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기회
“그래서 상속세를 내야 할 돈이 필요하다는 거군요?”
상속세를 낼 돈이라면 일 년에 2조씩은 필요하다는 건데. 대체 얼마나 돈을 빌려달라는 거지?
“맞습니다. 주식을 매각하는 방법도 있지만, 그건 경영권 문제로 어렵다는 건 알고 계시겠죠?”
“그건 저도 알고 있습니다. 장태식 회장님이 소유한 주식들은 지주회사의 주식으로 주식의 가격보다도 훨씬 더 큰 가치가 있는 주식들 아닙니까?”
장태식 회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그래서 현실적으로 주식매각으로 상속세를 내는 건 불가능하죠. 그렇다고 은행권의 대출도 어렵고요.”
“하하, 천하의 장태식 회장님에게도 대출은 어려운 문제인가요?”
“액수가 워낙 크기도 하고요. 외형상으로는 주식을 매각하면 해결되는 일이기 때문에, 은행들도 저에게 특혜를 주기가 어려운 실정이죠.”
“그렇겠군요. 그럼, 필요한 자금 액수가 얼마인가요?”
“당장, 올해 납입해야 할 2조가 필요합니다.”
“2조요?”
장태식 회장 말로는 작년분의 2조는 어떻게든 해결을 했지만, 올해 납입해야 하는 2조의 상속세가 부담이 되고 있다고 했다.
“그럼, 13조의 상속세 중에 올해분을 포함해서 얼마가 남은 겁니까?”
“납입한 세금은 2조입니다. 그것도 일가의 부동산을 다 처분해서 겨우 마련한 거죠.”
“그럼, 동화빌딩도?”
“맞습니다. 그것도 돈이 급해서 처분한 거였죠. 그 외에 예금이나 각종 핵심 주식을 제외한 모든 자산을 처분했지만, 그래도 2조를 마련하기가 쉽지 않더군요.”
“그렇겠죠. 2조라는 액수가 사실, 보통 사람들에게는 엄청난 액수니까요. 물론, 저 같은 자산가에는 큰 돈은 아니지만 말입니다.”
2조 원이라면 나에게도 사실, 엄청난 돈이다, 하지만 왠지 장태식 회장 앞에서 폼을 잡아보고 싶었다. 그리고 실제로 나에게는 지금 22조의 현금이 있었다. 3천 6백억을 지불하고 프랑스에 샤또 루이 14세를 구입했지만, 그래도 나의 현금 보유 총액에는 큰 차이가 없었다.
“2조가 필요하시다면 빌려드려야죠. 장태식 회장님은 국가적으로도 큰 일을 하시는 분 아니십니까?”
장태식 회장은 내가 아무렇지 않게 2조를 빌려주겠다고 하자, 살짝 당황한 표정이었다.
“정말입니까? 담보라든가? 다른 건 필요 없는 건가요?”
담보? 아, 그렇지, 주식을 담보로 설정해야 하는 건가? 이건 해본 적이 없어서 잘 모르겠네. 이런 건 김영석 사장이 잘 알 것 같은데, 나중에 따로 물어봐야 하나?
“그런 건, 실무진을 통해서 이야기하면 되겠죠.”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돈은 빌려야 하는데, 상환하는 것도 쉽지가 않습니다.”
“예?”
“지금까지 2조를 납부했을 뿐이고, 앞으로 세금으로 내야 하는 돈이 5년간 분할해서 11조 정도니까요. 보통 일이 아니죠.”
음, 남은 세금이 11조인데, 아마, 납부한 2조의 상속세도 부동산 같은 걸 탈탈 털어서 냈을 테고, 주요 자산은 지주회사 주식이라 매각하기도 어렵다는 말이겠지, 그래서 세금 낼 돈이 필요하지만 돈을 상환하는 것도 어렵다. 그래서 어쩌라는 거야?
“하하, 돈을 빌리러 오셨는데, 갚지는 않으시겠다는 건가요?”
“그건 아닙니다. 하지만 일반적인 방법으로는 상환하기가 쉽지 않다는 거죠. 내야 할 세금이 많아서 앞으로 11조의 상속세를 다 납부할 때까지는 여유가 없으니까요.”
“그럼 어떻게 하시겠다는 겁니까?”
“정상적인 방법으로 처리할 수 있으면 좋겠지만, 솔직히 이건 내 입장에서는 달리 방법이 없군요. 그래서 생각을 해봤는데, 대성의 계열사들을 헐값에 최진수 사장에게 넘기는 방법은 어떻습니까?”
“대성그룹의 계열사들을요?”
“예, 아시다시피, 나는 대성그룹의 지주회사의 최대주주로 사실상 대성그룹의 계열사들의 실질적인 대주주의 권한을 가지고 있습니다. 대성그룹을 지배하는 것은 나라는 거죠.”
“순환출자 방식으로 말이죠?”
“맞아요. 그게 한국 재벌이 경영을 하는 방식이죠. 아실지 모르겠지만, 우리 대성그룹의 시가총액이 작년 기준으로 720조를 넘었습니다. 1년 사이에만 200조가 증가하기도 했고요.”
