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4화
오랜만에 햇살이 따사로운 포근한 겨울이었다.
정훈은 처음 타보는 고급 차에 기분이 좋았고 은수는 오랜만에 나가는 외출이라 신이 났다.
현정옥도 가족과의 소풍이라서 기분이 좋았다.
하지만 목적지를 듣자 표정이 변했다.
“할머니는 거기 별로예요?”
“아니, 싫기는. 정훈이랑 가는데 어딘들 상관있겠냐. 다만……”
그녀는 말을 흐렸다.
앞 좌석에 있던 만호가 힐긋 뒤를 보았다.
“혹시 거기가 옛날에 말씀하셨던…….”
“으흠, 그만하지.”
현정옥이 만호의 말을 잘랐다.
하지만 다들 들뜬 상황에 만호가 눈치 없이 말을 이었다.
“거기가 맞군요. 옛날에 한 번 크게 낭패를 본 곳이 있다고 하시더니.”
“허어 이 사람이 그만하라는데.”
차 안에 그녀의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려 퍼졌다.
깜짝 놀란 만호는 황급히 고개를 앞으로 돌렸다.
“할머니, 무서워요.”
은수는 겁에 질린 척 귀를 막고 큰 두 눈을 깜빡였다.
‘저런 미친, XX’
그 모습이 너무 역겨웠던 정훈은 자연스럽게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은수의 아구창을 시원하게 날리고 싶었지만…… 참았다.
“크흠…… 박통이 죽지만 않았어도 쏠쏠하게 재미를 볼 수 있었는데.”
“네? 그게 무슨 말이에요?”
정훈도 궁금한 척 물었다.
“그게 옛날에 박정희 대통령이 그쪽으로 수도를 옮기려고 했었어. 갑자기 돌아가지면서 계획이 수포로 돌아갔지. 내가 그때 땅을 쫌……”
할머니의 얼굴이 붉어졌다.
“하여튼 그때 돈이 땅에 묶여서 얼마나 힘들었는지. 급하게 판다고 손해 본 거 생각하면 아직도 할미 손이 떨리는구나.”
옆에 있던 은수가 할머니의 손을 꼭 쥐며 위로했다.
“괜찮아요. 할머니?”
“아이구 우리 은수……호호, 요 귀여운 것.”
애교쟁이 은수를 보고 흐뭇하게 웃는다.
어이없는 광경에 머리가 어질어질했지만 다행이라 생각했다.
40살이 다 되어 가는 정신연령 때문에 귀여운 짓을 전혀 할 수 없었는데 은수 덕분에 할머니가 대단히 즐거워하셨다.
여자를…… 하여튼 타고난 놈이다.
현정옥의 최고급 롤스로이스는 고속도로를 거침없이 달렸다.
스피드광인 그녀.
빠른 속도로 다른 차를 추월하는 모습에 흐뭇한 표정을 지었다.
“할머니 그렇게 좋으세요?”
“그럼 이 녀석아, 봐라. 요놈 제 끼고 저놈 제끼는 거 보는 게 얼마나 재밌는데.”
“네, 그래도 위험하잖아요. 안전에 좀 더…….”
“그래서 이 할미는 항상 비싼 차만 사잖니.”
정훈은 신이 난 할머니와 사소한 문제를 다투고 싶지 않아 조용히 창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할머니가 과연 땅을 사 줄까? 누가 봐도 쓸모없는 땅인데…….’
정훈은 불안한 생각을 풍경을 보며 달랬다.
잠시 후 고속도로에서 내려온 차는 왕복 이차로의 좁은 시골길을 천천히 달렸다.
산에는 앙상한 나뭇가지밖에 보이지 않았다.
공주시를 지나고 계속 동쪽으로, 동쪽으로 차를 몰았다.
얼마 후 연기군에 있는 강변에 차를 세웠다.
금강(錦江).
굽이쳐 흐르는 물길이 비단결 같다 하여 붙여진 이름.
하지만 사람들은 반짝이는 모래가 꼭 금처럼 보여서 금강이라고 했다.
강 주변으로 반짝거리는 모래사장이 유명했다.
