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3화
문제지를 받아 본 최동수의 얼굴이 급격하게 일그러졌다.
그러고는 수학 선생의 얼굴을 보았다.
“부탁하신 대로 수학경시대회 문제로 출제했어요. 과학고 아이들도 쉽게 풀기 어렵다는 문제도 몇 개 넣었구요.”
자신은 아무 잘못 없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어깨를 으쓱한 다음 슬며시 일어서 자리를 떴다.
“권 샘, 결과 나왔어요”
“네. 영어도 지난번처럼 만점이에요.”
자신도 믿기 어려운 표정이었다.
“최 선생님도 알다시피 문법도 독해도 전부 토플에 있는 문제를 사용했는데……. 어떻게 이걸, 휴”
하지만 최동수는 여전히 받아들일 수 없었다.
“혹시 커닝하는 기미 같은 거 없었어요? 아니면 귀에 뭘 꼽고 있었다던지.”
“전혀요.”
“사실, 저도 이번 영어시험 만점이 안 믿겨서 저도 많이 의심스러웠거든요. 그래서 주의 깊게 봤는데……”
“제가 졌어요. 교사 생활 20년 만에 처음입니다. 이렇게 성적이 급격하게 오르는 건. 그리고 토플 문제를 틀리지 않은 학생도요. 천재, 그거 말고는 설명할 수 없네요. 아 그리고 국어도 만점이라고 하던데요”
“…….”
최동수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영어 선생의 손에서 재시험 문제지를 낚아챈 다음 자신의 자리로 돌아왔다.
처음엔 분명 문제를 대충 냈다고 생각했다.
아니다. 분명 자신이 미리 확인했다.
다음으론채점을 잘못했을 거라 확신했다.
꼼꼼히 두 번을 살펴보았지만 아무런 문제도 없었다.
“꽝”
책상을 내리친 다음 시험지를 구겼다.
그러고는 있는 힘을 다해 갈기갈기 찢었다.
- 찌지직, 찌직.
종이 찢어지는 날카로운 소리가 적막한 교무실에 울려 퍼졌다.
다른 선생이 그랬으면 개념 없다고 질책받기 좋을 행동.
하지만 이사장 아들에게 지적할 사람은 학교에 아무도 없었다.
이사장을 제외하고.
최동수는 시뻘겋게 불어진 얼굴로 주변을 살폈다.
분풀이할 대상이 필요했다.
분노의 대상을 찾으려 고개를 들고 주변을 살폈다.
그를 힐긋거리던 다른 선생들이 눈치를 보며 슬금슬금 자리를 피했다.
“윤정훈 이 새끼, 어디 간 거야?”
혼잣말을 한 최동수는 주먹을 부르르 떨었다.
분명, 자신이 모르는 방법으로 커닝을 했다.
그 순간 최동수의 머릿속에 해야 할 일이 떠올랐다.
이제 자신의 의무는 윤정훈의 커닝 방법을 찾는 것이다.
그는 책상 위에 올려진 회초리를 꽉 쥐었다.
정훈의 입을 불게 할 자신이 있었다.
그의 매질 앞에서는 한 명도 열외 없이 모두 무릎을 꿇었다.
비릿한 웃음을 지으며 자신의 승리를 상상한 그가 의자의 몸을 기댔을 때였다.
“이사장님 들어 오십니다.”
‘아, 오늘 전체 회의였지.’
오늘은 한 달에 한 번 있는 교직원 전체 회의.
오늘은 특별히 이사장님이 참석했다.
다른 선생들처럼 최동수도 자리에서 일어서 자신의 든든한 버팀목인 아버지를 기다렸다.
백발을 한 거구의 노인이 앞문을 통해 교무실로 들어왔다.
선생들 모두 조직 폭력배의 두목에게 하듯 허리를 깊이 숙여 인사했다.
노인임에도 불구하고 180이 넘는 큰 키.
좌중을 압도하는 당당한 기운을 풍기며 자리에 앉았다.
“흠, 자리에들 앉지”
그제야 모두 허리를 펴고 자리에 앉았다.
교감 선생이 일어났다. 주변을 살펴 빈자리가 없는 것을 확인한 후 입을 열었다.
“모두 다 모인 것 같네요. 그럼 중부고등학교 월간 회의를 시작하겠습니다.”
***
은수는 수업에 조금도 집중할 수 없었다.
“Traditionally, Kuhn claims, the primary goal of historians of science was…….”
영어 선생님의 약간 웃긴 콩글리시 발음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잘하고 있을까?’
정훈의 재시험이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 너무 궁금했다.
고개를 돌려 창밖을 보았다.
