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6화
“현수야, 차 세워. 당장.”
“네? 여기서요?”
만호의 말을 들은 곽현수는 당황했다.
길 한복판에 고속으로 달리고 있던 자동차를 세우라니.
항상 차분했던 김만호의 허둥지둥하는 모습에 현수도 살짝 긴장했다.
현정옥 여사님과 만호 형님을 모신 게 10년이 넘었다.
하지만 이렇게 당황한 표정은 손에 꼽을 지경이었다.
김만호가 차창 밖으로 고개를 돌리며 긴 한숨을 쉬었다.
흥분을 가라앉히려고 몇 번의 심호흡을 했다.
“형님 괜찮으세요?”
“어 괜찮아. 가는 길에 편의점 보이면 세워 줘.”
“네, 형님. 그런데……혹시 무슨 일 있으세요?”
“…….”
대답하지 않았다.
김만호의 귀에는 지금 아무 말도 들어오지 않았다.
‘분명 그 얼굴이야.’
20년이 넘었지만 잊히지 않은 그 얼굴.
“형님, 저기 있습니다.”
길가 편의점 앞에 차를 댄 곽현수가 만호에게 말했다.
“금방 갔다 올게 기다려.”
“네.”
편의점으로 들어간 만호는 계산대 앞에 있던 가판대를 살폈다.
신문이 가지런히 정렬되어 있었다.
“안녕하세요.”
계산대에 있던 20대 남자 아르바이트생이 친절하게 인사했다.
“중부일보 하나 주세요.”
네, 500원입니다. 가판대에 있는 거 가져가시면 됩니다.”
김만호는 신문들 사이에서 중부일보를 찾기 시작했다.
한참을 찾아도 보이지 않았다.
“없는 거 같은데요.”
“네?, 잠시만요 제가 찾아 드릴게요.”
아르바이트생이 계산대 밖으로 나와 신문들을 뒤적였다.
다른 신문은 다 있었지만 중부일보는 보이지 않았다.
그때 사장처럼 보이는 남자가 들어왔다.
“뭐 찾아?”
“중부일보요.”
아르바이트생이 신문을 뒤적이며 말했다.
“어, 그거 조금 전에 다 회수해 갔는데.”
사장은 별거 아니라는 듯 말하며 계산대로 들어갔다.
하지만 김만호의 표정은 딱딱하게 굳었다.
“신문을 회수하는 일이 자주 있습니까?”
“네, 아뇨. 제가 편의점하고 나서 처음 있는 일입니다.”
“알겠습니다.”
빈손으로 편의점을 나선 김만호는 차를 향해 천천히 걸어갔다.
‘다른 곳으로 가 볼까? 아니야. 분명 그들 짓이야’
“손님, 신문값 받아 가셔야죠.”
편의점 문을 열고 고개를 내민 젊은 직원이 외쳤다.
하지만 만호는 그의 말이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조심스럽게 운전을 하던 현수는 백미러를 힐끔거렸다.
편의점에서 빈손으로 돌아온 만호의 표정을 살폈다.
평소 같으면 궁금해서 물어보았겠지만 오늘은 말 붙이기가 어려웠다.
깊은 생각에 빠져 있는 얼굴이었다.
차에 탄 뒤 한참 동안 말이 없던 김만호가 입을 열었다.
“어르신 댁으로 가자. 전속력으로.”
평소와 다른 만호의 기세에 놀란 현수는 핸들을 꽉 잡았다.
“네 형님. 꼭 잡으세요”
최고급 검은 세단이 엔진음을 키우며 속도를 높였다.
***
“어르신, 어르신.”
만호는 집 안으로 들어오자마자 큰 소리로 어르신을 찾았다.
쿵쾅거리는 소리를 내며 서재를 향해 뛴 다음 문을 벌컥 열었다.
싸늘한 시선으로 김만호를 보는 현정옥.
“뭐 하는 거야? 집 무너지겠어.”
까랑까랑한 목소리로 예의 없이 문을 벌컥 연 만호를 꾸짖었다.
“후우, 죄, 죄송합니다. 어르신. 지금…….”
턱밑까지 숨이 찬 만호는 말을 잇지 못했다.
“중요한 게, 중요한 게, 아닙니다. 그러니까, 후우, 후우.”
주차장에서부터 전속력으로 달려와 숨을 헐떡였다.