차에서 내린 현정옥은 강변에 드넓게 펴진 모래를 보며 잠시 옛 생각에 빠졌다.
어렸을 적 동무들과 물장구치던 기억이 떠올랐다.
“할머니, 우리 여기서 밥 먹을까요?”
“그럴까?”
강변이라 바람이 많이 불 것 같아 걱정했는데 다행히 바람도 불지 않았다.
포근하고 햇살이 좋은 하루.
날을 잘 선택한 것에 정훈은 만족했다.
자리를 펴고 호텔에서 준비해 준 도시락을 열었다.
중부시 최고 요리사가 만든 음식.
모두의 젓가락이 쉬지 않고 움직였다.
한참 음식을 먹던 정훈이 할머니를 보며 말했다.
“할머니 저는요, 이런 곳이면 좋겠어요.”
“응?”
“저번에 말씀하신 선물요. 이렇게 넓고 아름다운 땅을 가지고 싶어요.”
“흠, 정훈이가 땅 욕심은 많아도 돈 욕심은 없구나. 호호.”
할머니가 쓴웃음을 지었다.
“네?”
정훈은 아무것도 모른 척 웃어 주었다.
‘하긴, 이 땅이 수십 배 뛴다고 누가 믿을까?’
“정훈아, 돈 벌려고 땅 사는 거지, 땅 자랑하려고 사는 거 아니란다.”
현정옥은 마음에 들지 않는지 투덜거렸다.
현정옥은 손자가 원하는 땅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분명 돈이 안 되는 땅이었다. 논밭으로 이뤄진 쓸모없는 땅.
이런 땅은 나중에 되팔기도 어려워 골치를 썩이곤 한다.
하지만 묘하게 사 주고 싶었다.
자신의 어린 시절이 생각나는 이곳이 그녀도 좋았다.
여기서 손자랑 있으니 가족과 시간을 보내지 못했던 자신의 죄의식이 치유되는 것 같았다.
“할머니, 약속 지키실 거죠? 네에?”
은수가 옆에서 살랑살랑 아양을 떨었다.
“아암, 물론 사 주지…… 녀석. 은수야 넌 친구 놈이 땅 사는데 배 안 아프냐?”
“네? 제가 왜요? 전 돈에는 관심 없어요. 저는 오직 시와 사랑만 있으면 됩니다.”
은수가 반짝이는 눈으로 말했다.
그녀를 본 현정옥이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네놈은 분명 카사노바가 환생한 것이 틀림없어.”
“헤헷.”
정훈은 현정옥의 눈치를 살폈다.
과연 얼마만큼 사 줄지 궁금했다.
그건 현정옥도 난감하긴 마찬가지였다.
돈으로 사면 이 동네 땅 다 살 수 있다.
하지만 가치가 없는 땅을 손자에게 줄 수 없다.
마지막으로 손자를 설득하고 싶은 그녀.
“정훈아, 서울은 어떠냐? 할머니가 땅 보는 재주가 있어서 좋은 데를 많이 아는데.”
고개를 저었다.
“저는 여기가 좋아요.”
“어휴, 그래? 그럼 많이 말고 조금만 사 줄 테니, 그리 알거라.”
“네.”
정훈이 실망한 표정을 지었다.
“조금이라고 하니 아쉽냐?”
“네. 조금요.”
“허허, 녀석도 욕심이 없는 것 같으면서 욕심이 가득하구나.”
정훈의 표정이 신경 쓰인 현정옥은 한 가지 제안을 했다.
“정 그러면 이 할미를 기쁘게 하면 내가 더 사 주마.”
“네? 정말요?”
“물론이지, 이번에 사는 만큼 더 살 테니…… 너무 아쉬워하지 말아라.”
“네, 할머니.”
정훈은 곰곰이 생각했다.
할머니를 기쁘게 할 방법이 무엇인지?
고등학생이 할머니를 기쁘게 할 방법이 뭐 있겠나.
딱 하나다.
“할머니, 저 이번 기말고사 전교 1등 할게요. 그러면 되겠죠?”
“전교 1등? 그 정도면 충분하지. 전교 1등 하면 이번에 사는 것, 아니 그보다 더 사 줄 수도 있지.”
