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 정상 회담 (1)
곧바로 마스터 위저드를 찾아갔다.
평소와는 달리, 그는 부모님의 원수를 보는 듯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지금은 그의 시스콘 증상을 신경 써 줄 때가 아니다.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이보세요. 제가 왜 높으신 분들 모이는 자리에 껴야 합니까?”
“당신도 높으신 분이니까요.”
마스터 위저드는 단 한 마디로 내 질문을 일축했다.
“저는 진짜 정치하면 온몸에 두드러기가 나는 체질입니다만.”
“누가 정치하라고 합니까? 그냥 가서 이야기만 듣다가 적당히 끄덕여 주고, 적당히 성질대로 나가시면 됩니다.”
적당히 성질대로?
내 성질을 모르는 건 아닐 텐데?
“정상 회담에서 그래도 됩니까?”
“하지 말라고 해도 그러실 거지 않습니까?”
그건 그렇다.
그래서 더욱 가기 싫은 거고.
“저 영어도 잘 못 하는데…….”
“TV 보시면 귀에 뭐 꽂고 회의하시는 분들 보이시죠? 그거 통역해 주는 겁니다.”
“……커닝이었습니까?”
우리한테는 현지인도 못 알아먹을 토익 듣기 평가를 시키더니, 지네들은 통역사 쓰네.
이래서 돈과 빽이 좋다.
“잘못 알아들으면 큰 외교 문제가 발생할 수 있으니 당연합니다.”
“앞으로 국회 의원 출마 자격에 토익 점수 집어넣죠. 왜 우리만 개고생시키는 겁니까.”
“억울한 건 이해합니다만, 안 그래도 정치인은 고학력자가 독점하고 있으니 그런 생각은 접어 두세요.”
역시 세상은 이유 없이 돌아가는 건 없나 보다.
단지 내가 이해를 못 할 뿐.
“우선 대한민국 대통령부터 미리 만나 보시죠.”
“싫은데요.”
내가 진심으로 만나기 싫은 국가 원수는 총 여섯 명이다.
우연인지 필연인지, 이 여섯이 육자 회담의 구성원이다.
“솔직히 말씀해 보세요. 헌터를 소모품으로 보는 우리나라 대통령을 제가 좋아할 것 같습니까?
“직접 만나 보시면 생각이 달라질지도 모릅니다.”
“전 회차에서 많이 만나 봤습니다. 만날 때마다 다시는 만날 일이 없기를 바랐죠.”
마스터 위저드는 소파에 깊이 몸을 뉘더니 펜을 핑핑 돌렸다.
“솔직히 말하자면, 이 회담에서 당신의 역할이 매우 중요합니다.”
“지금 협상해 봐야 암밖에 안 걸립니다. 발등에 불이 떨어져 봐야 제대로 된 협상이 나오죠.”
내가 전 회차 때, 영웅이라고 추켜세워지고 훈장이라는 훈장은 엄청나게 받았다.
우리나라에서뿐만 아니라 세계 각국에서 골고루 받았다.
이는 나를 대접해 주고 싶다는 의도가 아니다. 패닉 상태에 빠진 국민에게 보여 줄 희망의 대체품으로 이용된 것이다.
거기까지는 이해한다.
하지만 인간적으로 옆 나라들이 작살나는 걸 봤으면, 사전 대비는 충실히 해야 하지 않나?
“요즘 정치가들은 정치는 알아도 전쟁은 몰라요.”
“어느 영화에서 나올 법한 대사군요. 그런 그들도 회귀했으니 상황은 달라졌을 겁니다.”
“좋습니다. 저도 참여하죠. 대신 저 진짜 막 나갈 수도 있습니다.”
“처음에 말씀드렸다시피 적당히 맞장구쳐 주다가, 적당히 성질대로 나가시면 됩니다.”
대놓고 난동부리겠다는 말에도 그는 눈하나 깜빡이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내 행동 역시도 다 계산에 있는 모양이었다.
“회담은 언제죠?”
“3일 뒤입니다.”
“정상 회담 치고는 일정을 촉박하게 잡았네요.”
보통 정상 회담은 3~4개월 이전에 일정을 발표하는 만큼, 무척 이례적인 일이었다.
그만큼 각국의 정상들이 오랏트 사태를 심각하게 바라본다는 방증이기도 했다.
“받으세요.”
“이건 뭐죠?”
“회담에 논의될 내용입니다.”
뭐라 뭐라 많이 쓰여 있기는 한데, 요약하자면 크게 3가지 문제였다.
1. 재난시, 군사 협력.
2. 재난시, 경제 협력.
3. 재난시, 난민 지원.
물론 이 ‘재난시’라는 것이 오랏트 사태를 의미하는 것임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정상들이 굵직한 것을 결정하고, 세세한 것은 실무자들이 따로 회의합니다.”
“회담은 며칠간 하는 거죠?”
“이틀입니다.”
내 짧은 생각으로는 한 시간이면 충분할 것 같은데.
국가 간의 거래라는 것이 그렇게 쉽지만은 않은 모양이었다.
