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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금왕의 천재손자, 재벌되다-19화 (19/200)

#019화

‘후두둑’

오후부터 몰려왔던 먹구름은 늦은 밤이 되자 많은 비를 뿌렸다.

늦가을이라기엔 춥고 겨울이라기엔 아직은 따뜻한 저녁 밤.

겨울을 알리는 비가 추적추적 내렸다.

11월 말, 늦가을에 오는 비치고는 꽤 많은 양이었다.

잔뜩 굳은 얼굴로 밖을 보던 강도현.

신경질적으로 바짝 마른 입술을 깨물었다.

비릿한 피 맛이 입안에 감돌았다.

수십 번을 깨문 입술에 피가 맺혔다.

‘이판사판이다. 생각하지 말자. 그냥 눈 딱 감고 하자.’

강도현은 마음 한구석을 차지하고 있는 죄의식을 떨쳐 버리려 노력했다.

하지만 쉽지 않았다.

세차게 머리를 흔든 다음 그는 멀리 있는 윤정훈을 보았다.

어두운 밤길을 걷던 윤정훈이 횡단보도 앞에 섰다.

강도현은 마지막 기회라고 생각했다.

늦은 밤이라 주변에 사람도 없었다.

거기다 비까지 오고 있다.

지금, 반드시 성공해야만 했다.

눈앞의 신호등이 빨간불로 바뀌었다.

횡단보도의 신호등은 파란불이 되었다.

우산을 쓴 윤정훈이 길을 건너기 시작했다.

차 안에 있던 강도현은 핸들을 꽉 쥐었다.

그리고 엑셀러레이터를 끝까지 밟았다.

갑작스런 출력에 급발진하며 쏜살같이 튀어 나갔다.

미친 듯이 뛰는 심장만큼 자동차 엔진이 굉음을 내었다.

두 눈을 부릅뜨고 자동차의 정면을 보았다.

와이퍼가 시야를 가렸지만 상관없다.

그의 눈앞에 우산을 쓴 윤정훈이 나타났다.

핸들을 꽉 쥔 채 엑셀을 다시 힘껏 밟았다.

***

추적추적 내리는 비를 보면서 정훈은 생각했다.

‘이제 곧 겨울이겠네.’

겨울 보육원의 생활은 여름보다 힘들다.

따뜻한 파카라도 있으면 좋으련만.

멈추지 않고 자라는 몸 덕분에 교복도 새로 사야 한다.

그런 처지에 비싼 겨울용 외투를 사는 건 언감생심이다.

자신에게 정해진 의복비는 이미 정해져 있었다.

이번에 받은 장학금으로 옷을 사고 싶었다.

친구들에 비해 낡은 교복과 옷.

고등학교 생활에 적응되니 점점 신경이 쓰였다.

하지만 정훈은 흔들리지 않았다.

그런 것에 신경을 빼앗기기에 해야 할 일이 너무 많다.

물질적인 것은 할머니를 찾으면 모든 게 해결될 것이다.

대한민국 현금왕, 현정옥.

지금은 기회를 엿보며 실력을 쌓아야 한다.

“으으, 추워.”

횡단보도 앞에서 신호를 기다렸다.

비 오는 거리, 오늘따라 차도 별로 없었다.

파란불로 바뀌자마자 길을 건너기 시작했다.

- 부우우우우웅

아스팔트를 때리는 빗소리 사이로 낯선 굉음이 들렸다.

고개를 돌렸다.

(차 한 대가 빠른 속도로 자신을 향해 달려왔다.

브레이크를 밟지 않는 차.

‘이런 미친.’

위기를 직감한 정훈은 그대로 몸을 날렸다.

간발의 차이로 차를 피한 정훈.

자신을 치려 한 차를 볼 새도 없었다.

-빠아아아앙

다른 한 대가 자신을 향해 오고 있었다.

거대한 덤프트럭이 자신을 밀어 버리려 했다.

안도할 겨를도 없이 반대편으로 몸을 굴렸다.

다행히 겨우 목숨을 건진 정훈.

젖 먹던 힘을 쥐어짜 반대편 인도로 몸을 옮겼다.

온몸은 비로 흠뻑 젖었고 바닥에 긁혀서 난 상처에서 피가 흘러내렸다.

정훈은 자동차가 사라진 곳을 노려보았다.

‘이런 미친 새끼들.’

그들은 쥐 죽은 듯이 조용히 있었음에도 자신을 제거하려 했다.

오늘의 사고는 시작이다.

