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의 자격-83화 (84/151)

#83. 남극일기 (2)

툭. 툭.

“…….”

툭. 툭.

“아, 왜?”

“게임 좀 그만하고 잠깐 이야기 좀 해요.”

“잠깐만. 지금 중요한 순간이야.”

소피아는 말없이 플스의 전원 버튼을 누르려고 했다.

재빠르게 다가가 손목을 낚아챘다.

“뭐 하냐?”

“이야기 좀 하자고요.”

“조금만 기다리라고.”

“무슨 게임을 밥도 안 먹고 120시간 연속으로 해요?”

“켠 김에 왕까지 가려고 했는데, 왕까지 안 가지잖아.”

“옆에서 봤는데, 그렇게 사소한 것까지 다 깨니까 오래 걸리죠.”

“제작자에 대한 예의다.”

“저에 대한 예의도 가져 보세요.”

어째 소피아가 내 마누라 같이 느껴진다.

난 결혼도 안 했는데, 왜 이렇게 마누라 같은 사람이 많은 거지?

“알았어.”

“방으로 오세요.”

“이것만 깨고.”

“잠시 멈추고 오면 되잖아요.”

“그사이 게럴트가 추위에 떨고, 베스미워와 쉬리가 위험하다고!”

“당신은 사람보다 게임 캐릭터가 더 중요한 모양이군요.”

“그건 아닌데…….”

너보다는 중요하지.

차마 이 말은 하지 못했다.

잠시 게임을 멈춰 놓고 그녀를 따라 방으로 향했다.

“무슨 일이야?”

“이런 오지에 데려오셨으면 신경 좀 써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심심하다는 거지?”

“그런 게 아니라 너무 방치하는 것 같아서 그렇습니다.”

“그러니까 심심하다는 거잖아.”

“아니라니까요?”

심심하지는 않은데 신경 써 달라는 건 대체 무슨 심리지?

“혹시 그거 알아?”

“그게 뭔데요.”

“심리학적으로 자존감이 낮은 사람일수록 행복해하는 사람을 방해하고 싶어 한다는 거.”

내 말에 소피아의 눈썹이 까딱거렸다. 자존감이 낮다는 말이 기분 나빴나 보다.

“제가 당신을 방해하는 거로 행복해하는 사람이라는 뜻인가요?”

“그게 아니지. 방해한 후, 자신에게 신경 쓰도록 유도하는 사람이라는 뜻이지. 낮은 자존감을 그런 식으로라도 채워야 직성이 풀린다고 할까?”

“…… 됐어요. 나가세요.”

“여기 내 방이기도 한데?”

“그럼 제가 나가죠!”

“생각해 보니 나 게임 해야겠네. 내가 나갈게.”

제대로 삐진 소피아를 뒤로하고 방 밖으로 나가려고 할 때, 누군가가 방문을 노크했다.

“네~”

“안녕하십니까. 마스터 이.”

“소장님께서 무슨 일이십니까?”

“저번에 말씀드린 적 있는데 혹시 기억나십니까? 올해는 유난히도 춥다는 이야기를요.”

“네. 첫 만남 때 말씀해 주셨죠.”

“오늘 드디어 영하 73도가 되었습니다!”

“와아아!”

무척 흥분한 그의 모습을 보며 일단 환호는 해 주었지만, 이게 왜 기뻐할 일인지 모르겠다.

“전통적으로 영하 73도가 되면 재미있는 이벤트가 열리죠. 혹시 참가해 보시겠습니까?”

게럴트 형이 얼어붙은 채로 날 기다리고 있는데…….

“그러죠. 무슨 이벤트입니까?”

“300입니다.”

“스파르타?”

“그것보다 익스트림하죠.”

뒤에서 듣고 있는 소피아가 나섰다.

“저도 참가해도 될까요?”

“아…… 그건 좀…….”

“왜죠?”

“그게…… 아무튼 힘들 것 같습니다.”

***

아문센-스콧 남극 기지의 연구원과 직원들은 모두 남자로 이루어져 있었다.

당연히 세계적인 미녀로 유명한 소피아를 공주님 모시듯 대했고.

그중 소장이 가장 열성적인 신자.

그런 그가 소피아의 참가를 거부했을 때 무슨 이유인가 했더니…….

“알몸 이벤트였군요.”

“예. 아무래도 참가시키기에는 좀 그렇지요.”

“몸매에 자신 있어 보이던데 하라고 하지 그랬어요.”

“오우. 맙소사. 저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소서.”

이벤트 참가자들은 모두 탈의한 후 사우나에 들어왔다.

여기서 10분을 버텨야 한다고.

“알몸이라서 300입니까? 스파르타 군대도 팬티는 입었습니다만.”

“그게 아니라 온도입니다.”

“사우나 내 온도는 93도입니다만.”

“그건 섭씨이고, 화씨로는 200도입니다.”

