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7화
“마지막이라니요, 당치도 않습니다. 어르신.”
김만호가 다시 머리를 조아렸다.
“그게 중요한 게 아니야. 오랜만에 해야 할 일을 찾았어.”
약간 흥분한 들뜬 목소리였다.
“무슨 일입니까? 어르신.”
“재단을 만들어야겠어. 청소년들을 위한 장학재단, 그리고 몇 년이 지나면 청년 재단을 만들어야지”
의문스러운 표정으로 김만호가 입을 열었다.
“어르신 이미 장학 사업이랑 기부는 많이 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또…….”
“얼마 남지 않은 삶 넉넉하게 나누고 가야지. 왜 자네에게 돌아갈 몫이 없어서 그런가?”
화들짝 놀라 당황한 만호는 다급하게 허리를 숙이며 머리를 조아렸다.
“저, 절대 아닙니다. 어르신 덕분에 남들은 구경도 하기 어려운 부를 쌓았습니다. 제 남은 욕심은 그저 어르신 불편하지 않게 모시는 거, 그거 하납니다.”
틀린 말이 아니었다.
자신의 솔직한 속내를 털어놓은 만호.
그리고 현정옥도 그의 절제된 욕심을 알고 있기에 곁에 두고 있는 것이다.
강남대로에 빌딩 하나만 가지고 있는 김만호.
그 빌딩의 가격이 지금 백억이다.
임대 수익만으로도 펑펑 쓰고도 남을 정도였다.
그도 한때 더 큰 부자가 되고 싶었던 적이 없지 않았다.
하지만 일에 정신에 팔려 가정을 소홀히 했다가 가정이 풍비박산 날뻔했다.
아내는 돈쓰는 재미에 정신이 팔렸고 결국 남자가 꼬였다.
돈을 물 쓰듯 쓰는 여자에게 기생오래비가 꼬이는 건 법칙이었다.
더 큰 문제는 자식이었다.
자식들이 왕따를 주도하고 폭행을 일삼았다.
학교에 불러가길 수십 번 돈으로 해결될 것이 아니었다.
어느 날 집에 들어갔을 때 소 닭 보듯 자신을 쳐다보는 악마들이 눈에 들어왔다.
그때 깨달았다.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을. 돈으로 해결될 것이 아니었다.
무너진 가정을 다시 세우는 건 결코 쉽지 않았다.
하지만 종잣돈을 모으듯 어렵게 함께하는 시간을 늘렸다.
조금씩 늘어난 시간은 벽을 허물고 잃어버렸던 가족을 다시 찾게 도와주었다.
여사님도 적극 도와주셨다.
휴가도 많이 주고 여러 모로 챙겨 주신 덕분에 다시 화목한 가족을 만들 수 있었다.
가족의 소중함을 절실히 깨달은 김만호는 여사님을 볼 때마다 더 가슴이 아팠다.
하나 남은 혈육.
하지만 어디 있는지, 심지어 살아 있는지조차 알 수 없는 상황이다.
차라리 죽었다면 포기했을 텐데…….
“무슨 생각을 하는 게야?”
잠시 생각에 잠긴 김만호는 현정옥 여사의 목소리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아닙니다. 어르신.”
“이번에 설립할 장학재단은 오직 고아들만을 지원할 예정이야. 전국 고아원에서 공부를 잘하는 친구들을 지원해 더 클 수 있도록 하는 거지. 세부적인 계획은 자네가 짜서 올리게.”
“네. 어르신. 좋은 방향으로, 아이들이 더 크게 성장하는 방향으로 계획해서 보고하겠습니다.”
“그래. 서둘러. 내 목숨 얼마 안 남은 거 자네도 알지?”
당황한 표정으로 김만호가 두 손을 저었다.
“어르신 그런 농담은…….”
그런 모습을 본 현정옥이 슬며시 웃었다.
