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의 자격-68화 (69/151)

#68. 아비뇽의 괴물 (5)

전 회차 때.

그녀는 일반인임에도 호흐마에게 세뇌되지 않은 매우 희귀한 사람이었다.

“소피아. 전 회차부터 계속 악연으로 엮이네.”

“이번에는 직접 죽이실 건가요?”

전 회차는 기억은 회귀했어도, 힘은 회귀하지 않았던 상태.

구해달라는 그녀의 애원을 뿌리치고 호흐마와의 싸움에만 집중할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나에게 저주와 원망의 말을 남기고 죽었다.

“이번이라면 구해 줄 수도 있었어. 근데 네가 선을 넘었네.”

“그 선은 누가 정하는 것입니까!”

“내가.”

“역시 당신은 구제불능의 쓰레기입니다.”

“이미 만수무강할 정도로 욕먹고 있다. 조금 더 보태진다고 해도 아무 문제 없어.”

비난이 먹히지 않는다는 걸 깨달았는지 그녀는 스탠스를 바꿨다.

“오해입니다. 마르세유 지부는 그냥 반면교사였을 뿐이에요. 다른 곳은 그렇지 않아요.”

“납치하면 안 되고, 마약 하면 안 된다는 걸 모르는 사람도 있나?”

알면서도 욕망 때문에 하는 거지.

“그런 반면교사를 내세우면서 뭘 보여 주고 싶었어?”

“헌터에게는 억지력을. 비 헌터에게는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주고 싶었습니다.”

“협회의 사상과 비슷하네. 차라리 그들과 함께하지 그랬냐.”

“그들은 너무 온건적이었어요. 세상을 바꾸려면 때로는 극단적인 수단이 필요한 법입니다!”

“그게 바로 나야.”

순간 그녀는 할 말을 잃었다.

그녀의 논리대로라면 내가 그녀를 죽여도 이상하지 않으니까.

마찬가지로 누군가가 날 죽이러 와도 특별할 건 없다.

“아비뇽의 헌터 비율이 늘어난 거. 마르세유에서 쫓겨난 헌터들이 여기로 왔기 때문이지?”

“…… 그 짧은 시간에 잘도 알아내셨군요. 정녕 악마입니까?”

“내가 악마라는 건 부정하지 않겠지만, 너희도 악마야.”

“양비론은 됐습니다.”

“힘의 통제에 대한 편집증적인 광기. 그것이 너희라는 악마다.”

아비뇽이라는 느긋한 도시에 도사리고 있는 인위적인 악마지.

“우리는 정의입니다.”

“그럼 일반인도 할 수 있다는 걸 보여 주는데, 헌터를 깎아내리는 게 왜 필요하지?”

“헌터는 강력하니까요. 말로 좀 억누른다고 해서 그것이 뭐가 문제가 됩니까!”

“펜은 칼보다 강하다. 그러니 펜을 함부로 휘두르면 칼보다 위험하지 않겠냐?”

“그건 어디까지나 은유입니다. 실제로는…….”

“은유가 아니라 진짜야. 문제는 나나 오랏트의 괴물들에게는 통하지 않는다는 거지.”

적에게는 통하지 않고, 아군에게만 통하는 무기를 휘두른다.

그것도 안 좋은 쪽으로.

미친 거지.

“인권은 좋아. 하지만 그로 인해 전력을 깎아 먹는다면 두고 볼 수 없어.”

그 악마에 의해 아비뇽의 헌터들은 물론, 서유럽 전체의 헌터들이 거세되었다.

거세되지 않은 헌터는 정상에 있는 헌터, 혹은 음지로 간 헌터뿐이다.

“헌터와 비 헌터가 공존할 수 있는 세상을 만들고 싶었습니다.”

“넌 그런 주장을 하고 싶은 게 아니야. 일반인들의 방패로 네 권익과 안전을 지키고 싶은 거지. 내가 그런 새끼들 한둘 보는지 아냐.”

“당신이 무엇인데 제 이상마저 폄하합니까!”

“아니라면 행동으로 증명해.”

모두를 위한다는 인간이 한쪽에게는 일방적인 희생을 요구하고.

필요하다면 무고한 사람을 제물로 바치는 거나, 통계를 조작하는 것도 거리낌 없이 해낸다.

그게 인권이라고?

이권아니고?

“전 당신에게 아무것도 증명할 게 없어요.”

“그렇다면 너의 주장은 공허한 메아리가 되겠지.”

일반인은 굳이 논문까지 보지 않아도 알 수 있다는 소리하고 있네.

“나도 무엇이 옳은지는 알아. 무엇이 이상적인지도 알고.”

“아시면서 왜…….”

“그 이상으로 현실을 아니까.”

