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9화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과거에 이런 일은 없었는데. 분명히 없었어.’
혼란스런 기분에 밖으로 나온 정훈은 운동장을 걸으며 생각했다.
아무리 과거를 떠올려도 이런 일은 존재하지 않았다.
불현듯 불길한 생각이 떠올랐다.
‘설마, 미래가 바뀐 건가?’
큰일이다.
자신이 노트에 빼곡히 적은 사실들이 무의미해질 수 도 있는 상황이었다.
자신이 신용정보회사에 근무하면서 읽었던 신문 기사들.
주식을 공부하며 책 속에 서술되었던 급등주 정보.
오직 자신만 알고 있는 유리한 정보들이 바뀐 거라면…….
참담한 기분이 들었다.
일단 확인을 해야 했다.
도서관으로 다시 들어가 가방을 챙긴 정훈은 은수를 두고 보육원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꼭꼭 숨겨 놓은 노트를 꺼내 읽었다.
오늘이 10월 12일이니 내일 발표가 날 것이다.
지난 삶과 같이 그대로 진행된다면 별문제 없지만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정훈은 불안했지만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마음을 다잡고 문제집을 풀며 시간을 보냈다.
내일을 기다리며 힘겹게 잠에 들었다.
다음 날도 불안하긴 마찬가지였지만 최대한 침착했다.
흔들리는 마음을 다잡으며 수업에 집중했다.
앞으로의 인생에서 자신의 가장 큰 장점을 잃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이 결정할 수 없는 일에 헛되게 마음을 뺏길 수 없었다.
저녁 9시 뉴스를 초조한 마음으로 지켜보았다.
흥분한 앵커의 목소리가 귀에 들렸다.
“오늘 노르웨이 노벨 위원회가 김대중 대통령을 노벨 평화상 수상자로 결정했습니다.”
정훈은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됐다. 휴우.”
뉴스를 보던 정훈이 혼잣말을 하며 짧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역사는 그대로 진행되고 있다.
정훈은 여전히 누구보다 유리한 고지에 서 있다.
2000년 10월 13일 대한민국 역사상 최초의 노벨상 수상자 탄생.
노벨 평화상 수상자 김대중 대통령.
마지막 남은 분단국가이자 세계 최대의 화약고인 한반도.
그곳의 긴장을 완화한 공로가 그의 수상 이유였다.
정훈의 걱정과 달리 역사는 아직 예상대로 흘러가고 있었다.
특별히 바뀐 건 없었지만 새로운 우연이 일어났다고 생각했다.
이제 고민해야 할 것은 자신의 존재를 지금 드러내냐 마느냐이다.
정훈은 서울로 가기 위해 시외버스 정류장 갔을 때를 생각했다.
몇 번 갈 때마다 안 좋은 일이 생겼다.
처음에는 근처에 있던 조폭들이 이유 없이 자신에게 시비를 걸었다.
두 번째는 경찰이 자신을 수배 중인 범죄자라며 잡아갔다.
물론 사실이 아니어서 곧 풀려났고 정중한 사과도 받았다.
다음 날 오후 정훈은 시외버스 터미널로 향했다.
들러붙는 은수를 따돌리고 조심스럽게 터미널 안으로 들어갔다.
터미널 기둥에 기대어 신문을 보는 사람이 자신을 보았다.
눈이 마주치자 황급히 고개를 돌려 신문을 보았다.
그리고 정훈은 머리가 쭈뼛 서는 기분이 들었다.
‘저 사람은…… 분명 그때…….’
한 달 전 시외버스 터미널을 갔을 때 분명히 본 사람이었다.
처음에는 의자에 앉아서, 두 번째는 대합실에 앉아 책을 보면서.
지금은 기둥에 등을 대며 자신을 힐끗거리며 감시하고 있다.
그제야 그들이 항상 자신을 감시하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누굴까? 누가 나를 감시하고 있는 거지?
‘천지회?’
자신을 감시하는 눈이 있다는 걸 깨달은 정훈은 버스를 탈 수 없었다.
서초동 변호사 사무실을 폭탄으로 날려버린 조직.
버스에 타면 분명 죽을 수밖에 없다는 것을 느꼈다.
다시 그날의 폭발이 떠오르면서 온몸이 긴장되었다.
하지만 정신을 다잡고 되돌아가려 할 때였다.
“야, 정훈아 뭐 해 여기서?”
