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텍필립
“와, 그래도 박스오피스 2위네요.”
“1등을 해야죠, 2등은 아무도 기억하지 못하는 법이죠.”
드림엔터테인먼트의 첫 번째 투자영화인 산토리니의 사랑은, 그럭저럭 괜찮는 성적으로 순항을 하고 있었다.
헐리우드 블록버스터에 밀려 2위를 기록하고는 있었지만, 비슷한 시기에 개봉한 한국 영화들 중에서는 가장 좋은 성적이었다.
“어쨌든, 민소희의 연기 데뷔는 성공적이네요.”
“윤아영 전무님은 그렇게 생각하나요?”
“그럼요, 연기경력이 전혀 없는 민소희가 연기력 논란 없이 이 정도 성적을 낸 거면 나쁘지 않죠.”
하긴, 채은성 감독은 모르겠지만, 김우혁도 그렇고 민소희도 이번 영화에 만족하는 모양이었다. 그리고 내 입장에서도 이번 영화 제작 때문에 유럽에도 가보고, 샤또 루이 14세의 주인이 될 기회도 있었고 말이다. 물론 내돈내산이기는 했다.
아무튼, 역시 자본주의의 본산이라고 할 수 있는 유럽에 가보니, 뭔가 클라스가 한 단계 올라간 느낌이랄까?
한국에 비해서 부자들도 많고, 고급 소비재도 많은 시장이어서 나처럼 돈 많은 사람들이 쇼핑을 하기에는 유럽이 확실히 좋은 것 같았다.
그리고 이번에 샤또 루이 14세를 구입하면서 다니엘 페오라는 부동산 회사와 연결이 된 것도 나에게는 좋은 기회가 되고 있었다. 프랑스의 최고급 부동산을 취급하는 다니엘 페오는 자신들의 고객들에게 유럽의 고급 명품 회사들을 소개해 주는 역할도 하고 있었다.
형식적으로는 돈 많은 고객에게 명품 브랜드 회사를 소개시켜주는 것이지만, 뭐, 실제로는 그 반대로 고객 정보를 다른 고급 소비재 회사들에 제공한다고 할 수도 있었고 말이다.
아무튼, 다니엘 페오의 제니퍼 팍에게서 조심스럽게 이메일이 도착했다.
***
“파텍필립이라고요?”
“예, 윤아영 전무도 알아요?”
“그럼요, 세계에서 가장 비싼 시계 아닌가요?”
“그렇다고 하더군요.”
시계라? 군대에 있을 때, 손목시계를 차고 다니기는 했는데, 전역한 후로는 별로 쓸 일이 없었다. 휴대폰을 들고 다니다가 시간을 알고 싶으면 휴대폰을 보면 되니까 말이다. 주위에서도 시계를 차고 다니는 사람들이 많지는 않았다.
사실 한때 사람들이 많이 애용하던 손목시계는 전반적으로 수요가 많이 줄었다고는 한다. 그래도 명품 시장에서는 여전히 여자는 백, 남자는 시계라는 공식이 있다는 것이다.
여자의 자존심이 명품 백이라면, 남자들의 자존심은 명품 시계라고 할 수 있었다.
“파텍필립의 초대를 받았다는 말씀이세요?”
“정확하게는 파넥필립은 아니고, 그 뭐라더라? 루이비통 회사 이름이 뭐죠?”
“모엣 헤네시 루이 비통요, 약자로는 LVMH 라고도 하죠.”
“어떻게 그렇게 잘 알아요?”
윤아영은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여자들은 그런 쪽으로 관심이 많잖아요. 그럼, 루이비통에서 초대를 받으신 거예요?”
“예, 루이비통 코리아에서 초미니 패션쇼를 한다고 하더라고요.”
뭐, 내가 패션쇼에 딱히 관심이 있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초미니 패션쇼라니? 내가 초미니스커트 취향이라는 걸 알았나? 상상이 되었다. 초미니스커트를 입고 런어웨이를 누비는 늘씬한 각선미들의 향연 말이다.
