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의 자격-55화 (56/151)

#55. 헌터의 시대 (2)

“우리의 적은 오랏트이고, 인류는 아군입니다. 아군을 죽이는 전쟁 지도자는 없습니다!”

“당신은 프랑스인이니 나폴레옹의 말로 대답해 드리겠습니다.”

이럴 때는 역시 사학과가 좋다.

위인의 명언을 통해 효과적으로 전달할 수 있으니까.

“그대는 군인의 정신이 어떤지 전혀 모르오. 나는 전장에서 성장했소. 나 같은 사람은 백만 명의 목숨도 개의치 않소.”

“독재자에 어울리는 대사로군요.”

“저는 이렇게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들은 절대 아군이 될 수 없다.

오히려 진짜 아군을 노리고, 예측 불가의 피해를 일으킨다는 점에서 엄연히 적이다.

“당신은 대적 불가의 괴물과 싸워야 하는 헌터의 마음가짐을 모릅니다. 저는 최전방에서 성장했고, 그렇기에 가장 많은 사람을 살리는 방법을 압니다.”

욕심을 버려야 한다.

전전 회차 때의 인류는 절멸했다.

전 회차 때는 99.99%가 죽었다.

“그것을 위해서라면 전쟁을 방해하는 수천만의 목숨이 증발한다고 해도 개의치 않습니다.”

그 지옥의 끝에서 수없이 다짐하고, 결심했다.

인류의 30%를 살릴 수 있다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을 것이고.

50%를 살릴 수 있다면 악마에게 영혼이라도 팔 것이며.

70%를 살릴 수 있다면 내가 악마가 된다고 해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을 것이다.

“그런 당신에게 교육의 기회를 베풀고, 성장할 수 있게 보호해 주며, 인권의 소중함을 알려 준 체제는 다름 아닌 민주주의일 것입니다.”

“민주주의를 따르던 저는, 전 회차 때 모두가 죽어 있는 광경을 보며 함께 죽었습니다.”

전쟁 전문가들은 오랏트를 확실히 쓰러뜨릴 궁리를 한다.

그 과정에서 피해를 줄일 방법도 연구한다.

정치 전문가들은 적을 쓰러뜨렸다고 전제한 후, 그다음을 생각하고 걱정한다.

질 경우는 생각할 필요 없다. 어차피 지면 멸망할 테니까.

그러니 서로 계속 삐걱댈 수밖에.

“저 오랏트의 괴물들 앞에서 민주주의와 인권을 부르짖어 보십시오. 그리하여 당신이 살아남을 수 있다면 그 의견을 따르겠습니다.”

이미 세계를 한 번, 실제로는 두 번 멸망시켰던 괴물을 맞이해야 하는 상황.

그 대적을 앞두고 저런다는 게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았다.

역사상 이보다 사치스러운 사람들이 따로 없을 것이다.

“그럴 수 없다면 전쟁의 영역에 참견하지 마세요.”

전초전은 끝났다.

지긋지긋한 논쟁도 더는 질질 끌 수 없다.

이제는 확실히 매듭지어야 한다.

지금 이러는 와중에도 시간은 착실하게 흐르고, 그들이 오기까지 반년도 채 남지 않았으니까.

***

시몬 시뇨레와 경찰들의 보호는 정중히 사절했다.

지키긴 누가 누굴 지킨다고.

대신 내일 열리는 오랏트 대책 협회의 회의에 참여하기로 약속했다.

그러려고 여기 왔으니까.

“그래서 어디로 에스코트해 줄까?”

윤아가 오기 전까지 시간이 남았다.

“두바이에 처음 오지?”

“응. 전 회차에도 여기는 올 일이 없었으니까.”

“이곳은 오일 머니가 집중되는 중동의 금융 허브야. 그래서 꽤 사치스러운 곳들이 많아.”

“두바이도 석유가 많이 나나?”

“고갈됐어.”

그런 것치고는 여전히 상당히 부자 도시라는 느낌이었다.

“대신 중동의 허브라는 컨셉을 선점했고, 교통의 요지이며, 치안이 좋거든.”

“중동에 사업하려면 두바이로 와야 한다고는 들었는데…….”

“정확히 말하자면 두바이 외에는 갈 만한 곳이 거의 없어. 인근이 죄다 내전 중이거나 테러 조직들이 날뛰거든.”

“사우디아라비아는?”

“거기는 지나치게 보수적이고 폐쇄적인 곳이라서.”

이런 곳에 한국이 있었다면 나름 기 좀 펴고 살았으련만.

“덥다. 적당한 실내로 가자.”

“두바이에는 세계 최대의 쇼핑몰이 있어.”

“게엑.”

리디아와의 쇼핑은 그래도 괜찮다.

윤아는 하나하나 입어 보고, 매의 눈으로 철저히 고르는 스타일.

리디아는 “여기서부터 여기까지 다 주세요.”인 스타일.

그래도 쇼핑은 재미가 없다.

“꼭 쇼핑만 한다고 생각 안 해도 돼. 아쿠아리움도 있고, 식당도 좋은데 많아.”

