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 전후처리
군인 피해 약 12만.
헌터 피해 약 1천.
민간인 피해 약 1,150만.
“엄청난 피해기는 하지만…… 이만하길 다행이다.”
“전 회차 때에 비하면 확실히 적긴 하지.”
“영국이 터지면서 사상자는 6천만, 재산 피해는 측정 불가였으니까.”
세계적인 강대국인 영국 자체가 사라졌으니, 모르긴 몰라도 재산 피해는 경 단위로 났을 것이다.
“그래도 겨우 일주일 만에 진압했는데 재산 피해가 생각보다 큰데?”
“핵 때문에…….”
“아. 맞다. 핵 쏘라고 지시한 놈들 누군지 알아 놨지?”
“아니. 귀찮아서 안 했어.”
“와우. 리디아가 아주 순해졌네.”
“대신 산 채로 잡아 두라고 지시해 놨어.”
“역시 우리 마망.”
좀 이상한데?
“핵을 쏘라고 지시할 정도면 대통령도 껴 있는 거 아니야?”
“인도에서 대통령은 바지 사장이고 실제로는 총리가 명령한 모양이야.”
“대통령이나 총리나 국가 수장이잖아. 그런데도 잡아 둔다고?”
“모든 반발을 무릅쓰고 강행하려고 했는데 생각보다 쉬웠어.”
“왜?”
“인도는 지방 분권이 강하거든. 핵을 쏘자마자 주지사들이 집단 반발해서 들고 일어났어.”
“그래도 머리가 사라지면…….”
내 대답에 리디아가 피식 웃었다.
“와우. 우리 sweet baby가 많이 유해졌네.”
“대체할 사람은 정해 놓고 잡자는 거지. 지금 혼란기니까.”
“인도도 강대국이야. 이런 상황도 대비 안 했을 것 같아?”
“조지는 데 아무 문제 없다는 뜻이구나.”
“원래는 산 채로 가죽을 벗겨 버리려고 했는데 안 그래도 될 것 같아.”
“어떻게 하게?”
“인도 국민이 엄청 뿔난 상태거든. 알아서 탄핵하고, 알아서 사형할 것 같아.”
“이런 것도 전 회차에는 없었던 일이네.”
그때는 분노할 국민도 다 죽어서 이런 혼란이 없었는데.
“천만이 죽고 수천 조의 재산 피해가 났지만, 가해자는 말이 안 통하는 괴물이잖아. 살아남은 13억 국민이 분노할 대상이 없는 거지.”
“인도 국민으로서는 핵을 쏜 놈도 엄연히 가해자구나.”
“그렇지. 가만히 내버려 둬도 살아남지 못할 거야.”
“타국으로 망명…….”
“자국의 하이 랭크 헌터들이 피폭으로 죽을 뻔했는데, 어떤 나라가 받아 줘?”
“아멘…….”
그가 반면교사가 되어서, 다시는 이런 트롤링이 발생하지 않기를 바란다.
“우리도 욕먹고 있지는 않아?”
“아니. 전혀.”
“이상하네. 그렇게 얌전할 사람들이 아닌데.”
적이 어디로 올지도 몰랐던 거냐!
그런 난리를 쳐놓고 이렇게 큰 피해가 생길 때까지 뭐한 거냐!
이런 반응 분명히 나올 거로 생각했다.
“예상외의 등장, 전보다 강해진 힘, 좋아진 지능, 핵이라는 예측 불가의 사태.”
“언제는 그런 거 따지고 욕했나.”
“게다가 윤아를 비롯한 치료 헌터들이 큰 활약을 했고, 방사능마저 정화해 줬잖아.”
그런 사정을 고려해 줬다기보다, 인도인을 제외하면 딱히 피해 본 게 없어서 이해해 주지 않았을까 싶다.
“또, 세계가 합의했잖아. 앞으로 3년 동안 헌터에 대한 부정적인 표현을 <엄격히> 제한한다고.”
“그러네. 솔직히 예상외의 사태에도 우리 정말 잘했잖아.”
“전 회차처럼 영국에 나타났으면 피해는 훨씬 줄었겠지. 하다못해 핵만 안 쐈어도 더 괜찮았을 거고.”
“응. 이렇게까지 했는데도 욕먹으면 싸우기 싫어질 것 같아.”
나뿐만 아니라 목숨 걸고 싸웠던 사람들 다 그런 생각을 하겠지.
사기가 떨어지면 다음 보스를 대비할 때 큰 문제가 된다.
“욕하고 싶겠지만, 지금처럼 딱 3년만 참아 줬으면 좋겠다.”
“심정은 이해가 가?”
“그렇지. 가족이나 친구가 죽었을 수도 있고, 평생을 모은 재산이 하루아침에 사라졌을 수도 있는데. 욕 안 나오는 게 이상하지.”
그걸 본 사람 중에 피해자들에게 공감하는 사람도 있을 테고.
“하지만 이건 인간이 일으킨 전쟁이 아니야. 그 점은 반드시 명심해야 해.”