“정말요?”
“예, 다니엘 페오의 VVIP 고객이라서 나에게도 초대장을 보냈다는데, 다니엘 페오의 제니퍼 팍 말로는, 파덱필립도 이번에 콜라보로 자기들의 시계를 선보인다고 하니까, 관심이 있으면 참석해 보라고 하더군요.”
“세상에 루이비통의 비밀스러운 패션쇼라는 거죠?”
“아마도요...초미니..흠...뭐, 아무튼 초대를 받았으니 난 좀 가볼 생각인데. 같이 갈래요? 초대장에 보니까. 한 명을 동행할 수 있다고 하는데.”
***
루이비통 코리아, 스페셜 패션쇼장.
“어머, 저 사람, 서현주 씨 아니에요?”
패션쇼를 하는 곳이라고 해서 흔히 생각하는 런어웨이를 떠올렸는데, 그냥, 고급스러운 의류 매장 같은 분위기였다.
하지만 이곳에 초대를 받은 셀럽들의 면면은 대단했다. 서현주라면 현재 활동하는 여배우들 중에서 최고 인기스타라고 할 수 있었다. 한국에서도 인기가 좋고 특히 중국에서 큰 인기가 있어서, 중국계라는 소문이 돌기도 했던 당대의 탑스타라고 할 수 있었다.
최근에는 영화나 드라마보다는 CF에 더 많이 출현한다는 이야기도 듣고 있지만, 광고 모델로서 가치가 있다는 건 그만큼 인기와 이미지 관리가 잘 되었다는 말이기도 했다.
그 외에 서울 시내의 유명 호텔을 운영하는 여사장을 비롯해서 재벌가의 여자들이 많이 참석한 모양이었다.
제니퍼 팍의 설명으로는 오늘 패션쇼의 초대장은 모두 합쳐 10장이 보내졌고. 초대장 한 장당, 1명의 지인을 동행할 수 있다고 하니, 최대 20명이 올 수 있는 규모가 작은 스페셜한 패션쇼라는 것이었다.
“규모는 아담하네요. 그런데 무슨 초미니스커트 패션쇼를 한다는 거지?”
“초미니스커트요? 설마, 사장님, 초미니 패션쇼라는 걸, 초미니스커트 패션쇼라고 생각하신 거예요?”
어라? 아닌가? 그런 의미 아니었어? 그냥 규모가 작다는 의미였나? 젠장, 그럼 괜히 온 거잖아.
“하하, 농담입니다. 초미니스커트 패션쇼라? 말장난이 좀 과했군요. 그나저나, 사람이 많이 오지는 않았네요.”
이론상으로는 20명까지 입장 가능한 행사였지만, 실제로 패션쇼를 위해 루이비통 매장에 찾아온 손님들은 12명 정도였다.
더러는 초대를 받았지만 불참한 사람도 있다고 하고 말이다.
“대성그룹 장태식 회장님에게도 초대장을 보냈는데 바쁘셔서 못 오셨죠.”
루이비통 코리아의 최선주 부사장은 이번 행사를 주관하고 있다고 했다. 패션 명품 회사의 부사장이라서 그런지 젊은 시절에는 유명한 모델이었다는데, 지금도 패션모델로 나서도 손색이 없을 만큼 늘씬한 체형이었다.
“최진수라고 합니다. 다니엘 페오를 통해서 초대장을 받았죠.”
“예, 루이비통 코리아의 최선주입니다. 최진수 사장님 이야기라면 많이 들었죠.”
“그래요?”
“다니엘 페오도 그렇고 모엣 헤네시 루이 비통도 프랑스 회사다 보니까, 서로 연계가 되어 있는 편이거든요.”
최선주 부사장 말로는 최상류층을 상대로 하는 럭셔리 마케팅이라는 개념으로 다니엘 페오나 루이비통, 부가티 같은 프랑스 회사들은 서로 협력을 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한 마디로 수준이 같은 친구들끼리 어울린다는 건가요?”