미간을 찡그린 현정옥 여사의 눈에 불이 나기 직전이었다.
“뭐 하는 짓이야 이게, 이 사람이.”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방안을 울렸다.
그 소리에 흠칫 놀란 김만호.
가쁜 숨 때문에 말을 할 수 없던 그는 현정옥 앞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손을 뻗어 신문을 내밀었다.
책상에 앉아 서류를 확인하던 현정옥은 못마땅한 얼굴로 신문을 낚아챘다.
만호가 준 신문을 펼쳤다.
최재원의 미담 기사를 읽은 그녀가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최재원이, 이 꼬맹이가…… 많이 컸어.”
여전히 숨을 헐떡이던 김만호가 손을 흔들었다.
“아니…… 그거 말구요.”
“뭐?……어허 이 사람 왜 이래? 자네 어디 아픈가?”
안 하던 짓을 하는 만호.
그녀는 이제 슬슬 걱정되기 시작했다.
“사진……요.”
“사진이 왜.”
고개를 돌려 최재원의 사진을 보았다.
사진을 본 순간 그녀의 두 눈동자는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어느새 벌어진 입,
그녀는 겨우 고개를 들어 만호를 보았다.
고개를 끄덕였다.
“……어, 어…….”
현정옥의 머릿속도 하얗게 변했다.
단 한 마디도 생각나지 않았다.
그녀를 지켜보던 만호가 입을 열었다.
“맞습니다. 어르신. 분명합니다.”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야?”
“분명히 정훈 도련님입니다.”
고개를 끄덕인 현정옥의 볼이 미세하게 떨리기 시작했다.
“얼굴이…… 어떻게 이렇게까지…….”
“네, 현중 도련님과 똑같습니다.”
예전에 말라 버린 그녀의 두 눈에 어느새 눈물이 가득 고여 있었다.
“현중이랑 이렇게 똑같을 수가”
혼잣말을 하는 그녀의 볼에 눈물이 흘러내렸다.
더 이상 아무 말도 할 수 없어 침묵했다.
사진을 본 채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는 현정옥.
틈틈이 눈물을 닦을 뿐이었다.
만호도 그녀를 가만히 지켜보기만 했다.
“가세.”
“지금 말씀입니까……?”
“그렇게 찾고 있던 손자야, 지금 당장 출발해야지.”
“네, 바로 차를 준비하겠습니다.”
서재 밖으로 나갔다.
터질 듯이 빠르게 뛰는 심장을 진정시켜야 했다.
그녀는 일어서서 창밖을 보았다.
붉은 석양이 아름답게 물들고 있었다.
드디어 그토록 찾던 손자를 만날 수 있다.
다시 한번 마음을 가다듬은 그녀는 옷걸이에 걸린 외투를 들었다.
서둘러 나갈 채비를 마친 현정옥이 자신의 검은 세단에 올라탔다.
앞자리를 차지한 만호가 뒤로 고개를 돌렸다.
“어르신 퇴근길이라 차가 좀 막힐 것 같습니다.”
“괜찮아, 지금까지 참아왔는데 그거 못 참겠나. 천천히 조심히 가지.”
“네. 출발하겠습니다.”
운전기사 곽현수가 천천히 차를 움직였다.
퇴근 시간이 겹쳐 차는 꽉 막힌 도로를 거북이처럼 기어갔다.
최대한 빨리 가기 위해서 좌, 우 사이드미러를 확인하던 곽현수의 눈매가 서서히 가늘어졌다.
몇 번의 차선 변경을 거친 다음 다시 사이드미러를 확인했다.
그의 눈에 계속 거슬렸던 검은색 차량.
출발한 뒤부터 지금까지 자신들을 따라오고 있었다.
확실했다.
“어르신 꼬리가 붙었습니다.”
“…….”
무거운 정적이 차 안을 메웠다.
“말씀하시면 따돌리겠습니다.”
현수의 말을 들은 현정옥은 생각에 잠겼다.
지금 미행을 따돌리고 중부시로 가면 손자가 위험해질 수 있다.
지금까지 의문사한 아이들이 생각났다.
신중해야 한다.
잘못하면 자신도, 손자도 목숨이 위험할 수 있다.
침묵 속에서 생각을 정리한 현정옥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차 돌려. 명동에 있는 백화점으로…….”
“네? 알겠습니다.”
오랜만에 화려한 백화점에 들어온 그녀는 이것저것 구경하며 쇼핑을 시작했다.
