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 헌터의 시대 (3)
“협회 사람들이 왔다고? 안 느껴지는데?”
“쟤들 걸음 속도라면 한 10분 후에 도착하겠네.”
양반은 비가 와도 뛰지 않는 다는 건지, 참 여유롭다.
옆에서 스마트폰을 보고 있던 리디아가 내게 한 영상을 보여 주었다.
“이거 봐 봐.”
불과 30분 전에 내가 저지른 일들이 벌써 미튜브에 올라왔다.
폭발적인 반응과 함께 댓글도 엄청나게 달렸다.
“이 정도 조회수면 광고비 좀 떼어 줘야 하는 거 아니냐.”
“동영상은 GG 공식 계정에서 올렸어. 그보다 중요한 건 댓글. 예상외로 옹호하는 이야기가 많네.”
스킬 금지 구역은 엄연히 법으로 정해져 있는 건데, 그걸 무시한 내가 잘못했다는 의견도 많았다.
하지만 내 편을 들어준 사람은 훨씬 더 많았다.
“베스트 댓글은 뭐야?”
“‘그래서 니들이 대신 싸워 줄 거냐? 싸운다고 해도 이길 자신은 있어?’라고 하네.”
맞는 말이다.
최전방에서 싸우는 내가 그런 것까지 신경 쓰기 힘들다는데, 뭔 말이 그렇게 많은지.
싫으면 자기들이 싸우든가.
“이 댓글도 좋아요 많이 받았네.”
“핸드폰을 줘 봐. 내가 읽을게.”
“영어인데?”
“번역기 돌려 줘.”
“내가 읽어 주는 게 더 정확하겠지만……. 알았어.”
어차피 높으신 분들이 여기까지 오려면 5분은 걸릴 터.
받아 낸 핸드폰으로 댓글을 차분히 읽었다.
- 나는 전 회차에 말단 병사로 그와 함께 싸운 적이 있다. 그렇기에 그의 힘을 확실히 안다. 누구도 그를 대체할 수 없다.
ㄴ 힘이 있다고 마음대로 해도 된다는 건 아니지.
ㄴ 곧 목숨 걸고 싸워야 하는 헌터들 깎아내리려고 하는 건 잘하는 거고?
ㄴ 헌터들만 싸우냐? 그리고 지금 헌터들이 저지르고 있는 범죄를 봐 봐. 내버려 둘 수준인지.
ㄴ 정시출근, 칼퇴근 한 사람과 야근, 출장, 주말 근무까지 한 사람에게 동일한 임금 달라는 수준. ㅉㅉ.
- 큰 힘에는 큰 책임이 따른다.
ㄴ 너도 노력해서 큰 힘을 갖추고, 책임 좀 져 봐라.
ㄴ 헌터는 완전 운빨 아님?
ㄴ 로또 당첨됐는데, 자꾸 전액 기부하라고 하니까 빡치는 거 아니냐.
- Holy shit! 나는 협회에 동조하지 않았어요. 그러니 홀랜드에는 꼭 와 주세요♡
- 왜 다들 그를 보고 못생겼다고 하지? 내가 보기엔 적당히 잘생겼는데.
ㄴ 리디아가 내 남자 넘보지 말라고 여론 조작했다는 것이 학계의 정설.
- 이제부터 협회를 지지하는 정치인들은 다 끌어내린다.
- 나 B급 헌터인데 상황이 너무 거지 같다. 오랏트 나오기 전에는 죄인 취급, 이후엔 전쟁 병기 취급?
ㄴ 꼬우면 너도 저렇게 막 나가든가. ㅋ
ㄴ 안 그래도 한국이나 미국에 귀화할 거다.
ㄴ 지나가던 한국인입니다. 미국에 귀화하시는 것을 추천합니다. 여긴 지옥이에요.
대충 다 이런 패턴이다.
책임을 강조하는 쪽과 ‘싫은데? 내가 왜?’라고 반박하는 쪽.
“이거 잘만 이용하면 의외로 쉽게 해결되겠다.”
“무슨 생각하는지 뻔히 보이네.”
“그게 뭔데?”
“헌터와 일반인 사이에 갈등을 일으켜서 헌터들을 죄다 흡수하겠다는 거 아니야?”
“어떻게 알았냐? 우리나라 정치인들이 잘 쓰는 방법인데.”
“어느 나라든 잘 쓰니까.”
일부러 사회 갈등을 일으키고, 한쪽 편만 들어서 확실한 지지층으로 만든다.
이것만큼 쉽게 안정적인 표밭을 만드는 방법이 없지.
대신 정권을 잡은 후에는 난리가 나지만.
“이야기는 나중에 하자. 저기 오고 있는 게 보이네.”
“발톱은?”
“아직 꺼낼 때가 아니야.”
확실히 숨통을 끊을 수 있을 때.
그때 꺼낼 것이다.
***
“협회에는 인재가 별로 없나 보네요.”
또, 시몬 시뇨레가 나왔다.
협회의 중추라는 건 알아도 왜 계속 이 여자만 내보내는지 모르겠다.
