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의 자격-37화 (38/151)

#37. 새출발 (1)

나는 큰 착각을 하고 있었다.

부패한 정치인들을 척결하고, 그 자리를 도덕적이고 능력 있는 사람들이 채운다면 세상은 좋은 방향으로 흘러갈 것이라고.

아니었다. 저들은 선악과 상관없이 민주주의에 길들여진 사람들이다.

‘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이라는 슬로건 아래, 국민의 뜻에 따라 오직 자국의 이익만을 최우선으로 생각한다.

평소라면 괜찮다. 오히려 지지했을지도 모르지.

하지만 오랏트에 살아남기 위해서는 그러면 안 된다.

국가가 하나둘씩 멸망하기 시작하면 종자, 사료, 석유, 목재, 커피, 설탕 등 원자재가 없어진다.

그에 따라 별 탈 없던 한국도 완전히 몰락하여 조선 시대 수준으로 돌아간다.

그리고 조선 시대는…… 5천만을 먹여 살릴 능력이 없다.

“여기 계신 분들은 다들 저보다 똑똑한 분이시니, 제가 뭘 우려하는지 잘 아실 것이라고 봅니다.”

알지만 멈출 수 없는 거겠지.

국민이 바라니까.

그들의 대표인 정상이 해야 할 일이 되어 버렸으니까.

“탓하지는 않겠습니다. 저는 잘 모르는 사정이 있을 테니까요. 하지만 여러분들도 저를 너무 모르시는 것 같네요.”

전 회차의 나는 1회차의 경험을 바탕으로 극한의 효율을 추구하는 전사였다.

효율을 위해 정치나 내정에 간섭하지 않고 최전방만을 전전했을 뿐.

그러한 행동이 나를 세상 물정 모르는 무식한 싸움꾼으로 오해하게 만들었구나.

“저는 아무래도 여기까지인 것 같습니다. 남은 회담 잘하시기를.”

리디아가 옳았다.

시대가 바뀌었으니, 살아남는 방법도 달라져야 한다.

“저는 세계로 나아가겠습니다.”

***

내가 밖으로 나오자 대기하고 있던 기자들이 우르르 몰려왔다.

현재 내 이미지는 살인자가 아니라 구세의 영웅이니까.

계엄령 이후, 마스터 위저드나 윤아 같은 사람들이 지속해서 홍보해 준 덕이다.

“회담을 포기하셨다는 것은 지금의 체제가 가망이 없다는 뜻입니까?”

“아까 하신 말씀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세계로 향하신다고 했는데 어느 나라를 먼저 가실 생각입니까?”

기분을 망친 상태였는데, 질문 세례를 받으니 더 열 받았다.

하지만 이건 기회였다.

각국 정부의 기대치를 낮추고, 제대로 힘을 모으려면…….

역시 언론 플레이가 갑이지.

“모든 문제는 오랏트를 효율적으로 쓰러뜨리면 해결됩니다. 하지만 한 나라의 힘으로는 불가능한 일이죠.”

전 세계랑 맞짱떠도 지지는 않는다는 미국조차 네자흐에게 괴멸했다.

양질의 헌터를 보유한 중국과 인도는 호흐마에 의해 오히려 글로벌 민폐국이 되어 버렸다.

하나의 나라로는 아무리 강대국이라고 해도 이길 수 없다.

“최소 오랏트 사태에 한해서라도 인류는 국적, 인종, 나이, 성별 등 모든 굴레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아니면 우리는 또다시 멸망하겠죠.”

“이해는 합니다만 쉽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아니요. 가능합니다.”

“어떻게 말입니까?”

인류는 하나가 될 수 있다.

“돈과 생존입니다.”

우리는 모두 같은 것을 바라고 있으니까.

“그리고 GG는 돈과 생존, 전부를 제공할 능력이 있습니다.”

진정으로 돈 싫어하는 사람 없고.

진심으로 죽고 싶어 하는 사람 없는 법이다.

“먼저 가겠습니다. 따라오세요.”

정상들은 이미 카메라 앞에서 본심을 말할 수 없게 되었다.

정치인으로서는 대단할지 몰라도, 인간으로서는 지극히 비정상이다.

그러니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길을 걷겠다.

***

“대체 무슨 생각이야아아아!”

데자뷔인가.

전에도 이런 적이 있었던 것 같은…….

“에이. 걱정하지 마. 똑똑한 사람들은 내가 이럴 거라고 다 예상했어.”

“나는 멍청하다는 뜻이야?”

“평범하다는 뜻이지.”

돌아가는 상황을 보니, 리디아부터 해서 마스터 위저드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알고 있었다.

덕분에 나는 자신감을 얻었다.