하지만 아무것도 그녀의 관심을 끌 수 없었다.
“흠, 오랜만인 것 같네.”
“아마, 3년 만인 것 같습니다.”
“그동안 너무 집에만 있었나 봐. 이제 좀 돌아다녀야겠어”
“네. 어르신 그게 좋겠습니다.”
“내가 너무 성급했어. 손자를 만나려면 준비를 해야지.”
김만호도 그녀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그럼 저도 시작하겠습니다.”
“오랜만에 옷이나 하나 살까……”
명품 숍에서 650만 원짜리 캐시미어 코트 하나를 샀다.
그리고 만호의 딸을 위한 원피스를 산 그녀는 성북동에 있는 집으로 돌아왔다.
그날 밤을 뜬눈으로 지새운 그녀.
생각에 생각을 거듭했다.
순식간에 따라붙은 미행.
섣불리 움직이다가는 손자가 위험하다.
그녀는 손자와의 쉽지 않은 만남을 계획하기 시작했다.
‘이제 지지 않는다.’
물러설 수 없는 그녀의 마지막 싸움이었다.
어슴푸레 동이 트는 새벽녘,
창밖을 보는 그녀의 눈에서 푸른 안광이 빛나고 있었다.
***
“사부님, 드디어 내일입니다.”
“그래. 드디어……. 드디어 내일이다. 강철중 내 이름으로 강호를 통일한다.”
“저기, 발 연기는 집에서 해 주실래요?”
정훈과 철중의 어색한 연기를 보던 은수가 일침을 놓았다.
무안해진 정훈과 달리 철중은 얼굴에 철판을 깔고 다시 말했다.
“드디어 우리 학교에서 드디어 수능 만점자가 나온다. 푸하하.”
“역시, 사부님은 미친…….”
정훈의 말을 들은 철중이 눈을 부라렸다.
정훈이 급히 단어를 바꿨다.
“미친 사람 같지만 사실은 대단한 천재이십니다. 흐흐흐”
“뭔가 어색하지만…… 일단 넘어간다. 휴, 내일이면 끝이다.”
“선배 지금까지 고생 많았어요. 내일 잘 쳐요.”
은수도 철중을 격려했다.
“고생은 공부가 가장 쉬웠어.”
“형, 진짜 정훈이 말이 맞는 것 같아.”
은수의 뜬금없는 말에 철중이 은수를 본다.
“뭐?”
“미친 사람이라는 거요. 헤헷.”
“어휴, 내 이것들을 제자라고…….”
“하여튼 형, 내일 시험 잘 봐요.”
정훈이 철중에게 준비해 온 선물을 줬다.
“엿 드세요. 사부님. 그럼 내일 천하제일검이 되시길……”
“그래, 나의 수제자야. 흐흐흐. 하여튼 고마워. 나 시험 장소 확인해야 해, 간다.”
“형 시험 잘 봐.”
은수가 살갑게 손을 흔들며 철중에게 인사를 했다.
“네. 시험 잘 봐요, 형 나 장학금 받은 걸로 파티해요. 중국집 콜?”
정훈의 제안에 철중과 은수도 흔쾌히 동의했다.
“좋지. 언제 갈까?”
“형 편할 때요”
“아, 맞다. 엄마가 너희들 데려오래. 파티 하자던데.”
“네?”
“좋아요”
약속을 정한 다음 강철중은 교문 밖으로 사라졌고 은수와 정훈은 학교로 들어갔다.
교실로 돌아가던 은수가 갑자기 걸음을 멈췄다.
“아 맞다. 다혜 선배한테도 전화해야지, 가자.”
“응? 내가 왜? 갔다 와. 나 교실에 있을게.”
“아냐. 같이 가자. 그럼 내가 초코파이 사 줄게.”
점심 먹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았지만 벌써 속이 빈 정훈.
은수의 달콤한 유혹에 넘어가고 말았다.
공중전화 부스 안에서 수화기를 들던 은수가 정훈을 보았다.
손에 들린 전화 카드를 흔들며 자랑한다.
“야, 이거 다혜 누나가 나한테 사줬다.”
“뭐, 진짜? 와, 너희…….”
은수는 고개를 저었다.
“아냐, 누나가 부탁했다. 우리 학교에 간첩 하나 있는데, 어떻게 지내는지 보고해 달라고.”
