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의 자격-27화 (28/151)

#27. 훈련소에 부는 바람 (2)

윤아는 그새 옷을 갈아입었는지, 화사하면서도 샤방샤방한 원피스 차림으로 나타났다.

“전직 연예인이라서 그런가. 옷은 진짜 잘 입는다.”

“너는 오랜만의 외출인데도 꼭 추리닝을 입어야 속이 시원했냐?”

“나도 제대로 입고 싶었는데, 있는 옷이 전부 검은색 추리닝이더라.”

심지어 청바지와 티셔츠도 없었다.

“차도 이상해. 리디아가 사 준다고 했으면 좋은 거로 사지.”

“‘워 오브 제네시스’가 어때서!”

“너무 아저씨 같잖아.”

“군대 갔다 오면 다 아저씨다. 내가 편한 게 최고지. 그보다 어디로 가면 돼?”

“청담동 쪽에 내가 자주 가는 숍 있으니까 거기로 가자.”

“밥부터 먹어야 하는 거 아니야?”

“그 근처에 맛집 많아. 먹고 싶은 거 있어?”

“사 주게?”

“오늘은 전부 내가 쏜다!”

오늘따라 무척 기분 좋아 보인다.

들뜬 것도 같고.

“그러면 소…….”

“소머리 국밥 말고.”

국밥은 매일 아침에 먹으니 나도 별로인데.

얘는 대체 사람을 뭐로 보는 건지.

“소를 먹고 싶다는 뜻이었는데.”

“그러면 스테이크 하우스 중에 괜찮은 곳 있어. 그리로 가자.”

“좋지!”

사실은 소 곱창이 먹고 싶었지만, 솔직히 말했다가는 혼날 것이 분명했기에 고개를 끄덕였다.

***

우리는 청담동의 한 스테이크 하우스에서 우아하게 식사를 마친 후, 윤아가 자주 간다는 숍으로 향했다.

정정하겠다.

숍‘들’로 향했다.

“야야. 대체 몇 개를 들리는 거냐. 대충 사. 어차피 난 얼굴이 안돼.”

“얼굴이 안되니까 더 잘 꾸며야지. 아직 반밖에 안 갔어.”

“반이나 남았다고?”

“자자. 음료수 줄 테니까 조금만 더 힘내자.”

“내가 애냐?”

인도를 따라 걸어다니면서 주변을 둘러보았다. 겉으로는 평소와 다를 바 없이 평화로웠다.

사람들의 얼굴에 불안의 그림자가 있었긴 하지만, 이해할 수 있는 수준이었다.

오히려 이 시국에도 마냥 해맑으면 정신병자가 아닌가 생각했겠지.

“좀 의외다.”

“뭐가?”

“최악의 경우 개막장 상황을 예상했었거든.”

자포자기한 인간들이 공포를 이기지 못하고 자살 파티를 연다든가.

세기말에 어울리는 폭주족들이 폭력, 방화, 학살 등을 일으킨다든가.

지구 멸망을 배경으로 하는 영화는 많으니 쉽게 상상이 갔다.

“신기하지 않냐? 세상이 멸망할지도 모르는데 사회가 유지되고 있다는 게.”

“내일 세상이 멸망하더라도,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겠다라는 게 아닐까? 희망을 잃지 않은 거지.”

“사과나무는 희망을 말하는 게 아니야. 이게 잘못 알려진 건데…….”

“요점만 간단히.”

“멸망은 기정사실이니 내가 뭔 짓을 해도 의미 없다는 뜻이야.”

“운명론 같다.”

“그거 맞아. 대신 내 할 일을 한다면 종말은 피하지 못하더라도, 종말로 인한 혼란은 피할 수 있겠지.”

사람들이 어떤 마음으로 사회를 유지하는 데 손을 보태는 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사회 기능이 마비되지 않았다는 것은 희망이 있다는 뜻이다.

그런 의미에서는 사과나무를 희망으로 해석할 수도 있을 것 같다.

“한 푼이라도 더 벌어서 최대한 생존 방법을 찾겠다는 뜻같지만. 그것도 희망이 있으니까 할 수 있겠지.”

“그거 맞는 말 같아. 얼마 전에 뉴스보니까 물이랑 라면, 통조림 사재기가 심각하다고 하더라. 덕분에 보존 식품 회사는 엄청난 호황이래.”

“나도 그 기사 봤어. 의약품 산업이랑 군수 산업도 호황이라지?”

대신 금융은 연일 바닥이며, 창업률은 제로.

평온해 보이지만 경제는 대공황 이상으로 박살 난 상태다.

한마디로 부익부 빈익빈의 양극화가 극심하다는 뜻이었다.

정부에서는 복지나 투자를 왕창 줄이고, 그 돈으로 경찰이나 군인의 대규모 채용 및 무기를 사들이는 것으로 어떻게든 땜빵하고 있었다.

“리디아의 돈이 마르지 않는 이유를 알겠네.”

“그건 무슨 소리야?”

“리디아네 가문이 미국의 군수 산업을 반쯤 장악하고 있잖아.”

