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8. 뱀의 사과 (2)
시간은 거슬러 올라가 지구에 거대한 혼란이 닥치기 직전.
달.
<다시 말하지. 나의 정원 ‘영원’에 온 것을 환영하네.>
그로테스크한 흑련의 모습을 한 비나를 상대로 마스터 이는 필사적으로 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
“영원한 것은 없다.”
<하나하나를 보면 그렇겠지. 그러나 군집으로 본다면 영원을 이어나가는 것도 분명 존재한다네.>
“없다고 했다.”
<헛수고하지 말고 이곳에서 나와 함께 인간의 본성을, 미래를 관찰해 보지 않겠나?>
칼을 땅에 박았다.
이곳도 대지라면, 분명 지맥이 있을 것이다.
“난 원래 헛수고를 좋아해서.”
아니나 다를까.
달 수백km 밑에서 뜨겁게 맥동하는 지맥을 발견했다.
“매번 칼 들고 설쳐서 많이들 착각하는데, 난 원래 광역 폭격계다.”
2회차 때는 효율과 아군의 부상 때문에 자제한 것뿐.
1회차 때는 그러지 않았다.
제대로 된 스킬을 얻을 때까지 오직 순수한 마나를 압축시켜 쏘아 보내는 방식으로 싸웠다.
“필요하다면…….”
내가 가진 마나에,
“달 그 자체로 파괴해 주마.”
달의 지맥에서 얻은 매화를 얹었다.
<그대는 진정 괴물이군.>
밤하늘에 별의 수보다 많은 마나의 구체들이 나타났다.
하나하나가 빌딩마저 파괴할 에너지를 가지고 있었다.
“잘 가라.”
하늘에서 무수히 많은 구체가 운석처럼 달 표면에 떨어졌다.
마치 유성우처럼.
장시간에 걸쳐 끊임없이 쏟아졌다.
수없이 많은 구덩이 위에 새로운 구덩이가 아로새겨졌다.
파근파근한 돌가루가 우주를 향해 퍼져 나간다.
<그러나 그대를 제외한 나머지는 그리 어려운 상대가 아니지.>
그런데도 비나는 살아남았다.
“너를 상대하는 것은 나다. 다른 이들을 이길 수 있다고 해서 뭐가 달라지지?”
<내가 그대와의 싸움을 피하고자 이리로 왔다고 생각하는 거.>
아직 목숨이 붙어 있긴 해도 상당한 타격을 받은 듯, 비나의 영체는 망가진 TV가 보여 주는 방송처럼 흔들리고 뒤틀렸다.
<태양 빛이 강하면 달빛은 보이지 않나니. 그대가 이토록 강대한 까닭에 정작 다른 이들은 여느 때보다 약해졌나니.>
비나의 음울한 주문에 따라 저 멀리 지구에서 변화가 일어났다.
달의 궤도를 따라 기이한 문양이 생겨났으며, 이윽고 지구 전체를 덮는 특이한 결계가 생겨났다.
그것은 소설에서나 나올 법한 ‘마법진’이라고 불러도 모자람이 없었다.
<이것으로 나의 목적은 완수하였다.>
“무슨 짓을 한 거냐?”
<내가 이길 수 없다면, 다음 존재를 배려하여 최대한 상처를 주는 것이 옳지 않겠나?>
마법진이 강렬한 푸른 빛을 내며 가동되었다.
내가 지구에 있었다면 모를까, 이 자리에서는 어떻게 할 수 없다.
비나가 달에 나타난 까닭은 달에서는 싸우기 어렵기 때문이 아니었다.
나를 끌어내기 위한 미끼였다.
<나는 이렇게 가지만, 다음은 쉽지 않을 걸세. 부디 건투하게나. 껄껄.>
한가득 비웃음을 지으며 비나는 천천히 소멸해 갔다.
그러나 지구를 둘러싼 거대한 마법진은 계속 유지되었다.
***
먼저 서울에 있는 GG의 본부로 갔다.
이 마법진이 무슨 효과가 있는지 최대한 빨리 알아내야만 했다.
“허…….”
환영해 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모두 다 자고 있었으니까.
마치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게 수면 가스를 살포한 것처럼 가지각색의 모습으로 잠들었다.
누구는 키보드에 머리 박고 자고 있었고.
누구는 커피를 나르는 도중이었는지, 그대로 다 쏟고 커피 웅덩이 위에 쓰러진 채 고른 숨소리를 내었다.
그리고 리디아는 무언가를 지시하는 중이었는지 박력 있게 선 채로 잠들었다.
“대장군일세.”
리디아의 손목을 잡고 마나를 흘려보았으나, 딱히 건강상의 문제는 찾지 못했다.
다만 이대로 가면 탈수나 영양 결핍으로 죽을 수도 있다.
모두를 챙겨 줄 수는 없었기에 리디아만 침대에 눕혀 두고 거리로 나왔다.
거리에도 보행자‘였던’ 사람들이 길거리에 누워 자고 있다.