“그럼 할머니 약속하셨어요.”
현정옥은 정훈이 그렇게 공부를 잘할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몸을 추스르고 나서도 계속 공부를 하는 모습을 보면 흐뭇했다.
하지만 보육원 출신에 남들보다 누린 것이 많이 부족했을 거라 짐작했다.
흔한 학원도 못 갔을 손자.
반에서 10등만 해도 좋을 것 같았다.
“어르신 바람이 찹니다. 이제 들어가시죠.”
“그럴까? 정훈아, 이제 갈까?”
“저는 조금만 걷다 올게요.”
“그러면, 빨리 오너라.”
“네”
정훈이 강변 모래사장을 따라 걸어갔다.
그 모습을 흐뭇하게 보던 김만호와 현정옥,
“무슨 대화를 그리 즐겁게 하셨습니까?”
“아 정훈이가 땅을 사 달라더군. 이 동네 땅을.”
“여기요? 허허, 이 쓸모없는 땅을요? 산다고 하면 다들 서로 팔려고 할 텐데.”
“그러니 내가 답답해 죽겠어. 안 사 줄 수도 없고. 에잇 어차피 겪어 보면 깨닫는 게 있겠지. 자네가 작업 좀 해서 땅 좀 구해 봐.”
“예, 어르신. 알겠습니다. 바로 시작하겠습니다.”
“그래.”
“얼마나 할까요?”
“10만 평만 해. 딱 봐도 돈도 얼마 안 들 것 같은데”
“네”
차로 걸어가던 현정옥이 피식하고 웃었다.
그 모습을 본 만호가 물었다.
“무슨 생각을 하셨기에 웃으십니까?”
“아니, 글쎄 저 녀석이 전교 1등을 하겠다고 하지 않나, 그래서 내가 1등 하면 더 사 준다고 했지.”
“하아…….”
만호는 자신도 모르게 긴 탄식을 내뱉었다.
그런 만호를 궁금한 표정으로 본 현정옥.
“왜 그러나?”
“아, 아무것도 아닙니다.”
지금은 절대 말할 때가 아님을 확실히 느꼈다.
“거 아무나 하는 거 아닌데, 우리 정훈이가 욕심이 많아, 하하하.”
“흐읍…….”
만호는 이빨을 꽉 깨물어야만 했다.
“왜? 할 말이 있어?”
“아닙니다. 어르신.”
다시 한번 어금니를 깨물었다.
하고 싶은 말이 쏟아져 나올 것 같았지만 잘 참았다.
그 사실을 알면 현정옥이 불같이 화를 낼 게 뻔했다.
‘어르신, 이번 중간고사 전교 5등이었어요.’
만호는 기분 좋게 웃는 현정옥을 씁쓸한 표정으로 보았다.
쓸모없는 땅을 두 배나 사야 하는 그녀가 안쓰러웠다.
정훈은 강변을 조용히 걸었다.
은수가 뒤따르며 물수제비를 날렸다.
조금이지만 이 동네 땅도 얻었다.
‘조금 사 준다고 했으니 천 평, 아니 만 평 정도는 사 주겠지.’
생각보다 작게 얻어서 아쉽지만 어쩔 수 없었다.
아직 자신은 고등학생일 뿐이다.
인정을 받으면 사이즈가 훨씬 커질 것이다.
이번엔 작지만 다음엔 좀 더 크길 희망했다.
그런데 정훈은 당장 돈이 필요했다.
앞으로 닥칠 일에 대비해 종잣돈이 필요했다.
지금까지 눈앞에서 놓쳤던 무수한 기회.
이제 할머니와 함께라면 흘려보냈던 기회들을 꼭 잡을 수 있다.
그리고 내년,
역사상 가장 큰 비극이자 가장 큰 기회가 내년에 있다.
놓칠 수 없는 그 순간을 위해 준비를 해야 했다.
문든 고현민 변호사가 생각났다.
죽기 전 마지막을 함께한 사람.
그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마카오 돼지은행에 있는 내 돈.
그걸 빨리 찾아야 했다.
그 돈으로 큰돈을 벌어야 했다.
