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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호조선 (124/200)

한호조선

“예, 한호조선이라고 알고 계십니까?”

“한호조선요?”

어디서 얼핏 들어본 것도 같았다. 한호그룹이라면 과거에 꽤 대재벌 기업으로 이름을 떨치던 회사였는데, 경영이 악화되면서 계열사들이 하나둘씩 무너지고 지금은 거의 재계에서 사라진 비운의 재벌기업이라고 할 수 있었다.

“한호그룹이라면 거의 사라진 회사 아닌가요?”

“그렇죠. 주력 계열사들은 모두 다른 기업들에게 인수합병이 되었죠. 한호조선도 산업은행이 지분의 57%를 가지고 있습니다. 경영이 부실해지자, 채권자인 산업은행이 억지로 기업을 유지하고 있는 상황이죠.”

“그래요? 경영이 그 정도로 안 좋은가 보죠?”

“한호그룹 자체도 거의 해체된 상태기도 하고, 우리나라 조선업이라는 게 사실은 모두 채산성이 좋지가 않습니다.”

“신성조선도 말입니까?”

김동혁 사장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자동차 사업을 맡고 있는 김동혁 사장이었지만 신성그룹 총수의 외아들로 사실상의 후계자, 신성의 실질적인 넘버 투였기 때문에 자동차는 물론이고 그룹 계열사들에 대해서도 많은 정보와 영향력을 가지고 있는 김동혁의 말이었기 때문에 충분히 신빙성이 있는 이야기들이었다.

“조선업이라는 게 사양세인 것은 맞습니다. 다만, 신성그룹은 해운과 철강, 석유화학 같은 다른 계열사들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조선 자체로는 수익이 안 나도 기업들의 수직계열화를 통해서 그룹 전체는 이익을 볼 수 있는 구조라 조선업을 유지하고 있는 거죠.”

“그 자체로는 수익성이 낮지만 다른 계열사들과 연계된 사업을 위해서 반드시 필요하다는 말이겠군요?”

“그렇습니다. 그래서 신성조선도 경영이 좋지 않지만 추가로 한호조선을 인수할 계획도 세웠었죠.”

“그런데 잘 안 된 건가요?”

“예, 인수자금이 2조 2천억 정도가 필요한데, 자금 마련이 쉽지가 않아서 결국은 포기했죠.”

2조 2천억이라? 그렇게 큰 돈은 아니잖아? 지금 내 계좌에 현금이 16조 정도 있으니까, 2조 정도를 투자해서 조선소를 인수하는 것은 그렇게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2조 2천억이면 한호조선을 인수 가능한 건가요?”

“하하, 뭐, 산업은행 지분을 그 가격에 인수하기로 했었으니까요. 산업은행에서도 적자를 보고 있는 한호 조선을 처분하고 싶어하는 것 같더군요. 아무래도 다른 계열사와 연계된 것이 아니라면 조선업은 만성 적자를 내기 쉬운 산업이기는 하거든요.”

“신성은 확실하게 포기하신 모양이군요?”

“그렇습니다. 자금 문제도 있고 괜히 덩치를 키울 때는 아닌 것 같아서요. 그럼, 최진수 사장님이 한호조선을 인수해보시면 어떻습니까?”

***

거제도, 한호조선 본사.

내가 한호조선을 인수하겠다는 의사를 전달하자 현재 대주주인 산업은행에서는 크게 반기는 분위기였다.

경영 위기에 빠진 한호조선을 지원해 준다는 차원에서 인수를 했던 산업은행이었지만 지난 수십 년 동안 적자가 누적되면 산업은행에도 큰 부담이 되고 있는 사업이었던 것이다.

그렇다고 대형 조선소를 폐쇄할 수도 없어서 이래저래 골치를 썩히고 있던 회사를 인수하겠다는 인물이 나오자, 산업은행 측에서는 적극적으로 매각 의사를 보인 것이다.

내가 인수를 위해 거제도의 한호조선을 방문하겠다고 하자, 한호조선에서는 사장인 최기형 사장이 직접 마중을 나왔다.

“이게, 배를 만드는 도크인가요?”

“예, 대형 도크라 유조선이나 LNG선의 생산도 가능한 시설입니다.”

“그렇군요. 사실 저는 150미터 내외의 개인용 요트를 건조할 생각입니다.”

“그 이야기는 저도 들었습니다.”

“가능할까요?”

나의 질문에 최기형 사장은 잠시 머뭇거리는 것 같았다. 50대 후반의 최기형 사장은 조선업계에서 잔뼈가 굵은 인물이었지만 초호와 요트는 그에게도 생소한 분야라고 했다.

“솔직히 말하자면 그동안 만들던 대형 운송선들과는 차원이 다른 작업이라서 말입니다.”

“그렇기는 하겠군요. 유조선 같은 것들은 거대한 탱크라고 할 수 있으니까, 기본적으로 안쪽이 텅 빈 공간인데 그에 비해서 고급 요트라는 건 탱크가 아니라 고급 호텔을 배 안에 채워 넣는 작업이라고 할 수 있죠.”

