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4화
정훈은 쉬는 시간 동안 영어 단어를 외우고 있었다.
이제 영어 지문은 하나도 틀리지 않을 만큼 자신이 있었다.
그래서 훨씬 더 높은 수준의 비지니스 단어를 외우기 시작했다.
고등학교 2학년에게는 너무 수준 높은 단어지만 정훈은 미래를 준비해야 했다.
“정훈아, 너 찾는데”
“응?”
집중해서 영어 단어를 외우던 정훈이 고개를 들었다.
“방송으로 나왔어. 교장실로 오라는데.”
“교장실 맞아? 교무실 아니야?”
정훈이 반문했다.
“아니 확실히 교장실이었어.”
그때 앞문이 열리며 2학년 부장 선생님이 들어왔다.
고개를 두리번거리며 누군가를 찾았다.
“야, 윤정훈 교장 선생님이 찾으신다.”
“네?”
정훈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야, 좋은 일이니까 빨리 튀어와.”
선생님이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네.”
“너 근데 왜 이렇게 변했냐? 어색하게.”
복도를 걸어갈 때 부장 선생님이 말을 걸었다.
“네? 제가 많이 변했습니까?”
“그럼, 네가 안 변했나? 작년 이맘때 생각해 봐. 수업 시간에는 매일 책상에 엎어져 퍼질러자고, 친구들이랑은 말도 안 섞고……. 뭐라 지적하면 고슴도치처럼 날을 잔뜩 세우던 놈인데…….”
정훈은 2학년 부장을 보면서 생각했다.
‘나를 꽤 유심히 관찰했구나.’
“아, 그게.”
‘제가 한번 살아 보니 그렇게 살 필요가 없더라구요. 그리고 제가 대한민국 현금왕의 손자라서 준비해야 할 게 많습니다’라고 말할 순 없었다.
분명 놀리냐고 뒤통수나 맞을 게 뻔했다.
“누군가에게 어울리는 사람이 되고 싶어서요. 그리고…… 반드시 해야 할 일도 있고요.”
“누구길래 이렇게 하루아침에 바뀌냐? 그 사람은 좋겠네”
“그게…….”
정훈은 말할 수 없었다.
현정옥 여사라고 말하면 믿을까?
정훈은 할머니에게 어울리는 손자로 당당히 서기 위해서,
할머니와 함께 복수를 하기 위해서 매 순간 최선을 다하고 있는 중이었다.
“알아 알아, 비록 연애는 많이 못했지만 나도 알아 짜식아. 흐흐흐.”
‘연애? 연애는 개뿔’
선생님이 제대로 오해를 하셨다.
그리고 저분 얼굴은 분명 연애를 한 번도 못한…….
하긴 고등학생이라면 이성과 성에 한창 관심이 많은 나이다.
정훈도 아침마다 떠나는 캠핑이 어색하며 좋았다.
하지만 육체는 고등학생이지만 정신은 거의 40년을 살아온 정훈은 그럴 수 없었다.
학교에서 알고 지내는 여학생들은 왠지 모를 위화감이 있었다.
그냥 딱 귀여운 조카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물론 예외도 있긴 했지만…….
지금은 그런 것들에 한눈팔 시간이 아니다.
신경 써야 할 게 많았다.
“그럼 반드시 해야 할 일은 뭐야?”
“그건…… 살아남는 거요. 살아남아서 소중한 걸 지키는 거요.”
“뭐?”
부장 선생님이 당황하며 그 자리에 멈춰 섰다.
고개를 돌려 정훈을 물끄러미 보았다.
“정훈아 혹시…… 공부를 너무 많이 해서 미친 건 아니지? 푸하하.”
정훈은 진지했지만 누구도 믿을 수 없는 사실이었다.
‘하긴 진짜 살아남기 위해 공부를 하는 건 아마 처음 들었겠지.’
“누가 너를 노리길래 그러냐? 크크크. 하여튼 요즘 것들은, 아이구. 쯧쯧.”
정훈은 선생님이 원하는 말을 했다.