가능하면 할머니 몰래 그 돈을 찾고 싶었다.
그 생각을 하자 머릿속에서 몇 가지 해야 할 일이 떠올랐다.
이제 공부만 해서는 안 된다.
미뤄 왔던 일들을 이제 실행해야 할 시간이다.
***
학교 도서관에서 기말고사를 준비하던 정훈은 옆자리에 앉아있던 은수를 보았다.
은수의 코 고는 소리가 집중력을 흐트러트렸다.
‘이 새끼는 좀 조용히 좀 자지…….’
공부도 안 하는 게 따라오기는…….
주변을 보았다.
달라진 건 별로 없어 보였지만 모든 게 바뀌었다.
유전자 검사 결과는 예상대로 혈육임을 증명해 줬다.
안 해도 된다는 걸 정훈의 요구대로 어쩔 수 없이 진행했다.
보육원을 벗어나 할머니가 구한 집으로 들어갔다.
서울 성북동에 있는 집보다 작은 집을 구했다고 하셨는데,
대지 300평의 대궐같이 으리으리한 집이었다.
내년에 졸업하면 서울로 갈 거라며 집은 정훈의 이름으로 샀다.
갑자기 10억대의 자산가가 된 정훈은 기분이……나쁘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가능하면 중부시에 흔적을 남기고 싶지 않았다.
좋았던 기억보다 나빴던 기억이 더 많은 곳.
하지만 할머니는 그렇지 않다고 그를 타일렀다.
지금은 별로겠지만 정훈이 자라며 시간을 보냈던 곳.
언젠가 그리울 것이라고 했다.
그래서 쉽게 올 수 있도록 집 하나는 있어야 한다고 조언했다.
대궐 같은 집, 은수도 자연스럽게 내 옆 방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리고 할머니는 말씀하신 대로 학교의 이사장이 되었다.
만호가 부른 각 분야의 전문가들이 학교를 탈탈 털었다.
공금 횡령부터 촌지 수수까지 싹 밝혀낸 덕분에 대대적인 물갈이가 있었다.
철중 선배 아버지도 다행히 고비를 넘겼다.
아직 의식은 찾지 못했지만 안정적인 상태라고 했다.
만호 아저씨 말로는 서울 의사들이 감탄했다는 후문이었다.
이송이 불가능한 환자를 무진동 트럭으로 이송한 기발한 아이디어에 모두 깜짝 놀랐다고 했다.
정훈의 전화벨이 도서관에 울렸다.
진동모드로 해야 하는데 깜빡했다.
전화기가 있다는 사실을 종종 잊어 버렸다.
“도련님, 접니다.”
“네, 아저씨. 잠시만요.”
도서관 밖으로 나가서 전화를 받았다.
“도련님, 저번에 부탁한 사람 말입니다.”
“네, 아저씨.”
“지금 내려왔는데, 어디 십니까? 그리로 갈게요.”
“지금 학교 도서관에 있어요. 이리로 오세요.”
“네. 바로 가겠습니다.”
“네, 알겠습니다.”
만호에게 금융 쪽에 밝은 사람을 소개해 달라고 부탁했다.
실력도 중요하지만 인성이 더욱 중요한 사람으로.
사실 실력보다는 인성과 준법정신만 투철하면 되었다.
금융계는 횡령처럼 돈 장난치기 쉬운 곳.
돈 들고 도망가기도 쉬워 최대한 신뢰할 수 있는 사람으로 부탁했다.
실력과 투자 방향은 정훈이 대부분 알고 있다.
무수히 읽었던 신문들, 그리고 그것을 쉽게 잊지 않는 포토그래픽 메모리.
그것이면 수백 배로 자산을 불릴 수 있다고 확신했다.
왜?
자신의 투자에는 실패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부탁한 지 며칠 되지도 않았는데 벌써 구해 온 걸 보면 김만호는 생각보다 많은 것을 알고 많은 사람을 아는 분이다.
그의 능력에 감탄한 게 한두 번이 아니었다.
정훈은 도서관 앞에서 만호가 데려올 그 사람을 기다렸다.
현금왕의 천재손자, 재벌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