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능한 연출자
“시드니는 어떤가요?”
“덥죠, 엄청 더워요. 지구 온난화 때문인지 사상 최대의 폭염이라고 하더군요.”
채은성 감독은 생각만 해도 끔직하다는 듯이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었다.
“그 정도인가요?”
“저는 영화 촬영을 위해서 간 거 아닙니까? 실내에서 에어컨만 쐬고 있을 상황도 아니고 시드니 시내의 명소를 돌면서 촬영을 했는데 저도 그렇고 다들 더워서 쓰러지기 일보 직전이었죠.”
채은성 감독은 아시아 익스프레스의 최종 촬영을 시드니에서 마치고 지금은 편집 작업을 하고 있다고 했다.
“하하, 그래도 고생하신 덕분에 좋은 장면이 많이 나왔다고 들었습니다.”
“그렇다고들 말은 해주는데 관객들의 반응이 어떨지는 모르겠습니다. 저도 액션 영화는 처음이라 뭔가 감이 잘 안 오더군요.”
“하하, 저는 아직 못 봤지만 윤아영 사장 말로는 재밌다고 하던데요. 주변에서 반응이 좋으면 괜찮은 거겠죠.”
채은성 감독이 처음으로 찍은 액션영화이자 드림엔터테인먼트의 첫 번째 블록버스터 영화라고 할 수 있는 아시아 익스프레스가 이제 곧 개봉을 앞두고 있었다.
얼마 후면 시사회도 있을 예정이고 이제 본격적으로 진수의 쇼비즈니스 사업도 시작되고 있는 셈이었다.
“영화를 다 찍고 오니까, 드림엔터테인먼트에서는 또 드라마를 제작한다면서요?”
“뭐, 드라마와 영화를 제작하는 곳이니까요. 아이돌 가수들도 키우고 있지만 역시 수익을 내기 위해서는 드라마가 좋은 것 같습니다.”
진수의 말에 채은성 감독도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최근에 영화 개봉도 넷플릭스 같은 스트리밍 방식으로 개봉하는 사례도 많고요. 아무래도 전처럼 극장 위주로 영화를 제작하는 시대는 지난 것 같습니다.”
“맞아요. 저도 최근에 그런 이야기들을 많이 듣는데, 문화 컨텐츠 전반에 쉽고 단순한 걸 찾는 트렌드가 있다고 하더군요. 점점 더 빨라지는 거죠. 단순해지고,”
“아무래도 영화는 구시대적이라는 건가요?”
채은성 감독은 자조적인 웃음을 짓고 있었다.
“뭐, 채 감독님도 이미 체감하고 계시겠지만 기존의 영화문법으로 만들어진 영화들은 MZ 세대의 정서에는 너무 느리고 복잡하게 느껴질 겁니다. 기본의 창작자들이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새로운 세대는 빠르고 단순한 걸 좋아하죠.”
“그건 알지만 영화라는 것은 이미 수백 년의 역사를 가진 예술장르입니다.”
“하지만 지난 100년간 영화가 이어졌다고 해서 다음 10년 후에도 존속하리라는 법은 없는 거죠.”
“하하, 설마요?”
진수의 말에 채은성 감독은 약간 어이없다는 표정이었다. 채은성 감독 역시도 최근에 영화의 트렌드가 빠르게 변하고 있다는 정도는 체감하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해도 영화라는 장르 자체가 사라진다는 것은 그로서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영화 감독님에게 이런 말을 하기는 그렇지만 2시간 내외의 길이의 장편영화는 사라질 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그보다 더 긴 드라마 장르가 영화를 대체할 지도 모르죠.”
“영화를 대체하는 게 드라마라는 겁니까?”
진수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진수 혼자의 생각은 아니었고 최근에 업계의 사람들에게 들은 여러 가지 정보와 의견들을 총합해서 내린 결론이었다.
영화든 드라마든, 영상으로 만들어지는 컨텐츠는 더 직관적이고 단순해지고 있었다. 그와 동시에 전체적인 서사보다는 캐릭터와 소재의 특이성이 중요해지고 말이다.
“예, 아무튼, 극장을 찾아서 영화를 보는 것보다는 온라인을 통해서 다양한 컨텐츠를 즐기는 시대니까요. 우리도 이제는 드라마를 비롯한 다양한 컨텐츠를 생산하려고 하고 있죠. 그래서 말인데 채 감독님도 차기작으로는 드라마를 해보시는 게 어떻습니까?”
“드라마를 말입니까?”
“드라마든 영화든 극 형식이라는 점에서 큰 차이는 없는 것이 아닌가요?”
“하하, 드라마요? 영화와 드라마는 호흡의 차이가 다르지 않나요?”
“뭐, 꼭 드라마를 찍으시라는 것은 아닙니다. 시대의 변화의 흐름이 그렇다는 것이죠. 아무튼, 천천히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
필리핀, 산 페르노.