“흠흠, 그냥 열심히 하니까 재미있어서요. 칭찬받는 것도 나쁘지 않구요.”
“그래. 열심히 살면서 인정받으면 행복하잖아.”
“네.”
대화를 나누다 보니 어느새 교장실에 도착했다.
“긴장 풀고 좋은 일이니까 너무 걱정하지 말고……. 축하한다. 계속 열심히, 화이팅.”
“네 감사합니다.”
정훈을 교장실로 들여보낸 부장 선생은 허리에 걸린 전화기를 꺼냈다.
주위를 둘러본 다음 천천히 문자를 쓰기 시작했다.
[궁금해하신 거 확인했습니다. 좋아하는 여자 때문이랍니다. 그리고 학업 스트레스로 인한 약간의 피해망상증도 있는 것 같습니다. 그 외에는 별일 없습니다. 또 보고드리겠습니다.]
버튼을 눌러 문자를 보낸 그는 교무실로 향해 걸었다.
‘살아남기 위해서 공부한다…….’
정훈의 말을 곱씹은 부장이 고개를 흔들었다.
청소년들의 허황된 망상에 기가 찼을 뿐이다.
하지만 다시 한번 정훈의 처지를 생각한 그는 조용히 혼잣말을 했다.
“하긴 어쩌면 그 말이 진짜일 수도 있겠네”
서늘한 웃음을 지으며 교무실로 들어갔다.
***
“어서 들어와.”
교장 선생님이 정훈을 인자한 미소로 맞이했다.
문을 열고 들어간 교장실.
긴장한 정훈은 허리를 숙여 인사를 한 다음 고개를 들었다.
소파의 상석에 이사장이 앉아 있었다.
왼편에는 교장 선생님, 그리고 오른편엔 처음 보는 사람 두 명이 나란히 앉아 있었다.
한 명은 커다란 사진기를 들고 있었다.
“아, 정훈 군. 이리로 와서 앉아.”
교장 선생이 손짓으로 정훈을 자신의 옆에 앉혔다.
“이 친구가 우리 학교 2학년 윤정훈이란 학생입니다. 오늘 주인공입니다.”
“안녕하세요”
“반갑다, 난 중부일보 사회부 부장 이판수라고 한다.”
중년의 남자가 손을 내밀었다.
정훈이 엉거주춤한 자세로 악수를 했다.
소파에 몸을 기대고 있던 이사장이 몸을 움직여 커피잔을 들었다.
여유롭게 한 모금 마신 그는 잔을 내려놓고는 정훈을 보았다.
이사장의 눈치를 살피던 교장 선생님이 입을 열었다.
“오늘 자네를 부른 이유는 다름 아니라 장학금 때문일세.”
장학금이란 말에 정훈이 고개를 들고 이사장을 보았다.
이사장이 무겁게 입을 열었다.
“우선 내 아들놈 혼자서 멋대로 자네한테 약속한 건 내가 사과하겠네.”
“아, 괜찮습니다.”
뜸을 들이던 이사장이 말을 이었다.
“그리고 내가 여러 선생님과 논의해 보니 자네 성격도 많이 오르고 형편도 어렵고 해서 장학금을 지급하기로 결정했네.”
“네?”
정훈은 눈이 커졌다.
어제 이후로 전혀 기대하지 않았다.
그런데 장학금이라니…….
“감사합니다. 이사장님”
“아 장학금은 내가 개인적으로 후원을 하는 것이야. 학교랑은 관련이 없어. 열심히 하면 졸업 때까지 나올 거야. 학교 장학금보다 좋은 거지.”
“네. 감사합니다. 혹시…….”
“아 조건은 서울대 입학. 그거면 돼. 어렵지 않겠지?”
정훈은 일부러 굳은 표정을 지었다.
지금대로면 서울대에 갈 수 있을 것이란 자신감이 있었다.
법대는 몰라도 다른 곳은 가능하지 않을까?
하지만 이런 자리에서는 겸손해야 한다.
그리고 서울대가 공부만 열심히 해서 들어갈 수 있는 곳인가?