“적당한 비유군요. 아무튼, 선박의 골격을 만드는 건 가능하겠지만 내부 설계나 인테리어 작업은 쉽지 않을 것 같습니다.”

“그거라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배의 내부 작업은 이탈리아의 베네티가 지원을 할 테니까요. 우리는 배의 골격 위주로 생산을 하면 될 겁니다. 그 이후에 내부 인테리어 문제는 베네티와 함께 차근차근 풀어나가면 되지 않겠습니까?”

“그렇기는 하겠군요.”

최기형 사장은 약간은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다.

“표정이 안 좋으시군요. 제가 한호조선을 인수하는 게 마음에 안 드시는 겁니까?”

“하하, 저희 입장에서야 마음에 들고 안 들고가 있겠습니까. 적자를 면치 못하고 있는 조선소인데요. 인수자가 나타나서 다들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래요?”

“예, 다만, 기존의 생산하던 배들과는 전혀 다른 배를 만드는 일이기도 하고, 과연 이런 초호화 요트 사업이 성공할지 확신이 없어서 다들 불안해하는 것도 사실입니다.”

“내가 사업에 실패해서 회사가 파산할까 봐 말이군요?”

“최근에 조선 경기가 좋지 않으니까요. 특히 저희처럼 모기업이 사라진 후에 독립적으로 운영되는 조선소들은 경기에도 민감하고 수익성이 악화되어 있죠.”

“그건 저도 들었습니다. 이번에 내가 인수한 후에 잘못되면 조선소가 문을 닫을 수도 있으니까 걱정하고 불안해하는 건 알겠습니다. 하지만 걱정하실 건 없습니다. 저는 아직까지 사업에서 실패해본 적이 없으니까요.”

“아, 뭐, 그러시겠죠.”

최기형 사장을 안심시키려고 한 말이기는 한데, 아직 20대 중반이 내가 사업에 실패한 적이 없다는 식으로 말하는 것이 최기형 사장에게는 그다지 인상적으로 들리지는 않은 것 같았다.

“아무튼, 걱정 마세요. 이미 수주를 받았으니까요.”

“수주를요? 벌써 말입니까? 듣기로는 대당 가격이 1조 원이 넘는 초호화 요트를 생산하실 거라고 하던데, 벌써 그런 주문이 들어왔다는 겁니까?”

“하하, 그럴 리가 없지 않습니까? 아직, 회사의 인수 절차도 끝나지 않았는데 말입니다.”

“그럼, 수주를 받았다는 건?”

“이제 제가 한호조선소를 인수하면, 1호 요트는 제가 직접 주문할 생각입니다. 내가 쓸 요트를 만들 거라는 말이죠.”

“예, 최진수 사장님이 요트를 주문하시겠다는 겁니까?”

“제가 해야지 않겠습니까? 아직 요트 생산 경험도 전무한 조선소에 1조짜리 거액을 들여서 초대형 요트를 주문할 사람은 없겠죠? 그래서 일단 제가 1조짜리 요트를 주문해서 생산을 하는 거죠. 한호조선 입장에서는 일반적인 고객과 다를 바는 없을 겁니다. 저는 개인 자격으로 한호조선소에 요트 제작을 의뢰하는 거니까요.”

“역시, 엄청난 자산가라고 하시더니 진짜인가 보군요?”

“하하, 뭐, 아무튼, 인수가 확정되면 바로 제가 주문한 요트를 생산하면 될 테니까. 일감 걱정은 당분간 없을 겁니다. 그리고 1호 생산 요트가 완성되면 그때는 다른 세계의 부자들도 우리에게 관심을 갖게 되겠죠.”

물론, 나의 뇌피셜일 뿐이었지만 일단, 그렇게 일을 진행하기로 했다. 조선소를 2조 2천억에 산업은행으로부터 인수해서, 이곳 거제 조선소에서 1조짜리 초호화 초대형 요트를 건조해보는 것이다.

첫 번째 고객은 아까 말한 것처럼 내가 되는 것이다. 뭐, 요트를 너무 많이 사는 것 같기는 했지만, 사업을 위해서도 내가 첫 번째 요트 주문을 하기로 한 것이다.

다행히 산업은행과의 협상은 무난하게 진행되었다. 그쪽에서는 지긋지긋하게 적자를 보고 있던 회사를 처분하는 것을 환영하고 있었고, 나 역시도 나름의 사업구상을 위해 조선소를 인수하는 것에 만족을 하고 있었다.

산업은행이 보유한 지분 57%를 인수하는 비용은 모두 2조 2천억, 그리고 한호조선에서 1호 요트 주문을 위해서 추가로 1조의 비용이 더 필요해서 모두 합쳐 3조 2천억의 자금이 투입되는 사업이었다.

***

강남 사거리, 제이제이타워, 드림엔터테인먼트 본사.

내가 이카로스이노베이션에 이어 한호조선까지 인수한다는 소식이 퍼지자, 덩달아서 드림엔터테인먼트와 이카로스항공 같은 다른 기업들의 주식들도 상승하고 있었다.