조용하던 산 페르노에도 화려한 리조트가 들어서고 있었다. 신성건설이 맡아서 건설하고 있던 산 페르노의 에메럴드 캐슬 시티 리조트가 거의 완공단계였다.
윤아영은 마무리 단계의 리조트를 감탄을 하듯 바라보고 있었다.
“경도 리조트도 멋지지만 필리핀은 또 한국과는 다른 이국적인 분위기가 있는데요.”
“맞아요. 그게 내가 세계 여러 곳에 리조트 사업을 하는 이유라고 할 수 있죠. 리조트 건물이나 시설들이야 세계 어디에도 똑같이 만들 수 있지만, 자연경관과 그 나라만의 독특한 분위기는 만들 수 없는 거니까요.”
산 페르노의 리조트는 전부터 작업을 하던 곳이라 어렵지 않게 완공까지 마무리가 되고 있었다.
“그러니까, 회장님은 여기서 새로운 드라마를 찍자 그런 말씀이신 거죠?”
“경도 이카로스 리조트도 그런 식으로 대박이 나지 않았습니까? 드라마, 특히 한류 드라마의 힘은 대단하니까요. 특히 아시아 지역에서는 영향력이 크죠. 중국이나 동남아 이런 쪽에도 크게 어필할 수 있고요,”
진수는 새로 지어진 산 페르노의 마리나를 바라보며 새로운 구상을 하고 있었다. 그건 전에 경도 이카로스 리조트를 개발했던 경험을 살려서 드라마를 이용해서 홍보를 하자는 것이었다.
“드라마는 아름다운 최신식 리조트를 촬영장으로 맘껏 쓸 수가 있고, 리조트는 드라마를 통해서 홍보가 되면서 손님들을 끌어모으자는 거군요?”
“재벌 변호사가 성공한 것처럼 재벌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드라마를 만드는 겁니다.”
이미, 감독은 그러니까 연출자는 채은성 PD로 내정이 되어 있었다.
“채은성 감독이 정말 드라마를 연출한다는 말이에요?”
“예, 이미 아시아 익스프레스를 통해서 채은성 감독이 다방면에 다재다능하다는 것이 증명이 되었죠.”
“그건, 그렇기는 하죠. 처음 해본 액션 장르에서도 뛰어난 연출력을 보여주었으니까요.”
채은성 감독에게 드라마를 제의하고 얼마 후에 다시 연락이 왔다. 해보고 싶다는 것이었다. 드림엔터테인먼트에서 다음으로 제작하게 될 드라마 역시도 전에 만들었던 재벌 드라마 장르를 만들 생각이었다.
배경은 바로 이곳, 산 페르노의 에메럴드 시티 리조트로 하고 말이다. 줄거리는 복잡한 것이 없었다.
이 리조트의 젊은 사장이자 억만장자인 주인공과 우연히 산 페르노에 관광을 오게 된 평범한 한국 여대생이 사랑에 빠지고 알콩달콩 사랑을 이어가는 내용이었다.
첫 만남은 갑자기 폭풍우 때문에 무인도에서 시작하고 사소한 오해로 서로 말다툼을 하고 그러다가 다시 만나서 친해지다가 남자 주인공이 알고 보니 엄청난 재벌로 리조트 사장이었다는 그런 전개로 나가는 드라마였다.
“그러니까, 처음에는 필리핀에 사는 관광 가이드인줄 알고 막 대했는데 알고 보니, 평범한 가이드가 아니라 이 리조트의 사장이다. 뭐, 그런 이야기죠?”
“예, 새로 지어진 럭셔리한 리조트와 또 화려한 요트들도 등장할 예정이고요. 한 마디로 백마탕 왕자님, 아니 재벌 3세를 꿈꾸는 현대 여성들의 심리를 공략하자는 거죠.”
“하긴 여자들은 그런 게 먹히기는 하죠. 드라마의 주 시청층도 여자들이고요.”
윤아영도 대충 그런 내용의 드라마라면 여자들이 좋아할 거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
아시아 익스프레스 시사회장.
“기자들이 많이 왔군요.”
“아, 회장님.”
채은성 감독은 인터뷰를 하는 중이었지만, 멀리서 나를 보고는 인터뷰를 중단하고 잰 걸음으로 다가왔다.
“아닙니다. 인터뷰부터 하셔야죠.”
“괜찮습니다. 친한 기자라 조금 있다가 다시 해도 됩니다.”
“하하, 친한분이라면 그럴 수도 있겠네요.”
처음에 만났을 때는 제법 뻣뻣한 태도의 고지식한 예술가였던 채은성 감독도 이제는 많이 태도가 달라져 있었다.
그도 소위 말하는 자본주의의 맛을 본 셈이었다. 명성에 비해서 상업적으로는 그다지 성공하지 못 했던 그가 영화의 흥행 성공으로 상당한 돈을 벌게 된 것이다.
