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죽음은 사람을 바꾼다 (1)
정치인들이 현재 복무 중인 헌터의 제대를 연기하고, 아직 입대하지 않은 미필 헌터는 미리 징집하여 오랏트 사태를 대비하려 한다.
충분히 가능성 있는 이야기였다.
하지만…….
“그야말로 한 치 앞밖에 보지 못한다고밖에 말 못 하겠네요.”
“어째서 그렇죠?”
“제가 가만히 있을 것 같습니까?”
“그러고 보니 오재연 의원이 잔인하게 살해되었다고 들었습니다.”
‘너지?’라고 묻는 것처럼 보였다.
딱히 속일 생각은 없었기에 고개를 끄덕였다.
“저 말곤 할 사람이 없죠.”
“국회 의원이 이런 말 하면 안 되지만, 잘하셨습니다. 속이 다 후련해지는군요.”
“그렇습니까? 분명 질책할 거라 생각했습니다. 당신은 누구보다 온건파였고, 법과 도덕의 가치를 중시하는 분 아니었습니까?”
“사람은 변할 수 있습니다. 특히 죽음을 겪은 사람은 더더욱이요.”
“쓰레기는 회귀해도 쓰레기라고 생각합니다만.”
“본성이 어디 가는 건 어렵겠지만, 방침은 바뀔 수 있다는 뜻이었습니다. 당신만 해도 그렇죠.”
내가 변했다고?
그럴 리가…….
“전에 당신께서는 금돼지를 비롯한 부패한 사람들을 계속 방관하셨지 않습니까?”
“괴물과 싸우기 바빠서 정치에 신경 쓸 여유가 없었을 뿐입니다. 당장 싸울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게 더 중요했기도 했고요.”
아무리 부패했다고 하더라도 그 수가 적지 않은 만큼, 단번에 일소하면 사회에 혼란이 온다.
그래서 참은 것뿐이다.
“지금은 다릅니다.”
“뭐가 다르죠?”
“시간이요. 10개월이면 모조리 잡아 죽이더라도 혼란을 수습하고, 대체할 사람을 준비할 수 있습니다.”
“하하하.”
“왜 웃으시죠?”
“금돼지가 살해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혹시나 하는 기대를 품었습니다만, 정말 그러한 생각을 가지고 계셨을 줄은 몰랐습니다.”
시원한 웃음과 함께 안경을 벗었다. 그는 사소한 행동을 할 때도 무언가 의미가 있는 경우가 많다.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눈은 마음의 창이라고도 하니 대충 자신의 진심을 보여 주겠다는 뜻 같았다.
“묻겠습니다. 저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저는 마음에도 없는 상대와 이런 이야기를 하는 성격이 아닙니다.”
“다행이군요. 하지만 방법은 한정되어 있습니다.”
“한정하지 마세요. 필요하다면 쿠데타라도 일으킬 의향이 있습니다.”
“피는 필요한 만큼만 정확히. 최대한 짧은 시간 내에 끝내야 합니다.”
점잖은 척하더니…… 본인도 다 생각하고 있었다는 뜻이잖아.
“저는 원래 망나니라 그렇다 쳐도, 의원님은 괜찮으시겠습니까?”
“어떤 것을요?”
“그동안 국회 의원으로서 좋은 이미지만 쌓아 오시지 않았습니까. 역사에 오명을 남기실 겁니다.”
“그러고 보니 사학과 출신이라고 하셨던가요?”
“예.”
내가 백수인 것도 사학과 출신인 것과 무관하지 않다고 믿고 있다.
“전 역사를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제가 유일하게 두려워하는 것은 저번과 같은 일이 재발하는 걸 막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의 눈빛은 어느 때보다도 뜨겁게 타올랐다.
***
이야기하다 보니 벌써 자정이다.
“시간도 늦었고, 여기는 자리가 좋지 않으니, 자세한 이야기는 내일 자료를 보면서 하도록 하죠.”
“내일 뵙겠습니다.”
그는 먼저 차를 타고 돌아갔다.
“어떻게 됐어?”
“기본적인 합의는 됐어. 자세한 건 내일 그의 집에서 하기로 했고.”
“네가 이야기하러 간 사이 나는 다른 사람이랑 이야기했어. 조수석에 탔던 여자 보좌관 기억하지?”
“응.”
“강채라 의원의 여동생이라더라.”
이제야 기억났다.
제대로 이야기해 본 적은 없었지만 간단한 인사는 해 보았지. 특별히 얽힌 일이 없어서 가물가물했다.
“그런데?”
“마스터 위저드가 죽고, 그녀는 남은 가족을 살리기 위해 금돼지에게 팔려 갔어. 아마 뒤에서 비열한 수작질을 했겠지.”
“뭐?”
“아마 그때까지 살아있던 보좌관이 마스터 위저드에게 그 사실을 이야기해 줬을 거야.”
자신은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쳤는데 여동생은 팔려 갔다.
