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치의 척도
“고급 수입차들을 취급하는 곳입니다.”
“그래요?”
이진석은 명함 한 장을 내밀었다.
“최진수 사장님에 대해서는 많은 들었습니다. 대단한 재력가라고 하시더군요.”
“하하, 뭐, 그 정도인가요?”
“부가티 시론 에르메스를 사셨다고 해서 저도 호기심이 생겨서 찾아와봤습니다. 보통은 페라리, 맥라렌 같은 슈퍼카들을 많이 취급했지만, 최근에는 하이퍼카 수입에도 관심이 있습니다.”
이진석 사장은 명함 한 장을 건넸다.
“언제 한 번 관심 있으시면 매장을 방문해 주시죠.”
뭐야? 차를 사라는 건가? 아무튼, 부가티 때문에, 영화 시사회장에 자동차 관련된 사람들만 잔뜩 오기는 했네...
“예, 언제 기회가 되면 방문을 해 보겠습니다. 그런데 한국에도 하이퍼카를 가진 사람이 있나요?”
부가티 시론을 사면서 하이퍼카라는 말도 처음 알게 되었지만, 이런 최고급 하이퍼카를 한국에 가진 사람이 또 있나 호기심이 생겼다.
“아직은 그리 많지는 않습니다.”
“있기는 있다는 건가요?”
“부가키 시론의 이전 모델인 베이론은 이미 수입이 됐었죠. 우리 한영 모터스에서 직접 수입한 차니까요.”
“그래요? 그런데 슈퍼카 사진 동호회에서도 부가티는 한 번도 찍은 적이 없다고 하던데?”
부가티 시론 에르메스를 살 때, 옆에 있던 민영민 녀석이 부가티는 한국에서는 본 적이 없다고 말했었다. 슈퍼카나 럭셔리한 자동차들이라면 나름 전문가인 민영민이 모른다면 부가티는 한국에 거의 없다고 생각했는데 말이다.
“그건 차주들이 운행을 거의 안 해서 그럴 겁니다. 부가티 베이론을 샀던 사람은 지금까지 두 명이 있었는데, 두 분 다 재벌가 회장님이어서 눈에 띄는 걸 별로 안 좋아했거든요.”
“그래요?”
하긴, 한국 재벌들은 유난히 대중들의 시선을 신경 쓰는 경향이 있으니 말이다. 어떤 면에서 한국의 재벌들은 연예인과도 비슷한 느낌이었다. 그래서 재벌가의 3세들이라도 국산차를 타고 다니는 사람들이 많다는 이야기도 들은 적이 있었다.
“원래 진짜 재벌가의 사람들은 국산차를 탄다면서요?”
“그런 경향이 있죠. 쉽게 말해서 재벌 3세들 중에서 진짜 재산이 많고 그룹 경영자급은 국산차를 타고 다니면서 검소하게 다니는 편이고, 재벌가에서도 직계에서 벗어난 방계, 즉 그룹 경영에서 밀려 있는 재벌가의 후손들은 사치가 심한 편이죠. 슈퍼카들도 많이 타고요.”
“하하, 직계는 그룹을 물려받아서 회장이나 사장이 될 테니까, 대중을 의식해서 검소하게 국산차를 타고, 이미 경영권에서 밀려난 친구들이 오히려 슈퍼카를 타며 인생을 즐긴다는 건가요?”
“뭐, 비슷한 이야기입니다.”
“그런 기준으로 보면 전 급이 떨어지는 재벌인가요?”
이진석 사장은 살짝 미소를 지었다.
“아닙니다. 급이 떨어지다뇨? 한국에서 부가티 시론 에르메스를 구입할 수 있는 사람은 솔직히 많지가 않습니다. 아니, 거의 없다고 봐야겠죠. 장태식 회장님이...”
“대성그룹 장태식 회장 말입니까?”
“하하, 제가 실언을 했군요. 뭐, 장태식 회장님이 차를 좋아하시기는 하죠.”
“그럼, 두 대의 부가티 베이론을 샀다는 사람 중에 한 명이 장태식 회장인가요?”
이진석 사장은 살짝 당황한 얼굴이 되었다.
“최진수 사장님이시니까 특별히 말씀을 드리죠. 맞습니다. 하지만, 이건 대외적으로는 비밀이라서 말입니다.”
“예, 무슨 말인지 알겠습니다. 사실, 저도 입이 무거운 사람을 좋아하죠.”
“아무튼, 한국에서 부가티 시론 에르메스 같은 스페셜 에디션 모델을 구매할 수 있는 사람은 장태식 회장님을 제외하면 최진수 사장님이 유일할 겁니다.”
“그런가요?”
하긴, 부가티 본사에 갔을 때, 원래는 돈이 있어도 아무에게나 차를 팔지는 않는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었다.
70억짜리 부가티 시론 에르메스지만, 70억을 현금으로 가져온다고 차를 팔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이 정도의 스페셜한 모델은 차주가 누구인지 충분히 알아보고, 부가티의 명성에 도움이 될 건지 아닌지를 따져봐서 판매를 결정하는 것이다.