이제 그들은 집요하게 자신을 죽이려 할 것이다.

그렇다면 더 이상 숨어있을 필요도 없었다.

흐름이 바뀌었다.

살기 위해서는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야 한다.

어떤 방법으로 자신을 드러낼지 고민했다.

아직은 머릿속에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생각을 해야 했다.

두 번째 인생을 허무하게 놓칠 수 없었다.

차가운 비를 맞으며 돌아가려 할 때 귓가에 큰 충돌음이 들렸다.

자동차 부딪치는 소리가 분명했다.

멀리 보이는 교차로에서 교통사고가 났다.

뒤집힌 차가 보였고 차에서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사고를 낸 육중한 트럭은 천천히 후진한 다음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사라졌다.

정훈은 자신의 몸 상태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을 구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뒤집힌 차에 가까이 다가갔을 때 정훈은 깨달았다.

몸을 피한 다음 보았던 차량번호 ‘2XXX’

분명 자신을 해치려 한 차였다.

하지만 그대로 둘 수 없다.

정훈은 뒤집힌 차 안으로 몸을 밀어 넣었다.

“으으으, 으으으.”

피투성이의 남자가 신음을 내고 있었다.

얼굴이 피로 범벅이 된 그를 조심스럽게 꺼냈다.

하얀 연기 속에 석유 냄새가 더욱 짙어지고 있었다.

빨리 꺼내야 했다.

사력을 다해 그를 꺼냈다.

“으으으……정훈아.”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그의 목소리에 깜짝 놀란 정훈.

피투성이 남자의 얼굴을 보았다.

쏟아지는 비에 얼굴을 가렸던 피가 씻겨 내려갔다.

“아저씨”

철중 선배의 아버지가 분명했다.

“저, 정훈아…….”

“정신 차리세요, 아저씨.”

정훈은 강도현이 의식을 잃지 않도록 계속 그를 불렀다.

“정훈아……. 조수석 서랍 깊은 곳에……. 녹음기가 있어. 어서.”

의식을 잃어 가던 강도현이 정훈에게 말했다.

“어서, 그걸 가지고 있어야 해.”

“네? 일단 신고부터 할게요. 그리고 곧 폭발할 것 같아요.”

차 주변으로 자욱한 연기, 더욱 짙어진 석유 냄새.

뒤집힌 차 바닥에서 불꽃이 일렁이고 있었다.

“아, 아니야. 어서 중요한 물건이라 꼭 찾아야 해, 어서.”

정훈은 아저씨의 간절한 부탁에 어쩔 수 없이 차로 갔다.

주변은 차에서 흘러나온 석유 냄새가 진동했다.

언제 폭발할지 몰라 서둘렀다.

조수석 창문으로 몸을 넣어 서랍을 열었다.

깊은 곳에 작은 녹음기가 있었다.

재빨리 그것을 꺼내 다음 강도현에게 뛰어갔다.

“아저씨, 여기 가져왔어요”

“으, 정훈아, 이거 가지고 있어, 누구에게도 말하면 안 돼……. 그리고.”

“네. 아저씨 정신 차려요. 아저씨”

너무 많은 출혈로 의식이 희미해지고 있었다.

“후우, 정훈아. 아저씨가, 아저씨가 정말, 미안하다.”

그 말을 마지막으로 아저씨는 의식을 잃었다.

그리고 굉음과 함께 차가 폭발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소방차, 119 구급차와 경찰차들이 사이렌 소리를 내며 모여들었다.

구급대원들은 아저씨를 응급처치하고 병원으로 이송했다.

소방관들도 재빨리 자동차 화재를 진압했다.

경찰관들은 수신호를 하며 혼란스러운 상황을 정리했고.

렉카가 도착해 불탄 차를 견인했다.

30분도 지나지 않아 아무 일 없던 것처럼 평화로워졌다.

정훈은 추적추적 내리는 비를 맞으며 그 자리에서 서 있었다.

사고가 난 장소를 노려보았다.

지금까지 조용히 있으면 자신을 노리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이제는 분위기 달라졌다.

판의 흐름이 바뀌었다.

조용히 있으면 아무도 모르게 살해당한다.

결단을 내려야 했다.

주먹을 불끈 쥔 그는 근처에 있는 PC방으로 갔다.

컴퓨터를 켜고 워드 프로그램을 열었다.

자신에 대한 소개를 적었다.

물론 본명을 밝히진 않았다.

친구의 이야기를 적기 시작했다.

중부고등학교 2학년 중에 현금왕의 손자가 있다.