“하여튼 자네는 너무 진지해서 탈이야. 재미가 없어, 재미가……. 그럼 나가서 일 봐”
“네. 최대한 빨리 보고하겠습니다.”
조심스럽게 밖으로 나간 김만호는 최대한 빠르게 일을 처리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
적막한 복도에 마지막 시험을 알리는 종소리가 길게 울렸다.
이어서 책상 움직이는 소리와 함께 웅성거리는 소리가 건물을 가득 채웠다.
각 교실의 앞문이 열리고 시험지를 한 손에 든 교사들도 교무실을 향해 바삐 움직였다. 오랜만에 빠른 퇴근을 기대하는 그들의 발걸음은 한없이 가벼웠다.
‘휴, 드디어 제대로 된 첫 시험을 끝냈다.’
이로써 3일간의 중간고사가 끝났다. 이제 잠깐 휴식을 가질 수 있게 되었다.
고등학교 2학년이 되어서야 시험공부를 했다.
정확히는 올해 1월부터니 1학년 끝에.
1학기에는 백지상태였던 중학교 전 과정을 빠르게 정리했다.
기억력이 좋다는 건 큰 장점이다.
빨라도 1년이 걸릴 과정을 3개월 안에 마칠 수 있었다.
그것도 완벽하게!
여름 방학부터 고등학교 과정을 제대로 공부했다.
철중 선배가 큰 도움이 되었다.
“야, 잘 봤냐?”
가방을 빠르게 싼 은수가 물었다.
녀석은 책을 들고 다니지 않아서 쌀 것도 없었다.
“당연하지 아마 전교 1등은 못해도 2등은 할 것 같다.
“풋, 네가 전교 2등이면 형님이라 부를게.”
“그럼 내일부터 형님이라고 불러라.”
오랜만에 일찍 학교를 벗어날 생각에 신이 난 그들.
어디로 놀러 갈까 다투면서 교문을 나섰다.
“영화 보러 가자, 응? 아주 새끈한 멜로 영화가 나왔어.”
“뭐, 재미있는 거 나왔어?”
관심은 없었지만 예의상 물었다.
“그게, 청춘이라고…….흐흐흐”
“야이, 그거 성인 영화 아니야?”
“아니야, 고등학생들의 사랑과 우정에 관한 영화야. 그러니까 우린 봐도 돼.
“청소년 관람 불가 아니야?”
“괜찮아, 정훈아. 네 얼굴이면 충분해.”
은수가 정훈의 얼굴을 뚫어지게 본 다음 말을 이었다.
“어차피 너 밖에서 20대 중반으로 보잖아.”
“어휴……. 너 정말”
정훈이 은수의 정신 나간 계획에 고개를 젓고 있을 때였다.
“어이, 거기.”
강철중이 어깨동무를 하며 친근함을 표시했다.
“형, 시험 잘 쳤어요?”
“야, 조졌다. 묻지 마라. 후우……”
“어떡해요?”
은수가 걱정스런 표정을 지었다.
조금 전까지 성인 영화를 이야기하며 보였던 색귀의 음탕한 눈빛과는 확연히 달랐다.
그 모습에 감탄한 정훈이 생각했다.
‘후, 미친 연기력이란 게 저런 건가?’
“그러게, 어떡하냐 하나 틀렸지. 전 과목 만점 받을 수 있었는데, 너무 아깝다. 결국 꿈을 못 이루는구나. 역시 중학교와 고등학교는 너무 달라.”
철중이 웃었다.
“네에? 에잇 놀랐잖아요!”
“퍼억,”
은수가 철중 선배의 어깨를 한 대 치고 도망간다.
정말 저 녀석은 붙임성이 좋은 건지 개념이 없는 건지…….
하늘 같은 선배님한테 어깨 빵을 놓고 도망가다니…….
“너 이 새끼 죽을라고.”
철중이 바로 은수를 잡으려 뛰어갔다.