물론, 나의 경우에는 이미, 샤또 루이 14세를 구매한 경력이 큰 도움이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다니엘 페오의 VVIP 고객이라는 것도 영향을 주었을 테고 말이다.
다니엘 페오의 경우에도 샤또 루이 14세 같은 고가의 부동산 거래를 하는 데는 내가 이전에 플라잉 폭스를 구매했던 경력이 또 도움을 주었고 말이다.
플라잉 폭스, 샤또 루이 14세, 부가티 시론 에르메스, 초호화 요트, 최고급 저택, 최고급 하이퍼카의 스페셜 에디션은 이렇게 연쇄적으로 반응을 일으킨 것이었다.
한 마디로 재력이 보증된 부자로 인정을 받게 된 것이다. 뭔가 특별하고 값비싼 물건을 살 때마다 그 대상을 통해서 나의 재력과 신분이 인정을 받게 되고 그로 인해 나의 평가도 상승하는 선순환의 고리가 만들어졌던 것이다.
이진석 사장이 말한 것처럼, 부가티 시론 에르메스는 한국에서도 최고 재벌인 장태식 회장 정도가 아니면 살 수 없는 진짜 최등급의 차라고 할 수 있었다. 실제 가격인 70억도 엄청난 돈이라 일반인들은 엄두를 낼 수 없는 가격이지만,
70억을 지불한다고 살 수 있는 차가 아닌 것이다. 부가티도 그렇고 페라리나 람보르기니 같은 슈퍼카 회사들의 경우에는 부가티 시론 에르메스처럼, 가끔 스페셜한 에디션의 모델을 내놓기도 하는데,
이런 스페셜 에디션의 경우에는 소수의 VVIP들에게만 판매를 하는 정책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물론, 민영민에게 들은 이야기들인데, 페라리 같은 경우에는 이런 스페셜 에디션을 사기 위해서는 누적된 포인트가 필요하다고 한다. 그동안 꾸준하게 많은 수의 페라리를 구입한 고객에게만 이런 특별한 모델을 판매하는 전략이다.
그래서 그런 특별한 모델들을 사기 위해, 인기 없는 페라리 모델들을 계속 사는 사람들도 많다고 하니까 말이다.
그에 비해 부가티는 라인업이 다양한 회사는 아니라 판매실적보다는 고객의 재력이나 사회적 지위 같은 걸 더 많이 보는 편이라고 한다.
그래서 샤또 루이 14세를 막 구매한 내가 운 좋게 부가티 시론 에르메스의 주인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뭐, 돈이 있어도 쉽게 살 수 없다고는 하더군요. 저 같은 경우에는 부가티 본사에 가기 전에 다니엘 페오라는 부동산 회사에서 고가의 부동산을 구매한 게 도움이 됐습니다. 한마디로 운이 좋았죠.”
“그 이야기도 들었습니다. 3600억짜리 대저택이라면서요? 프랑스의 최고가 주택이라는데 맞나요?”
“그렇다고 하더군요.”
이진석 사장은 약간 감탄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아마, 고급차 수입업체를 운영하는 이진석 사장이라면 우리나라의 최상류층들을 상대하고 있겠지만, 그런 그에게도 이 정도로 고급 주택이나 고급차를 구매하는 이야기는 낯선 모양이었다.
“장태식 회장님은 그런데 부가티는 왜 구입하신 겁니까? 들어보니까, 차를 마음껏 타고 다니시는 것도 아닌 것 같은데 말입니다.”
“하하, 원래 차를 좋아하시죠. 그래서 예전부터 슈퍼카 동호회에서 활동도 하시고 가지고 계신 고급차들도 상당합니다. 다만, 대성 그룹 회장으로 취임하시면서 아무래도 주변 시선을 신경 쓰지 않을 수 없게 된 거죠.”
“음, 그렇군요. 재벌가의 회장이라는 것도 좀 피곤하겠네요.”
“하하, 장태식 회장님에 비하면 최진수 사장님은 아주 자유롭게 사시는 것 같네요?”
“누구의 눈치를 보지는 않습니다. 제가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제가 사고 싶은 걸 마음껏 사면서 거리낌 없이 사는 편이죠.”
“외람된 질문이지만, 대체 그 재력은 어디에서 나오는 겁니까? 역시 아버님이 굉장한 자산가이신가요?”
“하하, 뭐, 대충 그렇다고 해두죠. 저희 아버님에 대해서는 정보를 찾기 어려울 겁니다. 쉽게 자신을 드러내는 분은 아니거든요.”
“음, 그렇다면 역시 해외에서 사업을 하시는 거겠죠?”
“너무 디테일한 건 묻지 않았으면 좋겠네요.”
“죄송합니다. 제가 쓸데없는 걸 물었군요. 아무튼, 최진수 사장님도 자동차를 꽤나 좋아하시는 것 같은데, 차량 구매하실 일이 있으면 저희 회사를 한 번 찾아 주십쇼, 성심성의껏 상담해 드리겠습니다.”
“인연이 있으면 만날 기회가 있겠죠.”
***
식전 행사가 더 요란하기는 했지만, 부가티 시론 에르메스의 전시회가 끝나고 본격적으로 영화 시사회가 시작되었다.