“비슷한 이야기죠. 거기에 이번에는 파텍필립이라는 새로운 친구도 같이 했고요.”
“아, 그 최고급 시계 말이군요. 나중에 한 번 구경하기로 하죠.”
윤아영이 아무래도 연예계에서 오래 생활했기 때문에 안면이 있는지 패션쇼장 한쪽에 앉아 있던 서현주를 알아보고 아는 체를 했다.
“안녕하세요.”
“윤아영 씨? 여긴 어쩐 일이에요?”
나도 TV에서 몇 번 본 적이 있는 서현주였다. 타고난 미모는 역시 대단한 듯, 하지만 왠지 도도해 보이는 인상이라 나에게는 그다지 매력적으로 보이지는 않았다. 키도 늘씬하고 얼굴은 갸름해서 그냥 봐도 미인 스타일이기는 하고, 거기에 세련된 느낌도 있었지만 뭔가 차가운 표정이 그다지 마음에 들지는 않았다.
그래도 CF 촬영을 할 때는 잘 웃는 것 같았는데, 평소 모습은 그와 달리 상당히 차도녀 느낌이었다.
“저도 초대를 받았어요.”
“아영 씨가요?”
“예, 물론, 직접 초대장을 받은 건 아니고, 우리 사장님이 초대장을 받아서 저도 따라왔죠.”
“최진수라고 합니다. TV에서 자주 보던 분이라 익숙하네요.”
“최진수 사장님이라? 그 크림색 부가티를 타고 다니신다는 분 맞죠? 부가티 에르메스요?”
부가티 시론 에르메스가 맞는 이름이겠지만, 서현주도 여자라서 그런지, 에르메스를 더 쉽게 기억하는 모양이었다.
“예, 맞습니다.”
“상당한 부자라는 이야기는 들었어요.”
윤아영이 아는 체를 했을 때는 좀 차갑고 도도해 보였는데, 나를 보며 살짝 미소를 지어주는 서현주의 얼굴은 상당히 귀여운 모습이었다.
뭐지? 차가운 얼굴인 것 같지만, 살짝만 웃어도 금세 느낌이 달라지네, 역시 탑스타는 아무나 하는 게 아니군.
하긴, CF에 많이 나오는 서현주의 얼굴은 항상 밝고 상큼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평소에는 쉽게 웃는 것 같지는 않지만.
어쨌든, 대충 주위를 둘러보고 나니, 본격적으로 패션쇼가 시작되었다. 루이비통의 신상품들이 나오기 시작했는데, 나는 여자들 가방에 관심이 없어서 그런지 약간 지루한 느낌이었다. 그리고 윤아영 말대로 초미니 패션쇼는 초미니스커트와는 아무 상관이 없는 모양이었다.
모델들이 멋지기는 하지만 나의 눈을 사로잡는 파격적인 패션 같은 것도 없고 말이다. 괜히 온 건가? 하는 생각을 하고 있을 때쯤, 무대가 정리가 되고 이번에는 유리 케이스들이 매장 안으로 천천히 들어오기 시작했다.
“루이비통 코리아의 이번 패션쇼에 콜라보를 해주신 파텍필립 관계자 여러분에게 감사를 드립니다. 세계 최고의 명품 시계 파텍필립을 이 자리에 소개할 수 있어서 너무 기쁜 마음입니다.”
이번에는 시계군. 시계라면 역시 스위스 시계가 유명하기는 한 모양이다. 하지만 세계에서 가장 비싼 최고급 시계 브랜드라는데 고급스러워 보이기는 하지만 뭐가 특별한 것인지는 그냥 봐서는 알 수가 없었다.
최선주는 유리 케이스에 담긴 시계들을 하나하나 초대를 받은 셀럽들에게 설명하기 시작했다.
“보시는 이 제품은 올해 새롭게 출시된 제품들이고요. 물론, 파텍필립은 예약제라 구매는 예약을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점은 미리 양해를 드리겠습니다.”