내 비아냥에 그녀는 가만히 있고, 제일 앞장섰던 대머리 남자가 대신 다가왔다.
“안녕하십니까. 협회의 부회장을 맡은 리처드 프리드먼입니다.”
“이름은 많이 들었습니다.”
그는 도시 괴담에나 어울릴 법한 기형적인 헌터다.
[안식]이라는 스킬을 갖고 있는데, 대상자가 죽을 확률을 비약적으로 높여 준다.
얼마나 어처구니없는 스킬이냐면, 이 스킬에 당하면 침대에 굴러떨어져서 ‘낙사’하는 경우도 생긴다고 한다.
누군가에게 살해당하는 꿈을 꿨는데 실제로 죽어 버리는 예도 있다고 하고.
“엄숙한 수확자였죠?”
“마스터 이께서 기억해 주시니 무척 영광입니다.”
“두바이에서 헌터들이 날뛰지 못하는 이유를 알 것 같습니다.”
“제 덕이겠습니까. 질서를 유지하고자 열망하는 많은 사람의 노력이 있었습니다.”
문제는 그의 스킬이 인간에게만 통하고, 오랏트의 괴물들에게는 전혀 효과가 없다.
그래서 엄숙한 수확자(Grim Reaper)라고도 불리지만, 인간 백정이라는 멸칭도 존재한다.
증거를 남기지 않고 언제든 죽일 수 있으니, 신사다운 외모와는 달리 사람들에게 기피된다.
“이곳은 이야기하기 적당하지 않은 것 같군요. 잠시 자리를 옮기시겠습니까?”
“싫은데요. 집에 갈 겁니다.”
“당장 비행기 표를 구하시기는 어려우실 텐데…….”
“전용기가 있으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일부러 불쾌함을 보이기 위해 말을 끊으며 대답했다.
역시 돈이 좋다.
전 회차 때 택배 상하차와 막노동하면서 비행기 푯값을 구하려고 발버둥 쳤던 일이 떠오르네.
“그럼 언제든 출국하실 수 있을 테니, 급한 일이 없다면 잠시만 부탁드리겠습니다.”
수확자는 계속 예의 바른 미소를 지으며 설득했다.
이 정도 냉대면 알아서 떨어져 나갈 법한데.
역시 정치하는 사람들은 대단하다.
“세상에 공짜는 없습니다.”
“다행히 두바이에서는 최고의 대접이 가능할 듯하군요. 원하신다면 초청비도…….”
“아니요. 돈은 필요 없습니다.”
옆에 팔짱을 끼고 있는 리디아를 가리켰다.
“옆에 에스코트비를 넉넉히 챙겨 주는 아름다운 레이디가 있어서요.”
“제가 해 드릴 수 있는 게 있다면…….”
“당신이 유언장을 써 준다면 잠시 시간을 내어 드리지요.”
내 도발에 주변 사람들이 하나같이 경악하는 표정을 지었다.
거절한다면 집에 가면 되는 것이고, 승낙한다면 녀석의 목숨 줄을 쥐게 되는 것이다.
“알겠습니다. 곧바로 써서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그러나 수확자는 눈 하나 깜빡이지 않고 웃으며 대답했다.
역시 정치하는 인간들의 속은 알 수가 없다.
***
리디아는 윤아를 기다리기 위해 공항에 남고, 나만 잠시 그들을 따라 공항의 한 시설 안에 들어갔다.
먼저 약속한 유언장을 받아 내었다.
“역시 마스터 이는 당당해서 좋습니다.”
“어떤 것이 말이죠?”
“저는 스킬이 스킬인지라 꺼리는 사람들이 많거든요.”
“원래는 소심했었는데, 워낙 많은 일을 겪다 보니 어지간한 건 다 사소해 보이더군요.”
[안식]도 제한이 있을 것이다.
예를 들면 상대가 강하면 강할수록 쓰기 힘들다든지.
무엇보다 나에게는 희대의 개사기 스킬인 [이능 간섭]이 있다.
늘 그것을 두르고 다니기에 [안식] 역시도 의미 없다.
“먼저 쇼핑몰의 무례에 대해 사과드리겠습니다.”
“왜 그런 얼토당토않은 법을 만든 거죠?”
“두바이는 항상 테러리스트들의 위협에 시달려왔습니다. 이제는 사람 자체가 무기가 된 시대이니 더 조심해야 하니까요.”
“훌륭한 생각입니다. 테러리스트들이라도 스킬 금지 구역은 잘 준수해 주겠죠.”
내가 그걸 몰랐네.
근데 그렇게 법을 잘 지키는 인간들이 어쩌다가 테러리스트가 되었을까?
“위험한 사람들은 여기 베르사유의 성녀께서 미리 예언해 주십니다.”
“그러면 스킬 금지 구역도 필요 없는 것 아닌가요?”
“도둑질이라든가, 다혈질인 사람에게 경고하기 위함이죠.”
아까는 테러리스트 때문이라며.
말 바꾸기 클라스 보소.
“저도 좀 다혈질인데, 제가 이럴 것이라고는 예언하지는 않으셨나 보네요.”