“설마…….”

“밖은 영하 73도. 화씨로는 -100도죠. 정확히 300도 차이입니다.”

그러니까 사우나에서 알몸으로 10분 버티고, 그대로 밖으로 나간다고?

“미쳤습니까?”

“의외로 정상입니다.”

“밖에 나가서 10분을 버텨야 합니까?”

“아니요. 알몸으로 10분이나 밖에 있으면 얼어 죽습니다.”

……그의 말대로 의외로 정상이다.

“그럼요?”

“나가서 ‘세레모니용 남극점 기둥’을 돌고 오시면 됩니다. 약 64m 정도 거리입니다.”

“생각보다 간단하네요.”

“쉽다면 ‘지리학적 남극점 기둥’까지 갔다 오셔도 됩니다.”

“거긴 거리가 어느 정도죠?”

“원래는 300m 정도였는데, 지금은 100m 정도입니다. 남극점은 계속 움직이니까요.”

사우나에서 9분이 지났다.

참가자들은 헝겊으로 코와 입을 가리기 시작했다.

“저건 왜 그러는 거죠?”

“밖에 나가면 숨 쉬다가 폐에 동상이 걸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미친 세상이네요.”

미친 세상에 살다 보니 얘네들도 미친 건가?

“이런 이벤트를 하는 이유는 다 끝나고 나서 알려 드리겠습니다. 아! 기본 조건은 알몸이지만 신발은 신으셔야 합니다.”

“발에 동상 걸릴까 봐요?”

“그렇습니다.”

“팬티는 왜 안 되죠?”

“얼어붙습니다. 그…… 거기랑 붙은 채로요.”

“정말 의외로 정상이네요.”

그니까 정상인 인간들이 이걸 왜 하는 건데?

“자, 시간이 되었습니다. 가 보죠!”

사우나의 문이 열리자 다들 덜렁덜렁 거리며 뛰쳐나갔다.

그리고 기지의 문을 여는 순간 혹한이라는 단어조차 무색할 만큼 엄청난 추위가 엄습했다.

“대체 왜 하는 거냐고오오오!”

나는 제일 선두에서 달렸다.

명색이 인류 최강인데 뒤처질 수 없다!

“게럴트 형. 이렇게 추웠구나. 내가 빨리 와일드 헌터로부터 구해 줄게.”

그래도 나는 헌터라서 어떻게든 버틸 만했다.

공정함을 위해 일부러 마나를 차단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일반인에 비할 수준은 아니다.

하지만 저들은 진짜 일반인인데도 어떻게든 움직였다.

“우오오오!”

기지에서 100m 거리에 있는 ‘지리학적 남극점’에 다다르자 거기에는 방한 장비로 풀 세팅한 직원 하나가 대기하고 있었다.

“첫 참가인데 여기까지 오셨군요. 역시 인류 최강입니다.”

“얼어 죽겠으니까, 할 말 있으면 빨리하세요.”

“기념사진 찍으셔야죠.”

“알몸으로요?”

“주요 부분은 표지판으로 가리셔도 됩니다. 단, 표지판에 피부가 닿지 않게 하세요. 달라붙어서 업니다.”

“미친…….”

그는 셔터를 눌렀고, 그 순간 나는 다시 전속력으로 달려 기지 안으로 복귀했다.

다 제쳐 놓고 바로 사우나로 들어갔다.

“후아……. 이제야 살 것 같다.”

사우나 안에는 참가자들이 먼저 들어와 있었다.

나와는 달리 ‘세레모니용 남극점’까지만 갔다 왔나 보다.

“정말 끝까지 하셨군요.”

“마나를 쓸까 말까 엄청 고민했습니다.”

“왜 안 쓰셨습니까?”

“다른 분들과 공정하게 하려고 일부러 억제했습니다.”

“대단하십니다.”

소장은 물론 다른 직원들까지도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웠다.

“이제 말씀해 주시죠. 이런 미친 짓은 왜 하는 겁니까?”

“이곳 아문센-스콧 남극점 기지는 2월 중순부터 10월 말까지 외부와 단절됩니다.”

“비행기 타면 되잖습니까.”

“야간 비행은 어려우니까요. 더욱이 이렇게 춥고, 아무것도 없는 곳에서는 위험하기도 하고요.”

“여기는 3월 22일부터 9월 22일까지, 쭉 밤이라고 하지 않으셨나요?”

“맞습니다. 지속하는 밤. 외부와는 완전 격리. 잘 훈련받은 사람도 스트레스와 우울증으로 고통을 호소하는 곳이죠.”

확실히 극한의 상황이기는 했다.

“직접 경험해 보셨지만, 참가하는 사람도, 지켜보는 사람도 참 웃긴 모습입니다.”

“그렇죠…….”

“이 이벤트 한 방이면 쌓였던 우울증이 단번에 해소됩니다.”