“그래. 그 괴리에서 혼란이 발생하고 있지.”
“맞다. 의약품이랑 보존 식량 지원은 어떻게 됐어?”
“우리가 작전을 실행하는 사이 각국에서 급파한 배가 싣고 왔어. 문제없어.”
오랏트 사태를 대비해 세계는 보존식, 의약품, 군수 물자를 어마어마하게 생산했다.
말기에 가면 좀 모자랄 수도 있겠지만, 당장은 걱정이 없다.
“그리고 이번 일에도 나쁜 일만 있는 건 아니었어.”
“이 시국에 좋을 일이 있나?”
“첫 번째. 케테르를 잡았으니 네 무기도 만들어질 거고, 이지스도 완벽해질 거야.”
“난 안 써 봤지만, 이지스 꽤 좋은 것 같더라. 헌터 피해가 상당히 줄었어.”
S랭크 이상으로 이루어진 30만의 정예 헌터들.
피해가 겨우 1천밖에 안 나왔다는 것은 그만큼 효과가 입증된 것이다.
“두 번째. 너의 가치가 올라갔어.”
“나야 언제나 상한가 아니었어?”
“사실 몇몇이 목이 터지라고 주장해서 그렇지, 상당수가 의구심을 품고 있었으니까. ‘진짜 마스터 이 아니면 안 되는 건가?’라는 의문.”
“이제 곧 무수한 악수의 요청이 오겠군.”
1회차 때는 그럴 나라가 없어서 거의 못 받았지만, 2회차 때는 받은 훈장만 해도 한 트럭이었다.
나라별 최고 무공 훈장은 거의 다 싹쓸이했다고 보면 된다.
“이번에도 초기 피해를 막는 결정적인 역할을 했고, 여왕을 포함해 혼자서 절반 이상을 잡았잖아.”
“내가 잡았다고 알려진 것 중 반은 핵이 죽였는데.”
졸병들이었지만.
“그 부분은 명확히 해야 하지 않을까? 내가 공을 채간다는 소리 들리면 문제가 생길 텐데.”
“차라리 그게 더 나아.”
“왜?”
“네가 안 받으면 핵을 쏜 인간들이 재평가될 수 있잖아. 일단은 그냥 넘겨. 정 마음에 걸리면 다 끝나고 나서 정정하고.”
“그럽시다.”
어차피 다 끝나고 나면 은거할 거니 지지든 볶든 마음대로 해라.
“케테르를 생각보다 일찍 잡았는데 호흐마가 나타날 때까지 뭐하지?”
“개선식, 훈장 수여식, 피해자 영결식, 다음 보스 대비.”
“……호흐마나 대비하지 그런게 뭐 중요하다고…….”
호흐마는 올해 나타나는 보스 중 제일 짜증 나는 녀석.
[정신 오염]에 당하면 호흐마를 죽여도 세뇌가 안 풀린다.
즉, 그 인간들을 전부 다 죽이는 수밖에 없다.
“호흐마가 마지막에 나왔으면 방법이 있겠는데…….”
“무슨 말이야?”
“[정신 오염]에 당한 인간들. 오랜 시간을 들여 차분히 돌보면 회복할 가능성이 있기는 하잖아.”
하지만 4개월 단위로 보스가 등장하는데 [정신 오염]된 인간들을 케어해 줄 시간은 없다.
다 죽여야 한다.
“그러네. 그게 문제네. 호흐마가 티바트에 나타난다는 확신이 없어진 이상 문제가 심각해졌어.”
“개선식, 훈장 수여식은 패스하자. 사기를 올리는 것도 좋지만 축포는 함부로 터뜨리면 안 돼.”
“정상들하고 이야기해 볼게.”
“너는 이제 회의에 가나?”
“응. 인도네시아로 가.”
“고생하네.”
“네 활약 덕분에 이제는 발언권이 엄청 강해져서 편할 거야.”
전쟁의 결과는 외교에 큰 영향을 미친다.
과거 귀주대첩에서 강감찬이 거란을 박살 내자, 동북아의 국제정세가 오묘해졌다.
고려가 요나라(거란)에 붙느냐, 송나라에 붙느냐에 따라 흥망성쇠가 결정되었기 때문이었다.
그 덕에 고려의 사신들은 기선 제압과 실리를 얻기 위해 수십 년간 송나라에 가서 온갖 행패를 부렸다.
송나라에서 선물로 준 걸 보는 앞에서 때려 부숴도 눈치만 보고 굽신댈 뿐 뭐라 하지 못했다.
그래서 당시 유명한 시인 소동파는 고려를 엄청 싫어했다고.
“수호 형은 귀국 준비하고 있고, 한울이도 여자 친구를 만나러 귀국한다고 하고, 윤아는?”
“부상자 치료.”
“여전하네.”
“너는?”
“나는…… 대비해야지.”
호흐마를.
***
각자 전후 처리를 위해 뿔뿔이 흩어진 사이, 나는 [공간 도약]으로 프랑스에 갔다.
목적지는 프렌 교도소.