옆에 있던 시몬 시뇨레가 대화에 끼어들었다.
“당신의 일은 이제 예언의 범위에서 벗어났습니다.”
“그게 무슨 말이죠?”
“어찌 된 영문인지 잘 모르겠습니다만……. 이번 회차 때부터 어떤 미래에도 당신이 보이지 않습니다.”
“저만요?”
“자세한 건 기밀이지만, 조금 더 있습니다.”
“위상이 많이 떨어지겠네요.”
감이지만, 그녀가 미래를 볼 수 없는 인물은 아마도 반전 상태인 이들일 것으로 생각되었다.
“일부러 약점을 말씀해 주시는 이유가 뭡니까?”
“그만큼 당신의 협조가 절실하다는 의미입니다.”
눈가가 촉촉해지는 그녀를 달래며 리처드 프리드먼이 다시 나섰다.
“마스터 이께서 협회를 백안시하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
“아시면 좀 안 그랬으면 좋겠습니다만.”
나도 좋게 좋게 하고 싶다.
좋은 동료가 될 수도 있는 사람과 굳이 척을 지고 싶지는 않으니까.
“저희의 스탠스는 바뀐 적이 없습니다. 바뀐 것은 마스터 이의 마음가짐이죠.”
“전 회차에 실패했으면 이번에는 달라져야 하는 것 아닙니까? 이번에는 상황도 크게 바뀌었는데요?”
전 인류가 회귀했으며, 그중 3할에 가까운 회귀자는 헌터다.
그들 중 대부분은 슬픈 기억이나 악의를 가지고 있다. 그런데도 이전과 같은 방식?
“저는 평화롭게 이상을 논하고 있는 여러분들이 정말 이해가 가지 않아요.”
“마스터 이께서는 세상을 어떻게 바꾸고 싶습니까?”
“세상이 바뀐 적이나 있습니까? 이름만 바뀌었죠.”
원시 사회부터 현대 사회에 이르기까지 언제나 머릿수가 많은 쪽이 이겨 왔다.
동양 쪽에서는 이를 대변하는 말이 있다.
‘민심이 천심이다.’
머릿수 많은 쪽을 따라야 한다는 뜻이며, 내 편을 최대한 많이 만든 쪽이 이겨 왔다는 이야기였다.
다른 말로 하자면, 그동안의 사회는 언제나 대중을 잘 선동하는 쪽이 승리했다는 뜻.
“그렇습니까? 원시 사회, 봉건제, 절대 왕정, 제국 시대에 비하면 지금 사회는 모든 면에서 많이 발전한 것 같습니다만.”
“그 노력을 무시하는 것이 아닙니다. 덕분에 저도 많은 혜택을 받았죠. 하지만…….”
문제는 아무리 잘 선동을 해도 오랏트에는 먹히지 않는다는 것.
불행하게도 오랏트에게는 감수성이라는 게 존재하지 않으니까.
“그러다가 세상이 망하면 누가 책임집니까?”
큰 힘에는 큰 책임이 따른다며 강한 헌터일수록 당연하다는 듯이 사지로 보내 버렸다.
돌아온 것은 보상이 아니었다.
일반인들의 인권을 위한, 실제로는 권력을 유지하기 위한 헌터들에 대한 억압이었다.
그걸 본 헌터들은 힘을 감추고 뒤로 숨거나, 강해지려는 노력 자체를 안 하려고 한다.
누군가 나서서 구해 주겠지 하면서.
대체 이거 누가 만든 개판이야?
“마스터 이께서 지향하는 사회가 헌터를 중심으로 한 신분제의 복귀입니까?”
“개인의 힘이 집단을 힘을 뛰어넘은 순간 세상은 이미 크게 바뀌었습니다. 더 이상 과거의 방식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되었죠.”
“선민의식은 매우 위험합니다. 우리는 역사를 통해 그 점을 배웠지 않습니까?”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아니, 생각했습니다.”
마스터 위저드와 만났을 때만 해도 확실히 그런 생각을 했었다.
한국, 일본, 중국에서 여러 사건을 겪고 난 지금은 생각이 바뀌었다.
“하지만 이대로 세상이 망하는 것보다 차라리 그게 더 좋을 것 같습니다.”
“역시 영화에 나오는 히어로는 현실에서 나타나기 어렵군요.”
“영화니까요. 현실은 책임보다 업보만 따르는 경우가 많죠.”
이상은 집어치우고, 어느 인간이 그렇듯 헌터도 희생에 대한 대가와 보상을 요구하는 상황.
이제 너희들의 선택만이 남았다.
인정하든, 인정하지 않든 세상은 크게 바뀔 것이다.
헌터의 정점에 선 내가 그렇게 결정했으니까.
또, 일반인들은 몰라도 헌터 중 상당수는 내 의견에 동조할 것이며…….
그들을 놓친다면 너희들의 몰락은 기정사실이다.
“이제부터는 헌터의 시대입니다.”
오랏트 대책 협회에서 이런 설득을 해야 한다는 것 자체가 심각한 막장이라는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