“괜찮네.”

“자.”

리디아가 왼쪽 팔을 살짝 올렸다.

에스코트해 달라는 제스처다.

“알았다.”

그녀의 팔짱을 끼며 쇼핑몰로 향했다.

“솔직히 넌 에스코트(보호)가 필요 없지 않냐?”

리디아의 공식 랭크는 SS급.

아직 SSS급은 나뿐이고, SS급은 전 세계에 20명이 채 되지 않는다.

“미합중국의 전통 무술은 불법인 곳이 많아서.”

“전통 무술이라면서 화약을 쓰니까 그렇지.”

“화약은 미국인의 혼이지.”

화약만 쓰면 다행이다.

원자력까지 쓰지, 아마?

“미국에는 화약 말고 전통 무술이 없어?”

“특수 부대나 해병대가 쓰는 특공 무술도 있어.”

“그거 쓰면 되잖아.”

“팬티 보이잖아.”

“바지 입고 다녀.”

“치마는 바지보다 훨씬 전투적이야.”

“어째서?”

“얼마든지 무기를 숨기고 꺼낼 수 있거든.”

치마에 그런 용도가?

“또 여차할 때는 팬티를 보여 줄 수도 있지.”

“여차할 때가 언젠데?”

“위기의 순간, 잠시 집중을 흐트러뜨릴 때.”

“누가 싸우는데 팬티에 정신이 팔리냐?”

“의외로 엄청 많다.”

리디아는 짓궂은 미소를 지었다.

“예를 들면…….”

스킬을 사용해 아래에서 바람이 솟구치게 했다.

속옷이 보일락 말락 할 때, 그녀 자체가 꺼지듯이 사라졌다.

“이렇게.”

그리고 저 멀리에서 남자 세 명을 기절시켰다.

“거슬렸으면 말을 하지.”

두바이 공항부터 우리를 따라오던 사람들이다.

아마 협회에서 붙여 놨겠지.

“그냥 이런 식으로 쓸 수 있다는 걸 보여 주고 싶어서.”

“역시 웬만하면 쓰지 마라.”

“내 여자 팬티는 내가 지킨다?”

“얕은수에 익숙해지면 진짜배기들에는 역으로 당할 수 있으니까.”

그보다…….

“어째 사람들 시선이 기분 나쁘네?”

리디아가 일으킨 작은 소동에 쇼핑몰 내의 시선이 집중되었다.

하지만 하나 같이 호의적인 시선이 없다.

“헌터 처음 보나?”

아니지. 여기 오랏트 대책 협회가 있는 곳이다.

다른 곳에서는 보기 힘든 하이 랭크의 헌터들도 즐비한 곳이다.

그렇다면 왜…….

삐이익-

한쪽에서 제복을 입은 사내들이 호루라기를 불며 우리에게 다가왔다.

경찰이 벌써 오지는 않았을 테고, 쇼핑몰 내 경비들인 것 같았다.

“혹시 지금 스킬을 사용했습니까?”

“그런데요?”

내가 사용한 건 아니지만.

“이곳은 스킬 금지 구역입니다.”

“뭐요?”

개그인가?

“위법하셨으니 동행해 주십시오.”

회귀하다 회귀하다 별 희한한 상황을 다 보게 되네.

눈을 씻고 봐도 상대에게서는 마나의 기운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대체 무슨 패기야.

설마 옆에 차고 있는 곤봉을 믿고 이러는 건가?

“싫다면요?”

“협회에서 당신에게 수배령이 내려질 겁니다.”

어이가 없어 말이 안 나오는 상황에서 리디아가 이쪽으로 걸어왔다.

“뭐해?”

“여기 스킬 금지 구역이라고 우리를 잡아가겠다는데…….”

“그런 게 있었어?”

“너도 몰랐냐.”

“모를 수도 있지.”

“인정.”

정말 이상한 것은 나나 리디아는 전 세계에 잘 알려졌다는 점이다.

두바이 같은 유명한 도시에서 우리를 모른다고?

…… 협회가 일부러 우리 엿 먹이려고 사주한 건가.

“아저씨. 제가 누군지 몰라요?”

“당신이 누군지는 관심 없고, 법을 어겼으면 대가를 치르셔야죠.”

무표정을 가장하고 있지만, 그의 입가가 실룩샐룩하는 것이 뻔히 보였다.

이제 대충 감이 오네.

호가호위의 전형적인 예다.

“아저씨. 뭔가 착각하시는 것 같은데요.”

“뭐요?”

“협회가 당신을 지켜 줄 수 있다고 봅니까?”

협회는 현존하는 범국가적 헌터 조직 중 2위다.

1위는 GG지만, 기업이라는 한계로 인해 직접 정치나 군사에 간섭하지는 못한다.

반면, 협회는 2위지만 각국의 정부를 등에 업고 광범위한 분야에 영향을 끼친다.

정부 산하의 헌터 특수 부대와도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고.