인도에서의 활약 덕분인지, 몇 번의 깽판 덕분인지 프랑스 정부에서는 흔쾌히 들여보내 주었다.
“안녕. 잘 있었어?”
“……저를 조롱하러 오셨습니까?”
“아니. 확인할 게 있어서.”
면회 대상자는 소피아 마흐땅.
나타스 사건으로 종신형에 처한 프랑스의 천재 배우였다.
“혹시 들었는지 모르겠지만, 예상과는 달리 케테르가 인도에서 나타났어.”
“들었습니다.”
“나는 이 이유가 엘리자드 여왕이 인도로 갔기 때문이라고 생각해.”
나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그리 생각한다.
전 회차와 눈에 띄게 달라진 점이라면 엘리자드 여왕이 인도로 피신 갔다는 것이니까.
“피뢰침 역할을 한 건지, 아는 형의 말 대로 특정 인물이 오랏트를 잉태를 한 건지는 모르겠어.”
“……그래서요?”
“두 번째 보스, 호흐마는 어디서 나타날까?”
“제가 알 리 없지 않습니까! ……설마?”
“난 네가 호흐마의 숙주라고 생각한다.”
내 말에 그녀의 안색이 새하얗게 질렸다.
“어, 억측입니다. 저를 이 꼴로 만들어 놓고 이제는 죽이려고 명분까지 지어 내십니까!”
“전 회차 때 너는 영화 촬영을 위해 티바트로 갔었지. 티바트 어디였어?”
“…….”
“알아보니 정확히 호흐마가 나타난 자리야. 기가 막힌 우연이지?”
그녀에겐 불행한 우연이겠지만.
“다음. 헌터도 버티기 힘든 [정신 오염]에서 너는 자유로웠지.”
“일반인이라고 모두 [정신 오염]에 견딜 수 없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극소수지. 그것도 아주 극소수. 그중엔 네가 있고. 기가 막힌 우연이지?”
내가 우연이라고 할 때마다 그녀는 움찔움찔했다.
피폐해진 그녀의 모습은 대화가 진행됨에 따라 점점 더 처절하게 변해 갔다.
“내가 스티그마라는 기술을 익힌답시고, 팔자에도 없는 카발라라는 신비주의를 공부했거든.”
“…….”
“혹시 알아? 소피아라는 이름. 어원이 그리스어더라.”
“당신은 진짜 악마입니다.”
“그리스어로 소피아(Σοφία)는 지혜를 의미해. 그리고 호흐마는 지혜를 상징한다더라. 기가 막힌 우연이지?”
기가 막힌 우연이 세 번 반복되었다.
확신할 수는 없지만, 그녀를 죽임으로써 수천만, 수억을 살릴 수 있다면 불확실하더라도 해야 한다.
“죽이려면 당장 죽이세요! 더는 사람 비참하게 만들지 말고!”
“아니. 안 죽일 거야.”
“네?”
“나타스 사건 때 널 죽이려고 하니까 뭔가 굉장히 위험한 예감이 들었거든.”
죄책감은 없었다. 어차피 그녀는 죽을죄를 저질렀던 사람이니까.
하지만 정말 불길한 가능성이 떠올랐다.
그녀를 죽이면 정말 호흐마는 나타나지 않는가.
오히려 폭주한 상태로 나타나 더 큰 피해를 일으키지는 않을까.
“너에게 거부권이 없는 제안을 하겠어. 하지만 그렇게 나쁜 제안은 아닐 거야.”
“……거부권이 없다면 그냥 통보하세요.”
“난 너를 남극으로 보낼 거야.”
“남극…… 이요?”
“남극의 극점에 아문센-스콧이라는 미국 기지가 있어. 넌 호흐마가 나타날 때까지 거기서 시간을 보내게 될 거야.”
[정신 오염]의 범위는 매월 반경 500km씩 증가한다.
그러니 남극에는 호흐마가 강림한다고 해도 피해가 없다.
호주에 영향을 주기 전에 먼저 쓰러뜨릴 테니까.
“만약 정말 오랏트의 보스가 인간을 숙주로 나타난다면 이것으로 증명되겠지.”
“차라리 달로 보내시지 그러세요?”
“아무리 나라도 달에서 싸우기는 힘들다.”
자외선이나 방사선은 둘째치고 산소가 없으니까.
“호흐마의 [정신 오염]은 갈수록 범위가 커지니 방치하면 언젠가 지구에 닿을 테고.”
대략 64년 뒤면 지구에 닿는다.
지구를 시한부 인생으로 만들 필요는 없지.
“만약 예상대로 호흐마가 네 근처에 나타난다면, 그 공로로 널 살려 줄 거야. 운이 좋네. 소피아.”
“운이 좋다고요? 이런 비참한 운명을 받았는데도요?”
“당연히 운이 좋지. 만약 인간이 숙주라는 게 증명된 상태에서 네 차례가 왔다면…….”
그녀가 말한대로 비참한 운명이라는 건 부정하지 않는다.
다만 악운에 강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숙주가 죽으면 어떻게 되는지 확인하기 위해 널 죽였을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