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현금왕의 천재손자, 재벌되다-21화 (21/200)

#021화

아이들의 걱정스런 시선을 뒤로한 채 교실을 박차고 나왔다.

어지러움과 함께 몸이 휘청거렸다.

하지만 초인적인 의지로 이겨 냈다.

‘여기서 무너질 수 없어.’

벽을 짚으면서도 앞으로 걸어갔다.

운동장에서는 자신을 찾아온 할머니가 있다.

어젯밤 늦은 시간에 올린 기사를 보았을 것이다.

자신의 위험을 직감하고 이곳으로 달려온 것이 분명하다고 생각했다.

다시 고열 때문에 두통과 함께 몸이 휘청였다.

바닥이 울렁거리며 움직였다.

어지러움 때문에 한 발자국도 움직이기 어려운 상태.

하지만 가야만 한다.

오늘을 놓치면 이제 다시 기회가 없다.

할머니도 분명 수많은 난관을 뚫고 온 것이 분명했다.

어쩌면 자신보다 더 큰 위기를 이겨 내고 여기까지 온 것일 수도 있다.

자신에 대한 감시만큼 그녀에게도 수많은 제약이 있었을 것이라고 확신했다.

한 발을 다시 앞으로 내딛었다.

중앙 계단으로 가 1층으로 내려갔다.

난간을 잡고 한 걸음씩 천천히, 천천히.

평소라면 1분도 걸리지 않을 거리.

지금은 10분이 넘는 시간이 걸렸다.

“하아……, 후우…….”

고열로 인해 호흡도 가빠졌다.

숨쉬기도 어려울 만큼 엉망이지만 초인적인 의지를 발휘했다.

1층에 도착한 정훈은 현관을 향해 비틀거리며 걸었다.

***

“빠아아앙, 빠아아앙.”

조용한 운동장 한가운데서 갑자기 경적이 울렸다.

소리에 당황한 박성훈 기자가 고개를 돌렸다.

현정옥 여사가 자동차 크락션을 누르고 있었다.

‘할매가 노망이 났나?’

생각했다.

“아니, 갑자기 왜 이러세요?”

당황한 얼굴로 현정옥에게 물었다.

그녀는 장난기 가득한 표정을 짓고 대답했다.

“이제 쇼가 시작되는데 관객들이 많아야지, 호호?”

“네? 쇼라니요?”

“쯧쯧 기자라는 놈이 이렇게 센스가 없어서야. 있어 봐, 내가 여기 놀러 온 거 같아?”

“거, 좀 알아듣게 설명해 주세요. 어르신”

결국 박성훈도 폭발했다.

지금까지 얼떨결에 여기까지 와 꾹 참고 있었다.

하지만 갖은 핀잔만 일삼고 제대로 된 설명도 없었다.

그도 더 이상 참고 있을 수 없었다.

“이놈이, 이게 어디서 큰 소리를…….”

박성훈은 사자후를 날리는 현정옥의 목소리에 깜짝 놀랐다.

그녀의 기세에 놀라 급히 화를 누그러트렸다.

“아니, 어르신 제가 그러니까……. 좀 자세히 말해달라 이겁니다.”

“쯧, 그냥 지켜나 봐. 기사 보낼 준비나 해, 특종이니까.”

“네, 특종, 알겠습니다.”

여전히 선문답만 하는 그녀의 말에 더 이상 대꾸하기도 귀찮았다.

그냥 건성으로 대답했다.

“이거 생중계되고 있는 거야?”

옆에서 캠코더로 자신을 찍던 남자를 보고 물었다.

“네 지금 인터넷에서 나오고 있습니다.”

“잘 찍어.”

“네, 어르신.”

인터넷 생중계한다고 1억을 쓴 현정옥.

돈이 중요한 게 아니었다.

이 순간을 누구도 방해하면 안 된다.

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동원해 사람들의 관심을 끌어야 했다.

그러면 추악한 그들도 더 이상 훼방 놓을 수 없을 것이다.

방송국을 이용하고 싶었다.

돈이라면 넘치도록 있으니 원하는 만큼 줄 수 있다.

하지만 천지회와 결탁되어 있는 그들은 현정옥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을 게 뻔했다.

그래서 묻지도 않았다.

괜히 동선만 노출될 수도 있었다.

그녀는 김만호에게 지난번 큰 도움이 됐던 오마이뉴스를 활용하자고 했다.

그 회사와 협의해 충분히 지금 이렇게 생중계를 하고 있는 것이다.

