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의 자격-134화 (135/151)

#134. 암흑의 시대 (2)

유언장 외우기나 하고 있으려니 도저히 집중이 되지 않았다.

원래부터 머리가 그렇게 좋지 않았기도 하지만, 티피레트와 네자흐가 동시에 나타나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 끝없이 괴롭혔기 때문이었다.

차라리 확실히 하면 집중하기 편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호흐마를 만나러 갔다.

“질문이 있어.”

“당신은 꼭 필요할 때만 찾아오는군요. 효율만 추구하는 건 좋지 못하다는 걸 이미 알고 계실 텐데요?”

“그렇긴 한데, 그래도 뜨끈-한 국밥은 언제나 옳더라고.”

“하아…….”

말은 이렇게 해도 미안하다는 생각은 하고 있었다.

호흐마가 아니라 소피아에게.

“단도직입적으로 물을게. 티페레트와 네자흐는 같이 나타나냐?”

“저 역시 그들과의 연결이 끊겼기에 확답은 불가능합니다.”

“질문을 바꾸지. 티페레트와 네자흐가 같이 나타날 수 있어?”

“가능합니다. 단, 탄생의 시기를 앞당기거나 늦춘다면 그 존재에게 엄청난 부담이 되겠죠.”

“젠장.”

“또한……. 아닙니다. 이건 말해도 의미가 없을 테니 삼가겠습니다.”

무언가 더 숨긴 것이 있는 듯 보였으나 말해 줄 생각은 없어 보였기에 질문을 바꿨다.

티페레트와 네자흐를 동시에 상대해야 한다는 스트레스 때문인지 짜증이 치밀어 오른 상태로.

“한 가지만 더 묻자. 대체 그 엿같은 완성이라는 게 뭐야?”

“아직도 그런 걸 묻나요? 이미 봤을 텐데요.”

“너희 힘을 흡수하는 그거?”

“그것뿐만이 아닙니다. 아직 제대로 완성을 한 사람은 한 명도 없습니다. 그나마 소피아가 제일 근접한 수준이지요.”

대충 짐작해 보면 윤아라나 류페이처럼 보스의 힘을 자유자재로 쓰고, 이렇게 소통할 수도 있는 게 완성이라고 할 수 있는가 보다.

“너희는 대체 왜 이 지랄을 하는 건데?”

“당신은 모르겠지만 본래 이 세상은 멸망하게 되어있습니다.”

“너희가 나타나지만 않았어도 이런 일은 겪지 않았어.”

“만약 우리가 나타나지 않았다면, 우리의 대극에 있는 존재들에게 더 처참하게 짓밟겠지요. ‘다음’도 없었을 테고요.”

대극?

다음?

생각해보면 갈가마귀를 상대할 때 비슷한 이야기를 들은 것도 같았다.

오랏트를 인간보다 싫어하는 존재가 있다고.

그때는 가볍게 흘려들었는데, 진짜 그런 게 있는 모양이었다.

“전 회차에 인간이 자멸한 이유가 우연이라고 생각합니까? 혹은, 주동자를 죽였으니 이번에는 괜찮을 거라고 생각합니까?”

“그러니까 우리가 대극인지 뭔지에게 짓밟히는 걸 보느니 너희가 직접 짓밟겠다?”

“대리자가 처음부터 영혼에 말을 걸 수 있었다면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을 겁니다. 하지만 당신들은 모두 자신의 영혼을 바라볼 힘을 잃어버렸어요. 문제는 거기서부터 시작하였습니다.”

“우리 탓이니까 다 조져 버리겠다?”

“믿기지 않겠지만 우리는 당신들을 단련시켜 주고 있는 것입니다. 수없이 말을 걸어도 답해 주지 않는 나머지, 절망하여 실력 행사로 나선 이들도 있기는 하지만요.”

어디서 많이 들어 본 개소리다.

내가 했었던가?

“단련은 뒈지지 않게 해야 단련이지. 이건 그냥 학살이잖아.”

“네. 그러니까 죽지 않게 하고 있습니다.”

“뭐?”

“인간이 설마 하루아침에 ‘스킬’이라는 힘을 얻었다고 생각합니까? 그렇다면 왜 힘의 차이가 나타날까요? 당신은 어떻게 누구보다 강한 힘을 얻었을까요?”

“무슨…… 말이지?”

“이유 없는 결과는 없습니다. 다만 당신들이 이해를 못 했을 뿐이죠.”

말만 들으면 이게 3회차가 아니라 10만 회차, 100만 회차 돌려서 조금씩 쌓인 결과물이라는 소리 같은데…….

그게 말이 되는 건가?

“전 회차에 말쿠트가 나보고 완성은 지나갔고, 영원히 고통받는 라인에 합류했다더라. 이제는 포기한 거 아니야?”

“모든 것은 말쿠트의 계획에 따라 진행되었습니다. 하지만 어긋남이 발생했죠. 당신 때문에.”

“나?”