청명한 하늘이 눈에 들어왔다.
‘하늘처럼 현실도 깨끗하고 정의로웠으면…….’
은수는 자신의 생각이 부질없는 망상임을 이내 깨달았다.
이런 기대를 하는 자신을 생각하면서 은수는 자신도 정훈처럼 많이 변했다는 걸 깨달았다.
정훈의 적극적이고 자신감 넘치는 행동을 보면서 희망을 가졌다.
비록 어떻게 될지 모르지만 내심 정훈의 변화가 좋았다.
원래라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재시험을 말렸을 것이다.
하지만 은수도 이번 기회를 통해 사람들의 편견을 부수고 싶었다.
어울리지 않는 능력이라고 비아냥대던 그들의 콧대를 짓누르길 기대했다.
은수는 정훈이가 재시험을 통과하는 상상만으로 미소가 번졌다.
그렇지만 쉽지 않다는 걸 분명히 알고 있다.
자신들을 짓누르기 위해 해 왔던 가진 자들의 비열한 짓들이 아직도 기억 속에 생생했다.
옛날처럼 짓밟힐 수도 있지만 다시 한번…… 날아오르고 싶었다.
은수의 심장이 두근대기 시작했다.
“거기, 집중해”
“죄송합니다.”
영어 선생님이 창가를 보면서 생각에 잠긴 은수를 불렀다.
황급히 고개를 돌린 은수는 영어책으로 시선을 옮겼다.
하지만 알 수 없는 문자들의 조합에 서서히 눈이 감기려 했다.
오후의 햇살이 은수의 긴장을 조금씩 녹이기 시작했다.
- 드르륵
교실에 있던 사람들의 시선이 모두 뒷문으로 향했다.
“죄송합니다.”
정훈이 고개를 살짝 숙이며 예의를 표했다.
“그래, 재시험은 잘 봤냐?”
“네.”
아무렇지 않은 듯 대답했다.
“그래, 수고했다. 자리에 앉아라.”
정훈이 은수 옆자리에 앉았다.
잠이 깬 은수는 호기심 가득한 표정으로 정훈을 보았다.
궁금해 죽을 것 같았지만 수업 시간이라 차마 묻지 못했다.
다행히 곧 수업 종이 울리고 선생님이 수업을 마쳤다.
“야 어땠어? 잘 봤어?”
“망했다. 젠장…… 영어는 토플 문제에 수학은 경시대회 수준.”
그 말을 들은 은수의 표정이 급격하게 어두워졌다.
이 정도로 치졸한 짓을 벌일 거라는 상상은 하지 못했다.
정훈을 위로해야겠다고 생각한 은수.
“매점이나 가자, 학교가 다 그렇지……. 젠장.”
“그러게 학교가 다 그렇지. 그래도 이 형님은 만점 아니겠냐. 타고난 천재가 어디 가겠냐?”
“뭐?”
“만점이라고”
정훈이 거들먹거렸다.
“놀랐잖아, 이 새끼야.”
은수는 정훈의 엉덩이를 정말 강하게 찼다.
“윽. 이런 XXX XXXX……. 너 이 새끼 뒤졌다.”
정훈의 입에서 들어보지 못한 육두문자가 쏟아졌다.
화들짝 놀란 은수가 매점을 향해 뛰었다.
“야, 라면은 만점 받은 네가 사라.”
“좆 까.”
마지막 국물을 깔끔하게 비운 정훈이 은수를 보았다.
“나 교무실 좀 갔다 올게.”
“응? 지금 전체 회의할 시간 아니야?”
“그러니까. 가서 사과받아야지”
“야, 여기서 그만해. 재시험도 통과했으니 이제 안 괴롭히겠지.”
“아니, 사과도 받고 장학금도 받아야겠어.”
정훈이 단호한 표정을 지었다.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어?”
“뭐가? 약속을 지키는 건데”
“네가 그러면 담임선생이 교무실에서 개쪽팔잖아. 그럼 너를 원망하지 않을까?”
“그럼 작전 성공이고”
“뭐?”
“그 새끼는 개쪽팔고 이 학교에서 사라져야 해. 어차피 이사장 빽으로 들어온 거잖아”
“뭐? 이사장 빽?”
은수는 정훈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하여튼 넌 모르는 게 있어. 솔직히 저 새끼 학교에서 사라졌으면 좋겠어.”
“너무 미워하는 거 아니야? 우리 담임이 편견이 좀 쩔긴 해도……. 다른 선생들도 다 그런데…….”
“그냥 싫어 학교에서 나갔으면 좋겠어.”
정훈은 은수에게 차마 말할 수 없었다.