“나름의 이유가 있었군요?”

“이런 거라도 하지 않으면 정말 정신을 놓을 수도 있으니까요.”

“정신 줄을 놓아서 이런 이벤트를 기획한 것 같습니다만…….”

내 말에 다른 사람들이 다 웃었다.

자기들도 부정하지는 않는 모양이었다.

“자, 이것으로 마스터 이도 300클럽에 가입되셨군요.”

소장은 미리 준비해 두었던 기념 패치를 넘겨주었다.

군부대 마크 같다.

“참가자 전원이 아니라, 완주한 분께만 드리는 겁니다.”

“완주 못 하는 사람도 있나요?”

“처음 참가하는 사람 대부분은 한 발자국 내딛기 전에 포기합니다.”

“현명하네요.”

문득 어떤 질문이 떠올랐다.

“혹시…….”

“말씀하세요.”

“남극점 기지의 이벤트는 죄다 이런 종류입니까?”

“여기 사람들은 유희와 도전에 많은 갈증을 느끼지요.”

“얌전한 건 없나요?”

“영화 관람도 있습니다.”

갑자기 너무 얌전해졌는데?

“무슨 영화요?”

“<더 씽>이라는 영화입니다. 외계 괴물이 남극 기지에 나타나는 사건을 다루죠.”

“어쩌면 영화가 현실에서 이루어질 수도 있겠네요. 외계 괴물이 아닐 수도 있겠지만요.”

“그러지 않기를 바랄 뿐입니다.”

“오히려 그러기를 바라셔야죠.”

그래야 민간인 피해를 최대한 막을 수 있을 테니까.

***

사우나를 마치고 몸을 씻은 후 방으로 돌아왔다.

“잘 봤습니다.”

무척이나 신경질적이던 그녀가 상당히 온순해져 있었다.

“아까 엄청나게 참가하고 싶던 것 같은데, 지금이라도 같이 할래?”

“사양하겠습니다.”

“이런 기회는 돈 주고도 얻을 수 없어.”

“돈 주고서라도 사양하고 싶습니다.”

살짝 웃는 모습을 보면 소장의 말대로 우울증을 날려 버리는 데 특별한 효과가 있는 것 같다.

늘 우울하던 그녀가 이렇게 밝은 모습을 보이는 걸 보면.

“의외입니다.”

“뭐가?”

“당신이 협조적인 모습은 처음 보는 것 같군요. 이런 정신 나간 이벤트에도…….”

“나 원래 협조적인 사람인데?”

“그 개그는 좀 웃겼습니다.”

“바보야. 내가 협조적이지 않았다면, 인도 국민은 최소 1억 이상 죽었어.”

1억이 뭐야.

공주가 나타나고, 공주가 여왕이 되면서 인도와 국경을 댄 나라들은 죄다 망했을 것이다.

“특히 포식하면 포식할수록 더 많은 알을 낳는 케테르 특성상 인도와 접경국인 중국은…….”

“자기 자랑은 그만하셔도 됩니다.”

“말을 말자.”

적당히 침대에 드러누웠다.

“마스터 이.”

“드르렁. 푸우.”

“……벌써 잡니까?”

“드르렁. 푸우.”

“참고로 당신은 마치 시체처럼 잡니다. 코골이는커녕 숨소리조차 잘 안 들릴 정도로요.”

“왜 자꾸 부르냐.”

이러다 정들겠네.

“묻고 싶은 게 있습니다.”

“뭔데?”

“당신이 보기에 제 생각은 그리도 틀렸던 것입니까?”

“말은 좋아. 아니지. 말만 좋아.”

“그럼 뭐가 문제죠?”

“수없이 많지만, 가장 큰 문제는 누구도 책임지지 않는다는 거다.”

이상주의자들의 공통점.

‘그래서 누가 세상을 구할 거냐?’라는 질문에는 답하지 않는다.

“살고 싶은 마음. 권리를 누리고 싶은 마음. 다 이해할 수 있어.”

“계속하세요.”

“하지만 그러다 다 죽으면 네가 책임질 수 있어?”

“당신은 책임질 수 있습니까?”

“이미 인도에서 결과로 보여 주지 않았냐?”

“그렇긴 하군요.”

그녀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의외다.

우울증이 너무 심해서 자포자기 상태가 되었나?

“부탁이 있습니다.”

“말해. 들어줄지는 모르겠지만.”

“저를 서울로 데려가 주십시오.”

“안 돼.”

“한 일주일 정도면 됩니다. 당신이 함께하셔도 되고요.”

“두어 달만 더 참으면 넌 자유야. 그러니 좀 더 참아 봐.”

감수하지도 않아도 될 위험을 굳이 겪고 싶지는 않으니까.

“만약 제 부탁을 들어주신다면…….”

“돈이라도 주게?”

“호흐마에 대한 진실을 알려 드리겠습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그녀의 목을 움켜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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