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자들의 거래
“빌 살만 왕세자는 조만간 왕위 계승을 앞두고 있죠. 물론, 왕위 계승 서열 1순위라는 점에서는 변화가 없지만, 진짜 왕이 될지는 왕위에 오르기 전까지는 알 수 가 없는 겁니다.”
“중대한 일을 앞두고 몸을 사린다는 건가요?”
“그렇다고 할 수 있습니다. 아무래도 빈 살만 왕세자의 약점이라면 그의 사치스러운 생활이고 그런 방탕한 소비를 보여주는 좋은 증거물들이 샤또 루이 14세나 플라잉 폭스 같은 것들이죠. 그리고 살바토르 문디, 같은 미술품들도 그다지 실용적인 것들은 아니니까요.”
듣고 보면 이해가 가는 부분이었다. 돈이 워낙 많은 중동의 왕실의 장자라면 한국의 재벌과 비슷하다고 할 수 있었다.
물려받은 재산으로 부자가 되었다는 점에서 말이다. 소위 말하는 금수저, 아니 다이아수저쯤 되는 사람인데, 문제라면 그가 아버지에게서 물려받게 될 사우디 왕실의 재산이 사실상 국가의 재산과 다를 바가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가 주로 유럽에서 머물면서 대적택과 고급 자동차, 전용 비행기, 화려한 파티를 즐기는 것에 사우디 국내에서는 불만들이 많은 것 같았다.
물론, 빈 살만의 권력이 강하기 때문에 그런 불만들이 외부로 표출되고 있지는 않지만 아무튼, 빈 살만 왕세자도 왕위 계승을 앞두고 그런 외부의 시선을 신경 쓴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동안 모아두었던 값비싼 수집품들을 처분하려고 하려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런 그에게도 한 가지 조건이 있었던 것이다.
“조건이라고요?”
“예, 사실, 크리스티 경매에서 최고가를 기록하며 살바토르 문디를 구매했을 때까지만 해도 빈 살만 왕세자님은 대중들의 시선을 즐기는 입장이었다고 할 수 있죠. 그렇지 않았다면 공개적인 경매를 통해서 그런 고가의 미술품을 구매하는 일을 하지는 않았을 겁니다.”
“하긴, 그렇겠네요. 크리스티 경매 사상 최고가를 기록한 그림이고,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미발견 걸작이 세상이 나왔다는 것만으로도 엄청난 세계적인 이슈가 되었을 테고, 당연히 그 그림을 경매로 낙찰받은 주인공에게도 관심이 쏠렸을 테니까요.”
“맞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아까도 말씀드렸다시피 빈 살만 왕세자님은 이미지 변신을 시도하고 있으니까요.”
“이미지 변신이라고요?”
“예, 방탕한 중동의 왕자, 그리고 독재자라는 이미지 이런 것들을 부담스러워하는 거죠. 나라의 돈을 마구 쓰고 있다는 것도 없애고 싶은 이미지죠.”
“그럼, 그 조건이라는 게 뭔가요?”
“예전의 크리스티 경매와는 달리 이번에는 아주 조용하게 살바토르 문디를 처분하고 싶어하십니다. 언론에도 노출되지 않고 조용하게 말입니다. 그래서 경매나 그런 공개적인 방식이 아니라, 개인 간의 거래를 원하시는 거죠.”
조용하게 살바토르 문디를 거래하고 싶다? 역시 그렇다면 나 같은 돈 많은 부자들을 찾고 있다는 말이겠군. 고가의, 역사상 최고가의 미술품을 살 수 있는 부자 말이다.
음, 그런데 아무리 그래도 그림 한 장의 가치가 5천억의 가치가 있는 걸까?
“그러면 빈 살만 왕세자가 원하는 가격은 얼마입니까?”
“지난번 경매의 최종 낙찰가 수준이면 되지 않을까요? 그 정도면 나쁘지 않은 가격이라고 할 수 있죠. 아시는지 모르겠지만 미술품들의 가격은 계속 상승 중입니다. 마치 금의 가격이 계속 상승하는 것처럼요.”
“그래요? 금과 미술품이 공통점이 있나요?”
“둘 다, 양이 한정되어 있고 그에 비해서 세계 경제라는 건 계속 성장하고 있으니까요.”
“그렇겠군요. 그러면 지난 경매의 가격대로 구매한다고 해도 손해볼 건 없다는 말이군요.”
“다음에 이 작품이 경매에 나온다면 이전 경매 가격이 경신될 건 분명하니까요.”
그렇다면 이것도 비싸기는 하지만 장기적인 관점에서 보자면 손해 보는 장사는 아닌 셈이었다. 쉽게 팔리기는 어렵겠지만, 어쨌든 지금보다 더 고가로 판매될 수 있다는 말이니까 말이다.
“좋습니다. 하지만 5천억이나 하는 그림을 이렇게 전화 통화만 하고 살 수는 없는 거고, 실물을 한 번 보고 싶은데요.”
