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플 이즈 베스트
강남역 사거리, 제이제이 빌딩, 드림엔터테인먼트 본사, 사장실.
“사장님, 시사회장에서는 왜 먼저 가신 거예요?”
“어, 미안해, 소희 씨. 누가 좀 만나자고 해서.”
“대성그룹 장태식 회장님 말인가요?”
민소희는 호기심 가득한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설마? 민소희가 장태식 회장과 한 이야기를 들은 건가?
“그건, 소희 씨가 어떻게 아는 거야?”
“그거야, 사장님이 시사회장에서 그냥 빠져나가길래, 못 가게 막으려고 제가 따라갔었죠. 그렇게 지하 주차장까지 갔는데, 거기서 장태식 회장님이 나타난 거예요.”
“그래서 몰래, 엿들었다는 말이지? 엿듣는 건 좋지 않은 습관이라고.”
민소희는 약간 볼을 붉히며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그건 알지만, 좀 궁금해서요. 사장님은 다른 사람 이야기를 엿들은 적 없으세요?”
뭐? 나? 그러고 보니, 나도 습관적으로 남의 말을 엿듣고 있잖아? 대체 누가 누굴 힐난하는 거지? 아무튼, 그건 그렇고 장태식 회장과 한 이야기를 어디까지 민소희가 들은 거야?
주차장이라면, 그다지 많은 이야기를 하지는 않은 것 같은데 말이다.
“그럼, 소희 씨는 장태식 회장과 내가 하는 이야기를 어디까지 들은 거야?”
“어머, 무섭게 왜 그러세요. 무슨 검사도 아니고, 지금 취조하시는 거예요?”
“아니, 그런 게 아니라, 장태식 회장과 이야기 하는 걸 들었다니까, 뭘 들었다는 건지 궁금해서, 사실, 장태식 회장과 많은 이야기를 해서 주차장에서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 잘 기억이 나지 않거든.”
민소희는 약간 묘한 미소를 지었다.
“오래 이야기를 하시지는 않더라고요. 뭐, 자리를 옮겨서 더 하셨겠지만요. 제가 들은 건 장태식 회장님이 최 사장님에게 돈을 빌려달라고 한 이야기까지예요.”
기억이 나는 것 같았다. 장태식 회장이 돈 이야기를 꺼냈고, 주차장에서 이야기를 하다가, 자세한 건 조용한 곳으로 가서 하자고 해서, 그다음에는 미향으로 이동했으니까. 역시 장태식 회장 말대로 그런 중요한 이야기는 안전한 곳으로 가서 하는 게 맞는 것 같았다.
민소희처럼 누가 엿들을 수도 있으니 말이다. 왠지 지하 주차장 기둥 뒤에서 호기심 어린 눈으로 귀를 쫑긋 세우고 나와 장태식 회장의 대화를 엿듣고 있는 민소희의 귀여운 모습이 상상이 되었다.
귀를 쫑긋 세우고, 뭔가 토끼처럼 말이다.
상상이 되었다. 바니걸 룩으로 귀엽게 깡총거리는 민소희의 모습이...
“오빠, 이 옷 마음에 들어?”
“물론이지, 최고야..”
“사장님?”
“어, 아, 그래 어디까지 들었다고 했죠?”
“장태식 회장님이 돈을 빌려달라고 했잖아요? 정말이에요? 대성그룹 총수인 장태식 회장님이 정말, 최진수 사장님에게 돈을 빌려달라고 했냐고요? 그리고 사장님은 빌려주시기로 한 거예요? 얼마나요?”
민소희는 귀여운 도끼, 아니 소녀처럼 호기심을 보이고 있었다. 하지만 호기심이란 위험한 물건이다. 판도라의 상자를 열게 한 것도 결국 인간의 호기심이었으니 말이다.
“소희 씨는 호기심이 너무 많군요. 솔직히 말하자면 장태식 회장이 나를 찾아와서 자금 문제로 부탁을 한 것은 사실입니다.”
그거야, 민소희도 들은 거니까, 일단 거기까지는 인정을 해야겠지.
“정말요? 와, 상상이 안 가요? 대성그룹이면 진짜 초일류 기업이고, 한국에서 가장 돈 많은 회사 아니에요? 그런 대성그룹이 최진수 사장님에게도 돈을 빌릴 정도면, 사장님은 대체 얼마나 돈이 많으신 거예요?”
“하하, 진정하세요. 소희 씨, 제가 현금 자산이 좀 있는 편이죠. 아시겠지만, 대성그룹 같은 대기업도 유동성의 문제가 일시적으로 생기는 경우는 많으니까요.”
“유동성요?”
“여기저기 사업을 하다 보면, 현금이 좀 딸릴 때가 있다는 거죠. 왜, 강남에 고급 아파트가 있어도, 수중에 현금이 없는 사람들도 있잖아요.”
“아...그렇기는 하겠네요. 재산은 많아도 부동산에 묶여 있으면 세금 낼 돈도 없다는 사람도 많더라고요.”
