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층
종로, 센트럴 타워, 이카로스그룹 회장실.
“드라마 제작은 잘되고 있는 건가요?”
드림엔터테인먼트의 사옥 이전도 마무리가 되고 드림엔터테인먼트는 센트럴타워의 5층부터 7층까지 3개 층을 사용하게 되었다.
그 외에 지하에 안무 연습실과 녹음실도 따로 준비를 했고 말이다. 예전에 쓰던 제이제이타워도 연습생들을 위한 공간으로 계속해서 드림엔터테인먼트에서 사용하기로 하기로 해서 드림엔터테인먼트의 실제적인 사용공간은 크게 늘어난 셈이었다.
“예, 그렇지 않아도 민소희도 자꾸 드라마 이야기만 해서요. 방송국과 제작 일정을 의논해 보고 있는데 일단 드라마의 스케일을 좀 정해야 할 것 같아요.”
“스케일이라? 드라마의 제작비 말인가요?”
“제작비도 그렇고 전체적으로 어떤 드라마를 어떤 규모로 제작할지 말이에요.”
드라마 제작은 나로서도 아는 바가 없었다. 하지만 영화제작 경험은 있었으니까, 일단은 시나라오가 필요할 것 같았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드라마도 역시 기본은 스토리라고 할 수 있으니까 말이다. 스토리라는 기초 작업이 부실하면 돈을 아무리 많이 들여도 제대로 된 작품이 나오기 어려울 것이라는 게 내 생각이었다.
“일단, 시나리오가 있어야 하지 않나요? 드라마가 건물이라면 가장 기초가 시나리오니까.”
윤아영은 나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예, 그렇지 않아도, 시나리오를 몇 개 가져오기는 했는데 일단 제가 검토는 해봤습니다.”
윤아영은 시나리오와 간략한 요약본을 준비해서 나에게 내밀었다.
“이걸 다 읽어보라는 건가요?”
“예, 분량이 꽤 많아서 일단 요약본을 만들어 놓았습니다.”
뭐, 내가 읽어봐도 시나리오를 판단할 능력은 없었다.
“일단, 읽어보고 나중에 결과를 말해드리죠. 오늘은 이 정도로 합시다.”
윤아영을 돌려보낸 후 나는 회장실에서 오전의 서울 시내를 내려다보았다. 새로 인테리어 공사를 마친 회장실은 사무실 공간만 100평 이상으로 사무실 내부에 화장실과 욕실 그리고 침실과 서재까지 갖추고 있었다.
어지간한 서울 시내의 대형아파트보다 더 넓은 크기라서 혼자 쓰기에는 너무 크다는 느낌도 있었지만, 꼭 내가 쓰기 위해서 이렇게 실내를 넓고 화려하게 꾸민 것은 아니었다.
이곳은 이제 나와 사업을 하는 많은 사람들이 방문하게 될 곳이고, 나를 만나러 온 사람에게 무의식적으로 나라는 사람의 이미지를 어필할 수 있는 공간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래서 기왕이면 나를 더 크고 강렬한 이미지로 만들기 위해서 화려한 공간을 만들어 낸 것이다. 마치 고대의 왕들이 피라미드 같은 거대한 건축물을 만든 것처럼 말이다.
나는 단순히 사람들이 부러워할 수준의 것이 아니라 상대를 압도할 수 있는 그런 것들을 갖고 싶었다.
사마천이던가? 사람들은 작은 부자는 부러워하고 시기하지만, 큰 부자는 두려워하고 복종한다는 말을 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었다.
수천 년 전의 중국에서 나온 이야기지만 현대에도 별다른 것은 없었다.
현대에도 주변의 돈 많은 사람들에게 대해서는 질투를 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재벌 수준의 부자들에 대해서는 다들 은근히 부러움을 넘어 두려움 같은 것을 느끼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두려움이야말로 재벌들이 한국을 지배하는 진정한 힘이라고 할 수 있었다.
대부분의 서민들은 상대가 재벌이나 재벌가의 사람들이라고 한다면 뭔가 경쟁을 해보기도 전에 이길 수 없다고 생각하고 경쟁을 회피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물론, 재벌들이 거대한 힘을 가진 것도 있지만 그렇다고 해도 재벌들은 자신들이 가진 힘에 비해서 아주 쉽게 한국 사회를 지배하고 있었고, 그 진정한 힘은 개인들이 가진 두려움이라고 할 수 있었다.
부자나 권력자를 두려워하는 인간의 심리는 사마천이 살던 시대와 별반 다를 바가 없는 것이다. 물론 나는 그런 사람들의 두려움이 편리할 뿐이다. 나는 한국의 다른 재벌들과도 또 차원이 다른 압도적인 재벌이라고 할 수 있었다.