이제야 확실히 알 것 같았다.
온건파였던 그가 숙청의 칼을 뽑아 든 이유를.
“너는 어떻게 알았어?”
“평소에 사람들을 많이 접하고 그들의 이야기를 자주 들었으니까.”
“난 왜 몰랐지?”
“말을 안 해 줬으니까. 그때 넌 결전을 앞두고 있었거든. 신경 쓰이게 만들고 싶지 않았어.”
나는 늘 오랏트를 효과적으로 쓰러뜨리는 것밖에 생각하지 않았다.
동료들은 내가 그것에만 집중할 수 있도록 다른 사소한 일은 알아서 처리해 주곤 했다.
나에겐 사소한…… 일이 누군가에겐 나락 속으로 빠지는 것 같은 절망스러운 일이기도 했구나.
“그래서 무슨 합의를 했어?”
“앞으로의 대비.”
“좀 더 자세히.”
“알려주는 건 괜찮은데, 모르는 게 더 나을 수도 있어.”
평화주의자인 그녀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세계일 테니까.
“알려 줘.”
“먼저 물을게. 내가 어떻게 해 줬으면 좋겠어?”
“여유 있을 때 나쁜 놈들 다 갈아치우고, 좋은 사람들이 그 자리를 채우면 좀 더 괜찮아지지 않을까?”
생각이 일치했다.
하지만 ‘갈아치운다.’의 뜻이 다를 것이다.
“네가 말하는 것은 그들을 실각시키는 것이겠지. 그렇지?”
“맞아. 다시는 정치에 발을 디디지 못하게 하면 되잖아.”
“물러난 그들이 가만히 있을까?”
“가만히 안 있으면 어쩔 건데. 국민이 가만히 있을 리가 없잖아.”
“너무 순진하다. 천안문 사태는 괜히 일어난 줄 아냐…….”
“한국은 민주주의 국가잖아.”
“군부 독재는 민주주의가 아니라서 일어났냐?”
난 한국에만 있을 수 없다. 오랏트의 보스를 죽이기 위해 해외를 떠돌아야 한다.
그사이 저들은 쌓아 두었던 비자금으로 인간 사냥꾼을 고용해 정권을 잡으려 하겠지.
이후 오랏트 사태를 명분으로 계엄령을 선포해 버리면 쳐내지 않은 것만 못한 혼란이 발생할 수도 있다.
“또, 네가 말한 나쁜 놈들은 어디에도 있어. 정치, 경제, 군사 등등.”
“대세가 기울면 손절하지 않을까?”
“손절하고, 손절하다 보면 자기 차례일 때 아무도 도와줄 수 없다는 걸 잘 알고 있지.”
“다 합쳐도 너 하나를 못 이길 거 아니야.”
“북쪽에 그 나라는 미국을 이길 수 있어서 땡깡 부리는지 아냐.”
전 회차에 한국은 인류 최후의 보루였던 만큼 세계에서 제일 안전한 곳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그러니 외국으로 도망쳐 봐야 큰 의미 없다.
따라서 벼랑 끝 전술로, ‘날 건드리면 이 나라도 무사하지 못할 것이다.’라는 협박을 해야겠지.
미리 싹을 잘라 버려야 한다.
“그래서 어떻게 하려고?”
“실각이 아니라 확실하게 죽여야 해. 그래야 후환이 없어.”
“그 방법밖에 없는 거야?”
“최악은 이대로 내버려 두는 거지. 전 회차처럼.”
하지만 이번에는 전 회차의 피해자들이 힘을 합쳐 그들과 싸울 것이다. 아포칼립스 이전에 나라가 두 쪽 나서 망할 수도 있다.
“최선은?”
“그런 건 없어.”
“넌 어떻게 하려고?”
“숙청.”
무슨 일이 있어도 칼춤은 내가 춰야 한다.
그래야 복수와 증오의 연쇄 고리가 이어지지 않고 내 선에서 모든 게 끝난다.
위악자가 되고 싶은 마음은 없었지만, 아포칼립스가 일어나기 전에 자멸했다는 최악만큼은 피하고 싶다.
“합의했다는 게 그거야?”
“응. 하지만 네가 정 싫다면 합의를 물려 볼게. 이 경우 그의 세력은 잃게 되겠지만.”
“조금만 생각해 볼게.”
“미안하지만 고민할 여유는 없어. 그들이 결집할 시간을 주는 것과 다름없으니까.”
압도적인 우위가 이쪽에 있는 이상, 전쟁을 회피하는 것은 적을 이롭게 할 뿐이다.
“유감스럽게도 모두가 행복해지는 길은 존재하지 않아.”
“…… 한쪽이 죽을 수밖에 없다면, 착한 쪽이 살아야겠지.”
윤아는 나를 정면에서 바라보았다.
눈동자가 미약하게 흔들렸으며 입술은 꽉 다문 상태였다.