“그는 관대한 척하지만 사실은 누구보다 속이 좁습니다. 이레귤러인 당신을 절대 용서하지 않을 겁니다. 그가 모르는 것을 당신은 알고 있으니까요.”

설마…….

1회차 때 우연히 그의 뿔을 잘라서 회귀한 걸 말하는 건가.

“내가 알고 있는 건 별거 없는데.”

“무엇을 알고 있느냐가 중요한 게 아닙니다. 이로써 그는 완벽해지지 못했다는 게 중요하죠. 물론 그 원인인 당신을 죽도록 미워하고 있습니다.”

“와……. 되게 쪼잔하다.”

“그에게는 무엇보다 중요한 문제거든요. 지금까지 쌓아 올린 걸 모두 무너뜨리고, 다시 처음부터 시작하고 싶어 할 정도로요.”

즉, 이번 회차는 모든 걸 무너뜨리기 위한 회차다.

이전처럼 했다가는 내가 계속 말쿠트의 뿔을 뺏어다가 회귀할 테니까.

“그런 것치고는 별 성과가 없는 듯한데?”

“그렇다면 당신은 왜 계속 저를 찾아오시는 겁니까?”

“…….”

“말쿠트의 첫 번째 오산은 당신의 힘입니다. 케테르 때 당신이 생각보다 강했다는 걸 절실하게 느꼈죠.”

“내가 좀 대단하긴 하지.”

“하지만 결정적인 오산은 다름 아닌 제가 배신했다는 것입니다.”

“……인정해.”

그녀가 없었다면 비나 때 회생 불가의 큰 타격을 받았을 것이다.

비나의 본체가 달에 나타났을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을 테고, 어찌어찌 발견했다고 해서 꿈 세계의 부작용으로 인해 커다란 후유증이 남았겠지.

“넌 왜 배신했냐?”

“모든 것을 처음으로 돌린다는 그의 방식이 마음에 들지 않았으니까요. 차라리 당신에게 희망을 거는 게 더 낫다고 생각했습니다.”

호흐마는 ‘실수한 듯하지만요.’라고 작게 중얼거렸다.

내 청각을 고려했을 때, 분명 들으라고 한 소리다.

그동안 잘 도와주지만 않았어도 한 대 쥐어박았다.

“하여간 말쿠트 이 새끼. 주인 닮아서 마음이 밴댕이 소갈머리네.”

“주인?”

“내가 말쿠트 대리자 아니야?”

“한 가지만 더 묻는다더니 질문이 많군요. 뭐, 좋습니다. 이제 클라이맥스로 향해 가는 중이니 특별히 답해 드리죠.”

“클라이맥스?”

위화감이 들었다.

이제 절반 왔는데?

“우리는 개별적인 개체입니다. 약점과도 같기에 대리자를 밝히지는 않습니다. 모든 것을 알고 있는 자는 말쿠트 정도일까요?”

“짐작은 할 거 아니야.”

“다른 이는 몰라도 말쿠트의 대리자는 짐작 가는 바가 없습니다. 확실한 건 당신은 아니라는 점이죠.”

“진짜?”

“당신은 광대입니다. 누군가의 대리자가 될 수 없습니다.”

“광대가 뭔데?”

“우리 중 누구와도 진정한 완성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 쉽게 말해서 이 이야기의 조커입니다.”

내가 말쿠트의 숙주가 아니었다?

그럼 말쿠트의 숙주는 누구지?

“후우. 괜히 머리가 더 복잡해졌네. 그래도 고맙다. 진심으로. 일이 다 마무리되면 진짜 소피아한테 진짜 잘할게.”

“바람둥이의 약속 같군요.”

“나 그런 사람 아니다.”

“그렇다고 치죠.”

믿는 듯한 눈치는 아니었다.

거짓말 같은 약속이라도 마음에 들지 않는 건 아니었는지 호흐마의 표정이 조금 풀린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나 이제 갈 건데 혹시 할 말 더 있니?”

“말쿠트를 제외하고 남은 이는 티페레트, 네자흐, 호드, 예소드입니다. 이 중 가장 주의해야 할 이는 누구일까요?”

“네자흐지.”

“틀렸습니다. 당신들에게 있어 예소드야말로 가장 무서운 적입니다.”

예소드라고 하면 공룡 나오는 게 신기하고, 산소 농도가 높아진다는 것 말고는 딱히 별 볼 일 없는 보스인데.

“왜?”

“예소드는 말쿠트의 가장 충실한 심복이거든요. 게다가…….”

말쿠트의 심복.

그렇다는 건 이 세상을 초기화하는 계획에 매우 적극적인 보스라는 뜻이다.

“목표를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희생할 준비가 되어 있는 존재입니다.”

***

다시 집으로 돌아와 열심히 유언장에 쓰인 이름과 능력을 외우고 있을 때, 리디아가 나타났다.

“네자흐를 멈춰 세울 방법은 정해졌어?”