“우리나라 대통령을 뵙고 싶어 하지 않으신 것 같으니, 회담 전까지는 제가 중간에서 처리하겠습니다.”
“우리 대통령뿐만 아니라 일본 총리나 미국 대통령도 별로 보고 싶지 않습니다.”
“당신이 좋아하는 정치가가 있기는 합니까?”
“눈앞에 있습니다.”
마스터 위저드마저 없었으면, 그냥 정치는 다 때려치우고 GG에 몰빵했겠지.
내 대답에 그의 얼굴이 미묘하게 찌푸려졌다.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모르겠군요.”
“걱정하지 마세요. 저는 이성애자입니다. 처남.”
파직.
그가 쥐고 있던 펜이 순간 허리가 툭 끊겼다.
저번의 소개팅으로는 아직 여동생을 졸업하지 못한 모양이다.
앞으로 자주 도와주도록 하자.
“당신뿐만 아니라 리디아가 정치했더라도 좋아했을 것 같긴 하군요.”
“리디아 씨와 푸우 대통령은 비슷한 면이 있습니다. 기업가의 마인드로 정치를 한다는 점에서 특히요.”
“생각해 보니 전 회차 때, 그나마 말이 통한 것 같기는 합니다.”
리디아가 중간에서 기름칠을 잘해 준 덕도 있었을 테지만.
미국의 트리스트럼 푸우 대통령은 모든 정치나 외교 관계에 거래의 기술을 이용하는 경향이 있다.
일본의 보쿠무 신조 총리는 군인처럼 서열 관계를 중시하는 경향이 있다. 기준은 국력.
“자. 이제부터 실전 평가입니다.”
“갑자기 무슨…….”
“지금까지 저와 나누셨던 대화에서 이상함을 느끼지 않았습니까?”
“정치 이야기는 역시 더럽게 재미없다는 것 말고는 그다지 느낀 것이 없습니다.”
“회담이 3일 뒤라는 것이 이상하지 않습니까?”
……뭐가 이상한 거지.
“어차피 졸속 처리 할 거면서 왜 뜸을 들이나 싶긴 한데요.”
“맞습니다. 서로 하루하루가 귀한 만큼 뜸을 들일 이유는 없습니다. 형식이라는 건 여유가 있을 때나 갖추는 것이니까요.”
“그러면 왜 3일 후에 하는 거죠?”
“시간을 주기 위함입니다.”
“무슨 시간이요?”
“미국이나 일본에서 당신을 설득할 시간입니다.”
마스터 위저드는 그렇게 말하면서 내게 서류 두 장을 내밀었다.
한 장은 미국 회담 참가자의 목록, 다른 한 장은 일본 회담 참가자 명단이었다.
위쪽에는 뉴스에서 종종 보던 유명 정치인 이름이어서 고개가 끄덕여졌지만, 아래로 갈수록 누가 누군지 모르겠다.
그러다 마지막에 포함된 이름들을 보고 깜짝 놀랐다.
“엥? 이 사람들이 왜 회담에 참여합니까?”
“방금 말씀드렸지 않습니까. 당신을 설득하기 위함이라고요.”
전 회차에 큰 활약을 펼쳤던 헌터가 포함되었다는 것도 놀랍지만, 그보다는 마지막에 기록된 사람이 너무 신기했다.
미국의 셀린 패이러크
일본의 시노자키 아오이.
모두 세계적으로 유명한 모델이다.
“후진국식 협상 기술입니까? 노골적인 미인계는 솔직히 좀 저질 같은데요.”
“걱정하지 마세요. 당신이 상상하는 일은 벌어지지 않을 겁니다.”
그건 그거대로 유감인데.
“왜 그녀들이 포함된 거죠?”
“아주 간단한 이유입니다.”
“그녀들이 저한테 반했나요?”
마스터 위저드가 한숨을 쉬며 고개를 저었다.
어째 나를 보는 그의 표정이, 여자랑 이야기했다고 기뻐하는 모쏠을 바라보는 연애 고수 같았다.
“당신을 부추겨 한국에서 꺼내기 위함입니다.”
***
대한민국은 일명 선진국 판독기라고 불릴 정도로 강한 나라다.
전 세계 200개국 중에서 상위 10%인 20위 안에 든다고 봐도 된다.
하지만 단군 할아버지의 위치 선정으로 인해 제대로 큰 소리를 내 본 경험은 거의 없다.
한미일 회담.
국력으로 따지자면 미 > 일 > 한 수준이다.
‘>’ 이거 하나에 국력이 어마어마하게 차이 난다. 특히 일본은 한국보다 국력이 3~4배다.
오죽했으면 이런 말이 있다.
전 세계에서 일본을 밥으로 보는 국민은 한국인밖에 없다고.
하지만 이번 한미일 회담은 달랐다. 한국이 독립 이래 처음으로 갑에 가까운 역할을 하게 된 것이다.
이게 전부 오랏트 사태 때문이라니 참 아이러니하다.
먼저 나는 일본의 초청에 따라 그들을 먼저 만나게 되었다.
