

“날 한 번 믿어보세요. 뭐, 그런 쪽으로는 재능이 있으니까.”

“재능요?”

“건물이나 부동산 쪽으로는 운이 좀 따르는 편이거든요, 운도 재능이라고 할 수 있죠.”

채은성은 약간 어이없다는 표정이었지만, 내가 다른 장소를 섭외해 보겠다고 하니까, 더 이상 불평은 하지 않았다.

“하지만, 프랑스의 억만장자의 집이라는 느낌이 나는 그런 곳을 구하기는 최진수 사장님도 쉽지 않을 겁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내가 다 알아서 할 테니까.”

채은성 감독이 떠나가자, 옆에서 듣고 있던 윤아영이 다가왔다.

“사장님, 정말, 유럽에 부동산 쪽에 인맥이 있는 거예요?”

“예? 뭐, 그렇죠. 내가 좀 워낙에 글로벌하게 사업도 하다 보니, 유럽에도 좀 아는 사람도 있고요.”

물론, 뻥이었다. 하지만 아무래도 상관은 없었다. 프랑스의 대저택이 필요하다는 것인데, 프랑스는 처음이지만, 고급 주택을 사거나 빌딩을 매입한 경험은 많았으니까 말이다. 거기에 지금은 계좌에 돈도 충분하다. 대략 22억, 아니구나, 22조 원의 현금이 있는 것이다.

워낙 액수가 크다 보니, 나도 단위가 헷갈릴 정도로 엄청난 현금을 가지고 있었고, 이 돈이라면 부동산이든, 대저택이든, 사또든 샤또든 빌리 거나, 아니면 통째로 사버려도 괜찮고 말이다.

계획에 없던 일이기는 하지만 프랑스에 대저택 하나쯤 별장 삼아 가지고 있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아까 듣기로는 우리 영화 촬영팀이 섭외해 놓았던 그 샤또라는 고성도 중국에서 온 어떤 졸부가 채간 모양이었다.

“와, 역시, 돈도 많으시고, 영어도 잘하시고, 정말 얼굴만 잘생기고 키만 컸으면 우리 영화 속의 주인공이랑 똑같은 것 같아요.”

뭐? 얼굴은 아니라는 거야? 그리고 키가 왜 나와?

“하하, 그래요? 뭐, 칭찬이라고 생각하겠습니다. 아무튼, 프랑스에 대저택 씬 촬영에 필요한 저택은 내가 알아보도록 하죠. 그 샤또 말입니다.”

유럽은 이번에 와보는 것이 처음이었고 프랑스는 아직 가보지도 않은 미지의 신세계였지만 나에게도 믿는 구석이 있었다. 그건 바로 행운의 과자,

지금까지 해왔던 것처럼 필요한 부동산을 매입하는 데는 행운의 과자가 도움이 되리라는 생각이었다. 한국에서는 행운의 과자가 유능한 부동산 매니저들을 소개시켜 줘서, 그 덕에 좋은 부동산을 좋은 가격에 살 수 있었다.

브라질에서도 마찬가지였고 말이다. 그렇다면 유럽에서도 가능하지 않겠어? 그런 생각을 하면서 행운의 과자병을 조심스럽게 꺼내 들었다. 식사를 다 마친 레스토랑은 나 혼자뿐이었다. 다들 남은 촬영을 하러 떠났기 때문이었다.

주위에 아무도 없는 걸 확인하고 병에서 과자 하나를 꺼내 입에 넣고 씹기 시작했다.

“음, 과자가 이런 맛이었나?”

뭔가 마들렌 같기도 하고, 엘레강스한 느낌의 그런 프랑스풍의 맛이 느껴지는 것 같았다. 이게 바로 유럽과자의 맛인가?

아직, 프랑스는 아니고, 그리스의 산토리니에 와 있을 뿐이었지만, 행운의 과자에서는 어딘지 고풍스러운 프랑스의 대저택 같은 고급지고 우아한 맛이 느껴지는 것 같았다.

아무튼, 그런 우아한 과자의 향취가 지나가고 혀끝에 뭔가 이물감이 느껴졌다.

“전화번호군. 여기가 대체 어디지?”

일단 휴대폰의 버튼을 눌러보았다.

“다니엘 페오의 제니퍼 팍입니다.”

“다니엘 페오요? 거기가 부동산 업체인가요?”

“예, 맞습니다. 그런데 무슨 일이시죠?”

“저는 한국에서 온, 최진수라고 합니다. 프랑스 쪽에 샤또라고 하나요? 그런 고풍스러운 대저택을 찾고 있는데요.”

“어머, 한국분이시군요. 저도 한국계 교포예요. 국적은 미국이고요. LA 출신이죠.”

“하하, 한국분을 여기서 만나게 되는군요.”

“그런데 샤또에 관심이 있으시다는 거죠? 가격이 만만치가 않은데 괜찮으시겠어요?”

“가격이 어느 정도인가요?”

“음, 제가 일하는 다니엘 페오는 프랑스에서도 고급 부동산을 취급하는 대표적인 부동산 기업이에요. 한마디로 프랑스 최고가의 그런 부동산을 취급하는 곳이라는 말이죠.”

“그래요? 하하, 뭐, 돈이라면 충분히 있으니까, 매물만 마음에 든다면 가격은 상관없습니다.”

“음, 실례지만 어떤 일을 하시는 분이신지 좀 여쭤봐도 괜찮겠습니까? 고객님의 재무상태를 파악할 필요가 있어서 말입니다.”

돈이 진짜 있는지, 허풍인지 확인하고 싶다는 건가?

“예, 저는 드림엔테테인먼트의 최진수라고 합니다. 최진수 사장이죠. 한국 포털에 검색을 좀 해보면 제 정보가 나올 겁니다. 플라잉 폭스라는 요트도 가지고 있죠.”

“프..플라잉 폭스요?”

“플라잉 폭스를 아시나요?”

“물론이죠. 그거라면 한화로 7천억짜리 초호화요트라면서요? 저는 유럽에 있지만, 한국인 부자가 그 배를 샀다고 해서 저도 누굴까? 궁금했는데, 그 최진수 사장님이시라는 거죠?”

“하하, 그렇습니다. 제가 바로 그 최진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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