“와, 그래요? 그러면 장태식 회장님의 자산은 어느 정도입니까?”
“내가 가진 주식의 가치는 큰 변동은 없습니다. 주로 전자 부분에서 주가가 많이 올랐으니까요.”
대성그룹의 시가총액 중에 30조에 불과한 장태식 회장의 지분은 4% 정도라고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순환출자 방식으로 실질적으로는 그룹의 경영을 완전히 장악하고 있으니 효율성만 놓고 보면 최고의 방법이라고 할 수 있는 방식이었다.
“아무튼, 대성그룹의 가치는 엄청나니까요. 그런 대성그룹의 계열사 몇 개를 헐값에 매각하는 일도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닙니다. 수십조 가치의 이익을 최진수 사장님에게 몰아주는 것도 어려운 건 아니죠.”
“음, 그러니까, 제 돈을 빌려서 상속세를 지불하고 그 상환은 대성그룹의 계열사를 통해서 저에게 이익을 주는 방식으로 갚겠다는 건가요?”
“예, 물론, 이건 합법적인 방식은 아니죠. 하지만 현실적으로 제가 막대한 상속세를 지불할 방법은 이런 것뿐입니다.”
음, 분명히 불법적인 일이기는 하다. 하지만 이렇게라도 상속세를 처리하지 않으면 대성그룹 같은 거대 기업의 통제력을 확보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잘은 모르겠지만, 외국인 주주들도 많다고 하는데, 잘못하면 해외의 자본에게 대성그룹이 잡아먹히게 될 수도 있고 말이다.
얼핏 듣기로 대성그룹이 성장하는 데는 정경유착이 큰 힘을 발휘했다고 한다. 정치권과의 유착으로 막대한 수혜를 받으며 성장한 기업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한국을 대표하는 대재벌이 된 대성그룹인데, 사실상 국민들의 세금으로 키워준 회사라고 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국민들의 세금으로 성장한 대성그룹은 오너 일가의 개인소유물처럼 순환출자를 통해 지배되고 있었고, 글로벌화에 성공해서 주식의 소유자들의 상당수는 외국인이 되어 있었다.
장태식 회장 일가가 무너진다고 해도, 대성그룹은 아마 외국인 손아귀에 넘어가게 될 가능성이 큰 것이다.
장태식이 돈을 빌려서 갚겠다는 방식이 정상적인 것은 아니지만, 어차피 이 대한민국이라는 나라 자체가 미쳐돌아가고 있는 상황이기도 했다.
“좋습니다. 상환하는 방법은 천천히 논의를 해보기로 하죠. 그럼 일단 2조를 빌려드리겠습니다. 돈이 더 필요하시면 추가로 더 빌려드릴 수도 있고요.”
“하하, 시원시원하신 분이군요. 좋습니다. 상환하는 방법은 나중에 더 논의를 해보죠. 그럼, 2조는 어떻게 어떻게?”
“바로 계좌 이체를 해도 상관은 없겠지만, 액수도 크고, 아무래도 이런 건 비공식적인 경로로 보내드리는 게 좋겠죠. 이런 일들을 잘하는 실무자가 있으니까. 실무진을 통해서 최대한 빨리 보내드리겠습니다.”
“좋습니다.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
한남동 유엔빌리지, 센트럴 파르크, 진수의 빌라.
오랜만에 집에 돌아오니까 좋은데, 사실 서울에 내 집이라고 할 곳은 여러 군데가 있었다. 여기 말고도 신사동의 영진 빌딩의 나의 아지트도 있고, 성수동의 트리피오 아파트도 아직 내 소유였으니 말이다. 지금까지 샀던 아파트나 빌라 중에서 다시 되판 것은 처음 샀던 경희궁 아파트가 유일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여유자금이 그리 많지 않았으니까 말이다. 처음 샀던 아파트라 나에게는 좋은 추억이 있는 곳인데 조금 아쉽기는 하네, 그렇다고 다시 그 아파트를 사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일단, 지금 내가 살기에는 너무 작은 아파트고, 나 같은 사람이 그런 작은 아파트를 추억을 기념하려고 가지고 있는 것보다는 그 집에 실입주자가 들어가서 사는 것이 더 좋은 일일 테니 말이다.
아무튼, 장태식 회장의 제안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이 분야의 전문가라고 할 수 있는 김영석 사장에게 전화를 걸어보기로 했다.
“최 사장님 무슨 일이십니까? 유럽에 가셨다고 하던데요.”
“아, 영화 촬영도 있고, 겸사겸사 유럽 구경도 하고 왔죠.”
“저도 여기서 소식을 들었습니다. 무하마드 빈 살만 왕세자의 저택으로 유명하던 샤또 루이 14세 저택을 구입하셨다면서요?”
“하하, 거기까지 소문이 난 겁니까?”
