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6화
“말해 보거라 이유가 타당하면 얼마든지 줄 수 있다.”
정훈은 잠깐 생각했다.
이유라…….
복수 때문이라 말할까?
돈을 모으고 싶다고 말할까?
만족할 만한 답이 생각나지 않았지만 선택해야 했다.
돈이 좋다. 싫어하는 사람은 없으니.
“돈을 벌고 싶어졌습니다.”
“갑자기?”
“지금까지는 가진 게 없어서 욕심이 없었습니다. 꿈도 꾸지 않았습니다. 옛날에는 노력해도 되지 않았으니까요. 재능이 있어도 짓밟히기만 했습니다. 저도, 은수도.”
현현정옥은 알고 있었다. 가진 것 없는 자에게 얼마나 모진 나라인지.
“그래, 아마 그랬을 거야. 하지만 이제 누구도 너를 함부로 하지 못해. 넌 현금왕의 손자다.”
“그래서 욕심이 났습니다. 내 능력은 어디까지인가? 내가 움직인다면 무슨 일이 생길까? 어디까지 갈 수 있을까? ……궁금해졌습니다.”
“어디까지 가고 싶은 거냐?”
“갈 수 있는 데까지요”
“녀석 욕심이 너무 많은 것 아니냐?”
“할머니 손자가 되고 제 안에 욕심이 가득한 걸 알았습니다.”
“녀석, 돈 욕심이 있어야 돈을 모을 수 있지. 그런데 훈아, 이 할미 재산만 지키기도 쉽지 않을 텐데.”
“할머니.”
정훈이 현정옥을 불렀다.
“지키려 하면 결국 무너질 겁니다. 할머니도 아시지 않습니까?”
“그래, 알지. 마지노선을 굳게 믿은 프랑스가 독일 나치에게 파리를 허무하게 점령당했듯, 지키려 하면 결국 빼앗긴다.”
현정옥은 지금까지의 경험에서 나온 지혜를 정훈에게 말했다.
그리고 잠시 생각한 다음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럼 욕심을 한번 부려 보거라. 어디까지 가는지 할미도 궁금하구나.”
“끝까지 가 보고 싶습니다. 가는 길에 저를 방해하는 것들을 모조리 먹어 치울 겁니다. 할머니와 저를 위협하는 그놈들도요.”
그녀는 눈을 감고 정훈을 말을 되새기며 생각에 잠겼다.
‘결국 그것인가? 복수…….’
현정옥은 어린 손자의 치기가 걱정되었다.
“그들과 전면전이라도 할 것이냐?”
“아니요. 아직은 그럴 힘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래? 그건 니 애비랑 다르구나”
무모하게 시작한 싸움, 허무한 패배.
아들과 며느리를 한 줌의 재로 보낸 그녀의 한은 아직까지 사라지지 않고 있었다.
생때같은 자식을 보낸 부모가 가만히 있을 수 있을까?
비밀스럽게, 천천히 느리지만 확실한 힘.
그녀도 그 힘을 기르고 있었다.
언젠가 필요할 것이라 생각했었다.
현정옥은 눈앞에 있는 정훈을 보았다.
그의 눈빛에서 범접할 수 없는 기세가 뿜어져 나오고 있다.
강인한 의지, 명석한 두뇌.
운전기사이자 수행비서 현수의 말에 따르면 타고난 신체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했다.
하지만 아직 어린 손자가 감당하기엔 그 무게가 너무 무겁게 보였다.
어쩌면 전장에 하나뿐인 혈육을 보내고 싶지 않은 할머니의 마음이었을지도.
정훈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할머니. 하지만 지금 움직여 힘을 길러야 합니다.”
“녀석, 그래. 돈으로 어떻게 힘을 기를 거냐?”
“…….”
한참을 기다렸지만 정훈은 대답하지 않았다.
정훈도 말하고 싶지 않았다.
현정옥이 그를 보고 슬며시 미소 지었다.