강철중이 그를 불렀다.
“아…… 그게.”
사실대로 말할 수 없었다.
서울에 계신 할머니를 찾으려 가려다 살해당할 것 같아서 집으로 돌아가는 중입니다.
라고 말하면 믿을까?
“형, 그 현정옥 여사님이 제 친할머니라서 만나려 가려고요.”
“푸하하하하, 뭐 그 현금왕 현정옥 할머니?”
박장대소하는 철중 선배. 역시나 믿지 못하는 건 당연했다.
정훈도 어차피 믿지 않을 거라 생각하고 한 빈말이었다.
“그런데 책만 볼 것 같은 형도 현정옥 할머니 아네요.”
“야, 지금 그분 모르면 간첩이지. 일간지에 ‘내 손자 찾습니다. 내 재산은 어마어마해요’라고 한 사람을 어떻게 모를 수 있냐?”
“그건, 그렇네요”
현정옥 여사의 손자 찾기 프로젝트는 꽤 오랫동안 화제가 되었다.
조 단위의 자산을 가진 그녀.
열일곱에서 열아홉 사이의 남자아이를 찾고 있다.
참가 방법은 전혀 어렵지 않았다.
손톱과 머리카락만 보내면 된다.
전국에 있는 고아들과 자신을 주워왔다고 생각한 남학생들, 거의 대부분이 유전자 검사를 의뢰했다.
공짜인데 안 해 볼 이유도 없었다.
장난스런 표정을 지은 정훈이 철중에게 조심스런 목소리로 말했다.
“형, 비밀인데 저기 뒤에 기둥에서 신문 보는 사람.”
강철중이 뒤를 힐긋 쳐다보고 그의 얼굴을 확인했다.
“돌아보지 마세요. 저 사람이 저를 감시하고 있어요.”
“뭐? 저 사람이 너를? 확실해?”
정훈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단 말이지…….”
철중이 벌떡 일어서서 신문을 보던 남자를 향해 걸어갔다.
정훈이 말릴 틈도 없었다.
“저기요, 거기 아저씨.”
철중을 본 남자의 표정이 급격히 굳었다.
“야이, 쉿”
“헤헤, 삼촌 여기서 뭐 하세요?”
“잠복 중이지.”
불편한 기색을 내비치는 남자를 향해 넉살 좋게 웃는 철중.
“텄다, 텄어. 너 때문에 놓쳤다고 반장님께 말해야겠다.”
“야 정훈아 이리 와서 인사해. 우리 아버지랑 같이 일하시는 서호철 형사님”
철중이 정훈을 향해 손짓했다.
“안녕하세요.”
쭈뼛거리며 다가와 인사한다.
“제가 아는 후배가 아저씨가 자기를 감시한다고 하잖아요.
가만히 두면 곧 미칠 것 같아서요.”
잠깐 남자의 얼굴에 불편한 기색이 스쳐 지나갔다.
정훈은 그것을 놓치지 않았다.
“응?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지금 수배 중인 사기꾼이 버스 터미널로 온다고 잠복 중인데”
서호철이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경찰에 철중 선배랑 아는 사이라…….’
표정을 보니 분명 자신을 감시하고 있었던 게 분명하다고 생각했다.
“철중이 덕분에 여기서 접어야겠다. 다음에 보자.”
서호철 형사가 철중에게 만 원짜리 한 장을 쥐여 줬다.
“이거 가지고 과자 사 먹어.”
거절하지 않고 넙죽 받았다.
“감사합니다.”
“간다. 다음에는 아는 척 하지 마.”
“네. 들어가세요”
서호철 형사는 터미널 밖으로 나와 휴대전화를 켰다.
“반장님, 서울 가는 버스는 안 탈 것 같습니다.”
“그래? 다행이네.”
“그런데……. 잠복을 들켰습니다.”
“그게 무슨 말이야?”
강도현 반장의 목소리에 짜증이 묻어 나왔다.
“그게……. 철중이가 나타났습니다…….”
서형사가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그리고 저기…….”
“뭐야 뜸 들이지 말고 빨리 말해.”
“그게……. 철중이가 윤정훈이랑 친한 사이 같습니다.”
“……알았어. 그건 내가 처리하지.”
“이제 어떻게 할까요?”
“일단 복귀해.”
싸늘한 강도현 반장의 목소리를 들은 서호철이 자신의 차로 달려갔다.