“다행이지. 덕분에 지원을 빵빵하게 받으니까.”

진짜 무서운 것은 군수 산업은 브레튼우즈 그룹이 가진 문어 다리의 한쪽일 뿐이라는 것이다.

금융, 유통, 의약, 식품, 소프트웨어 등 돈 되는 사업이라면 전부 일각을 차지하고 있었다.

“이번에는 네자흐로부터 꼭 미국을 방어해 내야 할 텐데.”

“그러게. 미국이 없어지니까 오랏트 상대하기가 너무 힘들더라.”

이런 말 하면 뭐하지만, 다른 나라 다 망하더라도 미국만 무사하면 어떻게든 후일을 기약할 수 있다.

그 땅은 뭐든 다 있으니까.

“그건 나중에 생각하고, 일단은 오늘을 즐기자.”

“그럽시다.”

찰칵찰칵.

오랜만에 평화로운 한때를 즐기려고 하는데, 아까부터 계속 여기저기에서 셔터음이 들려온다.

“윤아야. 널 찍는 것 같은데 그동안 배운 킥복싱 실력을 뽐내 봐.”

“귀찮아.”

“언론에 스캔들 뜨고 난리 난다.”

“그 언론도 곧 없어질 거야.”

예전에는 동물의 사체만 봐도 무서워하고 울상 지었는데.

멘탈이 너무 강해진 것 같다.

나도 귀찮기는 하지만 내버려 두는 것은 더 귀찮다.

“얘들아. 자꾸 그러면 손가락 부러진다~”

그 말에 주변에서 웅성웅성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대부분 비속어가 섞인 비난하는 말이었다.

“전에도 뉴스에서 말한 것 같은데 법은 너희를 지켜 주지 않는단다. 두개골 깨지는 경험을 하고 싶지 않으면, 예의를 갖추는 게 어떻겠니?”

내가 다시 한번 말하자 다들 조용해지며 뿔뿔이 흩어졌다.

그걸 보며 윤아가 한마디 했다.

“적당히 해. 악의는 아니잖아.”

“꼭 악의로만 사람 잡을 수 있는 줄 아냐? 사진 찍고 싶으면 다가와서 같이 한 장 찍자고 하든가. 저게 대체 뭐 하는 짓이야?”

“공인은 그냥 샌드백이야. 누군지도 모르는 사람들한테 항상 두들겨 맞아. 그러려니 하는 게 편해.”

“난 공인도 아니고 그렇게 살기 싫은데?”

“계속 그렇게 하면 악플 엄청나게 달릴걸?”

회귀하게 되니 별 이상한 걸 다 신경 써야 하네.

내일 지구가 멸망하더라도 한 줄 악플을 달겠다는 굳은 심지.

그런데 이걸 어쩌나.

정부도, 기업도 내 편인데.

“마스터 위저드랑 리디아에게 데이터베이스 취합해 달라고 했어. 일단은 법으로, 법이 안 된다면 힘으로 다 아작 낼 거야.”

“와……. 그건 좀.”

“악플로 사람도 죽이는 세상이라면, 악플은 흉기나 다름없는 건데 왜 가만히 있어야 하는데?”

“그것도 그렇긴 하네. 나도 딱히 변호해 주려고 한 건 아니야. 보이지 않는 상대랑 싸우는 것만큼 힘 빠지는 일이 없어서 그런 것뿐이지.”

“걱정하지 마. 난 해병대 출신은 아니지만 귀신도 잡아 낼 수 있어.”

특히 인생은 실전이라는 건 확실히 보여 줄 수 있다.

딱 기다려라.

날 잡아서 매타작 할 테니까.

***

총 8개의 샵을 돌며 백 번을 넘게 갈아입고 나서야 윤아의 코디는 끝났다.

윤아는 올 블랙 슈트를 입어도 멋지지만, 나는 그렇지 않았기 때문에 더 오래 걸린 감이 있었다.

마라톤 쇼핑을 마친 우리는 다시 차에 탑승했다.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네. 저녁까지 먹고 가자.”

“그러자. 어디 야경 멋진 곳에서 근사하게 먹고 싶다.”

……순두부찌개 먹으러 가자고 하려고 했는데.

입에 담았다간 뚝배기로 한 대 맞을 각이다.

“그, 그래? 전에 어디서 식사하러 오라고 명함 줬었는데…….”

“누가?”

“훈련소에 있는 애 부모님이.”

“거기 가서 등쳐먹고 싶냐?”

“뭘 등쳐먹어. 내 돈 내고 먹을 건데. 겸사겸사 안부도 전해 주면 서로 좋지.”

말이 개돼지 취급이지, 아무 이유 없이 괴롭힌 적은 단 한 번도…… 있구나.

금태양은 특별 취급이라 유독 귀여워해 주긴 하지.

“어디 보자…….”

훈련소라고 해도 비밀 실험장 같은 곳이 아니다 보니 주말마다 면회를 허용한다.

그 때 수백장의 명함을 받아 뒀지.

단, 엄연히 범죄자이므로 외출은 허락하지 않는다.

