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제작
종로, 센트럴 타워, 이카로스그룹 회장실.
“어머, 진짜 이게 5천억짜리 그림이라는 거예요?”
윤아영은 26층의 내 사무실 벽에 걸어놓은 살바토르 문디를 신기한 듯이 바라보았다.
“그러게 말이에요. 뭐, 내가 지금까지 이런저런 비싼 명품들을 사들이기는 했지만 이렇게 작으면서 가격이 비싼 녀석은 처음이네요.”
“그런데 이게 유명한 그림이라고 설명해주지 않으면 솔직히 그렇게 대단한 그림인 것인지는 잘 모르겠어요.”
나도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세계적인 명화라는 것도 사실 미술사적인 가치가 있는 것들이니까 실제로 일반인들이 그림을 단순히 눈으로 보고 그 아름다움을 이해하기는 어려운 점이 있었다.
윤아영과 그림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문이 열리며 김지현이 비서가 들어왔다.
“사장님, KBC 박영수 사장님이 한 번 뵙고 싶다는데요.”
“KBC 사장이?”
KBC의 사장과 면담을 하고 싶다는 이야기는 전에 김지현에게 부탁을 해놓은 상태였다. 살바토르 문디를 구매하기 위해 사우디아라비아에 다녀온 사시에 KBC에서 연락이 온 모양이었다.
“예, 드라마 제작 일정에 관해서 직접 만나서 이야기하고 싶다고 하시네요.”
“언제쯤 만나겠다는 건가요?”
“그쪽에서는 내일이라도 가능하다고 합니다.”
“좋아요. 내일 스케줄을 잡아봐요.”
“알겠습니다. 회장님.”
옆에서 듣고 있던 윤아영이 KBC 사장이라는 말에 호기심을 보였다.
“회장님, 정말 박영수 사장을 만날 생각이세요?”
“전에 말했잖아요. 드라마를 만들겠다고 민소희도 주연으로 출연시켜야 하고 아무튼, 드림엔터테인먼트도 이제 한 단계 더 도약하려면 한류드라마 하나 정도는 만들어야 하지 않겠어요.”
“그건, 저에게 전권을 주시기로 하셨잖아요?”
“그건 그런데 일의 진척이 없어서요. 아무래도 내가 직접 KBC의 사장을 만나보고 드라마 제작에 대해서 협상을 해야겠어요.”
윤아영은 처음에는 약간 못마땅한 표정이었지만 이내 수긍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은 저도 드라마 제작은 경험이 없어서 생각처럼 일이 진행이 안 되기는 했어요. 회장님이 나서서 일을 성사시켜주시면 저는 고마운 일이죠.”
일단, 내일 KBC를 방문해서 박영수 사장을 직접 만나기로 약속을 잡았다. 그리고 박영수 사장을 만나기 전에 시나리오 정도는 정해봐야 할 것 같았다.
윤아영이 사무실에서 돌아가자 나는 윤아영이 요약해 주었던 시나리오들을 대충 읽어보았다. 뭐, 다들 그렇고 그런 트렌디 드라마 스타일의 시나리오였다.
주로 돈 많고 완벽한 남자와 신데렐라 스타일의 평범한 여자가 만나서 알콩달콩 사랑을 하다가 결혼에 골인하는 그런 내용이었다.
현실성은 제로라고 할 수 있었지만 여자들의 판타지를 채워주는 그런 드라마가 현재 한국 드라마의 주류하고 할 수 있었다.
드라마를 주로 보는 시청층이 여자들이 많다 보니 어쩔 수 없는 일이기도 했다.
뭐, 내용이 다들 재미없는 것 같은데. 하긴 이런 드라마를 내가 볼 건 아니니까, 나는 어디까지나 드라마를 제작하는 입장이었다.
그래도 여러 개의 시나리오 중에서 하나를 고르기는 해야 하니까 행운의 과자를 먹어서 시나리오를 선택하기로 했다.
시나리오들을 책상 위에 펼쳐놓고 번호를 매겼다.
그리고 행운의 과자를 하나 꺼내 입안으로 천천히 밀어넣었다. 과자는 언제나처럼 오늘도 신선하고 새로운 맛이었다. 뭔가 꽃향기가 나는 것 같기도 하고, 여름이 다가와서 그런지 뜨거운 해변의 열기가 느껴지기도 하는 것 같았다.
그렇게 과자를 씹고 나자 입안에서 이물감이 느껴졌다. 그리고 나온 번호는 7이었다.
음, 역시 럭키 세븐인가? 7이라면 왠지 마음에 드는 숫자였다. 행운을 상징하는 숫자니까 말이다.
나는 7번이 매겨진 시나리오를 다시 한 번 살펴보았다.
시나리오는 돈 많은 변호사, 변호사지만 사실은 재벌 3세다. 그러니까 재벌 3세 변호사와 고졸 출신의 인기 없는 경리 직원이 열렬한 사랑에 빠지는 이야기였다. 그리고 당대 최고의 여배우가 이 둘의 사이를 갈라놓는 악녀 역할로 나오는 그런 이야기였다.
