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운의 남자
종로, 센트럴 빌딩 26층.
“드라마 제작을 하려면 연출자가 필요하지 않아요?”
본격적으로 드라마 제작에 들어갈 예정이었다. 이번 드라마의 제목은 가칭, 재벌 변호사였다. 내용은 돈 많은 재벌 3세 출신의 변호사가 주인공인데 천재 변호사로 사건들을 척척 해결하는 일종의 미스터리 추리 형식을 갖추고 있었다.
하지만 그건 스토리를 진행하기 위한 장치일 뿐이고 기본적으로 사람들의 시선을 끄는 요소는 재벌이라는 것과 재벌과 평범한 여자 주인공 간의 로맨스라고 할 수 있었다.
“기왕 만드는 거 유명한 배테랑 연출자를 구해보면 어때요? 그리고 시나리오는 괜찮지만 드라마로 각색할 작가도 필요할 테고요.”
26층의 이카로스그룹 회장실에서는 드라마 제작에 관한 회의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이번 드라마의 제작비로 예상한 금액은 3백억 정도였다.
로맨스 드라마치고는 상당한 금액이기는 했지만, 내가 최근에 구입한 에어버스 슈퍼 푸마 한 대의 가격에 불과했다.
나의 자산 규모에 비하면 드라마의 규모는 아담하다고나 할까? 대작 드라마라고는 해도 나에게는 큰 돈은 아니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나에게 요즘 일거리라면 드라마 제작을 하는 것이 전부였다. 이카로스이노베이션이 신성자동차와 배터리 사업을 추진하고 있었지만 내가 개입해서 할 일은 별로 없었고, 거제도의 조선소에서 건조 중인 배에 대해서도 가끔 구경을 가는 정도였다.
다들 전문적인 경영인들이 일을 하고 있어서 내가 참견할 일도 없었고 그나마도 경영이나 첨단 기술에 대한 지식도 없어서 내가 옆에서 참견한다고 될 일도 아니었던 것이다. 그나마 할만한 일이 드라마 제작이었던 것이다.
윤아영은 드라마를 연출할 PD들을 섭외하고 있었다. 나에게 보여준 명단을 대충 훑어보니 경력들이 화려한 사람들이 많았다.
“다들 베테랑들이군요. 나이들도 대부분 중년 정도고 안정적이기는 하겠지만 이런 사람들로 새로운 도전이 가능하겠습니까?”
“새로운 도전요?”
뭐, 처음부터 대작 드라마를 만들겠다고 시작한 일은 아니었다. 사실대로 말하자면 민소희에게 주연 배역을 주기 위해 가벼운 마음으로 시작한 드라마 제작이었다. 하지만 기왕 만드는 거 제대로 된 드라마를 만들어서 성공을 해보고 싶기도 했다.
야마시타 골드로 손쉽게 재벌이 되고 큰 돈을 벌기는 했지만 아직 본격적으로 사업이라는 것으로 성공을 해본 적은 없었다.
돈을 벌겠다면 사업을 하는 것보다는 야마시타 골드를 차곡차곡 모으는 편이 더 빠르겠지만 어차피 야마시타 골드를 찾아서 번 돈으로 인생을 즐기고 싶었다.
과연 내가 즐기고 싶은 멋진 인생이란 무엇일까?
사람마다 멋지게 산다는 관점이 다르기는 했지만 내가 생각하는 멋진 인생은 성공한 사업가의 이미지였다. 007 제임스 본드처럼 세계를 누비고 다니면서, 물론, 첩보원이 되고 싶다는 것은 아니었다.
사람을 살인하고 싶지도 않았고 말이다. 나에게는 살인면허도 없다.
아무튼, 007 제임스 본드가 인기 있는 것은 악당을 쳐부수는 액션도 있겠지만 매시리즈마다 세계 곳곳을 누비고 다니며 멋진 슈퍼카와 아름답고 섹시한 미녀들 그리고 억만장자나 보물 아니면 첨단 무기 같은 보통 사람들이 접하기 어려운 이국적이고 스케일이 큰 인생 때문이 아니었을까?
대부분의 사람들은 지루한 직장생활이나 아니면 실업자 신세로 구직을 하면서 시간을 보낸다. 운이 좋게 좋은 직장에 다니더라도 매일 같은 사람들과 같은 이야기를 하는 일상이라는 것은 아무리 좋은 동료들이라고 해도 끔찍한 것이다.
그에 비해 제임스 본드는 세계의 아름다운 관광지들을 돌아다니며 화려한 인생을 사는 모습이다. 물론 악당과 싸우면서 고생도 하지만 어차피 다 제임스 본드가 이기는 걸로 끝나니까 상관없는 일이고 말이다.
나 역시도 제임스 본드처럼 화려한 인생 그리고 속도감 있는 그런 스케일이 큰 인생을 꿈꾸었다.