아직 문제를 해결하지는 않았지만.

“윤아야. 우리는 전 회차에 성공한 걸까?”

“성공이라면 성공이지. 상처뿐인 성공.”

“나는 그 상처뿐인 성공의 가면을 쓰고 싶지 않아.”

내가 전 회차에 이루었던 성취가 나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초심을 견지하고 원래의 목적을 상기할 필요가 있었다.

“전 회차가 성공이라면, 우리의 목표가 오랏트를 쓰러뜨리는 것이기 때문이겠지.”

“지금은 아니야?”

“더 높아졌어. 사람들을 최대한 많이 살리면서 오랏트를 쓰러뜨리는 것으로.”

“쉽지는 않을 거야.”

“자신 있어. 다름 아닌 우리라면.”

윤아는 내 근거 없는 자신감에도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믿어.”

“응?”

“너를 믿는다고. 늘 그랬듯이.”

“고마워. 나도 너를 믿는다.”

동료들이 아니었다면 진작 포기하고 적당히 타협했을지도 모르겠다.

“고마우면 사고 좀 그만 쳐. 지금 인사부에서 난리야.”

“지원자가 너무 몰렸나?”

“‘너무’라고 할 만한 수준이 아니야. 진짜 미친 수준이야.”

“보통 그런 인터뷰는 반감을 보여야 정상일 텐데.”

“시국이 시국이니까.”

오랏트가 나타나기까지 대략 8.5개월 남았다.

하지만 이미 경제는 추락하고 있었고, 범죄율도 폭증했다.

“게다가 한국에는 워낙 고학력 백수가 많았잖아.”

“앞으로는 더 취업 안 될 테니 그냥 지원한 건가?”

“네가 구원자에다가 흙수저, 백수 출신이다 보니 사람들이 더 열광하는 것 같아.”

“윽.”

팩트로 뼈 맞았다.

“아메리칸 드림처럼 느껴지나 보네.”

“그래서 이제는 어떻게 할 거야?”

“GG 업무에 집중하려고. 내가 하는 거야 손 한 번 흔들어 주고, 한 수 지도하는 것밖에 없겠지만.”

“그거 하라고 리디아가 너한테 사장 준 거니까 상관없지. 어느 나라부터 갈 거야?”

“가까운 나라부터 가려고.”

마음 같아서는 미국부터 가고 싶은데, 거기 먼저 가면 중국과 러시아가 극혐할 것이다.

자발적인 협조를 끌어내려면 미국은 뒷순위가 된다.

“일본, 중국을 먼저 가고 두바이를 거쳐 유럽으로 가야겠지. 최종 목적지는 미국이 되겠지만.”

동남아도 가야 하고, 베네수엘라와 호주도 가야 하는데 시간이 되려나 모르겠다.

어째 해외여행 코스 같다.

“일본에 가면 한국 사람들이 ‘이 시국’이라면서 싫어할걸?”

“그러니까 가야지. 국적을 초월해야 한다는 걸 보여 주기 딱 좋잖아.”

일본은 침몰한다는 이야기 때문에 엄청 혼란스러운 상황이니, 안심시켜 줘야 하기도하고.

“온천이나 초밥 때문에 가는 건 아니지?”

“에이. 내가 그런 걸 밝히는 사람인가.”

“시노자키 아오이 때문에 가는 건 아니지?”

“……아니야. 그런 거.”

윤아의 눈이 가늘어졌다.

여기서 약점 잡히면 피곤해질 수 있으니 최대한 얼버무려야 한다.

“윤아라는 세계 최고의 아이돌이 옆에 있는데 내가 왜 그러겠어.”

“잠시 망설였던 것이 수상하기는 하지만 일단은 그렇다고 해 줄게.”

“그보다는 수호 형이 걱정이다.”

높으신 분들이 편법을 써서 벌써 대위 달아 줬더만.

빨리 탈영하라니까 말을 안 듣더니. 쯧쯧.

“설마 말뚝 박는 건 아니겠지?”

탱 노예가 사라지면, 내가 탱커까지 해야 하잖아.

“수호 오빠는 알아서 잘할 거야. 너나 걱정해.”

“그러게. 일단 훈련소에 가서 짐 정리하자. 인수인계는 끝났지?”

“응. 근데 이상한 말을 들었어.”

“뭔데?”

“금태양 있잖아. 따라가겠다던데?”

“지가 뭐라고 따라와?”

“네가 제자로 받아 주겠다고 약속했다면서.”

“…….”

나는 정말 어지간하면 약속을 어기지 않는다. 아무리 작은 약속이라고 해도 그렇다.

“진혁이도 그 말 듣고 자기도 함께하고 싶다고 난리야.”