항상 감시당하고 있었다.

그런데 얼마 전부터 친구가 살해 위협을 받고 있다.

친구가 당한 미행과 살해 위협을 최대한 리얼하게 적었다.

글의 마지막에 현금왕의 손자를 구해 달라고 적었다.

제목을 뭐로 할까 고민했다.

직관적으로 하는 것이 좋다는 생각이 들었다.

‘현금왕의 손자가 제 친구입니다.’

정훈은 문서를 저장한 다음 인터넷 창을 열었다.

최근 급성장하고 있는 인터넷 신문사 클릭했다.

‘모두가 기자다’란 입장으로 누구나 기사를 쓸 수 있는 곳.

개방적인 정책으로 영향력을 급격히 확대하고 있는 오마이뉴스에 들어갔다.

정훈은 자신의 쓴 글을 복사해 옮겨 붙였다.

잠깐 심호흡을 했다.

이 내용이 인터넷에 올라간다면 90프로는 정신병자 취급을 할 것이다.

하지만 10프로 아니, 1프로 만이라도 믿으면 된다.

현정옥 여사의 귀에 들어가기만 하면 할머니는 분명 자신을 찾을 거라 확신했다.

자신을 찾기 위해서 쓴 돈이 지금까지 수십억이다.

정신 나간 기사일 수도 있지만 그녀는 분명히 확인할 것이다.

숨을 고른 정훈이 저장을 클릭했다.

인터넷에 자신의 기사가 올라갔다.

모니터 화면을 보았다.

‘현금왕의 손자가 여기 있습니다.’

흥미를 끄는 기사 제목이 눈앞에 보였다.

***

“현중아, 현주야, 가지 마.”

현정옥은 아들과 며느리의 손을 잡았지만 잡히지 않았다.

“헉.”

비명 같은 짧은 외침과 함께 잠에서 깬 그녀.

주름진 얼굴에 그리움이 가득 묻어 있었다.

오랜만에 꿈에서 본 아들의 얼굴은 무척 행복해 보였다.

며느리도 기분이 좋아 보였다.

현정옥이 갑자기 피식하고 웃었다.

조금 전에 꾼 꿈이 생각났다.

항상 그리운 아들.

오늘은 특히 며느리도 함께 나왔다.

아들은 황금색 보자기로 싼 선물 상자를 현정옥의 손에 쥐여 줬다.

상자를 열어 보니 고구마가 가득했다.

밭에서 캔 지 얼마 되지 않아 신선해 보였다.

그런데 그 고구마들이 점점 많아졌다.

얼마 지나지 않아 정원의 푸른 잔디를 뒤덮어 버렸다.

보라색 고구마로 가득 찬 보라 정원이 되었다.

현정옥은 황당한 상황에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아들, 며느리는 손을 흔들며 웃으면서 사라졌다.

다시 잠이 오지 않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현정옥은 침대에서 빠져나와 창가로 갔다.

늦가을치고는 많은 비가 내리고 있었다.

‘이 비가 끝나면 추워지겠어’

그녀는 곧 다가올 겨울을 생각했다.

중부고등학교에 있는 윤정훈을 떠올렸다.

자신의 가장 유력한 손자 후보, 아니 자신의 손자가 분명했다.

그렇지 않다면 기사가 내려갈 이유가 없었다.

인터넷에서도 사라진 기사.

그건 윤정훈이 자신의 손자이기 때문이다.

현정옥은 정훈을 데려올 방법을 만호와 함께 계획했다.

머리를 맞대고 현실성 있는 방법 몇 개를 찾았다.

실패한다면 손자의 목숨이 위험하다는 생각에 만반의 준비를 갖춰야 했다.

자신을 감시하고 있는 천지회의 눈을 피하느라 일은 더디게 진행되었다.

내년은 되어야 할 것 같았다.

보육원에서 겨울을 날 손자 생각에 마음이 아팠다.

그녀는 그 아이가 추운 겨울을 잘 버티길 기도했다.

손자 생각에 마음이 우울해진 그녀.

서재로 가 컴퓨터를 켜고 인터넷 서핑을 시작했다.

컴퓨터도 인터넷도 늙은 자신이 배우기에 쉽지 않았다.

하지만 만호와 현수가 반드시 배워야 한다고 강요했다.

몇 번의 치솟는 분노로 모니터를 부술 뻔했다.

하지만 이제 제법 익숙해졌다.

혼자서 기사도 찾고 필요한 정보도 모을 수 있었다.

방 안의 작은 모니터 안에 거대한 신세계가 열렸다.