거친 육두문자가 철중의 입에서 쏟아져 나왔다.
정훈도 그들을 따라 달리기 시작했다.
“형이 사는 거죠?”
메뉴판을 열심히 보고 있던 정훈과 은수는 걱정스런 마음에 다시 한번 철중 선배에게 확인했다.
“알았어. 내가 살게. 먹고 싶은 거 마음대로 먹어”
“갑자기 웬일이래요? 형이 먹을 걸 다 사고?”
“야 형 서울 가면 얼굴 보기 힘들잖아. 그리고 이제 곧 수능인데 덕을 쌓아야 시험을 잘 보지.”
“아, 그럼 형을 위해서 우리가 마음껏 먹어 드리겠습니다. 크크크.”
은수가 음흉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사장님 저희 우선 탕수육이랑, 깐풍기부터주세요.”
메뉴판을 보고 있던 철중 선배가 고개를 들었다.
“그걸로 돼?”
“시작은 간단하게 해야죠. 헤헷.”
은수가 상냥하게 웃는다.
따끈한 탕수육과 깐풍기가 테이블에 올려지고 젓가락질이 시작되었다.
“많이 먹어. 오늘 엄마 카드 가지고 왔으니까 돈 걱정 말고. 너희 이런 거 먹기 쉽진 않잖아.”
“걱정 마세요.”
대답과 함께 탕수육을 입에 가득 집어넣었다.
“정훈이는 시험 어떻게 됐냐?”
입에 가득 찬 음식 때문에 대답하지 못하고 있을 때 은수가 대신 말했다.
“전교 2등, 자기 말로는요”
“음…… 진짜?”
강철중은 진지한 반응을 보였고.
“풋”
하며 은수가 다시 웃는다.
‘평소 같으면 은수 뒤통수를 한 대 후려쳐 줬을 텐데…….’
괜히 잘못 쳤다가 입에 있는 거 다 튀어 나갈까 참았다.
“아냐, 정훈이가 마음먹고 제대로 공부했으면 가능하겠지. 수학이 문젠데……. 흠.”
잠깐 생각하던 철중이 정훈에게 물었다.
“수학은 몇 개 틀린 것 같냐?”
“두 개요. 그것 빼고는 잘 봤어요”
“야, 너 정말 전교 10등 안에는 들 것 같은데.”
철중은 지금까지 정훈이 보여준 그의 대단한 노력을 생각했다.
집요한 노력에 놀랐지만 더욱 놀라운 것은 그의 실력이었다.
어떻게 이런 머리를 숨기고 있었을까 의심스러웠다.
특히 기억력은 타의 추종을 불허할 만큼 대단했다.
자신이 본 사람 중에서 정훈이만큼 기억력이 뛰어난 사람은 없었다.
믿기 힘들 만큼 빠른 속도로 지식을 쌓았다.
굶주린 맹수처럼 쉬지 않고 먹어 치우는 정훈의 능력.
한동안 철중에게 공포로 다가왔다.
“형 안 먹어요? 그렇게 가만 있으면 우리가 다 먹어요”
“어, 괜찮아 더 먹어”
“그럼, 추가 좀 할게요.”
‘예의상 한 말이었는데’
철중의 인상이 살짝 구겨졌지만 곧 펴졌다.
어차피 엄마 카드, 인심이나 후하게 써야겠다고 생각했다.
“사장님 저희 주문할게요.”
은수와 정훈이 먹는 속도를 본 사장님은 입이 귀에 걸렸다.
함박웃음을 지으며 우리에게 왔다.
“뭘로 더 드릴까요?”
“저희 짜장면 곱빼기 두 개랑, 형은 뭐 할래요?”
“어? 난…… 짬뽕, 보통으로”
강철중의 표정에서 슬쩍 불안함이 엿보였다.
곱빼기를 말한 은수의 가벼운 목소리에서 그의 위가 아직 텅텅 비어 있음을 느낀 걸까?