오늘은 서울에서 슈퍼카를 몰고 강남의 화려한 밤거리를 누비고 내일은 전용기를 타고 뉴욕으로 날아간다. 뉴욕에서는 초호와 요트의 카지노에서 세계적인 재벌들과 게임을 하고 밤에는 나의 요트에 초대를 받은 아름답고 이국적인 미녀와...
보통은 그런 상상으로만 끝나는 꿈 같은 인생이지만,
나에게는 야마시타 골드라는 엄청난 행운이 찾아왔다. 그리고 행운의 과자도 있고 말이다. 나는 내가 원하는 인생을 얼마든지 꿈이 아닌 현실로 만들 돈이 있는 것이다.
자본주의 시대에 돈만 있다면 전세계가 나의 놀이터가 되는 것이다.
제임스 본드보다도 더 화려하고 멋진 인생도 얼마든지 가능했다.
“그래요. 새로운 도전 말입니다. 드라마로 돈을 벌겠다는 생각은 없지만 천편일률적인 그런 로맨스 드라마 말고 뭔가 더 화끈하고 스펙타클한 그런 드라마를 만드는 거죠.”
“사장님, 아니 회장님, 이건 그저 로맨스 드라마일 뿐이에요. 재벌 변호사 말이에요. 시청자들은 대부분 여자들이고 여자들은 화끈하고 그런 거 별로 안 좋아한다고요. 여자들은 알콩달콩 그런 걸 좋아하거든요.”
“상관없어요.”
“예? 무슨 말씀이세요.”
“여성 시청자를 포기해도 된다는 말입니다.”
“아니, 그러면 시청률은요?”
“그것도 상관없습니다. 뭐, 망하면 망하는 거죠. 그런 소심한 마음가짐으로 드라마를 만드니까 다 안정적인 전개를 한다고 똑같은 드라마를 찍어내는 거죠. 뭐, 제작비 회수가 가장 큰 목적이라면 어쩔 수는 없겠지만 말이죠.”
“그럼, 회장님은 제작비를 회수하지 못해도 상관없으시다는 말씀이세요?”
윤아영은 약간 놀란 토끼눈을 하며 되물었다.
뭐지? 귀엽잖아?
“흠, 귀...아니..물론이죠. 제작비로 3백억 정도가 들어갈 거라고 하던데 그 정도면 나에게는 푼돈에 불과하다는 거 윤아영 사장님도 잘 알고 있잖아요?”
“그렇기는 하죠. 최진수 회장님의 재력은 대단하시니까요. 그렇다면 어떤 드라마를 만드시겠다는 거예요?”
“제목이나 소재는 그대로 가는 거죠. 하지만 좀 더 남자 주인공의 비율을 더 키우는 겁니다. 남자 주인공이 좀 더 활약을 하도록요. 사건 해결에 중점을 주고 시나리오를 수정해 보세요.”
“그러니까, 이전에 계획은 로맨스를 기반으로 추리와 사건 해결은 양념 정도였는데 그 비중을 더 키우라는 거군요?”
“맞아요. 그리고 제임스 본드를 참고하세요.”
“제임스 본드요? 007 말씀이세요?”
“맞아요. 남자 주인공을 007 제임스 본드처럼 활약을 하게 만드는 겁니다. 전세계를 누비고 다니면서 사건을 해결하고....”
“잠깐..잠깐..그런데 남자 주인공은 첩보원이 아니라 변호사라고요. 국제 변호사도 아닌데 무슨 세계를 누벼요?”
“어차피 재벌이라는 설정이니까. 세계 여기저기에 글로벌한 기업들을 가지고 있다고 가정하면 되죠. 아무튼 제임스 본드처럼 다이내믹한 주인공을 만들어 보는 겁니다.”
윤아영은 나의 말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무리 그래도 제임스 본드는 바람둥이인데 로맨스 드라마에는 어울리지 않지 않나요?”
“상관없어요. 그리고 연출을 맡을 사람은 좀 나이가 젊고 패기가 넘치는 사람으로 뽑아요. 약간 서툴러도 상관없으니까. 알겠죠?”
윤아영은 어색하게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어차피, 회장님이 하시는 일이니까요.”
“그래요. 돈 벌려고 하는 일은 아니니까 기존의 상식을 벗어난 그런 드라마를 만들어 보기로 하죠.”
***
윤아영은 내 지시로 새로운 연출가를 알아보았다. 연출은 기존의 드라마 제작 경험이 있는 PD들은 제외하고 새로운 연출가를 찾아보기로 했다.
“회장님이 새로운 연출가를 찾으라고 하셔서 가능한 사람들을 알아봤습니다.”
윤아영은 연출가 후보들의 리스트를 구해왔다.
리스트 옆에는 간단한 스펙들이 적혀 있었다.
하지만 그런 스펙들이 그렇게 중요하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내가 연출가들에 대해 아는 것도 없고 연출에 대해서는 아는 것은 없으니까 말이다.
내가 별다른 어려움 없이 선택을 하는 방식은 행운의 과자를 이용해 보는 것이었다.