현정옥은 지난번 손자 찾기 기사를 올렸던 오마이뉴스로 들어갔다.

이런저런 기사를 확인하다 눈에 띄는 기사를 발견했다.

‘현금왕의 손자, 여기 있습니다.’

이런 종류의 기사는 이미 여러 번 있었다.

누구나 기자가 될 수 있는 곳이라 마음대로 올린 기사가 꽤 많았다.

최근 한 달 동안 대한민국 고등학생의 꿈 1위가 바로 현정옥 손자되기였다.

그냥 흘려버릴까 생각한 그녀.

하지만 습관적으로 기사를 클릭했다.

허무맹랑한 내용이라도 확인은 해야 한다.

현정옥은 천천히 기사를 읽기 시작했다.

모니터를 보는 그녀의 눈은 어느새 화면에 고정되어 미동도 하지 않았다.

현정옥은 몇 번이나 기사를 다시 읽었다.

‘분명해, 내 손자 정훈이가 확실해.’

그리고 이 기사를 쓴 사람이 정훈임을 확신했다.

손자가 위기에 처해 있다.

자신에게 S.O.S 신호를 보내고 있다.

결단을 내려야 했다.

그녀는 창밖을 보았다.

아직 날이 밝지 않았다.

개의치 않고 전화기를 들어 만호의 번호를 눌렀다.

“네, 어르신.”

“너무 일찍 전화한 거 아닌가 모르겠어.”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혹시 무슨 있습니까?”

이른 시간에 온 전화에 불안했던 만호가 물었다.

“오늘…… 아니야, 일단 집으로 오게. 아침이나 같이 먹지.”

“네 어르신. 최대한 빨리 가겠습니다.”

“허허허, 천천히 조심히 오게.”

***

천천히 오라고 해서 느긋하게 불벼락이 떨어진다.

입은 상냥하고 격식을 차리지만 급한 성격을 감출 수 없는 현정옥 여사였다.

최대한 빨리 준비한 김만호는 집을 나섰다.

아침 6시, 다행히 차가 많이 막히지 않을 시간이었다.

7시가 되기 전에 성북동에 도착한 만호는 현관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어르신, 저 왔습니다.”

주방을 담당하는 고성댁이 식사 준비를 하다가 나왔다.

“서재에 계세요.”

“어르신.”

노크를 한 다음 문 앞에서 기다렸다.

“들어와.”

현정옥의 목소리를 들은 그가 조심스럽게 문을 열었다.

모니터를 보던 현정옥이 고개를 돌렸다.

“왔나. 천천히 오란다고 천천히 오지 않네.”

“어르신 모신 지 20년이 넘었는데…… 참.”

“그런가? 이제 놀리는 재미도 점점 없어져서 큰일이야. 자네 놀리는 게 얼마나 재밌는데.”

“참, 어르신도.”

“이리 와서 이거 좀 보게.”

현정옥이 만호에게 오마이뉴스 기사를 보여 줬다.

그의 표정이 점점 심각해졌다.

“이미 위험에 빠진 것 같습니다. 어떻게 할까요?”

“시작해야지.”

“아직 준비가…….”

“어쩔 수 없지. 이미 저들이 목숨을 노리고 있어. 더 이상 기다릴 수 없어.”

“알겠습니다. 부족하지만 모든 걸 걸고 시작하겠습니다. 말씀만 하십시오.”

“시작하지.”

현정옥의 단호한 목소리가 방 안에 낮게 울렸다.

김만호가 전화기를 꺼냈다.

그리고 몇 통의 문자를 보냈다.

“다 됐나?”

“네.”

“밥이나먹으러 가지, 어쩌면 마지막일 수도 있어. 그래서 진수성찬으로 차렸네.”

“함께해서 영광입니다. 어르신.”

“허허허, 마음에 없는 소리는…….”

“아닙니다.”

“……고맙네, 만호.”

목숨을 걸고 띄운 승부수.

광기에 휩싸인 천지회가 어떻게 나올지 몰랐다.

수백 명이 탄 비행기도 눈 깜짝하지 않고 폭파하는 놈들이었다.

이익을 침해하거나 심기를 건드리면 어떤 식으로든 피의 보복을 가하는 자들.

그들의 감시를 피해 준비한 프로젝트가 시작되었다.

목숨을 잃을 수 있는 극도로 긴장된 순간.

하지만 연륜에서 나오는 여유로운 발걸음과 함께 천천히 주방으로 갔다.

현금왕의 천재손자, 재벌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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