“S랭크 이상의 헌터들을 모아 포메이션 연습 중이야. 슈퍼컴퓨터로 시뮬레이션도 계속 돌리고 있고.”

“내가 도와줄 건 없어?”

“아직은. 너에게 있어 최우선 사항은 유언장 외우는 거지.”

불길한 예감이 스쳐 지나간다.

나도, 리디아도 이번 보스전이 무사히 넘어갈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어쩌면 그동안 쌓아 올렸던 공든 탑이 한 방에 무너질 수도…….

“호흐마는 만나 봤어?”

“어. 티페레트와 네자흐가 같이 나타날 가능성은 충분하다고 하더라.”

“역시…….”

상대가 어떻게 올지 아는데, 대응 방법은 마땅치 않다.

칭기즈칸이 이끄는 몽골 기병을 평야에서 민병대로 막아야 한다는 느낌이랄까.

“고생이 많네. 안 그래도 부담이 많을 텐데 부탁이 하나 있어.”

“뭔데?”

“예소드에 대해 알아봐 줘.”

“예소드를? 거의 1년 뒤에나 나오는 보스잖아.”

“호흐마가 그러더라. 우리가 가장 주의해야 할 적은 다름 아닌 예소드라고.”

이건 아무리 리디아라고 해도 알아내기 힘든 정보일 것이다.

미지의 적이 숨기고 있는 내용을 어떤 수로 파악할까.

그런데도 할 수 있는 건 전부 해 보고 싶었다.

“크게 기대는 하지 말아 줘.”

“방법은 있어?”

“바벨 같은 사람들에게 카발라를 찾아보게 하고 최대한 상상력을 돌려 봐야지.”

“고마워.”

“근데 이상하네. 그거 호흐마가 직접 언급한 이야기지?”

“그렇지.”

“그녀가 왜 이 시점에 예소드 이야기를 했을까?”

“우리가 티페레트와 네자흐만 경계하고 있어서 그렇겠지?”

“그런 이유였다면 네자흐를 처리한 이후에 다시 찾아오라고 말해 줬어도 됐을 텐데…….”

아무래도 리디아는 마음에 걸리는 게 있는 모양이었다.

“혹시 다른 말은 더 없었어? 예소드에 대해서.”

“말쿠트의 가장 충실한 심복이고, 목표를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희생할 수 있는 보스래.”

“목표?”

“세계를 완전히 초기화하는 것. 간단히 말해서 몰살.”

“지금까지와 다를 바 없긴 한데…….”

이에 대해서 정확히 이해시키기 위해선 내가 2회차가 아니라 3회차라는 걸 언급해야 한다.

하지만 아무리 리디아라고 해도 진실을 말하는 게 꺼려졌다.

처음에는 단순히 감이었지만 이제는 대충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말쿠트는 내가 3회차인 걸 모른다.

4회차일 수도 있고, 100회차일 수도 있다는 걸 의심하고 있다.

가능성은 작지만 만약 리디아가 어떤 보스의 숙주라면, 내 정보가 그에게 들어가게 될 테고 그에 따라 무언가가 바뀔 수도 있다.

“아 참. 리디아, 너는 혹시 네 영혼에 말을 걸어 본 적 있어?”

“스티그마라면 익혔어.”

스티그마는 스킬을 좀 더 심도 있게 익혀서 강화하는 수련법이다.

나도 이걸 익히면서 명상을 수련했었다.

“그거 말고. 네 영혼을 직접 관조한 적 있냐고.”

“유체이탈 상태에서 거울을 보라는 뜻이야?”

“……아니다. 괜한 소리를 했네.”

“명상이라면 어느 정도 할 수 있어. 하지만 전설 속의 선지자처럼 내면을 제대로 관조하는 능력 같은 건 없어. 시도해 본 적도 없고.”

“그렇겠지?”

여태까지 그게 가능했다는 이야기는 소피아밖에 없다.

그나마도 호흐마가 인류에게 호의적이었기에 가능했지만.

“어쩌면 선봉장이 아니라 선지자가 돼야 했었을지도 모르겠다.”

“무슨 말이야?”

“처음부터 방향을 잘못 잡았을지도 모른다는 이야기.”

투쟁만이 유일한 해결책이라고 생각했는데, 이번 회차를 겪으면서 생각이 많이 바뀌었다.

하지만 돌아가기엔 너무나도 멀리 와 버렸다.

매몰된 비용도 너무 많고.

“불안해?”

“아니. 여기까지 왔으니 망설일 틈은 없어. 죽이 되든 밥이 되든 끝을 봐야겠지.”

상대가 어떻게 나오든 반드시 극복하겠다는 마음으로 전의를 가다듬었다.

***

그렇게 네자흐가 나타날 시간이 될 때까지, 각자의 자리에서 잠자는 시간까지 줄여 가며 대비하고 또 대비했다.

최선을 다했으니 남은 것은 결과를 받아들이는 것만이 남았다.

모두 굳게 결의한 후 LA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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