내가 가진 돈의 힘, 그리고 아마 사람들이 상상력이 만들어낸 내가 가진 막대한 권력 같은 것들이 내가 하려는 일들을 더 쉽게 만들어 주는 것이다.
방송국을 상대하는 것도 그런 두려움을 잘 이용하면 어려울 것이 없었다. 사람들은 상대가 눈군지 잘 모르면서도 막연하게 그가 가진 재력에 비례해 엄청난 힘을 가지고 있다고 착각을 하고는 하기 때문이다.
“일단, 방송국 쪽에 드라마 제작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봐야겠군.”
윤아영에게 전권을 주고 드라마 제작을 진행하라고 하고 있었지만, 예상 외로 진행이 더디다는 느낌이었다. 아무래도 주로 아이돌 가수를 키우고 음반을 제작하던 윤아영이라 아직 드라마 제작을 위한 인맥이나 경험은 부족한 것 같았다.
뭐, 드라마 제작에 대해서 잘 모르기는 나도 마찬가지였지만, 나에게는 윤아영이 갖고 있지 못한 것이 있었다. 바로 돈과 거기에서 나오는 권위였다.
알고보면 실체라는 것이 없기는 하지만 이미 어느 정도 재벌기업의 외형을 갖추고 있는 것이다. 사실 외형과 내실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이렇게 외형이 먼저 만들어지는 것이 이상한 것은 아니다.
자연을 예로 들면 호두 같은 견과류는 일단 껍데기가 만들어진 후에 내용물들이 채워지게 마련이다. 소대장님도 철학적 관점에서 본다면 외형이 먼저고 그 안에 내용물은 나중에 오는 것이라고 했다.
말하자면 어떤 단어가 먼저 탄생하고 그 단어의 의미가 생겼을 거라는 주장이었는데, 군대에서 소대장님에게 그런 이야기를 들었을 때는 헛소리라고 생각했지만,
지금 내 상황에서는 그런 이야기도 어느 정도 맞아떨어지는 부분이 있었다.
나는 야마시타 골드를 매각한 자금으로 재벌기업들을 사들이고 있었고, 그렇게 어느 정도 완성된 기업들로 이카로스그룹을 만들어 가고 있었던 것이다.
말하자면 나는 일단 재벌그룹의 외형을 열심히 만들고 있었던 것이다. 사람들은 껍데기만 보고 안에 뭔가 있을 거라고 상상을 하게 될 것이다.
이렇게 밖은 보이지만 안은 볼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껍데기 안쪽의 내부는 오로지 상상의 영역이고, 사실은 이런 상상력이야 말로 인간이 세상을 바라보는 유일한 방식인 것이다.
보이는 외형과 그 이면을 바라보는 상상력의 결합은 어쨌든 불완전한 것은 사실이다.
인간의 인식이란 구조적으로 한계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같은 사람이라도 경비원의 옷을 입고 아파트의 주차장에서 주차 안내를 하고 있는 것과 멋진 차를 타고 주차장 앞에서 내리는 것은 엄청난 차이가 발생하는 것이다.
어쨌든, 지금의 나는 편의점 알바 때와 별반 달라진 것은 없었지만, 내가 가진 외형은 엄청난 차이가 생겨 있었다.
나는 이제 막대한 자산가이고 한국에서 열 손가락 안에 드는 시가총액 50조 원 대의 이카로스이노베이션의 최대주주로 경영권을 장악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번에 새로 산 1조 5천억짜리 오피스빌딩, 센트럴타워의 주인이 된 것이다.
그리고 26층을 통쨰로 나의 공간으로 사용하고 있었다.
이런 외형만 보면 거대 재벌기업의 회장과 다를 바가 없었고, 어차피 사람들이 보는 것은 껍데기일 뿐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나는 재벌 회장 그 자체라고 할 수 있었다.
장태식 회장 같은 사람들도 나와 다를 건 없다는 생각이었다. 단지 예전에는 엄청난 재벌이라는 그가 가진 껍데기에 내가 압도되었을 뿐이었다.
그리고 이제는 다른 사람들이 나의 그런 껍데기에 압도되기를 바라고 있었다. 사람들이 나의 재벌 이미지에 압도되면 될수록 내가 하려는 일들은 수월하게 이루어질 테니 말이다.
“김지현 씨, 들어와요.”
김지현은 이번에 새로 뽑은 비서들 중에 한 명이었다.
이카로스그룹을 창설하고 사옥도 인수해서 계열사들을 입주시키고 있었고, 슬슬 재벌기업의 외형을 갖추어 가고 있었기 때문에 재벌 회장답게 비서실도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고 일단 비서 몇 명을 뽑아서 비서실을 운영하기 시작한 것이다.