“뭐? 진짜 학교에 간첩이 있어?”
정훈의 눈이 커졌다.
“어이구…….”
은수는 눈치 없는 정훈을 뒤에 둔 채 다이얼을 눌렀다.
“여보세요? 누나.”
“어, 은수야?”
은수를 반가워하는 박다혜의 목소리가 수화기를 타고 정훈의 귀에 들렸다.
“누나도 내일 시험 잘 쳐요.”
“그래, 전화해 줘서 고마워. 내일 잘 칠게.”
“혹시 누나도 만점 노리고 있어요?”
“아니. 그걸 노리는 건 미친놈이지. 안 그래?”
“그죠? 역시 철중이 형은 미친 거 맞네”
“푸하하, 그 자식은 미친 거지…….”
박다혜가 호탕하게 웃었다.
잠깐 침묵이 흘렀다.
“……아, 저기, 혹시…… 그러니까…….”
박다혜는 똥 마려운 개처럼 우물쭈물했다.
궁금했지만 부끄러워서 물어볼 수 없는 말이 있었다.
그 말이 입안에서만 이리저리 맴돌고 있었다.
은수는 몸을 돌려 뒤에 있는 정훈에게 수화기를 건넸다.
“정훈아, 너도 인사해. 모르는 사람도 아닌데.”
“응? 나도…….”
얼떨결에 전화를 받은 정훈이 그녀를 불렀다.
“다혜 선배.”
“……어머, 정훈아.”
깜짝 놀란 박다혜는 급히 목소리를 바꿨다.
호탕했던 목소리는 사라지고 다소곳하며 얌전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잘 지내죠? 선배도 내일 시험 잘 쳐요.”
“고, 고마워 정훈아. 너도 공부 열심히 해”
“네.”
“다혜 선배, 다음에 놀러 오면 밥 사 줘요.”
그녀의 대답을 기대하던 정훈.
하지만 전화가 갑자기 끊겼다.
수화기를 보며 정훈은 어이가 없었다.
‘뭐야? 지 할 말만 하고 끊네. 어이구…….’
박다혜는 전화를 황급히 끊어야만 했다.
심장이 터질 것 같아 더 말할 수 없었다.
마음이 들킬 것만 같았다.
그녀는 두근대는 심장을 진정시키려 심호흡을 했다.
거울 앞으로 간 그녀는 붉어진 자신의 얼굴을 보며 생각했다.
‘내가 언제 이렇게까지 빠져들었지…….”
태어나서 처음 느껴보는 감정이었다.
그의 격려에 힘이 났다.
내일은 시험을 아주 잘 볼 것 같은 기분 좋은 예감,
행복한 미소가 박다혜의 얼굴에 퍼졌다.
***
2000년 11월 15일 85만 명의 수험생이 응시한 수학능력시험이 전국에서 시작되었다.
3일 전, 군사작전을 방불케 하는 시험지 수송에 이어 당일 아침 학생들의 수험장 입실까지 대한민국의 모든 관심은 이 시험에 달려 있다.
인생의 모든 것이 걸린 단 한 번의 시험.
지난 19년의 노력이 단 한 번의 시험으로 결판난다.
언제나 11월의 가장 추운 날, 오전 8시 40분 언어 영역 시험이 시작되었다.
강도현 반장은 10시에 경찰서를 나왔다.
차로 한 시간을 달려 외곽의 대형카페로 들어갔다.
창가에 앉아 멍하니 한 시간 동안 풍경만을 보았다.
그는 흔들리지 않기로 결심했다.
가족의 행복을 위해서 해야 하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다.
남은 커피를 한 번에 비운 그.
다시 차를 몰고 근처에 있는 고급 한정식 수금재로 향했다.
오래된 종갓집을 개조한 한옥 식당.
고급스럽고 폐쇄적인 분위기 덕분에 중부시 고위층들이 애용하는 곳이었다.
경찰서장님과 여기서 한번 회식을 했었다.
“안녕하세요, 예약자 성함이 어떻게 되시죠?”
개량 한복을 입은 직원이 입구에서 정중하게 물었다.
“강도현입니다.”
“이쪽입니다.”
무거운 발걸음으로 남자를 따라갔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오랜만입니다. 강 반장님. 승진 미리 축하합니다.”
박현철 차장 검사가 손을 내밀며 악수를 청했다.
현금왕의 천재손자, 재벌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