“맞아요. 그래서, 대성그룹에서도 현금이 좀 필요한 모양이더라고요. 그래서 내가 가진 현금을 좀 지원해주기로 했어요.”
“정말요? 진짜 대박이다. 최진수 사장님이 부자라는 건 알았지만, 무슨 은행도 아니고 대성그룹에서 돈을 빌려 갈 정도라니, 대체 재산이 얼마나 되시는 거예요?”
“하하, 너무 디테일한 질문에는 대답하고 싶지 않네요. 사업상의 비밀이라고 해두죠.”
“음, 예, 더 물어보지는 않을게요.”
다행히, 민소희의 호기심은 거기까지였다.
“장태식 회장에게 돈을 빌려주기로 한 건 비밀입니다.”
“예, 걱정하지 마세요.”
***
얼마 후 김영석 사장에게서 연락이 왔다.
“어떻게 대성 쪽과 협상은 잘 된 겁니까?”
“예, 제가 최진수 사장님의 대리인 자격으로 장태식 회장이 보낸 오지은 씨와 이야기를 해봤는데요.”
“그래요? 오지은이 변호사라는 이야기만 얼핏 들었는데, 정확히 뭐 하는 사람입니까?”
“저도 궁금해서 좀 알아보기는 했는데, 서울 법대 출신으로 엘리트 변호사라는 것 외에는 그다지 정보가 없습니다. 판사 생활을 좀 하다가, 대성그룹 법무팀으로 들어가서 그 후로는 장태식 회장의 개인적인 일들을 처리해주는 것 같습니다.”
“뭐, 그건 그렇고. 협상 결과는요?”
김영석은 장태식 회장의 자산을 분석해 본 결과, 주식을 제외한 자산의 규모가 그리 많지 않고 그나마도 상당한 부분은 매각을 통해서 상속세 일부를 납입하는 데 사용해서 남은 자산은 거의 없는 편이라고 했다.
“장태식 회장이 주식 매각 외에 상속세를 납입할 방법은 거의 없는 실정입니다.”
“그러면 역시 우리가 돈을 빌려줘야 하는 건가요?”
“예, 하지만 우리도 자선 사업을 하는 건 아니니까요.”
물론, 자선 사업을 하는 것도 아니고 장태식 회장 같은 대재벌에게 자선을 베푼다는 것도 말이 안 되는 일이다.
“그래서 말입니다. 오지은 변호사와 협의를 해본 결과, 대성그룹 계열사 중에서 대성 이노베이션이라는 회사를 우리가 인수하는 조건으로 장태식 회장에게 11조의 현금을 주는 게 어떨까요?”
“상속세 납입에 필요한 11조를 우리가 장태식 회장에게 빌려주고, 대성 이노베이션을 대신 받는다는 겁니까?”
“예, 오지은 변호사의 계획을 들어보니까, 나쁘지 않을 것 같습니다.”
김영석 사장 말로는 대성 이노베이션은 배터리를 생산하는 회사라고 했다. 소위 말하는 2차 전지라는 전기차 배터리를 생산하는 회사로, 상당한 기술력을 가진 기업이다. 시가 총액은 50조 원 수준, 거기에 대성전자가 가진 지분이 20% 정도였다.
“50조짜리 회사의 지분 20%면 10조 정도 가치군요?”
“예, 하지만, 전기차 배터리 쪽이면 앞으로도 시장이 더 성장할 유망한 업종이죠. 거기에 국민연금 지분이 20% 정도라고 하는데, 사실상, 대성그룹에서 통제할 수 있다고 합니다.”
“음, 정경유착 그런 건가요?”
“대성그룹과 국민연금의 관계는 유명하죠. 아무튼, 오지은 변호사 말로는 장태식 회장에게 최진수 사장님이 현금 11조를 빌려주면, 지금 주가의 절반 수준 이하의 가격으로 그러니까, 10조 미만을 투자해서 대성과 국민연금 지분, 40%를 인수할 수 있게 해주겠다는 겁니다. 11조의 채무를 회수할 수 있도록 해주겠다는 거죠.”
뭐야? 20조 가치의 주식을 싸게 사게 해주겠다고? 그러면 대충 시세 차액이 11조 정도가 나올 것 같기는 한데, 그 정도로 이익이라고 할 수 있는 건가? 11조를 회수할 수는 있을 것 같아 보이지만, 내 돈 빌려주고 받는 게 그렇게 복잡하고 또 위험해 보이기도 하고 말이다. 불법적인 일도 있을 것 같고, 그런 위험을 감수하고 내가 얼마나 이익을 본다는 거지?
“11조를 빌려주는 대가로는 그 정도의 이익을 보는 게 이익인 건가요?”
“오지은 변호사의 말도 그렇고, 앞으로 전기차 산업이 활성화가 되면 대성 이노베이션의 가치는 폭등할 거라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상당한 수익이 발생할 수도 있고요.”
김영석 사장은 대성 이노베이션의 주가가 상승할 거라며 괜찮은 거래가 될 거라고 이야기하고 있었다.
“일단, 좀 생각을 해보겠습니다.”