내가 아이일 때는 아이처럼 행동하더니, 어른이 되자 어른처럼 행동하게 되었다는 예수님의 말씀처럼 고등학생에서 대학생, 군인, 복학생, 편의점 알바 그리고 재벌 회장까지 나는 그때 그때 상황에 따라서 나의 외형에 따라 행동을 바꾸어 나갔던 것이다.
그리고 재벌 회장인 지금이 가장 마음에 드는 것 같았다.
“회장님, 부르셨습니까?”
“어, KBC에 연락을 좀 해봐요.”
“KBC 방송국에 말씀이십니까?”
김지현은 대학 시절에 미인대회에 출전해서 입상을 한 경력이 있는 미모의 재원이었다. 학교도 유명한 사립 여대 출신으로 미모와 지성을 겸비했다고 할 수 있었다.
나름, 비서 정도를 하기에는 아까운 인재였지만, 본인은 대기업 비서실에 만족을 하는 것 같았다.
사실, 비서실의 연봉이나 처우는 다른 대기업 수준과 비교해도 상당한 수준이었다. 신생 그룹이라 비서실 같이 보이는 부분에 좀 신경을 많이 써야겠다고 생각해서,
다른 대기업 비서실보다 좋은 조건으로 채용을 했기 때문이었다.
물론, 아직 비서실에서 하는 일은 거의 없다고 할 수 있었다. 이카로스그룹도 이제 막 시작 단계로 계열사들이 각자 독립적으로 운영되는 것이 많아서 그룹 회장 차원에서 그다지 일거리가 많은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껍데기니까 말이다. 일단, 멋진 몸매에 화려한 스펙을 가진 아름다운 여비서들로 비서실을 채워 놓기 시작했다.
외부에서 26층의 회장실을 방문하게 되면 가장 먼저 보게 되는 것이 비서실과 나의 여비서들일 테니까 말이다.
상상이 되었다.
나를 만나러 26층의 엘리베이터에서 내리면 단아한 듯 섹시한 여비서들이 비서실에서 대기하고 있다가 손님들을 안내하는 것이다.
다들, 모델급의 늘씬한 키에 탤런트 뺨치는 외모들 그리고 학벌들도 다들 굉장한 세련된 미녀군단들이 비서진으로 포진하고 있는 것이다.
대기업 회장과 여비서, 이런 은밀한 상상도 하면서 나를 찾아온 손님들은 회장실로 안내된다.
그리고 멋진 모델들의 캣워킹을 따라가면 엄청난 규모의 호화로운 회장실로 들어가게 되는 것이다. 모든 것이 완벽한 공간이다.
백 평 이상의 실내 공간은 고급스러운 가구들과 그림들로 채워져 있다. 그림들?
그러고 보니, 사무실에 뭔가 부족해 보이는 것이 있었다. 돈 많은 부자들이 필수품인 예술품 말이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도 그렇고 르네상스나 아니면 그 이후의 유명한 화가들이나 음악가들은 모두 귀족들의 후원을 받으며 예술 창작을 했었다.
원래 예술이라는 것이 돈이 되는 것은 아니다, 어떤 실용성도 없고 단지 미학적인 가지만이 있는 것이니까 말이다.
그리고 냉정하게 말하자면 그 아름다움이라는 것도 그림을 예로 들자면 지극히 부자연스러운 눈속임에 불과하다, 정교한 그림은 마치 실재하는 뭔가가 눈앞에 있는 착각 내지는 상상을 불러일으키지만 본질적으로 외형을 모사한 껍데기인 것이다.
하지만 인간이라는 것은 항상 껍데기를 통해 내부를 상상하게 마련이다. 그리고 인간의 인지의 한계로 인해 내부라는 것은 언제나 완벽하게 들여다 볼 수 없는 것이다.
상상력은 단지 어리석음이 아니라 인간이 세상을 창조하는 방식인 것이다.
아무튼, 그런 소대장님의 개똥철학이 중요한 것은 아니었다. 중요한 것은 이 멋진 나의 사무실을 더 완벽하게 채워줄 미술품들이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방문자들에게 간단하게 소개해 주게 되면 그 누구라도 감탄하게 될만한 유명한 화가의 값비싼 그림을 말이다.
“저, 회장님...”
“아, 김 비서, 아까 어디까지 이야기했죠?”
“KBC 사장님에게 연락을 해보라고...”
“맞아요. 새로 드라마를 제작할 생각인데, 방송 스케줄 문제도 있고, 내가 직접 KBC 사장을 좀 만나고 싶다고 그쪽에 연락을 해봐요.”
“알겠습니다. 한 번 일정을 조율해보겠습니다.”
되돌아가는 김지현의 뒷모습을 슬쩍 보다가 다시 비어 있는 벽면을 바라보았다.
그러고 보니까, 그림을 걸 자리들이 많이 있네. 그런데 어떤 그림을 채워 넣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