“물론이죠. 여기 쿠알라룸푸르도 한류의 인기가 대단한 곳이라 한국 연예계 소식들에 관심이 많거든요. 최진수 사장님이 샤또 루이 14세를 매입해서 거기에서 영화 촬영도 하고, 부가티 시론 에르메스도 사셨다는 것도 잘 알고 있습니다.”
“뭐, 그런 것들은 뉴스에 나오니까 쉽게 접할 수 있겠군요. 하지만, 내가 지금부터 말하는 건 일급비밀입니다.”
“일급비밀요?”
“예, 김영석 사장님이 은밀하게 처리해 주셔야겠습니다.”
나는 김영석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장태식 회장과의 예전부터의 인연부터 해서 이번에 상속세 문제로 2조를 빌려주기로 한 일까지, 그리고 김영석에게 이 문제를 같이 진행할 장태식 회장의 비자금 담당까지 상세한 정보를 설명해 준 것이다.
“음, 그러면, 그, 오지은이라는 여성과 이야기를 해보면 되겠군요?”
“그렇게 하세요. 나는 이런 복잡한 문제는 잘 모르니까 말입니다. 어쨌든, 나중에 장태식 회장에게 채무이행을 청구할 수 있는 수단은 확보해야겠죠.”
“그거야 물론입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장태식 회장에서 은밀하게 자금을 전달해야 할 것 같습니다.”
“나중에 대성그룹 계열사를 인수하는 방식으로 돈은 회수하실 거라는 거죠?”
“그래야 할 것 같아요. 장태식 회장 입장에서는 그런 방법이 아니면 상속세 문제를 해결하기 어려울 테니 말입니다. 물론, 합법적인 방법은 아니지만, 대성그룹 같은 거대 재벌그룹이 흔들리는 건 어쨌든 한국경제에도 좋지 않은 일이니까요.”
“무슨 말인지 알겠습니다. 제 생각도 비슷합니다. 합법적인 것이 깔끔하기는 하지만 세상에는 지저분한 일들도 필요한 거죠. 그리고 저처럼 그런 지저분한 일들을 처리하는 사람도 있어야겠죠.”
“맞아요. 세상만사가 정의로운 방법이면 좋겠지만 워낙 많은 사람들이 살고있는 세상이고 정의라는 것도 그때그때 상황에 따라서 달라지는 일이고, 선이니 악이니 하는 것도 명확하지는 않는 것이 진짜 세상이니까요. 어쨌든, 장태식 회장에게 투자를 하는 셈치고 돈을 빌려주려고 합니다.”
“저도 나쁘지 않은 투자라고 생각합니다. 대성그룹의 주가는 계속 오르고 있고 글로벌한 경쟁력을 가지 몇 안 되는 한국의 기업이니까요. 앞으로도 성장 가능성고 크고, 우량 기업들도 많이 소유하고 있죠.”
김영석 사장의 말대로 이건 괜찮은 투자기회라는 생각이 들었다. 새롭게 벤처 기업에 투자하는 것과는 달리 오랜 전통과 축적된 기술을 가진 대성 그룹의 우량 계열사를 인수할 수 있는 기회인 것이다. 장태식 회장 입장에서도 경영권을 지키기 위해서는 당장 비자금이 필요한 상황이니까, 그룹 차원에서의 손해를 감수하고서라도 나에게 회사 몇 개 정도는 넘길 각오는 하고 있는 것 같고 말이다.
“지금까지는 작은 규모의 회사들 몇 개를 인수한 정도였지만 이번에는 나의 사업을 한 단계 업그레이들 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될 겁니다.”
“그러면 11조의 상속세 중에서 2조 정도만 빌려주시는 겁니까?”
“일단은 급한 돈이 2조라고 하니까요. 김영석 사장님 생각은 어떻습니까?”
“먼저 2조를 빌려주고 천천히 상황을 봐서 괜찮은 거래가 가능하다면 나머지 9조를 추가로 빌려주는 거도 나쁘지 않을 것 같습니다. 최진수 사장님이 원하신다면 말입니다. 제가 알기로는 그 정도 자금은 충분하지 않나요.”
돈이라면 현금 22조 정도가 있으니까, 이번에 2조를 빌려주고, 9조를 더해서 11조를 장태식 회장에게 빌려준다고 해도, 11조의 현금이 남는 셈이었다.
거기에 브라질과 필리핀의 야마시타 골드도 많이 남아 있고, 추가로 발굴할 수 있는 야마시타 골드의 추정량만 80조 상당에 달하니까, 돈이 부족할 일은 없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대성그룹의 장태식 회장에게 개인적으로 11조를 빌려주고, 대성그룹의 우량기업을 헐값에 인수한다면 단순 계산으로도 상당한 수익이 생길 테고, 무엇보다 대성그룹 같은 초일류 기업의 계열사를 인수하게 되는 것이었다.
“좋습니다. 김영석 사장님이 은밀하게 일을 진행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 오지은이라는 여자와 협의해서 장태식 회장에게 돈도 빌려주고요, 그리고 대성그룹 계열사를 인수할 계획도 한 번 세워보세요.”
“알겠습니다. 사장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