“자, 그럼 가지. 아 잠시만.”

다시 한번 차로가 경적을 길게 눌렀다.

- 빠아아아앙, 빠아아아앙.

시끄러운 경적 소리가 학생들의 수업을 방해했다.

학교 창가에는 선생부터 아이까지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운동장 한가운데 있는 사람들의 정체를 궁금하게 보았다.

그들의 눈에는 노망난 할머니가 행패를 부리는 것처럼 보였을 것이다.

“갑시다.”

“네.”

현정옥 여사는 성큼성큼 앞으로 나아갔다.

카메라가 그녀를 찍으며 따라왔다.

여전히 상황 파악되지 않은 박성훈도 그녀를 뒤쫓았다.

***

1층 중앙 현관의 유리문을 밖으로 밀었다.

차가운 공기가 느껴졌다.

어젯밤의 비로 기온이 급격히 내려갔다.

초겨울만큼 낮은 기온에 정훈의 몸이 떨렸다.

온몸에 힘을 줬다.

고개를 들자 운동장에서 사람들이 걸어오고 있었다.

백발의 머리를 곱게 묶은 현정옥 여사가 사람들을 이끌고 오고 있었다.

체구는 제일 작았지만 범접할 수 없는 기세 때문에 가장 커 보였다.

마치 개선장군 같은 발걸음이었다.

운동장에서 본관으로 난 시멘트 계단을 딛고 올라왔다.

그리고 드디어 현관 앞에 서 있던 정훈의 앞에 왔다.

두 사람의 눈이 서로를 마주 보았다.

처음이었다.

‘나의 할머니, 현정옥 여사가 눈앞에 있다.’

‘내 손자, 정훈아! 잘 자랐구나’

한동안 둘은 서로 쳐다만 볼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 장면을 카메라는 여과 없이 보내고 있었다.

인터넷 신문 메인화면에 그대로 방송되고 있었다.

조회 수와 트래픽이 폭발적으로 상승하고 있었다.

눈치 없던 박성훈도 정훈이 현정옥의 손자임은 눈치챘다.

그는 빠르게 휴대폰 문자로 기사를 보내기 시작했다.

***

정훈의 앞에 한 노인이 서 있었다.

몸은 작지만 태산 같은 기운이 그녀에게서 느껴졌다.

현정옥 여사, 그토록 기다리던 할머니가 내 앞에 있었다.

지난 생에 단 한 번 밥을 먹었던 사람.

그때보다 무려 18년을 당겼다.

“나는 대한민국 현금왕 현정옥이다.”

그녀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정훈은 고민했다. 자신의 존재를 밝혀야 하는데 근거가 없었다.

어떻게 자신의 그녀의 손자인지 밝힐 수 없었다.

‘미래에서 한 유전자 검사 때문입니다.’

그렇게 말할 수는 없는 노릇.

곰곰이 생각했지만 답이 떠오르지 않았다.

하지만 불현듯 떠오른 생각.

그 정도 근거면 가능할 것이라고 생각한 정훈.

현정옥의 눈을 보았다.

그녀의 빛나는 안광을 보며 입을 열었다.

“제가…… 당신이 찾고 있는 당신 손자입니다.”

“네가 나의 손자냐?”

“네. 제가 당신의 손자, 윤정훈입니다.”

“후우……아주 잘 자랐구나.”

현정옥이 아주 긴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 잘 생겼어, 키도 크고. 눈 서린 범상치 않은 기세도 마음에 들어’

그것으로 아주 오랫동안 자신을 짓눌렀던 고통스러운 기다림을 날려 버렸다.

눈앞에 서 있는 손자를 보았다.

표정도 그렇고 수척한 모습이 매우 아파 보였다.

얼굴도 붉어진 채 숨도 가쁘게 쉬고 있었다.

“많이 아파 보이는구나.”

“아닙니다. 아직 참을 수 있습니다.”

처음 할머니에게 강한 인상을 남기고 싶었다.

감기 따위에 굴복하는 모습은 보이고 싶지 않았다.

흔들리는 몸을 지탱하기 위해 마음을 다해 집중했다.

조금만 풀어져도 쓰러질 것만 같았다.

그때 멀리서 사람들이 뛰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버스로 막 도착한 백여 명의 사람들이 그들 주위로 몰려들었다.

번쩍 이는 플래시를 터트리며 바쁘게 둘의 사진을 찍던 기자들.

혼란스러운 와중에도 질문을 쏟아 내기 시작했다.

“이 학생이 현정옥 여사님 손자입니까?”