음, 역시나 전형적인 신데렐라 스토리군. 이런 이야기는 언제나 인가가 있는 법이지.
***
KBC 사장실.
“한국에서 가장 큰 민영 방송국이라더니, 방송국 규모가 상당하네요.”
“하하, 뭐, 민간 방송국으로는 규모가 좀 큰 편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최진수 회장님처럼 대기업에 비하면 작은 기업이죠.”
박영수 사장은 50대 중반의 약간 머리숱이 적은 남자였다. 원래는 기자 출신이라는데 보도국을 거쳐서 방송사 사장에까지 오른 입지전적인 인물이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죠. 드라마를 제작하고 싶습니다.”
“드림엔터테인먼트에서 말인가요?”
“예, 저희가 투자금을 투자해서 제작을 할 생각입니다.”
“시나리오도 이미 결정을 했고, 주연 여배우도 우리 회사 소속의 민소희가 출연할 예정입니다.”
“하하, 이미, 다 결정이 되어 있군요?”
“드라마를 처음 만들기는 하지만 자본은 충분하니까요.”
“음, 최진수 회장님이라면 대단한 분이라는 이야기는 많이 들었습니다. 최근에는 살바토르 문디를 구입하셨다는데 사실인가요?”
“예, 아니 그걸 어떻게?”
“하하, 뭐, 기자 출신이기도 하고 방송국은 아무래도 정보가 빠른 곳이죠. 빈 살만 왕세자에게서 그 그림을 구입하셨다고 들었습니다.”
“뭐, 숨길 건 없죠. 박 사장님이 알고 계시는 그대로입니다.”
“역시, 그렇군요. 살바토르 문디는 세계 미술품 경매 사상 최고의 낙찰가를 기록한 그림이라고 알고 있는데...”
“가격이 궁금하신 모양이군요.”
사람들이 가장 궁금해하는 것이라면 아마 가격일 것이다. 자본주의 시대는 모든 것에 가격이 매겨지는 시대다. 가격이 매겨진다는 것은 그 금액을 지불하기만 한다면 언제든지 거래가 가능하다는 의미이고 이것은 굉장히 편리하고 효율적인 방식이라고 할 수 있었다.
박영수 사장은 어색하게 미소를 지었다.
“솔직히 최진수 회장님의 재력에 대해서 많이 흥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최근에 종로에 센트럴 타워를 인수하신 것도 인수 금액이 1조 5천억이라고 들었는데요.”
“예, 센트럴 타워를 인수한 가격이 1조 5천억, 살바토르 문디의 가격은 5천억입니다. 두 개를 합쳐서 모두 2조를 쓴 거죠.”
박영수 사장은 약간 놀랍다는 표정이 되었다.
“2조라? 어지간한 재벌기업도 그 정도 자금력을 동원하기가 쉽지 않은데요.”
“하하, 뭐, 저는 어지간한 재벌은 아닌가 보죠.”
“사실, 방송국 사장 자리에 올라와 있으면 사방에서 정보가 들어오죠. 기자들의 정보 내지는 첩보 수준의 정보들도 모두 들을 수 있는 자리니까요.”
“그런가요?”
“그런데, 최진수 회장님에 대한 정보는 좀 의문이 많습니다. 정확하게 어떤 경위로 그런 막대한 자산을 운용할 수 있는지 정확한 정보가 없으니까요.”
“하하, 뭐, 그게 중요한 일인가요? 돈의 출처야 어찌 되었든 돈은 자본주의 시대에 세상을 움직이는 원동력이죠. 그리고 제가 여기에 온 것은 내 신변에 관한 이야기를 하려고 찾아온 건 아닙니다.”
“하하, 죄송합니다. 제가 좀 무례했나요?”
“예절을 따지자는 게 아니라 사업을 진행하려는 것뿐입니다. 제가 지금 하려는 건 드라마 제작입니다.”
“그 얘기는 들었습니다. 마침 저희 KBC에서도 올해 말쯤에 드라마 편성이 비어 있기도 하고요. 연말쯤에 방영할 드라마라면 저희로서도 좋은 기회가 될 겁니다.”
“그러면 연말에 방영 일정을 잡아도 될까요?”
“그때까지 제작이 가능하다면요.”
“그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박영수 사장은 잠시 뭔가를 생각해보는 것 같았다.
“최진수 회장님의 자금력은 잘 알고 있지만 드라마 제작은 아직 경험이 없지 않습니까?”
“하하, 제가 드라마 제작을 못 할 거라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저는 최근에 대성그룹으로부터 자동차 배터리같은 2차 전지를 생산하는 이카로스이노베이션을 인수했죠. 초대형 요트 사업을 위해서 한호조선도 인수해서 이제는 이카로스조선이 되었고요. 다들 규모 면에서 드라마 하나 제작하는 것과는 비교과 되지 않는 수준의 기업들입니다.”
“음, 그건 그렇겠네요.”