“그럼 이 자리에서 바로 구매할 수 있는 제품은 없는 건가요?”
왠지 슬슬 패션쇼도 지루해지고 있었다. 윤아영은 루이비통의 신상 백들을 구경하느라 정신이 없는 것 같았지만 말이다. 그래서 시계라도 하나 살까 했는데, 시계는 또 예약을 해야한다니 슬슬 짜증이 나고 있었다.
최선화 부사장은 내 얼굴을 슬쩍 바라보고는 미소를 지었다.
“신상품은 예약이 필요하지만, 기존의 출신 제품들 중에 구매가 가능한 제품들도 있습니다. 하지만 가격이 너무 어마무시한 녀석이라 실제 구매하시는 분이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오늘의 가장 특별한 시계를 소개시켜 드릴까요?”
최선화가 손짓을 하자 패션쇼를 하던 매장 안쪽으로 유리 케이스 하나가 천천히 들어왔다.
“어머, 저거 파텍필립 그랜드 마스터 차임이잖아. 맞죠?”
“그런 것 같은데, 맞다. 양쪽으로 투 페이스 워치잖아.”
뭔가 대단한 시계라는 느낌으로 시계 하나가 들어오고 있었다. 몇몇은 그 시계를 알아보고 감탄사를 내뱉고 있었다.
“뭐지? 저거 대단한 시계예요?”
윤아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저게 파텍필립 그랜드 마스터 차임이라는 것 같아요.”
“그게 뭔데요?”
“세계에서 가장 비싼, 파텍필립에서 가장 비싼 시계요.”
“세계에서 가장 비싼 게 파텍필립인데 그중에서도 가장 비싼 시계라는 건가요?”
가장 비싼 최고급 시계의 끝판왕이라는 건가? 그래 봐야. 부가티 시론 에르메스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겠지? 부가티 가격이 70억인데 말이야.
최선화는 사람들이 그랜드 마스터 차임을 알아보는 것에 흐뭇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여기 계시는 분들은 역시 이 시계를 알아보시네요. 예, 맞습니다. 바로 파텍필립의 시계 기술의 결정체, 아니 시계 예술의 정수라고 할 수 있는 파텍필립 그랜드 마스터 차임입니다. 비교를 하자면 세계 최고의 다이아몬드 컬리넌급이라고 할 수 있는 시계 예술로 정점을 찍은, 명품이라는 단어로도 설명이 안 되는 그 파텍필립 그랜드 마스터 차임이 한국에 이렇게 도착을 해서 아주 특별한 셀럽 여러분들에만 지금 눈앞에서 공개가 되고 있습니다.”
뭔가 설명이 상당히 장황한 느낌이다. 그렇게 대단한 시계인가?
“이 시계는 개발에만 7년, 그리고 제작에만 2년의 시간이 걸렸고요. 안에는 정교하게 제작된 1570개의 부품이 사용되었습니다. 2019년에 자선 경매를 위해 단 한 개만 제작된 익스클루시브 모델로, 한쪽은 로즈골드, 다른 쪽은 블랙에보니 두 가지 타입으로 착용이 가능한 투 페이스 와치입니다.”
“가격은 얼마인가요?”
“최진수 사장님께서 이 시계에 관심이 있으신 것 같네요.”
장내에 잠시 웃음소리가 퍼졌다. 그리고 사람들이 약간은 호기심 어린 눈으로 나를 쳐다보는 것 같았다.
“이 파텍필립 그랜드 마스터 차임은 최초 장선 경매에서 364억에 낙찰되었던 경력이 있고요. 이번에 여러 사정으로 인해 다시 파텍필립을 통해서 재판매가 이뤄지게 되었습니다. 파텍필립에서 재판매 가격으로 정한 판매 가격은 지난 경매가보다 약간 높은 370억입니다.”
순간 사람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한국에서 내노라는 재벌가의 사람들이 모인 자리였다. 하지만 그들에게도 370억짜리 시계라는 것은 충격적인 모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