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3화
“할머니, 병원에 가 봐야겠습니다.”
정훈이 일어섰다.
하지만 고열 때문에 휘청거리며 주저앉았다.
현정옥이 이마를 짚었다.
‘이런 몸으로 지금까지 버티다니. 의지가 대단하구나. 나약하지 않게 잘 컸어.’
“안된다. 지금 열이 너무 높아. 일단 좀 쉬어야 할 것 같아.”
“하지만…….”
“지금 간다고 할 수 있는 게 없을 거야. 이봐 만호, 쉴 만한 곳을 찾아봐.”
“예, 어르신”
정훈을 바라보던 은수도 걱정스런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그래, 일단 좀 쉬어.”
은수가 할머니를 향해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정훈이 친구입니다.”
“반갑구나.”
“할머니, 제 둘도 없는 친구입니다. 같은 보육원에 있습니다.”
“그래? 이리 와서 앉거라.”
현정옥이 은수를 보았다.
정훈이와는 결이 다른 기생오라비처럼 생긴 얼굴이었다.
물과 기름처럼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데 단짝이라니 신기했다.
“할머니, 사실 저는 정훈이 친구가 아니고 영혼의 단짝 같은 존재입니다. 헤헷.”
“호호호, 영혼의 단짝? 그런 친구가 하나쯤은 있어야지. 그런데 은수 넌 어쩜 이리 기생오라비처럼 잘생겼느냐?”
“헤헷, 제가 좀 그래요.”
정훈은 이 낯선 상황에서도 할머니에게 아양을 떠는 은수를 보니 기가 찼다.
‘어휴, 저 자식은 분명 전생에 개가 분명해. 어떻게 저렇게 꼬리를 잘 흔드는지’
“어르신 준비되었습니다.”
밖으로 나갔던 만호가 들어왔다.
“그럼 가지.”
은수는 정훈을 부축하며 운동장에 준비된 차로 데려갔다.
중부시에서 볼 수 없었던 롤스로이스에 올랐다.
강한 의지로 버티고 있던 정훈은 차가 출발하자 잠에 빠졌다.
***
“엄마, 괜찮아?”
철중은 중환자실에 앞을 지키는 엄마의 손을 꼭 잡았다.
“아들 왔어? 논술 시험도 준비해야 되는데…… 어떡하니?”
“그게 문제야 지금? 그리고 시험 걱정하지 마. 펑펑 놀아도 합격이니까.”
철중은 시험이 신경 쓰였다.
하지만 엄마를 안심시키고 싶어 허세를 부렸다.
“아빠는…… 어때?”
“서울로 이송을 해야 하는데, 너무 위험하데. 일단 여기서 할 수 있는 응급처치는 다 했대. 상태가 좀 나아져야 옮길 수 있는데…… 기적을 바라야지.”
“아빠, 강한 사람이니까 일어날 거야. 걱정하지 마. 엄마”
“그래, 일어나야지. 우리 철중이 결혼하는 것까지 봐야지”
“응.”
철중이 엄마의 손을 꼭 쥐었다.
“엄마, 잠깐 눈 좀 붙여. 어젯밤부터 한숨도 못 잤잖아. 엄마까지 아프면 안 돼.”
“괜찮아, 엄마 이제 괜찮아”
연주는 흔들리면 안 된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듬직한 아들이 있어 위안이 되었지만 자신이 중심을 잡아야 했다.
그래서 더욱 씩씩한 척 괜찮은 척 행동했다.
하지만 남편이 위독한 지금,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황에 눈앞이 막막했다.
“철중이 형, 아주머니.”
정훈이 중환자실 앞에 앉아 있는 그들을 불렀다.
“어? 정훈이 왔구나?”
수척한 얼굴을 한 형과 아주머니를 보자 마음이 아팠다.
“형 괜찮아? 아저씨는요?”
은수의 질문에 철중이 애써 웃으며 말했다.
“일어날 거야”
정훈은 그 말을 듣고 상태가 나아지지 않은 걸 직감했다.
“정훈아, 할머니 만났다면서, 축하해. 가족을 찾았네. 좋은 날인데…… 안 와도 되는데.”
은수에게 정훈의 소식을 들은 철중이 축하했다.
“아니 형, 지금 무슨 말을 그렇게 해. 일단……기다려 봐요.”
철중에게 오기 전에 정훈은 미리 할머니에게 부탁했다.
그를 돕고 싶다고, 어떤 식으로든 도와야 한다고 말했다.
