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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 익스프레스 (173/200)

아시아 익스프레스

“캐스팅 문제는 어떻게 할까요?”

“하하, 그거야, 감독님의 고유 권한 아니겠습니까?”

시나리오는 너무 문제가 많아서 내가 개입을 했지만, 앞으로 영화를 촬영하고 이끌어 가는 것이라면 아무래도 감독인 채은성이 맡아서 할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배우들은 특히, 감독과의 케미가 안 좋으면 촬영장에서부터 트러블이 생길 수 있기 때문에 웬만하면 감독인 채은성에게 캐스팅에 관해서는 전권을 줄 생각이었다.

내가 캐스팅에는 간섭하지 않겠다는 말을 하자, 굳어 있던 채은성 감독이 표정이 조금 풀어지는 것 같았다. 말은 안 해도 내심 시나리오를 내가 수정한 것에 기분이 나빴던 모양이었다.

하지만 채은성 감독도 이번 영화를 어떻게든 성사시켜야 하는 상황이었다.

“정수현 씨를 주연으로 캐스팅하면 어떨까 하는데요.”

“정수현을요?”

정수현이라면 재벌 변호사의 성공으로 지금 최고의 인기를 누리는 탑스타였고, 이번에 제작하는 영화의 주인공도 젊은 형사 역할이기 때문에 잘 어울릴 것 같은 느낌도 있었다.

다만, 걸리는 거라면 정수현이 재벌 변호사 때문에 고급스러운 부자 이미지가 있다는 것이었다.

“정수현이 인기가 물이 오른 건 사실이지만 이전 드라마에서 재벌가의 상속자 역할로 나왔는데, 이번 영화와는 좀 거리감이 있지 않나요?”

“크게 문제가 되지는 않을 겁니다. 형사라고 해도 엘리트 형사 역할로 하버드 학벌에 초엘리트라는 설정을 추가할 생각입니다.”

“하버드 출신의 엘리트 형사라? 그것도 나쁘지 않겠네요. 그나저나, 제목이라도 있어야 하는 거 아닙니다. 임시로라도 말입니다.”

“저는 아시아 익스프레스가 어떻까 하는데요.”

“아시아 익스프레스요?”

“예, 제가 이번 영화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건 속도감입니다. 블록버스터에 액션 장르고 아무래도 스토리보다는 속도감과 화려한 볼거리로 승부를 걸어볼 생각입니다.”

“하하, 그래요? 왠지 채은성 감독님과는 좀 안 어울리는데요. 채 감독님이라면 치밀하게 구성된 연출력으로 승부를 하는 분 아니셨나요?”

“이번에 스타일을 바꾸어 보려고요. 이제 시대가 바뀌지 않았습니까? 모든 문화 장르에서 단순하고 빠른 전개가 유행하고 있거든요. 영화도 이전에 만들던 속도감으로 제작하면 관객들에게 외면을 당할 거라는 생각입니다.”

“그것도 일리가 있군요. 좋습니다. 정수현을 캐스팅 하는 걸로 하죠. 그 외에 조연급들은 어떻게 할까요?”

이번 영화에는 여주인공은 없다고 해도 좋은 구성이었다. 남자 주인공인 형사가 거의 원톱으로 사건을 진행 빠르게 진행되기 때문에 여주인공과의 로맨스 같은 것도 없고, 각 도시마다 주인공을 도와주는 여성 캐릭터가 하나씩 등장하는 구성이었다.

그래서 여주인공이라기보다는 각 도시마다, 여자 조연이 하나씩 필요했던 것이다.

“회장님도 아시겠지만, 주연급 여성 캐릭터는 없으니까요. 관객들도 유명한 배우들이 나오면 뭔가 기대를 하게 되죠. 그래서 그보다는 역할에 충실할 수 있는 신인급들로 조연들을 캐스팅하려고 하는데요.”

“신인들요?”

신인 배우을 뽑는 것이라면 나름 장단이 있었다. 진수도 그동안 영화와 드라마를 제작하면서 들은 풍월이 좀 있었던 것이다.

신인 배우를 캐스팅하는 경우에는 일단, 비용이 적게 들고 기존의 이미지랄 것이 없기 때문에 연출자의 의도대로 원하는 캐릭터를 만들기가 쉽다. 백지 상태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물론, 그것은 관객을 대상으로 할 때 그렇다는 것이다.

관객의 눈에 낯선 존재이기 때문에 고정관념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로운 캐릭터의 창조가 가능하지만 반대로 생각하면 관객에게 특정한 이미지를 선사하기에는 쉽지 않은 일이 되어 버린다.

배우의 캐릭터라는 것은 그래서 한 두 개의 영화나 드라마로 완성되기가 쉽지 않다.

“신인들을 쓰면 연출하는 쪽에서는 편하다고 하더군요. 비교적 지시에도 잘 따르고요.”

“하하, 그런 건 좀 있죠. 아무래도 베테랑들은 자기 주관이 강하니까요.”