결코 시노자키 아오이의 실물을 보고 싶어서 그런 게 아니다.
“마스터 이. 오래간만이네.”
“뭐냐. 라스트 사무라이냐.”
“그 별명 엄청 오글거리니까 부르지 마라.”
일본의 얼마 안 되는 네임드 헌터, 오카다 준이치가 마중 나왔다.
일본은 국력에 비해 네임드 헌터의 숫자가 매우 적다.
이유는 간단했다.
침몰했으니까.
싸워 보기도 전에 침몰하는 바람에 영웅급 전사가 나올 만한 환경이 아니었다.
“오랜만이네.”
“네자흐와의 일전 이후로는 처음이지? 나로서는 석 달 만의 일이야.”
“나는 일 년 넘었다.”
그는 일본 침몰 때 살아남은 얼마 안 되는 헌터였다.
네자흐를 상대하다가 죽은 영웅 중의 하나이기도 했다.
친한파로 유명한 배우였고, 한국어도 잘하다 보니 나랑 좀 친하지.
“야. 네 스킬 쩔더라.”
“그렇지? 죽기 전에 마지막 한 마디를 남길 수 있어서 다행이었어.”
그의 스킬은 [장검술].
일정이상의 길이를 가진 검을 능숙하게 다루는 능력이다.
마나를 이용하면 무협지에 나오는 검기나 검강 같은 기술도 가능하다.
내가 2회차 때 받은 스킬들은 대부분 무기를 다루는 것과 관계있어서, 맨몸인 지금은 제대로 힘을 못 쓰는 것도 이러한 이유였다.
수호 형과 한울이의 능력만으로도 충분히 다 씹어먹기는 하지만.
“덕분에 네자흐는 쓰러뜨렸다.”
“듣기는 했는데 잘 상상이 안 가네. 그 새 진짜 너무 치트잖아.”
“네자흐는 말쿠트 다음으로 힘들었어. 날아다닌다는 게 그렇게 짜증 날 수 없었지.”
“맙소사. 그 새보다 더 강한 게 나온다고? ”
“말쿠트가 끝판왕이야.”
그에게 좀 더 가까이 붙었다.
“오카다. 혹시 시노자키 씨는…….”
“그러고 보니 너 미국에 있을 때도 노래를 불렀지. 그렇게 좋냐?”
“너는 안 좋냐?”
오카다는 말없이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웠다.
그렇지. 이런 반응이 정상이지.
한울이나 마스터 위저드는 관심이 없고, 윤아나 리디아는 경멸하는 눈빛으로 나를 보니 참.
“대충 너희가 찾아온 이유는 알겠는데, 나 데리고 뭐 할 생각이냐?”
“별생각 없을걸?”
“진짜?”
“우리나라는 침몰해 버리는 바람에 싸울 기회도 없었잖아. 너한테 뭘 기대하겠어. 침몰을 막아 줄 수 있는 것도 아닌데.”
그것도 그렇네. 오히려 미국의 몸이 달아 있겠지.
이번에는 피해를 줄이고 네자흐를 쓰러뜨리고 싶을 테니까.
“나도 언질은 받지 못해서 뭐라 말은 못 해 주겠지만, 아마도 너를 부른 건 GG 때문인 것 같아.”
“GG?”
“일본인 중에서는 활약 못 한 능력자들이 많잖아. 실전 경험도 없고. 그러니 잘 좀 해 달라고 부탁하지 않을까?”
인재 양성 때문이었구나.
리디아에게 보고 듣기로도 일본인들의 지원율은 상당히 높은 편이라고 했다.
“내가 사장이기는 하지만, 실질적인 사장은 리디아야.”
“당연히 알고 있지. 그래도 네 말 한 마디면 다 바뀔 거잖아.”
“꼭 그렇지는 않은데.”
“그럴걸? 네가 느끼는 것보다 너에 대한 그녀의 신뢰는 상당한 수준이니까.”
순간 오카다의 눈에서 어두운 기색이 서렸다가 사라졌다.
아무래도 말 못 할 고민이 있는 모양이었다.
이걸 다테마에, 혼네라고 하던가?
“아으. 몸이 찌뿌둥한 게 온천이라도 들어가고 싶다. 한국에는 좋은 온천 없어?”
“유성 온천…….”
“전에 가 본 적 있는데 별로였어.”
“온천은 너네 나라 가서 즐기시고, 한국에서는 치맥이나 즐기세요.”
일본에 스시 외교가 있다면, 한국에는 치맥 외교가 있다는 것을 보여 주지.
“확실히 한국에서는 삼겹살에 소주, 아니면 치킨에 맥주가 진리긴 하더라.”
“저녁 먹지 말고 바로 가자. 나도 청와대는 답답해서.”
“그러자. 시노자키 상도 부를게.”
“그렇다면 내가 사도록 하지.”
“나만 간다면?”
“뭘 말 같지도 않은 걸 묻고 그러시나.”
나는 돈이 많다.
“더치 페이다.”
그러나 함부로 쓰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