할머니는 만호 아저씨에게 지시했고 그는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
할머니와 병원에 도착했을 때 입구에 병원장이 나와 있었다.
“정훈아”
멀리서 할머니가 걸어오셨다.
옆에는 병원장이 주치의와 몇몇의 의사를 대동하고 함께 걸어오고 있다.
“할머니, 어떻게 됐어요?”
“그게…….”
“서울로 이송을 해야 하는데 환자 상태가 너무 좋지 않아 걱정입니다. 자칫하다가…….”
병원장이 말을 흐렸다.
“조금 자세하게 말해 주세요.”
정훈이 묻자 병원장 옆을 지키던 주치의가 입을 열었다.
“지금 할 수 있는 응급조치만 해 놓은 상태입니다. 서울 대형 병원에서 이송해 수술을 해야 하는데……. 이송이 위험할 만큼 상태가 좋지 않습니다. 구급차 상태도 좋지 않고 차량 진동 같은 것 때문에 돌이킬 수 없을 만큼 악화될 수 있어요”
“방법이 없나요, 선생님?”
옆에서 듣고 있던 은수가 물었다.
“일단 기다리는 게 최선입니다.”
난감한 상황이다.
서울로 가서 수술만 하면 희망을 가질 수 있다.
물론 그 희망도 낮은 확률이지만 지금보다는 훨씬 낮다.
지금은,
기다리고 있으면 며칠 뒤에 100프로 사망한다.
그렇다고 구급차로 이송하면 가다가 죽는다.
조금의 덜컹거림에도 어디가 터질지 모를 상황.
최악의 상황이었다.
의사 생활 동안 만나기 힘들 만큼 심각한 환자.
살리고 싶지만 방법이 없어 아쉬웠다.
정훈은 방법을 찾기 위해서 생각에 생각을 거듭했다.
문득 머리에 떠오른 생각.
“선생님, 구급차 진동 때문인가요?”
“네, 그게 가장 큰 문제죠.”
“그럼 진동이 없는 차로 옮기면되지 않나요?”
“그런 차가 있을 수 있나요?”
주치의는 정훈의 생각이 말도 안 된다는 듯 반문했다.
“아니요, 있어요. 분명히요.”
정훈이 전생에 본 기사가 있었다.
고가의 미술품을 옮기는 데 사용하는 특수트럭, 무진동 트럭.
완전한 무진동은 아니지만 거의 없을 만큼 저진동인 대형트럭이 98년에 한국에 들어왔다.
그렇다면 한국에 분명 몇 대가 있을 것이다.
정훈은 생각했다.
구급차를 그 트럭 안에 넣어서 옮기면 될 것 같았다.
아니면 의료장비와 함께 아저씨를 그 차로 옮기면 된다고 판단했다.
“한국에 무진동 트럭이 있어요.”
정훈이 반짝이는 눈으로 자신의 생각을 말했다.
병원장도, 주치의도 깜짝 놀란 표정이었다.
그런 차가 있다고 생각하지도 못했고 그런 발상을 하지도 못했다.
정훈의 생각을 들은 주치의가 한참을 생각했다.
그런 다음 눈빛을 반짝이며 말했다.
“그런 차가 있을지 모르지만 가능할 것 같습니다.”
정훈은 만호 아저씨를 보았다.
“아저씨, 대한통운에 그 차가 있어요.”
“아니 도련님이 그걸 어떻게?”
김만호의 의문스러운 표정.
“제가 기사를 봤어요.”
정훈은 설명하기 그래서 기사를 봤다고 둘러댔다.
“알겠습니다. 제가 한 번 알아보겠습니다.”
잠시 뒤 만호가 돌아왔다.
“정말 있습니다. 그리고 기적처럼 오늘 중부미술관에 운송을 했답니다. 지금 기사님이 이리로 오고 있습니다. 한 시간 안으로 도착할 예정입니다.”
“네? 이런 기적 같은 일이. 그럼, 저희도 준비하겠습니다.”
“비용은…….”
병원장이 조심스럽게 말을 꺼내려 했다.
“신경 쓰지 마세요.”
현정옥이 그의 말을 끊으며 짧게 말했다.
그리고는 손자를 보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자신의 손자가 친구 아버지의 목숨을 살린 것이다.
“그럼 선생님 부탁드립니다.”
정훈이 병원장에게 정중하게 부탁했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그럼 서울에 있는 병원은 저희 쪽에서 준비하겠습니다.”