“녀석, 마음에 드는구나. 투자를 하려면 조용히 해야 한다. 그것이 부동산이든 주식이든, 사업이든. 어리석은 것들이나 입으로 떠들며 자랑하고 다니지. 아무것도 모르는 녀석인 줄 알았더니 기본은 갖춰져 있구나.”
현정옥은 기특한 손자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얼마가 필요해?”
“10억이면 충분합니다.”
‘허허, 저놈 보게. 배포가……. 10억?’
당황했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10억,
자신에겐 하찮을지라도 결코 적지 않은 돈이다.
누군가는 평생 열심히 일해도 만져보지 못할 돈.
그 돈의 가치를 손자도 알 거라 생각했다.
“10억이라……. 아주 큰 돈인 건 알지? 그만큼 자신 있는 거지?”
“네.”
더 이상의 대화는 무의미하다.
이제부터는 믿고 지켜봐야 할 시간이었다.
“알겠다. 내일 입금해 주마. 대신 무리하지 말거라. 할미가 뭘 싫어하는지 알지?”
“네, 불법은 절대 없습니다……. 할머니 감사합니다.”
정훈은 주먹을 불끈 쥐며 환호성을 지르고 싶었다.
하지만 참았다.
이 10억이 100억이 될 때 축배를 들고 싶었다.
정훈은 침착함을 유지하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할머니께 가볍게 목례를 한 다음 밖으로 나가려 할 때였다.
등 뒤에서 그녀의 목소리가 정훈을 불러 세웠다.
“훈아. 마카오에 돼지은행이란 곳이 있어. 합법도 불법도 아닌 은행이다. 계좌번호와 비밀번호만으로 이용할 수 있어.”
정훈은 하마터면 소리를 지를 뻔했다. 기다리던 말이 드디어 나왔다.
포기하고 10억으로 만족하려 했는데.
저곳에 무엇이 있는지 모르지만 꼭 가져야 한다.
“네? 돼지은행요?”
모르는 척 물었다.
“네 아버지, 현중이가 훗날을 위해 미리 준비한 것이야.”
할머니가 서랍 속에서 봉투를 꺼내 주셨다.
“나도 그 은행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는 모른다. 다만 100일도 되지 않은 너를 보면서 말하더구나, 언젠가 정훈이에게 도움이 될 것이라고.”
“아버지가요?”
정훈은 당황했다. 할머니의 선물인 줄 알았는데,
얼굴도 모르는 자신의 아버지가 자신을 위해 준비한 선물.
눈물이 핑 돌았다.
“할미가 찾아줄까?”
갈등했다. 마카오까지 가야 하는데 지금 자신이 움직여 동선을 노출하고 싶지 않았다.
분명 자신과 할머니를 먼 곳에서 감시하고 있을 것이다.
“제 힘으로 해 보겠습니다.”
“녀석, 고집하고는……. 정훈아 네 아버지를 닮아 기분이 좋기도 하고 걱정되기도 한다. 혼자 하려 하지 말거라. 이 할미 비록 늙었지만 생각보다 많은 힘이 될 수 있어. 이 필요한 게 있으면 부탁하렴.”
“네. 할머니는 현금왕이잖아요. 꼭 그렇게 할게요.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정훈이 할머니에게 받은 봉투를 들고 일어섰다가 다시 안았다.
할머니에게 큰 선물을 받았으니 보답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할머니, 워렌버핏이 그러던데 가치 투자를 할 거면 장기투자를 해야 한대요.”
“허허허, 정훈이가 벌써 그런 것도 알아?”
“논술 준비하면서 본 신문에 나오더라구요. 그리고 신문에 사이다 만드는 로테칠성이랑 화장품 만드는 대서양이 좋다고 하던데요.”
“그 화장품은 이 할머니가 써보니 좋더구나. 그래서 나도 주식을 좀 사 볼까 생각 중이다. 로테칠성은……. 그건 생각을 해 봐야겠는데, 녀석 벌써 할머니한테 주식을 가르치는 거냐?”