이런 날 바깥에서 자면 입 돌아가는 건 둘째 치고 저체온증으로 죽을 수도 있을 텐데…….
차라리 이들은 괜찮은 편이었다.
운전하다가 잠든 사람들에 의해 다중 추돌 사고가 일어났다.
시내의 도로는 그나마 괜찮을지 모르겠지만 고속 도로에서는 이미 수많은 사망자가 나왔을 것이다.
내가 이 많은 사람을 보살필 수는 없는 노릇.
닥치는 대로 전화를 걸어서 깨어 있는 사람을 찾았다.
- 여보세요?
찾았다.
한울이도, 윤아도, 수호 형도 전화를 안 받는데, 혹시나 해서 걸어 보았던 마스터 위저드가 받았다.
역시 [이능 간섭]은 개사기다.
“접니다.”
- 드디어 오셨군요.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 겁니까?
“저도 그걸 물으려고 전화한 겁니다만…….”
- 비나를 상대하시던 게 아니었습니까?
“비나는 죽였습니다. 그런데 죽음의 메아리라고 할까, 마법진 같은 걸 선물로 주고 가더군요.”
- 감당하기 힘든 선물인데, 좀 사양하시지 그랬습니까.
“괜찮다며 억지로 넣어 주더군요.”
이렇게 농담 따먹기를 하는 이유는 여유를 갖기 위해서다.
발만 동동 굴러서는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으니까.
“혹시 깨어 있는 사람은 마스터 위저드뿐입니까?”
- 소피아 씨도 잠들지 않았더군요. 아마도 호흐마 영향 때문이 아닐까 합니다.
“흠…….”
이러한 이상 현상은 1, 2, 3회차를 통틀어 처음이다 보니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모르겠다.
이런 상황에서는 나 역시 사람인지라 쉬운 길을 먼저 떠올리게 된다.
호흐마라면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
“알겠습니다. 마스터 위저드는 사람들을 보호할 방법을 찾으세요.”
- 혼자 5천만 국민을 보호하라고요?
“국회 의원이지 않습니까?”
- 저는 국회 의원이지 마법사가 아닙니다.
“마스터 위저드니까 마법사 맞군요. 어떻게든 해내세요.”
- 그러는 마스터 이는 무엇을 하실 생각입니까?”
“저는 사람들을 깨울 방법을 찾겠습니다.”
- 바꿔서 하죠……. 라고 말하고 싶지만, 가능성이 큰 쪽을 택하는 게 맞겠죠. 사람들은 제가 어떻게든 해 보겠습니다.
보통 사람이 ‘어떻게든 해 볼게.’라고 한다면 기대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마스터 위저드나 리디아가 같은 말을 하면 기대하게 된다.
언제나 기대 이상의 결과를 내주었으니까.
“좋군요. 제가 왕이었다면 마스터 위저드의 퇴직은 절대 용납하지 않았을 겁니다.”
- 노동법을 준수하여 정년퇴직은 꼭 시켜 주셨으면 합니다만.
“걱정하지 마세요. 국회 의원은 정년이 없습니다.”
통화를 마친 뒤 소피아의 집으로 [공간 도약]했다.
***
벽에 막혔을 때마다 자꾸 호흐마를 찾아도 되는 걸까.
호흐마를 100% 신뢰할 수 없다는 문제는 둘째 치고, 그녀에게 의지하면 의지할수록 값비싼 대가를 치러야 할 것 같은 느낌이었다.
“하지만 딱히 방법이 없으니 나중에 대가가 어떻게 되든, 발등에 떨어진 불씨를 꺼야겠지.”
“뭘 계속 꿍얼거리고 있나요?”
어느새 주변 풍경이 바뀌고 여성의 모습을 한 호흐마가 나타났다.
“널 의지하는 게 맞을지 고민하고 있어.”
“다른 이를 의지하지 못하고 의심해 버리는 것은 당신의 안 좋은 버릇입니다.”
“충분히 의지하고 있어. 너를 의심할 뿐이지.”
“의심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제 앞에서 해도 되나요?”
“새삼스럽게.”
잡담은 이만하면 됐다.
본론으로 넘어가자.
“밖의 상황은 알지?”
“그 녀석다운 일을 했더군요. 녀석은 균형을 중시하니까요.”
“균형?”
“예. 제가 대립을 통한 순환을 중시한다면, 녀석은 균형을 중시하지요.”
“다 재워 놓고 뭔 놈의 균형?”
“심장을 찔러 오는 고통을 수용할 수만 있다면, 인간은 고통과 슬픔을 온전히 받아들일 수 있게 되지요. 행복만 받고 싶어 하는 당신들에게는 무척 어려운 이야기입니다만.”
뭔 소리를 하는 건지.
“됐고. 그래서 어떻게 해야 사람들을 깨울 수 있어?”
“정말 깨우는 것이 목적입니까?”
“그렇다면?”
“내버려 두세요. 밤이 길다 해도 하루를 가지 않으니, 머지않아 모두 일어날 것입니다.”
호흐마의 미소로부터 그렇게 간단한 이야기가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깨어나면 이전의 삶으로 돌아오나?”