최동수 선생이 무슨 짓을 저지르는지.
그는 여학생들한테 추근대며 성추행을 일삼았다.
그리고 만만한 우리 보육원 유리를…….
‘개새끼, 고아라고 만만하게 보고 저지른 그 일로 유리의 인생이 얼마나 비참하게 변했는지…….’
자신이 쫓아낼 수 없지만 위신은 땅에 떨어지게 만들고 싶었다.
이제 이 계획의 결말이 드러날 난다.
“나 갔다 올게. 걱정 좀 그만해라. 이 소심한 놈아.”
은수는 불안한 표정만 지은 채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
“올해 서울대는 몇 명 갈 것 같습니까?”
이사장이 물었다.
“서울대 법대 1명은 확실한데…….”
3학년 주임 선생은 말을 잇지 못했다.
“1명이란 말이군요.”
“……네.”
“당신들 돈 받고 선생질하면 최소한 서울대 두 명은 보내야 하는 거 아니야?”
이사장이 짜증 내며 말했다.
“그게, 이사장님 원래 한 명 더 있었는데 전학 갔습니다.”
눈치 없이 끼어든 말에 분위기가 쥐 죽은 듯이 고요해졌다.
“후우, 저랑 장난합니까?”
“내년에는 몇 명 예상합니까?”
“지금 두 명은 가능하고 새롭게 치고 올라오는 학생이 있는데 걔 포함하면 세 명 될 것 같습니다.”
2학년 부장 선생의 말에 선생들은 의문스런 표정을 지었다.
2학년 중에서 서울대에 갈 거라고 생각한 사람은 두 명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곧 부장 선생이 말한 한 명이 누구인지 깨달았다.
무서운 속도로 성적을 높이고 있는 녀석.
실로 믿기 어려운 속도였다.
모두 2학년 부장 선생의 말에 수긍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최동수는 불길한 생각이 들었다.
부장이 말한 뉴페이스가 윤정훈을 말하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선생님, 혹시 우리 반 윤정훈을 말한 거면 잘못 짚은 겁니다.”
최동훈은 비릿한 웃음과 함께 2학년 부장을 쏘아붙였다.
“아, 그게…… 저 혼자만 그런 게…….”
“하여튼 아닙니다.”
“크흠, 하여튼 올해 두 명, 내년에 세 명 반드시 보내요. 최소한 그 정도는 해야 월급 받는 게 안 부끄럽지, 안 그래요?”
그때 교무실 앞문이 열렸다.
“회의하는 데 죄송합니다.”
‘어디 학생이 회의하는데 들어오고.’
회의를 방해한 학생을 본 이사장의 이마에 핏줄이 툭툭 불거졌다.
“자넨…… 누구지?”
화를 참은 이사장이 물었다.
다른 선생님들 모두 이 상황에 당황했다.
그중에서 최동수 선생이 가장 놀랐다.
“야, 윤정훈 회의 중인 거 안 보여?”
최동수가 큰 소리로 주의를 주었다.
“이봐 최 선생, 어디 감히, 내 앞에서 소리를 지르고 그래.”
“아, 아버지. 죄송합니다.”
“뭐 이 새끼야?”
이사장의 목소리가 커졌다.
“죄송합니다.”
얼굴이 시뻘겋게 변한 최동수가 자리에 앉았다.
이사장은 정훈을 바라보았다.
노여움보다는 흥미로움이 더 큰 듯했다.
‘저 학생이 아까 윤정훈이란 놈이군.’
다른 선생들도 마찬가지였다.
정훈을 아는 선생들도 최동수가 강요한 재시험을 흥미롭게 지켜보고 있었다.
비록 그의 권력 때문에 말리지 못했지만, 마음속으로는 정훈을 응원하고 있었다.
오늘 만점이라는 소식을 듣고 내심 기뻐했다.
모든 일이 무난히 해결되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사장님까지 있는 지금 교무실로 들어온 윤정훈을 본 선생들.
앞으로 무슨 일이 벌어질지 내심 궁금했다.
“그래, 용건이 뭔가?”
“최동수 선생님이 한 약속을 확인하러 왔습니다.”
“그게 뭔가?”
“공식적인 사과와 졸업할 때까지의 장학금입니다.”
“뭐?”
이사장의 이마가 다시 한번 꿈틀댔다.
“이봐, 최 선생 장학금을 당신 마음대로 결정한 거야?”
이사장은 최동수를 보며 싸늘한 표정으로 물었다.
“그게…… 죄송합니다. 아버지.”
“닥쳐, 한 번만 더 학교에서 아버지라 부르면…….”