그렇다 보니 어지간한 헌터는 협회의 정책에 대해 대놓고 불만을 표할 수 없다.

“그동안 어쭙잖은 헌터들을 굴복시키면서 짜릿하셨나 본데…….”

[환상통]을 살짝 걸었다.

아플 정도는 아니지만, 온몸이 꽤 저릴 거다.

“그러다 잘못 걸리면 죽습니다.”

아주 옅은 보라색 빛이 그의 몸에 스며들자 그는 벌러덩 쓰러졌다.

장난감 거짓말 탐지기 수준으로 살짝 걸었는데, 새가슴인 모양이었다.

잠시 후, 경찰까지 출동했다.

헌터로 구성된 경찰로, 준수한 수준의 마나가 느껴졌다.

“당신들도 저 잡아 보시려고요?”

“그건 아닙니다만, 여기서 이러시면 곤란합니다.”

“저 아저씨가 이러는 건 안 곤란하고요?”

경찰들이 식은땀과 함께 침음을 흘렸다.

헌터와 일반인의 결정적인 차이.

그것은 마나를 느낄 수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

아까 나를 체포하겠다는 시점에서, 쇼핑몰 전체에 내 마나가 넘실대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태연하게 날 잡아들이겠다는 저 아저씨는 정말 보이는 게 없는 것이다.

“그래도 여기는 스킬 금지 구역이니 조금만 양해를 해 주시면…….”

“그냥 거지 같아서 여기 안 있으렵니다.”

“예?”

“두바이에서 꺼져 준다고요.”

옆에서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하는 리디아에게 팔짱을 걸었다.

“가자.”

“어디로?”

“경로를 바꾸자. 유럽 패스하고 미국으로 간다.”

협회의 가장 큰 후원자는 유럽 연합이니까.

내 말을 들은 주변 사람들이 일제히 놀라는 기색이 느껴졌다.

얼씨구. 모르는 척하더니 다 알고 있네?

“이제부터는 세계가 망하든 말든, 그냥 한국하고 미국만 왔다 갔다 하련다.”

“미국은 도와주게?”

“그럼! 리디아의 조국인데 내가 손 걷어붙이고 나서야지.”

게다가 미국만 살아 있으면 어떻게든 된다.

“오랏트의 괴물들도 스킬 금지 구역을 잘 준수했으면 좋겠네요.”

무전기를 통해 열심히 보고하고 있는 경찰의 어깨를 툭툭 쳐 주었다.

“이왕이면 괴물들에게 인권도 좀 챙겨 달라고 해 보세요. 저한테만 요구하지 말고요.”

사람들은 참 간사한 면이 있다.

생떼를 부려도 먹힐 사람이나 조직에만 그러니까.

***

리디아와 함께 공항으로 돌아왔다.

슬슬 윤아도 올 시간인데, 그대로 같이 돌아가면 되겠네.

“진짜 귀국하게?”

“어.”

단순한 블러핑이 아니었다.

이건 대리전이다.

쇼핑몰에 있던 사람들이 죄다 스마트폰으로 찍어서 SNS나 미튜브에 올렸을 테니 곧 반응이 나오겠지.

과연 사람들은 인권을 챙겨 주는 친절하지만 약한 이웃을 택할까?

아니면 인권은 못 챙겨 줘도 살려 줄 수 있는 강력한 망나니를 택할까?

전자를 택한다면, 헌터를 쥐어짜 내서 평등을 누리다가 죽을 테고.

후자를 택한다면, 말뿐인 평등의 시대는 몰락한 것이다.

“발톱 숨긴다며.”

“답답해 죽을 것 같은데, 피 안 보고 끝냈으면 잘 숨긴 거지.”

“하아…….”

“너는 정치랑 전쟁 둘 다 잘 알잖아. 내가 이상한 거야?”

“이상하지.”

“인정.”

솔직히 내가 생각해도 내가 좀 맛이 간 것 같긴 했다.

“하지만 틀리지는 않았어.”

“그래?”

“당장 다 죽을 판인데 안 올지도 모르는 미래만 고집하는 건 문제가 있지.”

“오랏트 사태에 비해 스케일은 무척 작지만, 한국에서 비슷한 상황은 참 많이 겪었는데.”

공부, 일, 저축.

힘들어서 자살할 판인데, 나중을 생각하라며 내 현재를 쥐어짜려는 사람들.

아무것도 모르는 시절엔 그 말을 듣고 열심히 공부했다.

대학 졸업장은 받아야 사람 취급 받는다고 해서 밥 굶어 가며 알바해서 겨우겨우 졸업했다.

근데 취업난이라 사학과는 취업이 잘 안 되네?

심지어 취업하기도 전에 오랏트 사태가 터져서 세상이 망해 버렸네?

내가 이 일을 겪고 나서, 미래를 생각하라는 사람들 죄다 뚝배기 깨 버리려다가 꾹 참았다.

“왔다.”

“비행기 오려면 30분 남았는데?”

“윤아 말고.”

협회의 높으신 분들이 무거운 엉덩이 들고 공항까지 와 주셨다고.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