쉽지 않다는 뉘앙스를 풍겨야 했다.
“그게 서울대란 게 쉬운 것도 아니고……. 실패하면 어떻게 되는 겁니까?”
“허허허, 어쩔 수 있나. 돈만 날리는 거지. 그런 건 신경 쓰지 말고 학교와 나의 명예를 위해 최선을 다해 주게.”
이사장은 별거 아니라는 표정을 지었다.
“역시 이사장님 배포가 대단하십니다. 성적이 꾸준했던 학생도 아니라고 들었는데. 이사장님 개인적으로 이렇게 큰 후원을 하시다니…….”
맞은편에 있는 중부일보 기자가 이사장을 칭찬했다.
정훈은 이사장의 말이 점점 의심스러워지기 시작했다.
학교 돈으로 주면 될 걸 왜 굳이 자기 돈으로 주려 하는지 의문이었다.
“배포는 무슨, 칭찬이지. 인재는 인재가 알아보는 법이지.”
“이 이야기도 기사에 꼭 쓰겠습니다.”
“허허 부탁하겠네. 멋진 스토리 부탁하네. 다음 총선에 공천받을 수 있도록 자네가 좀 도와주게.”
“물론입니다.”
그제야 모든 의문이 풀렸다.
이 모든 건 이사장의 정계 진출을 위한 언론 플레이였다.
뭐 정훈의 입장에서 나쁠 것도 없었다.
어차피 돈이 필요한 상황이었다.
돈을 확인해야 했다.
“그럼 이사장님 약속하신 대로 매달 50만 원 맞습니까?”
이사장의 눈썹이 꿈틀댔다.
사회부 기자가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아니 이사장님, 25만원인 줄 알았는데, 50만 원이라니 역시 대단하십니다.”
이사장이 황급히 굳은 얼굴을 풀었다.
“하하하, 이거 감추려고 했는데……. 들켜 버렸구만.”
“제가 금액도 꼭 적겠습니다.”
옆에서 둘의 이야기를 지루하게 듣던 카메라 기자가 일어섰다.
“자 그럼 사진 촬영하겠습니다.”
사진 기자는 여러 포즈를 요구했다.
이사장은 얼굴 근육에 경련이 올 만큼 웃는 얼굴을 지었다.
마지막 촬영은 본관 입구에서 정훈과 이사장의 투 샷이었다.
“자, 찍습니다. 하나, 둘, 셋.”
찰칵하는 소리와 함께 마지막 촬영이 끝났다.
사진 기자는 이사장을 향해 허리를 숙였다.
사회부 부장도 이사장 곁으로 와 인사했다.
“그럼 이만 가 보겠습니다. 장학금 수여 기사는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걱정은 무슨, 잘 부탁하네”
이사장이 품 안에 있던 하얀색 종이봉투를 꺼냈다.
그리고는 서슴없이 부장의 호주머니로 찔러넣었다.
“뭘 또 이런 걸 주시고 그러십니까?”
“허허, 가는 길에 식사라도 해야지. 내가 오늘 선약만 아니면…….”
“이사장님 바쁘실 텐데,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럼 가 보게.”
서로 비릿한 미소를 주고받고는 헤어졌다.
멀어지던 두 사람을 물끄러미 보던 이사장이 정훈을 보았다.
인상 좋게 웃던 이사장은 어느새 굳은 얼굴이었다.
“자네 재주가 좋아.”
“네?”
“순식간에 25만 원을 챙겼어”
“약속이 50만 원이었습니다.”
“그건 내 아들 새끼랑 한 약속이고, 뭐 25든 50이든 상관없다. 기사만 잘 나오면 그만이야.”
“돈 받은 만큼 열심히 하겠습니다.”
그 말을 들은 이사장이 정훈을 보고 웃었다.
“열심히 하든, 그 돈으로 유흥을 하든 상관 안 해. 자네 덕분에 내 아들을 병신으로 만들었어. 병신 새끼도 자식은 자식이야, 마음이 아프더군.”
