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8화.
여섯 시가 넘어서야 기다리던 전화벨이 울렸다.
“정훈아, 나야.”
“네.”
“휴우, 너무 늦게 전화해서 미안하다. 도망간 줄 알았겠네.”
“조금요.”
“허허, 녀석. 이게 아주 오랫동안 있던 거라서 좀 복잡했어.”
“네”
“구체적인 내용은 한국에서 말해 줄게. 일단 제일 중요한 게 돈인데…….”
“네.”
정훈은 자신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얼마 있는 것 같니?”
“아저씨.”
잔뜩 긴장해 있던 정훈은 자신도 모르게 목소리가 커졌다.
“녀석, 궁금하냐?”
“후우, 아니 저는 돈보다는 아버지가 남긴 게 뭘까 생각한 거죠. 돈이 궁금한 건 아닙니다.”
정훈은 씨도 안 먹힐 핑계를 댔다.
정말 궁금해 죽을 것 같았다.
아버지가 얼마를 남겼는지.
무엇을 남겼는지
“백.”
“네? 백만 달러요?”
10억, 정훈은 약간 실망했다.
“아니.”
“백 억요?”
“그래, 정확하게는 115억 2천 5백……. 그냥 115억이야. 현중이가 금, 미국 국채, 달러, 그리고 주식으로 남겼어. 그래서 처분한다고 시간이 좀 걸렸어. 그리고 여기 수수료가 출금할 때 발생하는데 그게 10프로. 그래서 103억 5천만 원. 아까 페이퍼 컴퍼니로 보냈어. 이제 미국으로 송금하면 돼.”
“감사합니다. 고생하셨어요.”
“고생은 무슨 돈 받자고 하는 거지.”
“네.”
“나는 오늘 저녁 비행기로 한국으로 들어갈게.”
“좀 쉬다가 오셔도 돼요. 피곤하실 텐데.”
“아니야, 마음 같아서는 지금 비행기 타고 바로 가고 싶은데 참는 거야.”
“네. 그럼 조심하세요.”
“그래. 내일 보자.”
다음 날 임철수가 저녁에 집으로 왔다.
빡빡했던 일정과 짧지 않은 비행 시간 등으로 피곤할 것 같았지만 활기차 보였다.
그의 방문을 들은 할머니는 아들의 옛 친구를 위해 저녁상을 크게 차렸다.
모처럼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맛있는 음식을 먹으며 식사를 마쳤다.
은수와 할머니는 일일드라마를 보며 드라마 속 악역을 요리조리 다양하게 씹었다.
마치 사이좋은 모녀 같은 모습을 구경하던 정훈과 철수는 조용히 일어나 방으로 들어갔다.
“휴우, 잘 먹었다. 사실 좀 걱정됐는데 다행이다.”
기분 좋은 목소리였다.
“네?”
“어머니, 그러니까 할머니 음식 솜씨가 보통이 아니라서 걱정했지. 직접 하실까 봐, 흐흐흐.”
“아, 저도 이미 한 번 당해서…….”
“그래. 정말 다행이다, 휴우.”
정훈도 내심 할머니의 요리가 나올까 조마조마했다.
다행히 고성댁 아주머니의 정갈하고 깔끔한 요리로 모두가 즐거운 저녁을 먹었다.
임철수는 가방에서 서류와 노트북을 꺼냈다.
“일단 마카오에 세운 페이퍼 컴퍼니부터 들어가 보자.”
아주 오래전에 사용했던 브라우저가 눈에 들어왔다.
“어 넷스케이프 쓰시네요. 한국 사람들은 거의 익스플로어만 쓰던데.”
“너 이거 아냐?”
“아니요. 그냥 호기심에 한번 써 봤어요.”
“그래? 속도랑 보안이 좋아서 이거 쓰는데, 한국에서 쓰기는 영 불편하네. 이 나라는 죄다 익스플로어 기준으로 되어 있어. 조만간 바꿀 거야. 불편해서 안 되겠어.”
넷스케이프, 초기 인터넷 브라우저의 표준.
대부분 이 브라우저를 사용했다.
하지만 윈도우 익스플로어의 성장과 편리성에 경쟁력을 잃고 퇴출되었다.
정훈이 옛날 생각을 하고 있을 때였다.
“여기 봐 봐, 이게 계좌야 금액 보이지? 지금 달러로 되어 있어.”
“848만 달러……. 100억이다.”
100억!
정훈은 두 눈을 크게 깜빡이기만 했다.
모니터 화면의 숫자는 현실의 무게를 전달하지 못했다.
하지만 점점 그 돈의 무게가 전해졌다.
꿈도 꿀 수 없었던 금액.
모든 사람의 꿈.
가만히 놀아도 돈이 쌓이기 시작한다.
온몸에 전기가 통하며 전율이 흐르는 게 느껴졌다.
“후우, 아저씨 이 돈 들고 도망가시죠. 평생 먹고살 만하지 않아요?”
“풉, 야 너 나를 너무 과소평가하는데, 내 목표는 1조야 1조.”
“웁.”
정훈은 터져 나오는 웃음을 황급히 입으로 막았다.
약간은 무안한 얼굴을 한 임철수는 꿋꿋하게 말을 이었다.
“네가 지금은 좀 그렇지만……. 뭐 앞으로 잘 나가서 돈 엄청 벌건데 100억은 너무 적지 않아?”
“아, 네. 그렇게 생각하시면 100억은 적은 돈이네요. 아저씨는 실력이 뛰어나시니 곧 1조 원은 아니라도 몇 천 억은 벌 수 있을 거예요.”
지난 생에 보았던 그의 인터뷰 기사를 생각했다.