이사장의 손에 있던 볼펜이 콰직하고 부서졌다.
얼굴이 시뻘겋게 변한 이사장이 2학년 부장 선생에게 물었다.
“선생님 설명을 좀 해 주세요. 내가 전혀 이해가 안 되네.”
“알겠습니다.”
이사장에게 그동안 있었던 일을 치우침 없이 설명했다.
“그러니까 성적이 급격하게 올랐는데 근거도 없이 의심을 한 거군.”
“아닙니다. 아버지, 절대 아니에요. 커닝을 한 게 분명합니다.”
그 말을 들은 이사장은 손목에 걸린 롤렉스 시계를 천천히 풀었다.
아버지라 하지 말라 했는데도 계속 지껄이는 저 입이 눈에 거슬렸다.
한 번 말해서 듣는 적이 없는 자식, 아니 새끼였다.
느릿하게 일어서 자신의 아들에게 갔다.
“틀렸으면 인정을 해야지…… 넌 옛날부터 그랬어.”
이사장의 거대한 손바닥이 최동수의 뺨을 후려쳤다.
바닥에 쓰러진 최동수는 당황한 얼굴로 이사장을 보았다.
“아, 아버지……”
“학교에서 아버지라고 부르지 말라고 수십 번을 이야기했거늘.”
이사장의 발이 최동수의 머리를 몇 차례 짓밟았다.
“살, 살려 주세요 아버지. 죄송합니다.’
최동수가 교무실 한가운데 쓰러졌다.
그 모습이 측은하게 느껴질 만도 한데, 누구도 말리는 사람이 없었다.
오히려 손으로 입을 가리고 몰래 웃음 짓는 선생들이 더 많았다.
그만큼 학교에서 신뢰를 잃고 있던 자였다.
이사장이 입을 열었다.
“사과하거라”
쓰러져 있던 최동수는 비틀거리며 일어섰다.
그의 얼굴은 눈물과 콧물로 범벅이 되어있었다.
“정훈아, 미안하다. 내가 잘못했다.”
정훈이 그를 내려다보았다.
공포에 짓눌린 얼굴.
잠깐 불쌍한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곧 생각을 지웠다.
그가 자신과 비슷한 처지에 있던 아이들에게 한 모욕, 그리고 그가 미래에 저지를 죄가 생각났다.
“알겠습니다.”
담담히 그의 사과를 받아들였다.
이사장이 윤정훈을 보았다.
“공식적인 사과는 된 거 같고, 장학금은 상의를 해야겠어. 저 자식이 마음대로 줄 수 있는 게 아니야.”
“알겠습니다. 이사장님. 기대하지도 않았습니다. 고아인 제게 세상은 늘 호의적이지 않았습니다.”
당황한 이사장이 얼굴을 찡그렸다.
‘사내놈이 기개가 있어, 내 앞에서, 그리고 모든 선생이 있는 자리에서 저런 말을 하는 걸 보니.’
“허허허, 그런 뜻이 아니야. 긍정적으로 검토할 테니 기다리게. 그만 나가 봐”
“네. 감사합니다.”
정훈이 몸을 돌렸다.
온몸에 짜릿한 쾌감이 전해졌다.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어느새 복도를 가득 메운 아이들이 결과를 기다리고 있었다.
아이들은 창문 틈으로 안에 있던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도 최동수의 사과를 분명하게 보았다.
아이들의 함성이 복도를 메웠다.
고아였고 방관자였던 윤정훈은 이제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불의에 맞서 이긴 승리자가 되었다.
***
다음 날부터 최동수 선생은 학교를 나오지 않았다.
안 그래도 선생들 사이에서 미움받던 자였는데 교무실 한 가운데서 구타를 당했다.
부끄러운 치부가 들켜 버린 상황.
누구라도 다시 학교로 돌아오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정훈은 자신의 계획대로 모든 것이 이뤄지지 않아 조금 아쉬웠다.
장학금이 절실한 상황이었는데……. 대신 철중이 형에게 부탁하기로 마음먹었다.
대신 최동수를 학교에서 몰아낼 수 있어서 더없이 기뻤다.
귀여운 유리가 좀 더 행복하게 살 수 있을 거라 생각하니 기뻤다.
2교시가 끝났다.
선생님은 교실을 떠났고 아이들은 시끌벅적 떠들기 바빴다.
정훈이 자리에서 공부를 할 때였다.
교실 스피커가 켜졌다.
“아, 아 2학년 윤정훈 학생, 지금 교장실로 오세요.”
누군가 윤정훈을 찾고 있었다.
현금왕의 천재손자, 재벌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