“아니요. 그냥 아 돈 있으면 좀 사 두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저는 돈이 없으니까 할머니가 한 2~3년 가지고 있으면 좋겠어요.”
현정옥은 정훈의 자신감 넘치는 태도가 마음에 들었다.
하지만 자신의 속내를 쉽게 드러내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흠, 한번 생각해 보마.”
“네, 할머니. 그럼 전 가 볼게요”
“그래, 가서 쉬거라. 아 이 등기서류도 챙겨야지. 네 땅인데.”
“아니요, 할머니가 관리해 주세요. 아직 미성년자잖아요.”
“허허, 이 할머니가 팔아 버리면 어쩌려고?”
“뭐 그렇게 하신다면 이유가 있겠죠.”
현정옥은 욕심이 없는 손자의 모습에 놀랐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욕심이 가득한 녀석이었는데,
어느새 초탈한 듯한 무심한 표정.
‘마음을 저렇게 다스릴 줄 알다니, 고등학생이라고 누가 믿겠어?’
변화무쌍한 손자의 모습이 놀라웠다.
“그래, 내가 잘 보관하고 있으마.”
“네, 할머니.”
‘제 인감증명서가 없으면 어차피 팔 수 없잖아요. 그 정도는 알고 있습니다.’
할머니가 로테와 대서양 주식을 꼭 사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말하지 못했지만 그 주식들 내년부터 2년 안에 10배 오른다.
10배!
***
“부르셨습니까?”
“앉지.”
심각한 표정을 한 현정옥이 만호를 보았다.
“정훈이가 돈이 필요하다고 했어.”
“아, 그게…….”
“무슨 일이지?”
“얼마 전에 투자를 하고 싶다며 그쪽으로 밝은 사람을 소개해 달라고 했습니다.”
“그래? 혹시 철수 붙였나?”
만호는 현정옥의 눈치를 살폈다.
다행히 언짢아하지는 않는 듯했다.
“네, 그게…… 믿을 만한 사람이 별로 없어서요.”
“한국에 있었어? 그 자식은 한국에 들어왔으면 친구 어머니한테 인사를 해야지.”
“크흠, 뭐 어르신이 워낙 무뚝뚝하게 대하시니…… 어려운 거죠.”
“그랬나?”
현정옥은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그게, 철수를 보면 현중이가 생각나서 그랬지. 그래서 별것도 아닌 실수를 빌미로 오지 말라고 한 거야.”
“알고 있습니다. 철수도 아는 눈치더군요.”
“그럼, 다행이군. 왜 들어왔대?”
“미국에서 어려운 일이 있었답니다. 아무래도 불법적인 자금 세탁에 연루될 뻔 했답니다. 운 좋게 벗어나긴 했지만요.”
“자금 세탁이라…….”
“무슨 일인지 은밀히 한번 조사해 봐.”
“알겠습니다.”
“항상 조심해야 하네.”
“네, 어르신.”
대답을 들은 현정옥은 화제를 전환했다.
“이봐 만호, 정훈이 놈이, 그놈이 나한테 주식을 추천하지 뭐야”
현정옥의 입꼬리가 이미 귀에 걸려있었다.
“네? 도련님도 참,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른다더니, 허허허.”
그 말에 발끈하는 현정옥.
“뭐얏? 정훈이가 하룻강아지란 말이야?”
그녀는 가끔 특이한 지점에서 화를 내곤 했다.
“아, 아닙니다.”
“흠흠, 하여튼 그놈이 로테칠성이랑 대서양을 추천하던데. 자넨 어떻게 생각해?”
깜짝 놀란 만호의 눈이 커졌다.
“어, 그게…….”
그리고 검은색 결재 파일을 그녀에게 전했다.
“안 그래도 이번에 새롭게 편입할 종목들 보고드리려 했습니다. 도련님이 말씀하신 종목도 들어 있습니다. 꽤 눈썰미가 있으시군요.”
“그래?”
그녀의 눈이 환하게 빛이 났다.