***
“접니다. 강도현 반장입니다.”
“네. 어쩐 일입니까?”
“타깃에게 문제가 생겨 전화했습니다.”
전화를 받은 박현철의 표정이 구겨졌다.
“잠시만요. 제가 전화 드리겠습니다.”
전화를 끊은 박현철은 다시 자신 앞에 앉아 있는 딸을 흐뭇한 미소로 보았다.
하지만 애써 근엄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다혜야, 성적이 이게 뭐야?”
“뭐? 딸이 전교 1등을 했는데, 이게 뭐라는 건 도대체 무슨…….”
흥분한 박다혜가 목소리를 높였다.
“그러니까 이게 뭐라고 아빠 심장이 덜컥거리냐! 흐흐흐 너무 기뻐서 심장이 멈출 것 같다.”
사랑스러운 딸, 다혜를 안으려 하자 눈에 불을 켜는 박다혜.
“으, 저리가 . 아저씨!”
박현철이 아쉬운 표정을 한다.
“자, 1등 했으니 소원 들어줄게. 말해 봐”
“용돈 백만 원. 부탁합니다. 아빠”
“뭐? 백만 원?”
딸이 말한 금액에 깜짝 놀란 박현철의 눈이 커졌다.
“뭐 안 들어줘도 돼. 대신 아빠는 영원히 신용을 잃겠지. 헤헷.”
“알겠다. 내일 계좌로 보내줄게.”
“아니, 지금 현금으로 줘. 그래야 상받은 기분이 들지”
“허허허, 그래. 잠깐 기다려.”
기분 좋은 웃음을 한 박현철이 자신의 서재로 들어갔다.
커튼이 쳐져서 어두운 서재로 들어간 박현철은 검은색 가죽 의자에 털썩 앉았다.
만년 2등이었던 딸이 전교 1등을 해 기분이 좋았다.
하지만 강도현 반장의 전화가 신경이 쓰였다.
전화기를 들고 버튼을 눌렀다.
“박현철이요. 말씀하세요.”
“네, 검사님. 타깃이 서울로 가려 했습니다. 올해부터 성격이 적극적으로 변했습니다. 공부도 열심히 하는 것 같습니다.”
“고아 새끼가 공부라……. 뭔 생각인지……. 무기력하게 살도록, 좀 밟아 놔야 되는데.”
엘리트 검사 박현철의 거친 말에 강도현이 깜짝 놀랐다.
“네? 저는 감시만……”
“아, 아니오. 그건 내가 할 테니 신경 쓰지 마세요. 윤정훈의 차후 동향을 좀 더 주의 깊게 살펴보세요”
“네. 검사님.”
“아 그리고 강반장님, 저 타깃을 잘 처리하면 앞으로 경무관까지는 문제없을 건데, 어때요, 관심 있어요?”
경무관이라는 말에 깜짝 놀란 강도현.
목소리가 떨리기 시작했다.
동기에 비해 뒤쳐지던 그가 빠르게 승진했던 것은 박 검사의 도움 덕분이었다.
만년 형사 반장인 자신도 내년에 드디어 경감으로 승진하게 될 것이다.
힘 있는 귀족 검사 박현철을 자신의 스폰서로 잡는다면 경무관을 달 수 있을 것 같았다.
“네? 잘 처리하라는 게 무슨 말인지?”
“글쎄요, 그런 건 만나서 이야기해야죠. 내 곧 연락하겠소.”
“네. 검사님. 기회만 주시면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그럼 곧 연락하겠습니다.”
전화를 끊은 박현철은 굳은 표정으로 결심했다.
‘윤정훈, 이 새끼를 제거해야 한다.’
다혜의 일기장에 적힌 이름, 윤정훈이 그의 심기를 거슬렀다.
무슨 연유로 그에 대한 마음을 키워 가는지 알 수 없다.
하지만 이루어질 수 없는 사이.
결코 상상으로라도 어울릴 수 없는, 완전히 격이 다른 존재들이다.
그를 향해 마음을 키워 가는 딸이 신경 쓰였다.
박현철은 딸의 수능 시험이 끝나고 나면 제거하기로 결심했다.
어차피 눈엣가시 같은 놈. 지금까지 미뤄 놓은 게 천추의 한이었다.
그때 어디에 묻어 버렸어야 했다.
예전에 처리했어야 했는데, 괜히 미뤘던 자신이 원망스러웠다.