“하지만 영화의 흥행이나 그런 걸 생각하면 배우들은 단순히 연기만 하는 존재는 아닙니다. 그 자체로 영화의 간판이고 홍보 모델도 하는 거니까요.”

“그렇기는 하지만 정수현이 워낙 인기니까, 홍보는 정수현으로도 충분하지 않을까요?”

진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 영화, 가칭, 아시아 익스프레스는 채은성 감독의 말대로 속도가 중요한 영화였다. 빠른 장면 전환과 아시아 각국의 도시들을 누비는 주인공의 스피드한 전개가 특징이자 장점이 될 것이었다.

그런 상황이라, 고정적으로 카메라가 따라다니는 주연 배우에 비해서 도시와 함께 일종의 배경과 간단한 설명, 그리고 주인공의 사건 해결의 단서를 하나씩 던져 주는 여자 캐릭터들의 비중은 작다고 할 수 있었다.

인기스타나 베테랑 연기자를 섭외하면 오히려 문제가 생길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기존의 스타급 연기자들보다는 신인들이 좀 편하겠죠?”

채은성 감독은 고개를 끄덕였다.

“예, 아무래도 조연이나 단역에 급이 되는 연기자를 쓰면 좀 피곤하기는 합니다. 인지도도 있고 연기경력에 자존심도 강한 사람들이라 짧은 연기도 돋보이게 과장하고 그러니까요.”

“그렇겠네요. 개인이 돋보이려고 너무 나서면 전체적으로는 밸런스가 붕괴되겠죠.”

“예, 그런 면에서 사실, 이번에 시나리오 수정 작업은 잘 된 것 같습니다.”

“그래요?”

캐스팅 문제를 이야기하다 보니 의외로 채은성 감독은 속마음을 털어놓기 시작했다.

“제가 감독 데뷔 전부터 시나리오 작업도 하고 나름 이쪽으로는 경력도 있고 실력에도 자신이 있었지만 생소한 액션 장르라 이것저것 에피소드를 추가하고 재밌게 만들겠다고 오버를 많이 했거든요.”

채은성 감독은 액션 블록버스터를 만들어보고 싶은 마음에 시나리오를 평소대로 직접 작성했지만 곧 난관에 부딪쳤다고 했다.

“일단, 장르에 대한 이해가 전혀 없었습니다. 장르라는 것이 한 사람이 만든 것도 아니고 오랜 시간동안 여려 작가들에 의해 조금씩 수정되면서 나름 최선의 방법을 찾은 것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런 과정을 생략하고 저 혼자 머릿속으로 상상한 스토리를 액션이라는 장르에 접목시키려고 하다보니까, 일단 장르 영화의 재미라는 포인트를 잘 모르겠더군요.”

그래서 채은성 감독은 뒤늣게 다른 영화들을 찾아보며 인상적인 에피소드를 참조해서 새로운 에피소드들을 채워 넣었는데, 그게 너무 과했던 모양이었다.

“액션 장르의 클리셰를 따라서 여러 가지 에피소드들을 넣었는데 이번에는 그게 조화가 안 된 거죠. 에피소드들은 어딘지 익숙하고 그럴듯했지만 전체 스토리가 산으로 간 겁니다.”

“하하, 하긴, 영화 시나리오 만드는 게 쉬운 일은 아니겠죠?”

“아무튼, 일정도 촉박하고 마음도 조급해진 상태에서 일단, 시나리오를 드림엔터테인먼트에도 보내고 최진수 회장님에게도 보여드린 건데, 나중에 생각해 보니 너무 완성도가 떨어져서 저도 좀 아차 싶었죠.”

“아무튼, 김성진 작가가 시나리오를 수정한 것이 괜찮다는 말이겠죠?”

“예, 수정된 게 상당히 깔끔하더군요. 저도 원본보다 수정본이 훨씬 마음에 들고요.”

“좋아요. 그렇다면 다행이고, 그러면 조연급 연기자들은 신인들, 적어도 연기 경험이 없는 신인들로 하자는 거죠?”

“예, 그렇습니다. 민소희 씨처럼 아이돌 출신도 괜찮을 것 같고요.”

“아이돌요?”

“예, 어차피, 아시아 익스프레스에서 여성 캐릭터는 짧고 강렬하게 시선을 강탈하는 역할이니까요. 스토리를 이어가고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연기력이 필요한 게 아니라, 관객의 시선을 사로잡고 호기심을 유발하면 충분하다는 겁니다.”

“그래요?”

“영화에선 맥거핀이라고도 하죠.”

“맥거핀요?”

“히치콕이 즐겨 쓰던 방식인데, 뭔가 있을 것 같지만 실제로는 관객의 호기심을 사로잡는 역할이 다인 그런 일종의 떡밥이죠.”

“음, 그러니까, 아이돌 출신들이 나름 인지도도 있고 외모도 화려하니까, 관객들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존재로 내세우자 그런 거죠?”