“음, 실물을요?”
“물건도 보지 않고 그런 거액을 지불할 수는 없는 거 아닙니까?”
“그럼, 사우디로 직접 가보셔야 할 것 같은데요.”
“사우디? 사우디아라비아 말인가요?”
***
사우디아라비아, 제다, 빈 살만 왕세자의 집무실.
“왕궁에 사실 줄 알았는데 따로 사무실을 가지고 계시군요.”
빈 살만 왕세자는 올해 37살의 비교적 젊은 나이였다. 물론 나보다는 한참 연상이었지만, 중동 사람 특유의 인상이 실제보다 더 나이가 들어보기는 느낌이었다.
“왕궁에는 아버님이 계시니까요. 저는 왕궁에서 가까운 곳에 사무실에서 집무를 봅니다.”
빈 살만, 빈은 아들이라는 의미로 아버지는 사우디의 살만 국왕이다. 어쨌든 사우디의 사실상의 실권을 쥐고 있는 인물로 그의 자산은 대략 1천조가 넘는다는 이야기가 있다.
하지만 그의 자산이라는 것의 대부분은 사우디 왕실의 재산으로 개인의 재산과는 차이가 있다고 할 수 있었다.
어떤 의미에서 한국의 재벌들과도 비슷하다고 할 수 있었다.
장태식 회장의 대성그룹 같은 경우에도 어마무시한 글로벌 대기업이기는 하지만 실제 그룹 경영은 순환투자 방식을 통해서 지주 회사의 지분을 가진 장태식 회장 일가의 지배력이 강한 것처럼 말이다.
실제 장태식 회장이 소유한 자산의 규모는 30조 내외 정도지만 순환출자 구조를 이용해서 시가총액 5백조가 넘는 대성전자 같은 계열사들을 지배하고 있었다.
그리고 둘 다, 막대한 자산을 가지고 있었지만 돈을 쓰는 것에 어느 정도 제약이 있는 것도 비슷한 것 같았다.
“그런데 듣기로는 재산이 엄청나시다고 들었는데 말입니다. 한화로 1천조쯤 된다고 하던데, 그림을 파셔야 하는 이유가 있나요?”
“하하, 재산이 많은 건 사실이지만 최진수 회장님처럼 순수하게 개인이 소유한 자산과는 차이가 있죠. 개인적인 재산이라기보다는 왕실의 재산이고 그 왕실 재산을 상속받기 위해서는 왕세자 지위가 필요하니까요.”
“왕세자시라면 조만간 국왕에도 취임하시겠군요?”
“하하, 아버님이 아직 건강하시니까요. 하지만 아버님이 조기 퇴임을 하시고 제가 왕이 될 수도 있겠죠.”
“그래서 여론에도 신경이 많이 쓰이시겠군요?”
빈 살만 왕세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남들은 나를 엄청난 행운아라고 부르는 사람도 많지만, 사실은 저도 스트레스가 많습니다.”
“사람들의 시선 같은 거 말입니까?”
“그렇습니다. 특히 내가 가진 재산과 지위에 대해서 시기하고 질투하는 사람들이 많죠.”
“선대의 재산과 권력을 물려받게 되는 상속자의 운명 같은 거 아닌가요?”
“그럴 수도 있겠네요. 아무튼, 나의 정적들이 제법 있죠. 그리고 그들은 틈만 나면 나를 공격하려고 합니다. 안 좋은 루머도 퍼뜨리고요.”
“루머라면?”
“내가 사우디 왕실의 돈으로 사치스럽고 방탕한 생활을 한다는 거죠. 그래서 내가 왕이 될 자격이 없다는 식으로 말입니다.”
음, 그건 사실 아닌가? 빈 살만이 가진 자산은 그의 말대로 사우디 왕실의 것이고 그것을 왕세자 개인이 호화 요트와 대저택 그리고 각종 사치스러운 명품들을 소비하는 데 쓰고 있었으니 말이다.
“하하, 왕세자님 입장에서는 억울할만도 하겠군요. 그래서 미술품을 내놓으신 건가요?”
“어쩔 수 없는 일이죠. 가난한 대중들은 자기들보다 조금만 더 운이 좋은 사람들을 보면 참지 못 하거든요.”
“그렇기는 하겠네요. 서민들이 부자들을 증오하는 건 어디에서나 일반적인 일이죠.”
“그래서 말입니다. 저도 이제는 왕위 계승 문제를 생각해야 할 때가 오기도 했고요. 어쨌든, 소나기는 피하라는 말도 있죠.”
“하하, 사우디아라비아에도 소나기가 오나요?”
“영국 속담입니다. 학교를 영국에서 다녔거든요. 아무튼,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 이제는 정치적인 문제도 있고 예전처럼 돈을 마음대로 쓰는 것도 어렵고, 내가 사고 싶은 것을 마음대로 살 수도 없다는 거죠.”