“어떻게 찾은 겁니까?”

“여사님 지금 기분이 어떠십니까?”

정신이 점점 흐려졌다.

의식이 희미해지고 있었다.

현정옥은 정훈의 변화를 알아챘다.

다가가서 아이를 품에 안았다.

품에 안은 손자의 몸은 불덩이처럼 뜨거웠다.

“손자야, 할미가 왔다. 이제 이 할미 품에서 쉬거라.”

태산 같은 기세를 품어 내던 여인의 입에서 나온 다정한 목소리.

정훈은 포근하고 따뜻한 품을 느끼며 의식을 잃었다.

옆에 있던 만호가 정훈을 업고 양호실로 뛰었다.

주변에 있던 기자들은 현정옥을 향해 여전히 질문을 쏟아 내고 있었다.

“이리로 드시죠. 어르신.”

중부고 이사장, 최재원이 불편한 얼굴로 현정옥을 교장실로 모셨다.

***

“연락이라도 주셨으면 제가 마중 나갔을 텐데요”

“자네 마중은 바라지도 않네”

현정옥이 벌레 보듯 한 표정으로 최재원에게 대답했다.

그의 표정이 굳어졌다.

최재원은 사업을 하면서 현정옥 여사에게 몇 번 돈을 빌렸다.

한때는 성실했던 그. 그녀에게 인정받아 여러 번 투자받았다.

그녀 덕분에 위기를 넘은 적도 많았다.

하지만 욕심에 눈이 멀어 선을 넘었다.

자신이 저지른 잘못 때문에 이미 눈 밖에 난 상황이었다.

그런데 하필이면 눈엣가시 같던 윤정훈이 그녀의 손자라니.

되는 일이 없었다.

차라리 장학금을 수여했던 그날, 덕담이라도 했으면 좋으련만.

고아 새끼라고 저주에 가까운 말을 내뱉은 게 머릿속에서 지워지지 않았다.

“자네가 학교를 운영하다니…… 학교는 잘 운영하고 있나?”

현정옥은 믿기 어렵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네, 어르신. 제 마지막 자선 사업입니다.”

그녀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그래? 자네의 비자금 창구나 혹은…… 흠 민망해서 말하기도 그렇네. 뭐 그런 거 아니야? 옛날부터 자네 전문이지 않았나?”

“아닙니다. 절대 아닙니다.”

“아니라면 상관없지만, 내 손자가 다니는 학교 깨끗했으면 좋았겠는데”

“알겠습니다. 어르신. 걱정하지 마시지요. 제가 최선을 다해서 깨끗이 청소하겠습니다.”

조용한 침묵이 흘렀다.

최재원을 노려보던 현정옥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 잠시 학교 좀 구경하고 오겠네”

“제가 모시겠습니다.”

만호가 일어섰다.

“됐어. 나 혼자 다니는 게 편해”

“어르신, 타지입니다.”

만호가 걱정스런 표정을 지었다.

“알았어. 흠흠, 가자 현수야.”

“네.”

건장한 체격의 곽현수가 현정옥을 모시고 밖으로 나갔다.

“우리 도련님에 대해서 이야기 좀 해 주시죠.”

“아, 알겠습니다.”

최재원이 정훈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했다.

***

“이게 인터넷인가?”

“네, 회장님”

회장이라는 직함과 어울리지 않는 소박한 공간이었다.

오래된 가구들이 세월의 흔적과 노인의 검소함을 드러냈다.

그 낡은 책상 위에 최신 컴퓨터가 올려져 있었다.

“회장님, 이제 마우스를 들고 움직이시면 됩니다.”

노인은 오른손에 쥔 마우스를 말 그대로 들어 올렸다.

허공에 대고 이리저리 움직였다.

“반응이 없는데”

“흐읍”

한현동 비서실장은 참아야만 했다.

조금이라도 웃음이 터져 나오면 목숨을 걸어야 했다.

“회장님, 제가 말을 잘못했습니다. 마우스를 쥐고 바닥에 대고 클릭하시면 됩니다.”

“크흠, 조심해”

서늘한 목소리였다.

곧 인자한 웃음을 띤 그가 입을 열었다.

“이 안에 온 세상이 다 있구먼”

“자, 이건 뭐지”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구경했다.

메인 포털 사이트를 들어간 다음 인터넷 신문사로 화면을 옮겼다.

“보자, 현동아, 속보도 바로 나오고, 앞으로 세상이 많이 바뀌겠어”

“네, 그렇습니다.”