“그렇습니다. 진짜 무명의 신인 연기자라면 짧은 대사나 한 두 씬 등장하는 걸로는 관객도 제대로 기억하지 못 할 수도 있으니까요. 그럴 바에는 차라리 연기력은 모자라도 얼굴이 알려진 아이돌 출신들이 더 적합할 수 있죠. 회장님 말대로 영화 홍보에도 도움이 될 테고요.”

그거라면 나로서도 반가운 제안이었다. 연예엔터테인먼트 사업을 하면서 아이돌 그룹들도 좀 키워야 하고 장기적으로 보면 기획사 중심으로 영화든 드라마든 제작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가는 것이 더 유리하다고도 할 수 있었다.

당연히, 그런 관점에서 아이돌 그룹에서부터 시작해서 연기자로 영역을 확장하는 것은 필수적이라고 할 수 있었다.

“좋습니다. 그렇게 하죠. 저도 아이돌 가수들을 연기자로 키우는 것에는 전부터 관심이 많았거든요.”

***

스카이 캐슬 타워, 70층, 슈퍼펜트하우스.

이성호 사장에게 부탁한 인테리어 공사가 마무리가 되었다. 진수는 윤아영과 민소희를 슈퍼펜트하우스로 초대를 했다.

“오늘 처음 가시는 거죠?”

“예, 저도 새로 인테리어 작업을 지시하고는 처음입니다. 물론 대충 어떻게 될 거라는 건 보고를 받았지만 실물을 보는 건 이번이 처음이죠.”

원래는 집들이 겸, 윤아영과 민소희를 초대해서 와인이라도 한 잔 할 생각이었는데 초대하지도 않은 민영민까지 따라와 버렸다.

“영민이 너는 바쁘지 않아? 일해야 할 시간 아냐?”

“아닙니다. 낮에는 그다지, 파파라치뉴스에 필요한 사건 사고는 항상 늦은 밤에 많이 일어나니까요.”

민영민은 넉살 좋게 웃으며 대답했다.

하긴, 녀석의 말도 틀리지 않은 게, 연예들의 뒷조사 내지는 재벌가의 동향을 파악하는 데는 낮보다는 밤 시간대에 할 일들이 더 많은 것은 사실이었다.

아무래도 기업가들도 그렇고 낮에는 공적인 영역의 일들을 보다가 퇴근 후에 밤 시간에 데이트를 하든 뭘 해도 할 테니까 말이다.

파파라치뉴스에서는 일종의 찌라시 정보를 나에게 주기적으로 보내오고 있었다. 그것이 내가 파파라치뉴스를 후원하는 이유 중에 하나기도 하고 말이다.

최근에 관심 분야라면 연예계의 스캔들이라고 할 수 있었다. 내가 딱히 연예인들의 연애사에 관심이 있는 건 아니었지만, 드라마나 영화 제작을 위해서 배우들을 캐스팅하는 문제들도 있다 보니 연예인들의 일거수일투족, 특히 사생활에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특히, 누구와 누가 사귄다는 소문들은 연예인들을 캐스팅하거나 기획사로 스카웃하기 위해서 반드시 확인해야 할 항목이었다.

연예인들은 그 자체가 상품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에 가장 민감한 리스크가 이런 연애사라고 할 수 있었고, 상대에 따라서 이미지가 크게 하락할 여지도 많았기 때문에 꼼꼼하게 확인이 필요했던 것이다.

엘리베이터가 70층에 도착하고 문이 열렸다.

70층과 71층 듀플렉스 구조의 펜트하우스는 출입구만 7군 데가 있었지만 내가 이용하는 곳은 거실과 연결된 현관 쪽이었다. 그 외에 다른 곳들은 관리 직원들이나 메이드들이 사용하는 곳이었다.

집이 크기 때문에 출입구를 다른 곳을 이용하면 같은 공간에서도 메이드나 다른 관리 직원들과 마주칠 일이 별로 없었다.

돈 많은 재벌이라는 건, 집에서도 혼자만의 여유로운 공간과 시간을 즐길 수 있는 것이다.

아무튼, 현관을 열고 들어가자 뒤에 따라오던 세 명의 입에서 약속이나 한 듯 감탄사가 터져 나왔다.

“와..이거 대박인데요. 이런 집은 처음 봅니다.”

민영민은 말보다는 손이 먼저 움직여서 어깨에 메고 있던 카메라를 들어 사진부터 찍기 시작했다.

“사장님, 정말 럭셔리해요. 무슨 호텔에 와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아니, 호텔보다 더 화려하고 뭔가 유니크하고요. 마치..”

“호화 요트에 들어온 느낌 아닙니까?”

“맞아요. 요트, 그러고 보니, 회장님 요트하고 느낌이 비슷하네요.”

그럴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베네티의 인테리어 자재들로 고급 요트처럼 꾸며 놓은 펜트하우스였으니까 말이다.

“아무튼, 안으로 들어와요. 천천히 구경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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