논문까지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지만, 직접 경험해 보지 않아서 모르나 본데…….

“예를 들어 누군가가 일반인은 헌터보다 더 잘할 수 있다고 근거 없이 주장했다고 치자. 대부분 ‘그럴 수도 있겠지’하고 받아들이겠지.”

너의 추종자들은 맹신할 테고.

“근데 괴물들은 안 그런다고. 말이 끝나기 전에 그냥 죽인다고. 그 차이를 모르겠어?”

인류의 역사에서 이긴 세력은 언제나 둘 중 하나였다.

앞선 문물이나 전략·전술을 보유한 쪽이거나.

정의가 자신에게 있다고 잘 선동한 쪽이거나.

“우리가 착하다고, 정의는 우리에게 있다고 아무리 선동해도 적은 알아먹지도 못하고.”

하지만 이번에 맞이할 적은 다르다.

“그나마 대화할 수 있는 몇몇 보스들은 ‘어쩌라고?’ 하면서 그냥 죽이러 온다.”

선동은 전혀 통하지 않고.

실질적인 강함은 저쪽이 한참 위.

“그런 적을 상대로 고고한 이상을 들먹이며 아군을 자꾸 위축시키는 게 대체 무슨 의미가 있는데?”

정작 본인은 싸우지도 않고 말이다.

“만약 우주에 너희의 주장에 공감하며 오랏트랑 맞짱 뜰 수 있을 정도로 강력한 종족이 있다면, 그들이 우리의 메시지를 듣고 도와주러 온다면 또 모르지.”

세계 2차 대전 때처럼 강력한 지원군을 기대할 수도 없고.

오직 현재 있는 것만으로 아등바등 꾸려서 해야 한다.

“근데 그게 아니라고 등신들아!”

“그럼 일반인들은 그냥 손 놓고 죽으라는 뜻입니까!”

순간 할 말을 잊었다.

“우리도 살고 싶습니다. 대체 어떻게요? 운에만 기대어야 합니까?”

“그래서 최대한 전력을 모아 초기에 끝장내려고 준비하고 있다.”

“우리에겐 오랏트의 괴물들도 문제지만, 마음대로 날뛰는 헌터들은 더 큰 위협입니다.”

“그래서 헌터에 의한 범죄는 가중 처벌을 허용했다.”

“생활형 헌터들은요?”

나도 미처 생각하지 못한 문제.

“경제 공황 상태에서 자영업자들은 그들에게 마지막 남은 생존의 가능성마저 박탈당했습니다.”

지원형 헌터가 일반인 만 명분의 일을 할 수 있다면, 일반인 만 개의 일자리가 사라진다는 걸 생각하지 못했다.

“그래서 헌터들을 최대한 한곳으로 모았습니다. 헌터는 헌터끼리, 일반인은 일반인끼리 경쟁하라고요.”

아비뇽의 악마는 편집증적인 광기에서 나왔지만.

아비뇽의 괴물은 생존의 위협을 느낀 공포에서 만들어졌구나.

하지만…….

“모순이네.”

“예?”

“일반인도 할 수 있다며. 근데 경쟁은 못 하겠어? 일반인 할당제라도 만들어 줄까?”

나중에는 일반인 전용 대학도 만들고, 아파트도 만들고, 주차장도 만들고, 도서관도 만들어야겠네?

“인류가 스킬과 마나를 얻기 전부터 재능이라는 건 가혹했어.”

그녀는 프랑스의 톱 배우이자, 세계적인 미녀.

“네가 간단하게 돈을 벌고 인기를 누리는 동안, 꿈만 먹고 살았던 지망생들이 얼마나 많았을지 짐작해?”

“저는 엄청나게 노력했습니다. 당신이 상상도 할 수 없을 만큼!”

“너 이상으로 노력한 사람 중 재능이 없어 빛을 못 본 사람은 훨씬 많겠지.”

그것이 재능의 가혹함이고.

“성공한 사람은 모두 노력했어도, 노력한 사람이 모두 성공하는 건 아니니까.”

인간이 평등할 수 없는 근본적인 원인이다.

“사상 논쟁은 여기까지다. 준비할 시간은 충분히 줬으니 이제 와라. 재능의 가혹함을 알려 줄 테니까.”

슬프다.

이번에도 내 선택은 최악과 차악밖에 없는 것 같다.

미리 알았다면 최선이라는 선택지도 나왔을까?

***

나타스는 붕괴했다.

나는 마르세유 지부와 아비뇽 본부만 두들겼을 뿐이지만, 곧이어 후속대가 도착했다.

리디아의 정치력과 교섭력이 빛을 발했고, 프랑스의 특수 경찰들이 움직였다.