행운의 과자로 간단하게 선택지를 만들어 그것을 뽑으면 된다. 아직까지 행운의 과자가 나를 실망시킨 적은 없으니까 말이다.
그래 잘 되겠지..
나는 윤아영이 가져온 연출가들의 명단에 번호를 매겼다. 처음에는 새로운 연출을 시도하기 위해서 기존의 배테랑들은 제외시키려고 했지만,
행운의 과자로 가장 적합한 연출자를 찾겠다고 생각을 하자 베테랑이라고 해서 배제할 필요도 없을 것 같았다.
그냥 경력에 상관없이 이번 드라마에 연출을 맡을 가능성이 있는 사람들의 명단을 만들고는 거기에 번호를 하나씩 매기기 시작했다.
그리고 천천히 행운의 과자병을 꺼내들었다. 병에서 과자 하나를 꺼내들어 천천히 입에 밀어 넣었다.
과자에서는 매번 새로운 맛이 나고 있었다. 이번에는 제임스 본드 같은 매력적인 남자 주인공이 나오는 드라마를 상상해서인지 어딘지 섹시한 남자의 맛이 나는 것 같았다. 뭔가 쿨하면서도 시크하고 그리고 젠틀한 그런 맛 말이다.
아무튼 기본적으로 과자에서는 달콤한 향취가 나고 있었다. 과자의 풍미가 모두 사라질 때쯤 입안에서 뭔가 이물감이 느껴졌다.
그리고 나온 것은 7번이었다.
역시 007 제임스 본드의 번호인 7번이군. 하긴, 주인공에게는 언제나 행운이 따라야 했다. 그래야 멋진 주인공에 감정 이입을 할 수 있을 테니 말이다.
“7번이라 좋은 징조군.”
7번에 해당하는 연출자는 홍성진이라는 젊은 연출가였다. 스펙을 보니 그다지 경력이 있는 사람은 아닌 것 같았다.
애니메이션을 만들어본 경력이 좀 있었지만 그 외에는 이렇다할 경력은 없는 30대 초반의 젊은 남자 연출가였다. 하지만 경력 같은 것은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행운의 과자가 선택한 사람이라면 내가 가진 선택지 중에서 최고의 선택일 것이 분명했다.
***
홍성진은 30대 초반으로 약간 작은 키에 다부진 인상이었다. 예술가라기보다는 스포츠맨 같은 느낌도 있는 사람이었다.
“처음 뵙겠습니다. 홍성진입니다.”
“최진수라고 합니다.”
홍성진은 회장실로 들어오면서 내 사무실을 둘러보며 약간 놀란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리고 갑자기 멈추어 선 곳은 내 사무실 한쪽 벽면에 걸려있는 살바토르 문디 앞에서였다.
“와, 바로 이게 그 유명한 살바토르 문디이군요.”
“하하, 유명한 그림이기는 하죠. 그 그림에 대해서 아십니까?”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그림으로 최근에 발견된 그림이라는 정도로 알고 있습니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그림이 최근에 발견되었다는 것 때문에 위작 논란도 있었던 걸로 알고 있지만, 정밀한 검사 결과 진품으로 밝혀졌다는 정도죠.”
“그렇다고 하더군요. 제가 보기에는 모나리자와 비슷하게 생겼는데 말입니다.”
“기법이 유사하기는 합니다. 아니면 다 빈치가 같은 모델을 기용했을 수도 있겠죠.”
“음, 그래요? 미술에 관심이 많으신가 보군요?”
홍성진은 살짝 미소를 지어보였다.
“미대 출신이니까 어쩔 수 없는 본능이라고 할 수 있겠네요.”
“미대 출신으로 애니메이션 감독을 하셨더군요. 그런데 드라마는 연출할 수 있겠습니까?”
홍성진은 행운의 과자가 선택한 인물이었고 문제는 없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래도 확인 차원에서 물어보기로 했다.
“드라마는 처음이지만 드라마라고 해서 크게 다를 건 없다고 생각합니다. 애니메니션에도 역할을 맡은 캐릭터들이 존재하는 것이고 드라마에서는 그 캐릭터를 살아 있는 실제 배우들이 연기하는 것뿐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럴듯하군요. 하지만 애니메이션의 캐릭터들은 연출자가 자유자재로 다룰 수 있겠지만 배우들은 좀 다르죠. 실제로 살아 있는 사람들이고 개성과 성격을 가지고 있으니까요. 애니메이션의 캐릭터들처럼 다룰 수는 없을 거라는 겁니다.”
홍성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명심하겠습니다. 드라마 쪽은 경험이 없지만 그래도 저를 믿어주시고 이렇게 불러주신 걸로 알고 있습니다.”
“저는 경력보다는 미래의 가능성을 더 보는 사람이니까요. 그게 바로 제가 투자를 하는 방식이죠. 뭐, 좋습니다. 그래도 홍 감독님이 연출력은 탁월하다고 생각하는데요. 이번 드라마를 같이 해볼 생각 없습니까?”
“기회를 주신다면 최선을 다해 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