겨우 웃음을 참고 있던 한현동이 이빨을 꽉 깨물고 대답했다.

새로운 문물을 발견한 즐거움과 함께 마우스를 클릭하던 노인.

기사를 읽던 그의 온화한 얼굴이 점점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현정옥과 손자가 만났어?”

“네? 그게 무슨 말입니까?”

“그걸 나한테 묻는 거야?”

회장의 목소리가 방안을 쩌렁쩌렁 울렸다.

비서실장을 노려본 그가 모니터를 향해 눈짓했다.

고개를 숙여 본 모니터에는 현정옥과 손자가 만나는 장면이 실시간으로 나오고 있었다.

“이 이건, 죄송합니다. 회장님”

“죄송할 거 뭐 있어”

노인의 손에 든 마우스가 머리를 숙이고 있던 한현동의 머리에 강하게 부딪혔다.

짧은 비명과 함께 한현동이 머리를 부여잡은 채 쓰러졌다.

분노한 얼굴로 모니터를 바라보던 노인은 모니터를 들어 그대로 바닥에 던져버렸다.

***

“여긴…….”

눈을 떴을 때 하얀 천장이 보였다.

학교인 것 같다고 생각한 그.

뒤척거리는 소리에 누군가가 다가왔다.

“일어났니?”

손으로 머리를 집었다.

“여긴…….”

“양호실이야.”

“네…….”

정훈은 순간 꿈을 꿨다고 생각했다.

할머니, 기자들, 믿기 힘든 일들의 연속이었다.

“선생님, 방금 엄청난 꿈을 꿨어요”

“응? 무슨 꿈?”

“제 할머니가 찾아왔어요”

“풋, 아직 열이 안 내렸나? 그게 왜 꿈이냐? 여사님은 지금 이사장님 방에 계셔.”

정훈이 피식하고 웃었다.

“휴우, 다행이네요. 너무 믿기 어려워서요. 현실이라 생각했는데 꿈이면 슬플 것 같아서, 그래서 반대로 해 봤어요.”

“짜식, 그 좋던 배짱은 어디 가고 소심하기는…… 참, 너한테 고맙다고 인사를 했어야 되는데…… 최 선생 쫓아 줘서 고마워. 나 때문에 한 건 아니겠지만……. 우리 학교 여선생님들이 너한테 매우 고마워하고 있어.”

“네?”

“입에 담기에는 좀 그런…… 하여튼 그런 게 있어. 내가 대표로 고맙다고 하는 거야.”

“알겠습니다.”

양호 선생이 정훈을 빤히 쳐다보았다.

“그런데 정훈아, 아까 정말 영화 같았어. 막 플래시가 펑펑 터지고 기사들이 질문하고……. 거기서 너랑 그 할머니랑 딱 서 있는데…… 햐, 나 온몸이 감전된 것처럼 찌릿찌릿하더라”

그녀에게는 영화의 한 장면처럼 보였을 것이다.

하지만 할머니와 정훈에게는 생사를 건 모험이었다.

그걸 알 리 없는 그녀.

“……네.”

정훈은 부끄러운척하며 웃을 수밖에 없었다.

“열 때문에 정신없었는데, 플래시 때문에 너무 어지러웠어요. 그래서 쓰러진 거 같아요”

“그랬구나, 아까 열이 40도가 넘었어. 이제 괜찮으려나…….”

양호 선생이 정훈의 체온을 확인했다.

“열은 많이 내렸네. 그래도 조심해야 돼, 알겠지?”

걱정스러운 눈으로 정훈을 바라봤다.

“네, 선생님.”

한결 가벼워진 느낌이 든 정훈은 몸을 일으켰다.

“저 이제 가 볼게요.”

“벌써? 너 조금밖에 안 쉬었는데…….”

“할머니에게 가 봐야 할 거 같아요”

“잠시만.”

그녀는 정훈의 손등에 있던 링거줄을 제거했다.

“무리하면 안 돼. 아까 열이 40도까지 올라갔어. 마치면 병원 꼭 가.”

“네“.

양호실의 문을 열고 나섰다.

모두 수업 중이라 복도는 적막했다.

조금 전의 소란이 꿈인 것 같았다.

학교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처럼 평온했다.

정훈은 교장실로 발걸음을 옮겼다.

할머니와 해야 할 말도 묻고 싶은 말도 많았다.

궁금한 것 투성이였다.

교장실의 문을 열었다.

낯선 남자 한 명과 이사장이 앉아 있었다.

현금왕의 천재손자, 재벌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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