자신의 손자가 한 말이 검증된 것과 같았다.
“녀석, 재주가 있나 봐.”
“네, 우리 도련님은 강아지가 아니라 큰 호랑이 같습니다.”
“그치?”
손자의 칭찬을 들으니 그녀의 기분이 날아갈 것처럼 좋아졌다.
“고 녀석이 2~3년 동안 가치 투자를 하라던데……”
“저희는 평소처럼 6개월에 30%의 수익을 예상하고 있습니다.”
“아니야, 이번에는 우리 손자를 한 번 믿어 봐야겠어. 무슨 일이 있어도 팔지 말게. 한번 2년 동안 가지고 있어 보자고.”
“네? 알겠습니다. 어르신.”
비상장 주식만 장기 투자하던 현정옥이 새로운 스타일의 투자를 시작했다.
“아 그리고 각각 10억씩 정훈이 이름으로 매수해. 그 녀석 운을 한번 시험해 봐야겠어.”
“네, 세금 문제까지 깔끔하게 처리해서 매수하겠습니다.”
“그래, 수고해.”
미국에서는 장기 투자가 일반적이다.
하지만 국내는 시기상조라 생각했다.
한국 시장은 대주주와 주가 조작 세력들의 장난질이 생각보다 심한 곳이었다.
오래 들고 있다가 손해 보는 일은 없기를 기대했다.
걱정이 들었다.
하지만 왠지 좋은 일이 생길 것도 같았다.
만호는 정훈의 운이 얼마나 큰지 지켜보기로 했다.
***
만호에게 받은 전화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긴장되는 순간이었다.
이제 곧 모든 것을 걸어야 한다.
그는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인가?
정훈은 반드시 확인을 해야 했다.
“임철수입니다.”
“윤정훈입니다.”
“아, 그래요. 어쩐 일입니까?”
“저번에 부탁한 포트폴리오 완성되었나요?”
“거의 다 되어 가는데……. 급한가요?”
철수는 만호 앞에서 급존칭을 했지만 단둘이라 존대만 했다.
정훈은 그의 말이 약간 거슬렸지만 아버지 뻘이니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다.
“네, 급합니다. 오늘 볼 수 있을까요?”
“오늘은…… 조금 곤란한데…….”
긴 침묵이 이어진 다음 정훈이 입을 열었다.
“그럼, 안 오셔도 됩니다. 지난번 했던 문의는 취소하겠습니다.”
“뭐?”
임철수의 목소리가 날카로워졌다.
거친 숨소리가 들렸다.
“후우, 뭐? 너 나랑 장난 하는 거야? 이 새끼가 돈 좀 있다고……. 내가 포트폴리오 짠다고 며칠을 고생했는데 갑작스럽게 취소해? 별 이유 같지도 않은 거로? 야 너, 인마. 내가 응, 느그 아부지, 현중이랑 밥도 묵고, 술도 묵고, 사우나는 아니고 목욕탕도 간 사이야. 어? 어디서 이 고삐리가 아버지 친구한테…….”
정훈은 그의 말에 기분이 살짝 나빴지만 어쩔 수 없었다.
의도적인 도발이었으니.
아버지 친구라, 역시 예상대로였다.
만호 아저씨보다 꽤 아래로 보였다.
살아 계셨다면 아버지 나이대인 40대.
그만큼 신뢰할 만한 사람이 분명했다.
자신이 해야 할 도박의 승률이 조금은 높아졌다.
전화기에 두고 서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정훈이 입을 열었다.
“아저씨, 그럼 저를 위해 목숨을 걸 수 있습니까?”
“뭐……?”
“그럴 수 있다면 지금 오세요. 아니면 안 오셔도 됩니다. 친구의 아들이 곤경에 처해 있는데…… 아저씨는 어떻게 하실지 궁금합니다.”
정훈은 전화기를 끊었다.
레이스를 시작했다.
모든 것을 걸어야 한다.
현금왕의 천재손자, 재벌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