만호가 제안하자 병원장과 주치의가 고개를 끄덕이며 감사를 표했다.
“감사합니다.”
“정훈아, 너무 고맙구나”
한연주는 감동의 눈물을 흘리며 정훈에게 감사를 표했다.
“아니에요. 아주머니. 제가 받은 거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에요.”
출중이 정훈을 꼭 안았다.
“고맙다, 짜식, 이 사부가 정말 복이 많아. 이렇게 좋은 제자를 두다니…….”
수척했던 얼굴이었던 그들의 얼굴에 온기가 돌기 시작했다.
“아니야 형…….”
‘형이 지난날의 내 인생을 구원했잖아, 비록 재수 없긴 했지만…….’
정훈은 철중에 대한 고마움을 마음속으로만 말했다.
정훈은 받은 거에 비해 해 준 것 없었던 지금까지와 달리 보답할 수 있어서 행복했다.
정훈은 이 사건의 진실을 철중에게 말하지 않기도 했다.
감당할 수 없는 진실은 모르는 게 낫다.
대신 할머니에게는 말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송 준비에 정신없던 그들을 뒤로 한 채 할머니가 계신 휴게실로 갔다.
“할머니, 사실 어제…… 저분이 그랬어요.”
정훈의 말을 들을 할머니의 눈이 파르르 떨렸다.
“뭐? 아니 그런데도…… 저 사람을 살리려는 거야?”
현정옥은 자신을 해하려 한자를 살리기 위해 노력한 정훈의 큰 배포에 다시 한번 놀랐다.
그리고 이 어긋난 인연에서 오는 불길한 기운을 떨쳐 버릴 수 없었다.
“철중 선배 아버지고…… 제 생각에 이용당한 것 같아요. 마지막에 쓰러지면서 저한테 미안하다고 사과하셨어요.”
“흐음……. 그래, 아마 그들이 올 것이야. 흔적이 남는 걸 좋아하지 않으니까.”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그래서 무진동 트럭으로 위장해서 이송하려구요.”
“허허허, 우리 꼬맹이가 그것까지 생각한 거야?”
정훈은 물론 거기까지 생각했다.
아저씨가 살아 있으면 제거하려 할 것이라 추측했다.
실패한 계획이든 성공한 일이든 가급적이면 증거를 없애야 한다.
그것이 냄새가 난다면 더욱더 철저히 해야 했다.
하지만 정훈은 자신의 모든 능력을 드러내지 않는 것이 좋다고 생각했다.
“아니, 그건 아니구요. 우연이었어요.”
정훈이 제시한 임기응변에 다시 한 법 감탄한 현정옥.
바르게 커 준 그를 사랑스러운 눈길로 다시 한번 바라보았다.
한 시간도 지나지 않아서 구급차가 들어왔다.
조심스럽게 아저씨를 옮겼다.
그의 생명을 유지할 장치도 함께 했다.
의사와 간호가 동행하며 그를 지켜 줄 예정이었다.
구급차가 병원을 빠져나갔다.
곧이어 만호가 준비한 무진동 트럭 안으로 사라졌다.
누구도 응급 환자를 이송한다고 생각하지 않을 차,
미술품보다 더욱 섬세하고 예민한 강도현의 육체,
그것을 실은 대형트럭이 서울로 향했다.
***
초조하게 결과를 기다리던 박현철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전화기를 들었다.
“어떻게 된 거야? 아직도야?”
거친 목소리로 물었다
“죄송합니다. 조금 전에 강도현을 서울로 이송한다는 첩보를 받았습니다. 이송 중에 제거하겠습니다.”
“마음대로 하세요. 대신 이번에도 실패하면……. 네 놈이 뒤지시는 겁니다. 알겠어요?”
마지막에 고막이 터질 것 같은 호통 소리가 수화기에 들렸다.
앞이었다면 분명 이빨 몇 개는 부러졌을 상황이었다.
박석호는 구타를 피할 수 있어서 안심했다.
“……네 반드시 완수하겠습니다.”
전화기를 끊은 그의 차 앞으로 커다란 특수차량이 고속도로 톨게이트로 들어가고 있었다.
구급차를 기다리며 그는 어젯밤을 다시 생각했다.
자신의 임무는 윤정훈을 제거한 강도현을 없애는 것이었다.
신호대기 중인 강도현을 25톤 덤프트럭으로 밀어 버리는 아주 간단한 일이었다.