하지만 한 번 퍼져 버린 사상은 없어지지 않겠지.

상관없다. 오랏트 사태가 끝날 때까지만 조용히 있으면 되니까.

“결과 나왔어.”

“어때?”

“네가 알아낸 정보가 맞더라. 이거 봐 봐.”

리디아가 준 서류 한 장.

거기에는 미스트랄 제작 방법이 쓰여 있었다.

“지구도 회귀해서 광석을 캐내야 하는 줄 알았더니…….”

“미스트랄이야말로 정의가 존재한다는 증거가 아닐까?”

“무기는 무기일 뿐. 다루는 건 사람이야.”

헌터에게 살해당한 일반인.

정확히 말하자면, ‘마나에 의해 살해당한 일반인’을 화장하면 주홍빛 결정이 나온다.

그것은 철과 비슷한 성질을 지녔으며, 아이러니하게도 헌터를 무력화하는 이능을 가졌다.

마치 원망과 증오를 형상화한 것 같다.

“작명 센스가 별로네.”

“뭐가?”

“나라면 미스트랄 같이 온화한 이름이 아니라 ‘바스티유’ 같은 이름을 붙였을 거야.”

힘 있는 자가 힘없는 자를 억압한다면 너희도 결국 죽을 것이다.

이런 메시지가 확실히 전해지지 않았을까?

“그 이름, 소피아가 붙였다더라.”

“그래?”

“그녀 나름대로 진짜 공존을 하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그럴지도.”

“너무 괴로워하지 마.”

방금 네 말 때문에 더 괴로워졌는데.

“당신이 걷는 길은 제가 짐작할 수도 없을 만큼 험난하고 위험한 길.”

리디아가 음에 맞춰 노래를 불렀다. 언뜻 들으면 한국어로 들리지만, 프랑스어로 된 노래였다.

“아플 때도 있겠고. 슬플 때도 있겠죠. 어쩌면 한 사람을 죽이고 싶을 정도로 괴로울 수도 있습니다.”

여기서 한 사람이란, 자기 자신을 의미한다.

“하지만 당신의 등만 쫓고 있는 이들이 있습니다. 그러니 멈추지 말고 달려가 주세요. 앞만 보며 힘껏.”

이 노래의 가사는 다름 아닌 꼬맹이가 지었다.

루이스가 전 회차 때 내 핸드폰에 녹음한 내용.

리디아가 해석해 주면서 무척 마음에 들어 했었다.

“이제는 뒤나 옆도 봐야 할 것 같은데…….”

“삐딱하게 듣지 말고.”

“그럴 리가 있겠냐. 근데 웬 노래야? 음이 잘 어울리네.”

“문장이 마음에 들어서. 회귀한 후에 작곡가를 시켜서 노래로 만들었어.”

돈도 많다. 진짜.

“얼마나 들었냐?”

“센스 없게 그런 거 묻는 거 아니야. 세상에는 돈으로 살 수 없는 가치라는 게 존재하니까.”

“돈이 부족했다는 뜻이 아닐까?”

“너라면 꼬맹이의 말을 잊어먹는 대가로 얼마를 받겠어?”

“…….”

순간 할 말을 잊어버렸다.

가치를 헤아리다가 결론을 내었다.

“내 기억은 비싸다. 돈으로 살 수 없을 만큼.”

“하여간 츤데레라니까.”

***

시간이 흘러 브뤼셀 회의가 다가왔다.

마주치는 사람마다 안 좋은 시선을 보내올 것으로 생각했는데 의외로 굉장히 차분했다.

“오. 마스터 이. 다시 만나게 되어 반갑습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이제는 국왕 전하라고 불러 드려야 할까요?”

“그래도 되고, 안 그래도 됩니다. 하하.”

이번 브뤼셀 회의에는 이례적인 인물이 참여했다.

엘리자드 여왕의 뒤를 이어 새롭게 왕위에 오른 인물.

죽기 전에 왕위에 못 오를 것이라 평가되었는데, 오랏트 사태에 대한 우려로 73세에 극적으로 즉위한 자.

안찰스 필립 윈저 아서스.

“케테르에 대한 대비는 잘 되어 가고 있습니까?”

“왕가는 군림하되 지배하지는 않습니다.”

“그래도 런던에서 나타나는데 왕실 근위대라도 정비를…….”

다른 오랏트의 보스들이라면 모를까, 케테르는 화기가 직빵이니.

그냥 개미라고 생각하면 편하다.

더럽게 큰.

“영국에는 유능한 장성들이 많으니 좋은 답을 내어놓았을 겁니다.”

“…….”

영국 성님들.

안찰스 왕세자가 왕위를 계승하게 둔 건 통한의 실수인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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