“그리고 며칠 전에 사우디아라비아에서 빈 살만 왕세자에게서 구입한 살바토트 문디만 해도 가격이 5천억이나 되죠. 솔직히 한국에서 대작 드라마라고 해도 제작비가 2백억을 넘는 정도 아닌가요?”
“드라마 제작 정도는 아무 일도 아니라는 거군요.?”
“제가 하는 다른 사업들에 비하면 그렇다는 겁니다. 그게 사실이기도 하고요. 드라마 제작이 처음이든 말든 제가 못 할 정도의 일은 아니라는 거죠.”
박영수 사장은 싱긋 미소를 지어보였다.
“죄송합니다. 최진수 회장님의 말을 듣고 보니 드라마 같은 건 회장님에게는 아주 작은 일일 뿐이겠군요.”
“예, 그러니까,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민소희를 주연배우로 만들어주려고 드라마를 만드는 것뿐이니까요.”
“예? 민소희를 출연시키기 위해서 드라마를 제작한다고요?”
박영수 사장은 약간 어이가없다는 표정을 지었지만, 그것은 아주 잠시였고, 표정을 바꿔서 얼굴에 미소를 지어 보였다.
“민소희는 우리 회사를 대표하는 스타기도 하고요. 아무튼 민소희에게 주연 배역을 준다고 약속을 했으니까요.”
박영수 사장은 잠시 뭔가를 계산해 보는 것 같았다.
“사실, 최근에 드라마 제작이 쉽지가 않습니다. 드라마 제작 단가는 계속 상승하고 시청률은 유투브나 넷플릭스 같은 다른 매체들에게 많이 잠식당하고 있죠. 종편이나 케이블 같은 경우에는 재방송도 자유롭고 중간광고도 가능하지만 그게 안 되는 지상파 방송국에서는 드라마보다는 가성비가 좋은 예능을 만든는 게 더 수익이 좋죠.”
“돈 문제는 걱정하지 마시죠. 제작비용은 드림엔테테인먼트에서 책임지겠습니다. KBC는 방영 스케줄만 책임져 주시면 됩니다.”
“정말이신가요? 그렇게만 된다면 저희로서도 좋은 일이죠.”
***
종로, 센트럴 타워, 26층.
“그래서 드라마 스케줄은 잡으신 거예요?”
“예, 박영수 사장과는 이야기가 잘 됐어요.”
“정말요?”
“뭐, 별거 있나요? 결국은 돈 문제죠. 제작비는 우리가 책임지겠다고 하니까 그쪽에서도 드라마 방영을 약속했어요.”
“수익 배분은요? 판권이나? 그런 문제는요?”
“뭐, 그건 윤아영 사장이 나중에 협상을 하기로 하고요. 일단 드라마 제작이라는 큰 틀에는 합의를 했으니까, 드라마를 본격적으로 제작해 보기로 하죠.”
“그럼, 제작비는?”
“돈 걱정은 할 거 없어요. 이카로스그룹에서 최대한의 지원을 해줄 생각이니까.”
윤아영은 잠시 생각을 해보는 것 같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뭐, 돈만 있으면 사실 다른 건 크게 문제될 건 없죠.”
윤아영의 말대로였다. 자본주의 시대는 돈으로 모든 것을 살 수 있는 시대다. 돈은 자본주의 시대의 마법인 셈이었다.
그리고 나는 에메럴드 캐슬에 살고 있는 오즈의 마법사처럼, 별다른 실력 없이도 이 이상한 오즈라는 나라, 아니 자본주의 시대를 지배하고 있는 셈이었다.
내가 하는 일이라는 건 오즈의 마법사가 그랬던 것처럼 도로시 일행을 나를 대신해서 마녀들에게 보내서 무찌르게 하는 것이었다.
“아영 씨, 아무튼 드라마 제작의 실무적인 문제는 아영 씨가 잘 처리해 주세요.”
“알겠습니다. 회장님.”
민소희도 소식을 들었는지 싱글벙글 미소를 지으며 안으로 들어왔다.
“회장님, 정말 드라마 제작이 결정된 거예요?”
“그래요. 연말쯤에는 방송되야 하니까, 서둘러야 해요.”
“그런데 무슨 내용인데요?”
박영수 사장과 만나서 제작하기로 한 드라마는 행운의 과자로 뽑은 로맨스 드라마였다. 재벌가의 3세이자 천재 변호사가 남자 주인공이고, 민소희는 평범한 외모의 인기 없는 신데렐라형 여주인공 역이었다.
“어머, 제가 인기 없는 역할이라고요?”
“하하, 소희 씨에게는 잘 안 어울릴 것 같지만 연기 공부라고 생각하고 배역에 충실하게 준비를 해봐요. 화장도 좀 수수하고 촌스럽게 하고요.”
“뭐예요? 회장님. 전 여주인공이라서 화려하고 멋진 역할일 줄 알았는데.”
“그건 걱정할 거 없어요. 동화 미운 오리새끼처럼 극의 후반부에서는 진짜 화려하고 아름답워지는 역할이니까.”
“정말이죠?”
“나만 믿어요. 이번 드라마 반드시 대박이 날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