“특이한 일이네요. 보통은 한호조선같은 부실기업을 인수하면 인수한 기업들은 주가가 떨어지는 게 보통인데요.”

“나야, 좀 특이한 케이스죠.”

뉴스 기사를 보고 있던 윤아영은 약간 특이한 일이라는 듯이 말하고 있었다. 윤아영의 말대로 부실기업이 인수되는 경우에는 인수자에 불리한 평가가 더해지는 것이 보통인데, 이번에는 주식시장에 오히려 내가 대주주로 있는 기업들의 주가가 상승하고 있었다.

정확한 이유는 모르겠지만, 그동안 내가 이카로스이노베이션을 인수하고 여수 해양 리조트 사업에도 투자를 결정하고 거기에 이번에 베네티와 손잡고 한호조선까지 인수해 연이어 규모가 큰 투자를 하는 모습에 막대한 자금력을 가진 나의 투자능력에 큰 기대를 걸고 있는 것일 것이라는 예상을 해보는 정도였다.

물론, 정확한 이유는 나도 정확히는 모르겠다 하지만 주식 투자자들 사이에 나에 대한 기대감이 있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런 투자자들의 예감은 적절하다고 할 수 있었다. 내가 막대한 자산과 투자금을 가진 거물급 투자자인 것은 틀림없었으니까 말이다.

윤아영과 그런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문이 갑자기 열리며 민소희가 안으로 들어왔다.

“어머, 소희 씨, 사장실에 들어올 때는 노크 정도는 해야 하는 거 아니에요?”

“노크요? 언제부터 노크를 했다고 그러세요.”

“전에야 회사 규모가 작았으니까, 뭐 대충대충 사장님한테 오빠라고 부르고 다들 친하게 지냈지만 이제는 우리도 좀 전과 달라졌다고요. 최진수 사장님만 해도 이제 동네구멍가게 사장님이 아니라 대기업의 경영하는 분이고, 이제 조선업에도 진출하실 거라는 말이에요.”

윤아영의 핀잔에 민소희는 약간 뾰로통한 표정이었다.

“뭐, 그건 알겠는데 사장님, 너무 하시는 거 아니에요?”

“예, 뭐가요? 소희 씨, 뭐 섭섭한 거 있어요?”

“당연하죠. 다른 사업에 바쁘신 건 뉴스 기사로 많이 봐서 아는데, 요즘에 너무 저에게 신경을 안 써주시는 거 아닌가요?”

민소희는 귀여운 빨간색 미니스커트 차림이었다. 보통사람이라면 빨간색 미니스커트는 좀 부담스러울 수도 있을 텐데, 연예인이고 그 중에서도 특히 통통 튀는 민소희에게는 잘 어울리고 자연스러운 모습이었다.

그리고 운동으로 다져진 미끈한 각선미까지, 음, 역시 민소희 말대로 내가 그동안 너무 민소희에게 신경을 쓰지 않았던 거였군...

“하하, 그럴 리가요? 소희 씨처럼 눈에 확 띄는 사람을 누가 신경을 안 쓸 수 있겠어요? 안 그래요? 아영 씨.”

윤아영을 힐끔 쳐다보니 뭔가 못마땅한 표정으로 민소희를 바라보고 있었다. 두 여자들, 둘 다 우열을 가리기 어려운 미녀들이었다.

윤아영은 나보다 연상에 세련되고 농염한 강남 미녀스타일이고, 민소희는 나보다 연하에 통통 튀는 귀엽고 개성이 강한 매력이 있었다.

그렇기는 한데, 둘 다 개성이 강한 편이라 그런가? 그러고 보니 최근에 두 사람 사이가 냉랭한 것 같기도 했다.

윤아영이 은근히 민소희의 일에 무심한 것 같기도 하고 말이다. 설마, 나를 사이에 두고 둘이 질투를?

하긴, 내가 그다지 미남은 아니지만 돈은 많으니까. 자본주의 시대 돈이 최고인 시대고 돈이 최고의 권력인 시대다. 남자들은 권력과 돈을 장악하고 그 후에 아름다운 미녀를 찾지만, 여자들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부자와 권력자들을 쫓는 법이니까.

요즘 한국에서 가장 핫한 부자로 떠오르고 있고 나를 두 명의 미녀들이 은근히 탐을 내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행복회로가 나의 대뇌에 즐거운 망상을 불러일으키고 있었다.

“윤아영 전무님, 그러고 보니 민소희 씨의 다음 작품도 슬슬 준비해야 하지 않겠어요? 음반이든 드라마든 말입니다.”

“그러니까요, 제 말이 그거예요. 저 드라마 주인공 하고 싶어요.”

“어머, 민소희 씨, 드라마 주인공이 하고 싶다고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게 아니잖아요.”

“왜요? 지난번처럼 사장님이 직접 드라마 제작하시면 되잖아요? 돈도 많으신 것 같은데, 제발요, 사장님...”

뭐야? 억지를 부리는 민소희의 모습 왠지 너무 귀엽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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