듣기로는 새로 아파트도 구입하고 생활이 크게 안정되었다는 것이었다.
그래서인지 영화를 연출하는 태도나 진수를 대하는 태도에도 큰 변화가 생긴 것이었다.
어떤 면에서는 예술가가 자본에 종속이 되는 생생한 현장을 눈앞에서 보고 있는 것이었다. 진수로서는 의욕적인 연출가 하나를 얻은 셈이고, 반대로 예술계에서는 참신한 창작자 하나를 잃은 셈이라고 할 수 있었다.
물론, 채은성 감독은 그 두 가지를 다 해낼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지만 현실적으로 그건 불가능한 일이라고 할 수 있었다.
상업적이면서 동시에 예술적인 그런 창작의 세계라는 건 존재할 수 없으니까 말이다. 결국 어느 한쪽으로 기울게 마련인 것이다.
그래서인지 과거에는 호평 일색이던 그에 대한 평가도 이제는 상당히 부정적으로 변해 있었다. 특히 예전에 그를 칭찬하던 평론가들이 그를 비판하기 시작한 것이다.
하지만 반대로 다른 연예부 기자들은 새로운 흥행작들을 만들어 내는 그를 신선한 연출자로 그럭저럭 포장해 주고 있었다.
“시사회는 성공적인 것 같네요.”
진수는 좀 늦게 와서 영화를 직접 보지는 않았지만 여기저기 유명한 배우들의 모습도 많이 보이고 감독이나 드라마 PD들도 많이 보였다.
연예인들도 이카로스그룹의 최진수를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진수가 늦게나마 시사회장에 들어오자 여기저기서 인사를 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예, 반응들이 대부분 좋습니다. 재밌다고들 해주니까 저도 좋고요.”
“영화는 이제 성공이고 다음은 드라마를 찍으셔야죠.”“회장님이 보내주신 시나리오는 저도 읽어봤습니다.”
“어떻습니까? 원작이 웹툰이라 감독님이 보기에는 좀 이질적일 수도 있을 것 같은데요.”
“아뇨, 재밌던데요. 원래 재벌이 나오는 로맨스가 다 그런 거 아니겠습니까? 신데렐라 스토리의 변형이죠.”
“하하, 그렇겠네요. 신데렐라가 대표적인 원조라고 할 수 있겠죠.”
진수도 채은성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채은성이 연출할 새로운 드라마의 시나리오를 찾다가 최근에 인기가 있다는 웹툰의 판권을 사들였다.
진수는 그런 취향이 아니라 본 적은 없었는데, 윤아영이 평소에 자주 보던 웹툰이라고 했다. 주로 여자들이 보는 로맨스 스토리로 평범한 여성이 갑자기 재벌을 만나서 결혼까지 성공하는 스토리였다.
“웹툰의 에피소드들을 바탕으로 배경만 필리핀의 산 페르노의 리조트로 바꾸기로 했습니다. 김성진 작가가 시나리오 작업을 돕기로 했고요.”
“그래요? 그것도 괜찮겠네요.”
“참, 그리고 마침 저기 오네요.”
채은성 감독은 갑자기 손을 흔들며 누군가를 불렀다.
“누굽니까?”
“다니엘 박이라고 신인 배우입니다.”
“다니엘 박요?”
“예, 아직은 무명배우지만 어떻습니까? 키도 훤칠하고 귀티나게 생기지 않았나요?”
“안녕하십니까. 박형식입니다.”
큰 키에 정말 귀공자 같이 생긴 잘생긴 배우였다. 캐나다 교포 출신으로 본명은 박형식, 이름이 좀 평범해서인지 다니엘 박이라는 캐나다에서 쓰던 이름으로 활동 중이라고 했다.
“여자들에게 인기가 많겠군요.”
“하하, 누님들이 좀 좋아해 주시는 편입니다.”
외모는 완벽한 것 같았다. 크고 날씬한 체형은 모델 같은 느낌이었고 얼굴은 핸섬한 스타일로 목소리도 낮고 부드러워서 로맨스 드라마의 주인공으로는 최적의 느낌이었다.
“혹시, 채 감독님이 새로운 드라마의 주인공으로 낙점을 한 건 아닙니까?”
“회장님만 승낙하신다면 저는 이 친구를 캐스팅하고 싶은데요.”
“연기 경력은 어떤가요?”
다니엘 박은 나의 질문에 캐나다에서부터 연극을 비롯해서 다양한 연기를 경험했다고 했다.
“아직, 눈에 띄는 경력은 없지만 15살 때부터 꾸준히 연기를 이어왔습니다.”
채은성 감독도 그런 다니엘 박을 옆에서 거들었다.
“이 친구 연기력이라면 제가 보증하겠습니다.”
“흠, 그 정도인가요? 좋습니다. 그러면 채 감독님을 한 번 믿어보기로 하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