“죄송합니다.”
“그럼. 동수는 이제 학교에 나오지 않을 거야. 내 아들을 학교에서 쫓아냈으면 죄송해야지.”
이사장의 표정이 점점 일그러졌다.
“참 사람이 신기해. 그 자식이 하도 사고를 쳐서 어떻게 쫓아낼까 그 생각만 했는데……. 자네 덕분에 쫓아냈더니 또 없는 게 허전해, 그래서 자네가 별로 맘에 들지 않네.”
“선생님이 스스로 만든 올가미에 걸린 겁니다. 전 그걸 피했을 뿐입니다.”
“그래, 내가 그랬지. 내가 성인군자라면 자네를 이해하지. 하지만 사람이야, 사람. 그러니 앞으로 조심해. 아주 사소한 것 하나로도 아작을 낼 테니까”
이사장이 이글거리는 눈으로 정훈을 보았다.
정훈도 물러서지 않았다.
“해보시지요. 가진 것 없는 고아라고 함부로 대하는 건 이사장님을 닮았나 봅니다.”
“뭐 이 자식이?”
“아, 이사장님 걱정하지 마세요. 서울대, 그것도 법대로 가 드리겠습니다.”
정훈과 이사장의 날카로운 시선이 허공에서 팽팽하게 교차했다.
얼굴에 핏줄이 툭툭 솟아오르던 이사장이 손을 높이 들었다.
정훈도 밀리지 않으며 이사장을 쏘아보았다.
“푸하하, 기개가 있어. 조심하게, 조심해야지.”
이사장이 천천히 몸을 돌려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휴, 노친네 덩치가 크긴 크네. 쫄았네.’
거구의 몸을 이끌고 들어가는 이사장을 본 정훈의 눈이 다시 반짝였다.
‘이사장님도 방심하지 마세요. 현정옥의 손자로 돌아와 잘근잘근 씹어 먹어 드리겠습니다.’
정훈은 이사장의 기세에 밀리지 않은 스스로를 대견하게 생각하며 교실로 들어갔다.
***
다음 날 중부일보의 사회면에 이사장의 장학금 수여 기사가 나왔다.
기사의 내용은 중부고등학교 이사장 최재원의 미담이 대부분이었다.
기업인으로 중부시 발전을 위해 노력했다.
인재 양성을 위해서 학교를 운영했다, 등등.
차마 읽기 부끄러울 만큼 찬양 일색이었다.
신문을 읽던 강도현 반장은 어이가 없었다.
조폭 비슷했던 자가 운 좋게 아파트 분양으로 떼돈을 벌어서 그 자리에 있는데…….
인재 양성이라…….
학교를 운영하며 빼돌린 돈과 학교를 통해 돈세탁한다는 첩보가 이미 몇 개다.
곧 수사에 착수할 예정이다.
이사장의 사진을 보던 강반장의 표정이 굳었다.
‘윤정훈?’
다시 기사를 자세히 보니 장학금을 받는 학생이 윤정훈이었다.
신문을 책상에 던진 강도현 반장이 의자에 몸을 기댔다.
눈을 감은 채 의자를 이리저리 돌렸다.
잠깐 고민을 한 그가 문자를 보냈다.
[중부일보에 윤정훈 사진이 나왔습니다. 중부고등학교 이사장 최재원의 장학금 수여 사진입니다. 중요한 건 아니지만, 알려 드립니다. 또 보고드리겠습니다.]
보내기 버튼을 눌렀다.
별것 아닌 정보, 그냥 자신이 감시에 최선을 다하고 있다는 걸 보여 주고 싶었다.
잠시 뒤 전화벨이 울렸다.
박현철 검사였다.
강도현의 입술이 길어지며 미소가 절로 나왔다.
검사님의 칭찬을 생각하며 전화기를 귀로 가져다 댔다.
“예, 검사님.”
“너, 너 이 씨발 새끼야, 뭐 하는 새끼야?”
우레와 같은 고함이 수화기에 울려 퍼졌다.
현금왕의 천재손자, 재벌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