그의 불안함은 얼마 뒤에 현실이 되었다.
은수와 정훈은 짜장면을 순식간에 해치웠다.
다음으로 쉽게 먹기 어려웠던 팔보채와 고추잡채를 더 시켰고, 마지막엔 짬뽕 보통으로 기름진 중국요리를 매운맛으로 마무리했다.
“햐, 이게 실화냐?”
10만 원이 넘게 나온 영수증을 보며 밖으로 나온 강철중.
믿기 어려운 가격에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정훈과 은수는 정신적 충격을 먹어 멍해 있던 철중을 향해 허리를 숙였다.
아주 정중하고 90도로 인사했다.
“잘 먹었습니다. 선배님.”
“어, 그래…… 하, 좆 됐다. 엄마한테 어떻게 말하냐?”
“네?”
“괜찮아요? 우리가 너무 많이 먹었나?”
“아니야, 괜찮아. 뭐 이 정도로. 하하핫.”
불안한 목소리였다.
철중은 흐느적거리는 다리를 붙잡고 학원으로 향했다.
정훈과 은수는 오랜만에 가득 채운 든든한 배를 두드리며 보육원으로 돌아갔다.
***
“야, 박 기자, 오늘 인터뷰 확실하지?”
“네 확실합니다. 부장님.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충성!”
박성훈 기자는 자신에게 특종을 안겨 준 부장에게 충성을 맹세했다.
“짜식, 현정옥 여사 생애 첫 인터뷰다. 절대 실수하지 말고 알겠지?”
“넵. 기대하십시오. 흐흐흐”
박성훈 기자는 오랜만에 들어온 대박 특종의 기회를 놓칠 수 없었다.
우연찮게 들어온 인터뷰 요청. 특이한 것은 현정옥 여사가 먼저 요청했단 것이다.
지금까지 무수한 경제지 기자들이 인터뷰를 요청했지만 거절했던 그녀.
그래서 은둔의 여제로 불려 왔던 그녀, 현정옥.
혈혈단신으로 명동에 나타나 사채 시장과 주식시장의 거물이 된 그녀.
실패 없는 투자에 오죽하면 미래에서 온 여인이라는 소문이 돌기도 했다.
마음만 먹으면 재벌도 휘청이게 한다는 그녀의 자금력은 모두가 인정하고 있다.
우스갯소리로 강남빌딩 10개 중 한 개는 그녀의 것이라는 믿기 어려운 소문도 있었다.
철저한 은둔생활로 얼굴도, 정확한 재산 규모도 얼마인지 정확하게 알려져 있지 않다.
그런 그녀가 인터뷰를 하자고 하니 얼마나 대박인가?
부푼 기대를 안고 박성훈은 조선호텔 스위트룸 앞에서 벨을 눌렀다.
“문화일보 박성훈 기자입니다.”
문이 열렸다.
창가에 비친 햇살 사이로 위풍당당한 노년의 여인이 있었다.
옥색의 비녀로 쪽진 머리를 한 백발의 여인은 인자한 미소를 지었다.
그녀는 남자를 향해 걸어갔다.
160이 채 되지 않는 작은 키지만 눈에 서린 안광 때문인지 기세가 대단했다.
개량 한복에 고무신을 신은 모습은 편하고 검소해 보였다.
박성훈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반가워요!, 현정옥이에요.”
박성훈은 말할 수 없는 거대한 기운에 눌려 한동안 그녀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맹수처럼 위압적인 것이 아니라 포근하면서도 범접할 수 없는 기운이었다.
“흠흠.”
옆에 있는 중년의 남자가 헛기침을 하자 정신을 차린 그.
“만나서 반갑습니다, 영광입니다. 여사님. 문화일보 박성훈 기자입니다.”
그는 허둥지둥대며 현정옥이 내민 손을 잡았다.
현금왕의 천재손자, 재벌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