아까는 다들 자동차 관련한 기자들 뿐인줄 알았는데, 시사회가 임박하자 극장 안은 영화 기자들과 팬들로 채워지기 시작했다.
“생각보다 시사회가 성황인데요.”
“예, 그런 것 같은데요.”
객석 중앙에 있는 VIP석의 옆에는 윤아영이 앉아서 나와 같이 영화를 감상했다. 영화 촬영을 직접 지켜봤던 영화였지만, 편집해서 이렇게 정식으로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화면은 예쁘게 잘 나온 것 같아요.”
윤아영의 말대로 산토리니와 샤또 루이 14세 대저택, 그리고 파리 명소들이 많이 등장하는 영화 속의 화면은 장면 장면이 한 폭의 수채화처럼 아름다운 모습이었다. 채은성 감독이 미술을 전공했다고 하는데, 그래서인지 화면이 굉장히 서정적인 느낌이었다.
그에 비해서 인물들의 연기나, 전체적인 스토리는 좀 밋밋한 느낌이 있었다. 아름다운 배경에 비해서 극적인 사건이 좀 부족한 영화라고 할 수 있었다.
“영화가 배경은 예쁜데, 좀 지루하지 않나요?”
“약간은 그런 것 같기도 하고요. 잘 찍기는 했는데, 흥행이 될지는 모르겠어요.”
약간 지루한듯한 영화 시사회가 끝이 나고, 무대에서는 주연 배우들의 기자회견과 팬미팅이 진행되었다.
나는 더 할 일은 없을 것 같아서, 주차장 쪽으로 빠져나왔다.
***
주차장에서는 나의 부가티 시론 에르메스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70억짜리 최고급 하이퍼카로 고장이든, 작은 긁힘이든, 약간의 문제만 생겨도 프랑스로 보내서 수리를 해야 하는 녀석이지만 그렇다고 조심스럽게 창고에 모셔둘 생각은 없었다.
고장이 나든 망가지든, 완전히 박살이 나든, 나에게는 큰 의미는 없었으니까 말이다. 70억이라는 돈도 큰 돈이기는 하지만, 나의 25조에 달하는 자산에 비하면 껌값 정도였다.
25조면 25억의 만 배의 자산이다. 서울에 25억 정도의 자산가라면 중산층 정도 될 것 같은데, 그 정도 사람이 70만 원 짜리 중고차를 대하는 느낌 정도라고 할까? 나와 25억을 가진 사람의 자산이 만 배 차이니까 말이다.
70억은 나에게는 보통 사람의 70만 원 정도의 가치라고 할 수 있었다. 70만 원도 작은 돈은 아니지만, 70만 원짜리 차를 타면서 신줏단지 모시듯 하지는 않으니까 말이다.
70억짜리 부가티 시론 에르메스도 나에게는 그저 타고 다니는 차일 뿐이었다. 물론, 기가 막히게 멋진 녀석이라는 건 나도 인정할 수밖에 없지만 말이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 부가티 시론에 막 타려는 참이었다.
“오랜만이군요, 최진수 사장님.”
어딘지 낯익은 이 목소리는?
뒤를 돌아보니 내 예상대로 장태식 회장이었다.
“아니, 장 회장님이 어쩐 일이십니까?”
“하하, 무슨 일이 있어서 온 건 아니고, 근처에 일이 있어서 왔다가, 여기에 부가티 시론 에르메스가 있다고 해서 구경이나 해볼까 하고 왔죠.”
장태식 회장 말로는 식전 행사가 끝나고 지하 주차장으로 부가티 시론이 이동했다는 걸 이진석 사장에서 들었다는 것이다.
“이진석 사장하고 친하신가 보죠?”
“친하다기보다는 단골이라고 할 수 있죠. 내가 그동안 한영 모터스에서 차를 많이 샀으니까요.”
“부가티 베이론도 말입니까?”
“하하, 이진석 사장이 생각보다 입이 가볍군요. 그런 말도 하던가요?”
“직접 말한 건 아니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추측을 해본 것뿐입니다.”
“뭐, 최진수 사장이라면 비밀로 할 것도 없겠죠. 최진수 사장은 나보다 레벨이 높으면 높았지 낮지는 않은 사람 아닌가요?”
“레벨요?”
장태식 회장은 싱긋 미소를 지었다.
“우리끼리 하는 이야기지만 말입니다. 자본주의 시대에 인간의 능력은 가진 자산으로 평가를 받는 거니까요. 안 그런가요?”
하긴, 좀 노골적이어서 그렇지, 보통 사람들도 그 사람이 타고 다니는 차나, 옷차림으로 인간을 평가하고 차별하니까 말이다. 장태식 회장의 말대로 자본주의 시대에서 인간의 척도는 자산, 즉 돈인지도 모를 일이다.
“물론, 돈이 전부는 아니겠지만, 하나의 평가수단이라고는 할 수 있겠죠. 그나저나 정말 부가티를 보러 오신 겁니까?”
“뭐, 부가티 구경도 하고요. 또, 최진수 사장에게 긴히 할 이야기도 있고요.”
“예? 저에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