그리고 혹시나 강도현이 실패하면 자신이 윤정훈을 제거하려 했다.
강도현이 실패하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자신은 분명 성공했다고 생각했다.
눈앞에 쓰러져 있는 그를 보았을 때 절대로 피할 수 없는 거리라고 생각했다.
아니었다.
자신도 믿기 어려울 만큼 빠른 반응 속도로 몸을 날려 덤프트럭을 피했다.
어떻게 피했는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윤정훈의 믿기 어려운 신체 반응을 본 박석호.
너무 놀라서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그렇게 멍한 상태로 강도현의 차를 밀었다.
정신이 없어 속도를 충분히 올리지 못했다.
그의 목숨을 한 번에 끊지 못했다.
치명적인 실수를 연이어 해 버렸다.
일이 안 되는 날은 줄줄이 안 된다.
그는 고속도로 입구에서 병원에서 출발한 구급차를 기다렸다.
병원에서부터 따라가면 의심을 살 수 있을 것 같아 선택한 장소였다.
이미 차량 번호를 알고 있어서 절대 놓칠 수 없다.
서울로 가는 최단 거리는 이곳이니 반드시 이리로 오리라고 확신했다.
하지만 몇 시간을 기다려도 보이지 않았다.
‘젠장, 왜 이렇게 안 오는 거야?’
그는 날이 밝을 때까지
오지 않을 구급차를 하염없이 기다려야만 했다.
***
강도현은 무사히 서울로 이송되었다.
김만호가 연락한 병원에 도착해 응급 수술을 시작했다.
최고의 팀으로 준비한 덕분에 성공적으로 수술을 마쳤다.
중간에 위기도 있었지만 어쨌든 살아남았다.
정훈은 종일 잠을 자며 몸을 추스렀다.
그리고 현정옥과 함께 보육원에 있는 개인 짐을 찾아왔다.
남아 있는 아이들이 신경 쓰였지만 할머니가 걱정하지 말라고 하셨다.
보육원을 인수해 부족함 없이 생활할 수 있도록 지원하기로 약속했다.
물론 원장은 인수 계약이 마무리되자마자 교체되었다.
현정옥은 시내에서 가장 좋은 호텔의 스위트룸을 빌렸다.
거기서 현정옥과 정훈과 은수가 생활했다.
정훈은 호텔 생활이 낯설고 어색했다.
하지만 은수는 자기 집인 것처럼 적응을 잘했다.
그리고 은수는 할머니에게 정말 잘했다.
정훈이 아니라 은수가 할머니 손자 같았다.
귀여운 강아지처럼 할머니를 졸졸 쫓아다니면 할머니를 즐겁게 했다.
“정훈아, 조금만 참아. 지금 인테리어 공사 중이니 다음 주면 들어갈 수 있을 게다.”
“네? 어디로요?”
“학교 근처에 집을 하나 샀다. 나도 이제 학교에 출근해야 하니까 가까운 곳에 구했어.”
현정옥의 말을 이해 못한 정훈이 물었다.
“할머니가 왜 학교에 출근하세요?”
“이참에 그냥 인수했다. 그동안 온갖 더러운 짓이 난무했더구나. 내 그놈의 자식이 한 짓을 생각하면 그냥 쫓아내고 싶었지만…… 그러면 나중에 꼭 문제가 생겨. 그래서 적당히 싼 가격에 인수했다. 지금 만호가 정리 중이니 이제 곧 깨끗해질 거야.”
“감사합니다.”
정훈은 할머니가 너무 고마웠다.
하지만 곧 깨달았다.
할머니가 종일 자신 곁에 있을 수도 있다는 사실에 머리가 지끈거리기 시작했다.
“그럼 이제 출발할까?”
“네, 할머니.”
멀리 소풍을 간다니 신이 난 은수가 외쳤다.
“그런데 꼭 거기까지 가야 하니?”
“이왕이면 멀리 가죠. 그럼 좋잖아요.”
“그래, 그러자꾸나.”
할머니와 은수 그리고 정훈은 금강이 관통하는 충청남도 공주시로 갔다.
몇 년 뒤 대한민국의 신행정수도가 되어 세종시로 이름이 바뀌는 곳.
거긴 아직 땅값이 아주 쌌다.
정훈은 차를 타고 가는 내내 기분이 좋았다.
헐값에 땅을 살 생각에 기분이, 도저히 나쁠 수가 없었다.
현금왕의 천재손자, 재벌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