“원래 왕족들은 자유롭게 살지 못 하는 법이죠.”
“하하, 아무튼 최진수 회장님에 대해서라면 많이 들었습니다.”
“저에 대해서 말인가요?”
빈 살만은 싱긋 미소를 지어 보였다. 빈 살만의 집무실에서는 아버지인 살만 왕이 집무를 보고 있는 사우디 왕궁이 한눈에 들어오고 있었다.
거리상으로도 가깝고 언제든지 왕궁으로 들어갈 수 있는 준비가 되어 있는 것 같았다. 왕세자라는 것이 원래 왕의 유고시에 바로 권력을 승계할 사람이기도 하니까, 이렇게 가까이에서 대기하는 것 같았다.
“예, 샤또 루이 14세 저택의 전주인이 저라는 것은 알고 계시죠?”
“플라잉 폭스도 빈 살만 왕세자님의 것이었다고 하더군요. 뭐, 일부러 빈 살만 왕세자님의 요트와 저택을 사들인 건 아닙니다. 최고 수준의 물건들을 찾다보니까, 자연스럽게 그렇게 된 거죠.”
“그렇겠죠. 세계 최고급의 저택이나 요트들은 그 숫자가 많지는 않으니까요. 결국 최고 수준의 부자들끼리 거래가 이루어지는 거겠죠. 아무튼, 최진수 회장님이라면 아시아 지역의 떠오르는 신흥 부호라고 알고 있습니다. 최근에 한국에서 기업들과 빌딩들을 마구 사들이고 있다는 이야기도 들었고요.”
“마구 사들이는 건 아니지만, 투자를 많이 하고 있기는 합니다. 그래서 레오나르도 다 빈치 걸작, 살바토르 문디를 제가 구매하기를 바라신다는 거군요?”
빈 살만 왕세자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꼭 최진수 회장님이라야 하는 건 아니지만 적당한 사람을 찾기가 어렵기도 하고요. 아무튼, 살바토르 문디는 너무 유명한 그림이라 내가 소유했다는 것 자체로 사우디아라비아에서는 공격의 대상이 되고 있습니다.”
“종교적인 문제도 좀 있겠죠? 이슬람교와 기독교는 교리가 다를 테니까요.”
“종교 문제는 이야기하고 싶지 않군요. 그건 너무 예민한 문제니까 말입니다. 그리고 이 그림이 유명한 건, 누구를 그렸느냐가 아니라, 누가 그렸느냐 하는 이유 때문이겠죠.”
그건 빈 살만의 말이 맞는 것 같았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그림이기 때문에 5천억이라는 천문학적인 가치가 있는 그림일 테니까 말이다.
“아무튼, 실물을 좀 보고 싶군요. 5천억짜리 물건을 사면서 실물을 보지 못하고 거래를 할 수는 없는 거 아닙니까?”
“물론이죠. 무스타파, 그림을 가져와.”
빈 살만은 비서에게 명령을 내렸다. 이슬람 국가라서 그런지 미모의 여비서 같은 것은 없었다. 대신 젊은 남자가 비서 역할을 하고 있었다.
무스타파라고 불린 빈 살만의 비서는 베일이 덮인 카트를 밀고 사무실로 다시 들어왔다. 그리고 베일을 걷어내자 방탄유리 안에 들어가 있는 한 폭의 그림이 나타났다.
저게? 예수님의 얼굴인가? 어딘지 내가 상상하던 그런 예수님의 얼굴과는 좀 차이가 있었다. 어딘지? 그래, 모나리자와 어딘지 닮아 있는 그런 느낌적인 느낌이 드는 그런 그림이었다.
뭐, 아무튼, 그게 중요한 것은 아니었다.
“이게 살바토르 문디군요.”
“예, 르네상스의 천재 화가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걸작이죠.”
“그런 것 같군요. 그럼 이걸 얼마에 거래하기를 원하시는 겁니까?”
“내가 크리스티 경매에서 지불한 금액 정도면 만족합니다. 한국 돈으로 5천억이죠.”
빈 살만은 싱긋 미소를 지으며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마치 나에게 그런 거액을 지불할 수 있겠냐는 듯한 그런 표정이었다.
“뭐, 얼마 안 하는군요.”
“예? 하하, 통이 크신 건가요? 아무리 돈이 많다고 해도 5천억이라는 금액은 엄청난 돈이죠.”
“그렇기는 하겠죠. 평범한 부자들이라면 말입니다. 한화로 5천억은 어마무시한 금액이죠. 하지만 저에게는 그다지 큰 느낌은 없는 금액입니다. 그 정도 돈을 지불하고 시대를 초월한 천재 화가의 걸작을 살 수 있다면 저로서는 횡재를 한 기분이군요.”
“하하, 재밌는 분이군요. 그럼, 거래를 하면 되겠군요.”
“좋습니다. 5천억을 지불하겠습니다. 그리고 살바토르 문디는 제가 한국으로 모셔가도록 하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