“하나 꿈은 시간의 제약을 받지 않으니 그들은 한 달, 1년, 어쩌면 10년, 100년의 경험을 할지도 모르겠군요.”
“무슨 꿈을 꾸는 거지?”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유추는 가능하죠. 녀석은 균형을 중시하고, 이번만큼은 고통과 슬픔을 주는 것이 목적인 만큼 그에 관련된 꿈이겠지요.”
꿈이라는 건 대개 일어나서 몇 시간 정도면 기억에서 완전히 사라진다.
그것이 악몽이라고 해도 그렇다.
불쾌함은 남겠지만.
그런데 비나가 단순히 찝찝함을 남기기 위해 이런 짓을 벌였을까?
“아 쫌. 빙빙 돌리지 말고 세세히 말해 봐.”
“다시 말씀드리지만, 저도 유추하는 것에 불과합니다.”
“괜찮아. 판단은 내가 하고, 책임도 내가 진다.”
“악몽을 꾼다. 하지만 현실과 꿈을 분간할 수 없다. 그때야말로 고통과 슬픔이 극대화되지 않겠습니까?”
“비나가 그렇게 생생한 경험을 구현한다고? 전 인류를 상대로?”
일시적이라고는 해도 거의 창조주에 가까운 힘이 아닌가.
“아니요. 비나의 힘이 강력한 편이긴 해도 그 정도는 아닙니다. 하지만 아주 약간만 바꾸면 손쉽게 가능하지요.”
“어떻게?”
“예를 들어 당신이 없는 세상에서 ‘우리’를 상대하게 한다. 그 결과가 눈에 보이지 않습니까?”
“사람들이 그렇게까지 약하지는 않아. 늘 그렇듯이 답을 찾아내겠지.”
“그렇습니까? 그렇다면 이건 어떻습니까.”
호흐마의 웃음이 한층 더 짙어졌다.
나를 높게 평가하는 것은 그렇다 쳐도, 다른 이들을 너무 낮게 평가하는 것 같다.
“약간의 세공을 곁들여 ‘당신은 살아 있다. 하지만 모종의 이유로 움직이지 못한다.’라는 제약을 넣는다면 어떻겠습니까?”
“…….”
“사람들은 생각하겠죠. ‘우리가 조금만 더 버티면 마스터 이가 보스를 쓰러뜨려 줄 거야! 괜히 움직여서 더 큰 피해를 보면 안 돼!’라고요.”
하지만 일어날 수 없는 바람이었다. 그 꿈속의 세계에서는 내가 존재하지 않으니까.
그사이 세계에는 서서히 아포칼립스가 일어나고, 결국 모든 이들이 세기말의 처참한 모습을 그대로 겪을 수밖에 없다.
전 회차의 경험과는 달리 더 심각한 문제다.
대부분은 오랏트 사태를 ‘괴물 침공에 의한 전쟁’ 같은 것으로 생각하지, ‘괴물보다 더 위험한 게 인간이다.’라는 생각을 안 하니까.
예외라면 운 좋게 마지막에 멸망했던 한국 정도일까.
“어디까지나 추측입니다만, 높은 확률로 그럴 것이라 생각합니다. 비나는 그런 녀석이니까요.”
“이렇게까지 말했다면 방법이 있다는 거지?”
호흐마의 모습이 천천히 변했다.
미의 여신이라고 할 수 있는 아름다운 외형을 버리고 점점 더 거대해지더니, 이내 세계를 감쌀 만한 뱀의 모습으로 화했다.
전 회차에 상대했던 바로 그 모습이었다.
[녀석과 나는 상극. 서로 먹고 먹히는 관계. 하나 그 힘은 비나가 더 강합니다.]
“너의 힘은 그렇겠지.”
[반면 당신의 힘은 그와 상성이 좋지 않습니다.]
이제야 호흐마가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인지 깨달았다.
호흐마는 바닥을 기어 내게로 다가왔다.
그 크기는 점점 작아져 비단구렁이 수준으로 줄어들었다.
내 발밑에 오더니, 천천히 내 몸을 타고 올라왔다.
기묘한 감각이다.
“이렇게까지 협조해 줄 줄은 몰랐는데?”
[그 머리 꽉 막힌 답답한 녀석에게 본때를 보여 줄 수 있다면 이런 수고도 아끼지 않지요.”
“네가 힘을 쓴다고 소피아에게 무리가 가는 건 아니지?”
[전혀요!]
“부탁한다.”
[인간과의 공투라. 처음 겪는 일이라 무척 신선합니다.]
“나도 오랏트의 보스와 함께 편을 먹게 되는 날이 올 줄은 몰랐네.”
이러다 진짜 소피아랑 결혼이라도 하게 되면 네팔렘이 나오는 거 아닌지 모르겠다.
“간다.”
[언제든.]
내 모든 것을 바쳐 최대의 힘을 끌어냈다.
호흐마와 하나로 동화되었고.
세계를 휘감는 거대한 뱀이 되어.
전 세계에 [정신 오염]을 발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