“진혁이가 누구였지?”

“김저격. 이름 좀 외워라.”

금태양과는 다르게 김저격이라면 받아 줄 만하다.

성격도 좋고, 원거리 정밀 타격도 가능하니까.

태양이는 나랑 포지션이 좀 겹친다.

“그리고 진혁이가 간다니까 지수정도 따라가겠다고…….”

“지수정은 또 누군데?”

“네가 점순이라고 부르는 애.”

이제 생각났다. 점이 많아서 점순이가 아니다.

동백꽃에 나오는 점순이처럼 새침데기라서 그런 별명을 붙여 주었다.

누가 봐도 김저격 좋아하는 거 뻔히 보이는데 늘 틱틱대니까.

“드디어 츤데레 포기했구나.”

“……걔네 커플이야. 훈련소 습격 사건 때 최초의 커플.”

“그 애들이 원흉이었냐? 헤어지면 받아 준다고 해.”

빡!

“너는 진짜 발상이 쓰레기 같아.”

“아니. 눈꼴 시려서 그런 것도 맞지만, 커플 옆에 금태양을 데리고 간다고 생각해 봐.”

나중에는 유혈 사태로 번질 가능성이 크다.

둘 다 잘만 키우면 2인분은 할 수 있는 애들이니.

“에이. 금태양도 뇌가 있는데 그렇게 할까.”

“걔는 뇌가 머리에 없고 아래에……. 아니다.”

안 그래도 태양이는 일본에 데려가기 전에 고자로 만들어 둬야겠다고 생각했었다.

한국 남자들의 명예를 위해서.

“이제 다 결정된 건가. 한울이 의향도 묻고 싶은데 어디에 있어?”

“데이트 중.”

드디어 한울이에게 봄이 오는구나.

키가 커져서 자신감이 올라갔기 때문이 아닐까.

따라서 내 덕이다.

“누구랑?”

“훈련소 애들이랑.”

“애들?”

“여자 다섯이랑 동시에 일 대 오 데이트 한다더라.”

“……쓰레기네.”

“어떻게 홀려놨는지 다섯이 전부 그걸 받아들였어. 중증이야.”

내가 60대 이상의 할아버지들과 하렘물을 찍는 동안 우리 한울이는 젊은 여자들이랑 하렘물을 찍고 있었구나.

이런 간나 새끼…….

들어오기만 해 봐라.

“그러면 한국에 남고 싶어 할 수도 있겠네.”

“오랏트 사태가 터지면 함께하겠지만, 당분간은 별개의 행동을 하고 싶어 할지도 모르지.”

리디아도 없고, 수호 형도 없고, 한울이도 없어지면…….

그 자리를 금태양, 김저격, 점순이가 메꾸면 되겠네.

“그러라고 하자. 대신 자제 좀 시켜야겠어. 나중에 돌아와 보니 칼에 찔렸다는 결과는 보고 싶지 않다.”

“어디서 맞고 다닐 애는 아니지. 그리고 자제는 힘들걸?”

“왜?”

“네가 하라면 그럴 애니까. 그럼 다섯 중에 넷은 너를 극도로 원망할 거야.”

“나중에는 감사하게 될 거다.”

생각해 보니 이거 완전 부모들의 논리 아니야?

내가 한울이의 부모도 아닌데 강제할 필요는 없지.

“아니다. 알아서 잘할 테니 주의만 해 두고 내버려 두자.”

“내버려 두면 다섯이 오십으로 불어나 있을 수도 있어.”

“에이. 설마. 의자왕도 아니고.”

오히려 다섯 여자도 곧 정신을 차릴 것으로 생각한다.

“다 정리되었으면 짐 싸자.”

“여권은 있고, 비자는 필요 없겠고……. 비행기 표는?”

“리디아가 전용기 마련해 뒀으니 그거 타고 가라더라.”

“역시 돈이 좋네.”

좋긴 하지만 자괴감이 느껴지기도 했다.

전 회차에 나는 영국 가려고 택배 상하차를 해서 겨우 표를 구했는데.

그것도 이코노미석이었고.

“참. 애들은 여권 있대?”

“진혁이랑 수정이는 있고, 우영이는 없어서 신청했어.”

“마스터 위저드에게 말하면 프리 패스 되겠지. 근데 우영이가 누구?”

“박우영……. 네가 금태양이라고 하는 애.”

“헷갈리니까 앞으로 그냥 별명으로 부르자.”

“다 동의하면 나도 그렇게 할게.”

내 편의를 위해서라도 동의하게 만들어야겠네.

***

이틀 뒤. 우리 다섯은 전용기를 타고 일본으로 향했다.

자, 이제부터 무대는 세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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