“예, 그럼,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일단, 대성 이노베이션이라는 회사에 대해서 좀 검색을 해봤다. 세계 5위권의 전기차 배터리 회사이기는 한데, 뭐, 그렇다고 압도적으로 시장을 장악하는 그런 회사는 아닌 것 같은 느낌적인 느낌이었다.
다른 비슷한 경쟁사들과 비교해도 주가가 낮은 편도 아니고 말이다. 장태식 회장이 주가를 하락시켜서 싸게 구입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지금 주가 이상으로 주식 가치가 올라갈 회사인지는 잘 감이 오질 않았다.
이런 건, 뭔가 전문가의 상담이 필요한 거 아닌가?
하지만 내 주변에 전문가가 있어야지? 내 주위에 있는 전문가들이라면, 파파라치 전문인? 민영민이나, 연예계 쪽 엔터테인먼트 전문가인 윤아영 정도?
무슨 컨설팅 회사를 찾아가 볼까? 어디서 보니까, 맥킨지라는 회사가 유명해서, 한국 대기업들도 컨설팅을 받는다고 하던데...
하지만 좀 더 검색을 해보니, 맥킨지의 컨설팅을 받은 회사들이 다 잘 된 것은 아니었다. 최근에 그것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룹이 망해가는 곳도 있었고 말이다.
그래, 역시 컨설팅 회사라는 것도 참고 자료일 뿐이지, 미래를 어떻게 알겠어?
아니지, 나한테는 행운의 과자가 있잖아?
그래, 복잡하게 생각할 거 없이 행운의 과자의 행운으로 결정하면 되는 거 아니겠어? 아직까지 행운의 과자의 선택이 빗나간 적은 없었으니까 말이다.
그럼 어떻게?
단순하게 생각하기로 했다.
나는 프린터에서 A4 용지 두 장을 꺼냈다. 그리고 책상 위에 올려놓고, 큼지막하게 1과 2라는 숫자를 적었다.
그리고 1이라는 숫자 아래에는 대성 이노베이션 인수, 라고 적고 2번에는 대성 이노베이션 인수하지 않음 이라는 글자를 적어 넣었다.
대성 이노베이션을 인수하는 게 득이 될 것인가? 아닌가? 그냥 그 두 가지 중에 하나를 행운의 과자로 뽑기로 한 것이다.
진짜 단순 무식한 방법이지만, 지금처럼 글로벌한 시대에 복잡한 거대 기업의 경영이라는 문제를 생각하면 세계적인 컨설팅 회사의 컨설팅을 받는다고 해도 확실한 답이 없기는 마찬가지 아닌가?
결국, 대기업들도 운에 따라 좌우되는 것이라는 생각이었다.
그렇게 행운의 과자의 병을 꺼내 들었다. 그리고 천천히 과자 하나를 꺼내 들었다. 과자에서는 뭔가 심플하면서도 고소한 냄새가 나는 것 같았다. 뭔가 복잡하지 않고 단일한 그런 단순한 냄새 말이다.
“과자 역시도 좀 심플한 맛이 질리지 않는 법이지.”
천천히 행운의 과자를 입에 넣고 씹기 시작했다. 그리고 단순한 듯 세련된 고소한 향취가 입안에 퍼지고 있었다. 마치 복잡한 기교를 부리는 것 같지만, 결국은 단순한 반복일 뿐인 세련된 재즈 음악처럼 말이다.
그리고 고소한 과자의 맛이 사라질 때쯤 입안에서 이물감이 느껴졌다.
나온 것은 작은 쪽지였고. 거기에는 1이라는 번호가 적혀 있었다.
“아주 심플하군. 역시 대성 이노베이션을 인수하라는 건가?”
복잡하게 생각할 것은 없었다. 행운의 과자의 메시지는 단순했다. 나는 김영석 사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최 사장님, 무슨 일이십니까? 설마 벌써 결정을 하신 겁니까?”
“예, 뭐, 복잡할 거 있나요. 장태식 회장에게 돈을 빌려 주는 걸로 하죠.”
“11조를 말입니까?”
“예, 대신, 대성 이노베이션의 주식 40%를 우리가 인수하는 겁니다. 그 정도면 경영권을 확보할 수 있겠죠?”
“뭐, 그럴 겁니다. 다른 대주주들은 없으니까요.”
“그러면 오지은 변호사와 잘 이야기를 해서 일을 마무리 하도록 하세요. 대성 이노베이션을 인수하는 거 말입니다.”
“역시, 대성 이노베이션이 미래가 밝다고 보시는 건가요?”
“예, 느낌이 좋아요.”
“느낌요?”
“큰 사업을 하는데는 운이나 감이 중요하죠.”
“하긴, 그렇기는 하죠. 직감 같은 거 말씀이시죠?”
“그렇다고 해두죠. 아무튼, 복잡한 실무적인 절차는 김영석 사장님하고 오지은 변호사가 맡아서 처리하세요. 나중에 문제가 생기지 않도록 비밀유지도 잘 하시고요.”
“알겠습니다. 그건 걱정하지 마십쇼. 깔끔하게 마무리하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