딸이 말한 액수 백만원을 챙긴 박현철이 조심스럽게 서재의 문을 열었다.
문 앞에 다혜가 서 있었다.
‘설마 들은 건 아니겠지?’
딸의 표정을 유심히 살폈지만 특별한 건 없었다.
다만 백만 원을 노리는 두 손이 앞으로 나와 있다.
“빨리이.”
“자, 여기. 아껴 써.”
“오늘 다 쓸 거야, 헤헷.”
그녀는 잽싸게 돈을 쥐고는 방으로 들어갔다.
그런 딸의 뒷모습을 박현철은 한 동안 걱정스럽게 지켜봐야만 했다.
백만 원을 손에 쥔 박다혜는 방으로 들어오자마자 문을 잠갔다.
책상 서랍 구석에 숨겨 놓은 자신의 일기장을 꺼냈다.
자신이 남긴 표식이 사라져 있었다.
‘아빠가 읽은 게 분명해.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서재에서 들려온 서늘한 아빠의 목소리는 낯설었다.
아빠의 입에서 정훈의 이름이 나온 게 놀라웠다.
하지만 신경이 쓰이는 건 잘 처리하라는 아빠의 말.
깊게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아빠는 법을 수호하는 대한민국 검사다.
절대 자신이 걱정하는 그런, 무서운 일을 할 사람이 아니다.
박다혜는 자신의 생각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
‘잘 처리만 한다면’
박현철 검사의 말이 강도현의 귓가를 계속 맴돌았다.
기회를 달라고 했지만 사실 걱정이 되긴 했다. 지금까지는 그냥 감시였다.
‘처리.’
그 단어가 신경이 쓰이고 불길한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고개를 흔들었다.
대한민국 검사가 그런 지시를 할 리가 없다고 믿고 싶었다.
강도현에게 그는 은인이나 다름없었다.
박현철이 특수수사비 명목으로 주는 현금.
덕분에 아내의 약값을 벌 수 있었고 생활도 넉넉해졌다.
실적도 그의 도움으로 급격히 채웠다.
자신의 인생에 보기 드문 귀인이었다.
그는 쓸데없는 생각을 떨쳐 내고 자신을 기다리는 가족이 있는 집으로 향했다.
“다녀오셨습니까?”
강철중이 늦은 시간 집으로 들어온 아버지를 향해 인사했다.
“응, 철중아, 공부한다고 힘들지? 이제 얼마 안 남았다. 조금만 더 힘내자.”
“네. 힘들긴요. 공부가 제일 쉽습니다.”
“녀석도, 허허. 엄마는?”
고개를 두리번거리며 강도현이 물었다.
“방에 누워계세요. 오늘은 좀 괜찮으신 것 같아요.”
“그래, 우리 철중이가 고생이 많다. 공부에 엄마도 신경 쓰고”
“아니요.”
기특하고 대견한 아들의 머리를 쓰다듬는 강도현.
“그래. 들어가 쉬렴.”
“네, 아버지도 쉬세요”
방으로 들어가는 자신의 사랑스런 아들을 보던 강도현은 생각했다.
‘어떻게 말을 해야 하지……. 그렇다고 가만히 놔둘 수도 없고. 일단 떼어 놓아야 하는데’
“왔어요?”
침대에 누워 있던 부인이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누워 있어. 몸은 좀 괜찮아?”
“철중이 시험이 얼마 안 남았는데 몸이 이래서 큰일이네요.”
“그것보다 중요한 게 당신 몸이야. 잘 챙겨야 해.”
아내의 수척한 손을 꽉 잡고 강도현이 희미하게 웃었다.
“당신이 가져온 약 덕분에 살 것 같아요. 비싼 건 아니죠?”
“아니, 보험 되는 거라서 얼마 안 해. 빼먹지 말고 꼭 챙겨 먹어.”
“네.”
그렇게 대답한 그녀는 강도현을 살폈다.
불안해 보였다.
“무슨 일이에요?”
우물쭈물하는 남편을 보고 물었다.
“아무것도 아니야.”
“빨리 말해요. 당신 거짓말 못 하는 거 내가 잘 알아요.”
“그게, 철중이가 좀 안 좋은 친구를 만나는 것 같아. 신경이 쓰여서.”
“친구 누구요? 설마 정훈이 말하는 거예요?”
“어 당신이 어떻게 정훈이를 알아?”
현금왕의 천재손자, 재벌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