그 지옥 같던 아포칼립스를 헤쳐 나왔음에도 아직 살인에 대해 거부감이 있는 듯했다.
“리디아에게 후원을 부탁해서 세력을 키워 보는 것은 어떨까? 평화적으로 정권 교체가 가능하지 않나?”
“돈이 아니라 시간이 부족해.”
“어제는 시간이 충분해서 움직이는 거라며.”
“숙청할 시간은 충분해. 순리적으로 바꾸기엔 부족하고. 애초에 기회조차 없어.”
“왜 기회가 없어?”
“총선은 작년에 끝났고, 다음 대선은 내년 3월에 있어. 하지만 내년 2월에 오랏트 사태가 터지지.”
이후 선거는 무기한 연기된다.
따라서 총선도 없고, 대선도 없다.
GG.
“이제 10개월밖에 남지 않았으니 선택의 여지가 너무 적어.”
“정치를 하나도 모르니 어렵네.”
“쉽게 생각해.”
“어떻게?”
“이건 미래의 문제가 아니야. 현재의 문제지.”
윤아가 망설이는 가장 큰 이유는 가능성 때문일 것이다.
성선설을 믿는 그녀는 개과천선의 가능성을 무시하지 못하니까.
“전 회차 때, 금돼지 일파를 비롯한 적폐들에게 살해당했거나 착취당했던 사람들. 그들이 힘과 기억을 가지고 회귀했어.”
“응…….”
“없었던 일이 되었다고 그 사람들이 얌전히 있을 것 같아?”
강력한 힘을 얻었는데 당하고 있을 바보가 어디 있을까.
“알았어. 이 일에 대해서는 더는 뭐라 하지 않을게.”
“현명한 선택이야.”
여전히 최선에 대한 미련을 못 버렸는지, 윤아는 무언가 골똘히 생각하는 모습이었다.
윤아의 마음이 흔들리지 않기 위해, 다시금 스스로 다짐하기 위해 한 마디 더했다.
“최악을 확실히 피하려면 차악을 골라야겠지.”
대한민국 역사상 유례없는 피바람이 분다고 해도.
***
다음 날 아침. 곧바로 마스터 위저드의 집으로 향했다.
똑똑.
“들어가도 될까요?”
마스터 위저드는 정장 차림으로 창문을 열었다.
“예의가 바르신 건지, 없으신 건지 모르겠습니다. 여기 35층입니다만.”
“쓸데없이 보안이 철저한 것 같아서 중간 과정을 스킵한 것뿐입니다. 대충 넘기시죠.”
“알겠습니다. 들어오세요.”
집 안으로 들어가자 그 외에도 사복 차림의 여자 하나가 있었다.
얘가 마스터 위저드의 동생이구나.
무척 순해 보이는 인상이지만, 눈은 오빠를 똑 닮은 것이 심지가 굳건해 보였다.
“경계는 안 하셔도 됩니다. 전 평화주의자거든요.”
“오빠…….”
“정말 괜찮으니 안심하렴.”
오빠를 바라보는 여동생의 눈은 살짝 젖은 채로 흔들렸다.
그런 여동생을 보며 마스터 위저드는 따뜻한 훈남 오빠의 미소를 지어 주며 화답했다.
기대했던 현실 남매의 모습이 아니라서 두드러기가 날 것 같다.
“말씀 나누세요.”
“실례하겠습니다.”
그의 여동생은 밖으로 나갔다.
“제시간에 맞춰 오셨군요. 혹시나 마음이 바뀌셨을까 봐 걱정했습니다.”
“전 갈대 같은 사람이 아닙니다.”
“옆에 있는 윤아 씨는 무척 온건하신 분이니까요.”
“바보처럼 보일 정도로 착하긴 하지만, 이 상황에서 대안없이 반대만 던질 정도로 멍청하지는 않습니다.”
나한테는 막 대하지만.
“그보다 데스노트 작성은 끝내셨습니까?”
물론 내가 사신 역할이다.
“대답을 드리기 전에 질문 두 개만 드려도 괜찮겠습니까?”
“마음 편히 하세요.”
“전에 인류는 승리했었습니까?”
“네. 승리했습니다. 제가 마지막 보스인 말쿠트를 쓰러뜨렸습니다.”
이기긴 했지만, 상처뿐인 승리였다.
살아남은 인간은 거의 없었고 문명 역시 거의 다 파괴되었으니까.
“다음 질문입니다. 이번이 정말 2회차가 맞습니까?”
“예?”
“저는 우리가 기억 못 하는 것일 뿐 이번이 3회차 일수도 있고, 백만 회차일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왜 그렇게 생각하시죠?”
“어떤 일이든 한 번은 어렵지만, 두 번째부터는 쉽기 때문입니다.”
“…….”
“만약 제 가정이 사실이라면 당신의 비정상적인 강함도 설명할 수 있겠지요.”
너같이 감이 좋은 사람은 싫어하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