“찾았다. 명함에 김진혁 부모님이라고 써 놨네. 김진혁이 누구였지?”

“네가 김저격이라고 부르는 애.”

“걔라면 완전 에이스잖아.”

저격 능력자인데 공간 지각 능력과 사물 인지 능력을 타고났다.

훈련으로 기본 시력과 동체 시력까지 엄청나게 향상한 덕에, B랭크 능력자 중에서도 상당히 높은 수준이라고 생각한다.

“잠실에 있는 브레튼타워 107층에서 초밥집을 하고 계시네.”

“점심엔 스테이크 먹었으니, 저녁엔 초밥도 괜찮겠다.”

“콜?”

“콜!”

부모님이 그런 곳에서 장사하실 정도면, 금수저까지는 아니어도 은수저 쯤은 될 텐데.

현재는 잘만 살아 계시는 부모님의 원수를 죽이느라 훈련소에 들어왔으니, 내가 생각해도 어처구니가 없다.

“어라?”

“갑자기 왜?”

“방금 중전차가 지나갔던 것 같은데…….”

“무슨 소리야. 중전차는 죽었잖아.”

“예감이 좋지 않아.”

[영혼의 사냥개]에게 명령을 내려보았지만, 그를 추적하지는 못했다.

내가 잘못 봤나?

“뭘 망설여. 감이 좋지 않으면 얼른 뛰어가.”

“하지만…….”

“나중에 후회하지 말고 가. 차는 내가 운전해서 돌아갈 테니까.”

“……고마워. 꼭 벌충할게.”

“끝나면 바로 훈련소로 돌아오고.”

“알았어.”

인도 근처에 정차해 놓고 빠르게 뛰어갔다.

기우였다면 좋겠지만…….

폭풍이 올 것 같은 예감이었다.

***

어떠한 이정표도 없이 그저 감이 이끄는 대로 골목길을 헤집었다.

날이 어두워지니 인적이 점점 드물어졌다. 예전만큼 치안이 좋지 않다 보니 스스로 통행을 자제하는 느낌이었다.

가로등조차 미약한 어둑한 골목.

심장 박동 소리가 들릴 정도로 고요하며, 이전보다 한층 더 차가운 한기가 흘렀다.

빛 한 점 비추지 않는 깊은 곳에서 무언가가 다가왔다.

“그대라면 찾아올 줄 알았다.”

“중전차?”

“어떠한 단서도 남기지 않았건만 잘도 찾아오는 군. 그것이 늘 자랑하던 육감인가?”

그는 가로등의 옅은 빛이 닿는 곳까지 걸어왔다.

“꼴을 보니 인간이기를 완전히 포기했구나.”

머리가 하얗게 탈색되고, 눈의 색이 반전된 것만이 아니었다.

피부는 완전히 타 버린 고기처럼 까맣게 되어 수없이 갈라졌으며, 혈관을 나타내는 것처럼 몸 곳곳에 붉은 선이 불길하게 빛났다.

“완전히 포기한 것은 아니다. 단 하나만큼은 잊지 않았으니까.”

“뭘 포기하지 않았지?”

“나의 목표.”

“목표가 뭔데?”

“그것을 확인하기 위해 너를 찾아왔다.”

“너도 모르는 걸 내가 어떻게 확인해 주지?”

“어떤 소설에서 말하더군. 사람들은 자기들의 왕을 뽑는 일을 좋아하며, 그 왕을 능지처참하면서 더 많은 기쁨을 얻는다고.”

그의 목소리는 이전처럼 묵직한 중저음이 아니었다.

마치 담배 수십 개비를 동시에 핀 것처럼 허스키하고 가래가 끓는 듯한 소리였다.

“너를 넘어서는 것이 목표일지, 나라를 수호하는 것이 목표일지. 너를 상대해 보면 확실히 알 수 있겠지.”

철판을 쇠로 긁는 듯한 불협화음이 내게는 처절한 비명처럼 들렸다.

“너를 넘어서고 기쁨을 얻는다면 내 목표는 너를 넘어서는 것이다. 하지만 후회가 느껴진다면 나라를 수호하는 게 목표다.”

“하하하하!”

녀석은 한없이 진지한 듯했지만, 내게는 터무니 없는 허세처럼 느껴졌다.

“나를 넘어선다면 알 수 있겠지. 하지만 못 넘을걸?”

“넘지 못한다면 그것으로 좋다. 내가 그것밖에 안 되는 것일 테니.”

“좋다. 넘었다고 치고. 기쁨까지 얻었다고 치자. 다음엔 뭐 할 거냐?”

“내가 오랏트를 깨부수고 세상을 구하겠다.”

“가슴이 웅장해지는 꿈이다만, 넌 여태까지 아무것도 증명하지 못했어. 말로는 뭐든 하지.”

언제나 그 사람을 증명하는 건 말이 아니라 행동이다.

“이제부터 증명하지.”

녀석의 몸에서 광포한 기세가 뿜어져 나왔다.

배 위에서 싸울 때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강한 기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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