전설적인 수익률. 하지만 1조까지는 아니고 5000억 정도가 그의 자산이었음을 기억했다.
천만 원으로 오천억을 만든 마이더스의 손.
물론 굴리는 돈은 수십조였다.
그는 인터뷰에서 미국 주식 시장을 추천했다.
특히 미국 주식 직접 투자.
미국에서 대부분의 돈을 번 그에게 그곳은 황금이 가득한 엘도라도였다.
“어휴 이 도련님, 억이 우습지? 그 돈 모으기 쉽지 않다. 지금 최저 시급이 2000원 안 될걸? 1억을 벌려면 5만 시간을 쉬지 않고 일해야 해. 6년을 잠도 자지 않고 계속 일해야 1억 이상을 번다. 뭐 그래도 감이 안 오지?”
정훈은 대답하지 않고 옅은 미소만 지었다.
‘그럴 리가? 지난 생에 1억을 모으기 위해 얼마나 개처럼 노력했는데.’
제대로 된 직장을 잡고 열심히 일하며 안 쓰고 안 입고 거지처럼 살았다.
그렇게 노력해서 3년 만에 겨우 7천만 원을 모았었다.
“아저씨, 미국에 투자할 만한 회사는 뭐가 있어요?”
“안 그래도 이제 그 이야기해야지.”
정훈이 눈을 반짝이며 기대감을 나타냈고 그 얼굴을 본 임철수도 신이 나서 말하기 시작했다.
“일단 지금 제일 매력적인 건 IT 기업들이야. 지금 주가가 많이 떨어졌어. 내년쯤이면 분명히 반등한다.”
아니, 아직 더 떨어져야 한다.
언제나 바닥 밑 지하실은 존재했다.
90프로 이상의 닷컴 기업이 문을 닫은 뒤에야 이 버블은 끝이 난다.
2000년 중반부터 2002년까지 지속된 IT 버블 붕괴.
버블의 꼭대기에 100달러 하던 주식이 60~70달러 하니 싸 보일 것이다.
2000년 초반까지 대부분의 닷컴 기업이 수익을 내지 못했다.
언젠가 분명히 황금알을 낳을 것이라 확신했다.
하지만 황금의 시대를 누리는 회사는 살아남은 회사들 뿐.
아마존, 애플, 넷플릭스 등 살아남은 자들만이 희열을 맛볼 뿐이다.
그 외에는 대부분 소리소문없이 도산했다.
아직 더 기다려야 한다.
곧 있으면 100달러에 근접했던 아마존의 주가가 10달러 밑으로 내려온다.
바로 그때 주워 담아야 한다.
더 기다려야 할 시간이었다.
“아저씨 애플은 어때요?”
“어 너 애플도 아냐? 잘 나가다가 훅 갔는데 요즘은 얼마 하려나?’
“요즘 분위기 안 좋아요?”
“거기 곧 파산한다고 소문이 파다하던데?”
“설마 파산할까요?”
“그건 모르지. 잠시만, 오늘 주가가……”
인터넷으로 주가를 확인한 철수의 눈이 커졌다.
“0.2 달러네”
고민하는 눈빛이었다.
“무슨 생각 하세요?”
“너무 싼데? 막 사고 싶어지네.”
“그걸 왜 사요?”
“싸잖아, 지금 잡스도 돌아오고, 조너선 아이브가 디자인에 주도적인 역할을 하고 있어. 분명히 이제 곧 날아오를 거야.”
“글쎄요. 날아오를 수도 있겠죠. 중요한 건 언제 날아오르냐는 거죠.”
애플의 주식이 반등하는 건 아이팟이 나온 이후다.
아직은 아무도 관심을 가지고 있지 않다.
“정훈아, 너무 싸다. 이거 좀 사 봐. 분명 몇 배 오를 거야.”
“아저씨. 싸다고 덥석 물면 절대 안 돼요.”
정훈이 단호한 말로 흥분한 아저씨를 진정시켰다.
애플, 한 입 베어 문 흰 사과의 로고.
처음에는 무지개 색깔이었다.
향후 애플은 모바일 세상에 누구도 넘볼 수 없는 제국을 만든다.
그리고 믿기 어려운 20퍼센트가 넘는 영업이익률.
10년만 기다려도 수백 배는 오를 주식이 눈앞에 보였다.
하지만 중요한 건, 언제나 타이밍이다.
이 주식 지금 사면 앞으로 5년 동안 아무것도 못 한다.
괜히 시간만 날릴 뿐이다.
차라리 내년에 10배 오를 로테와 대서양이 낫다.
투자해야 할 곳이 여기만은 아니다.
“너무 흥분하지 마시고 진정하세요. 1달러 넘어가면 그때 관심 가지죠.”
정훈은 약간 큰 목소리로 그를 진정시켰다.
당황한 철수는 정훈의 말을 듣고 자신이 너무 흥분했음을 자각했다.
초보나 할 법한 실수를 한 게 부끄러웠다.
이런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정훈이 대단해 보이기도 했다.
“알겠다. 내가 너무 흥분했다. 차분히 지켜보마. 자, 그럼 우선 송금부터 할게, 미국 법인으로.”
미국으로 돈이 가는 데 10초도 걸리지 않았다.
“엄청 신기하네요. 이렇게 한 번에 돈도 보내고.”
“그렇지? 아마 미래에는 모든 게 인터넷으로 이뤄질꺼야.”
“그럴 거 같아요. 이렇게 편한데 누가 안 쓰겠어요”
편리한 송금.
그때 정훈의 머릿속에 전설적인 기업이 떠올랐다.
그 회사의 창업자들이 나중에 벌일 일들.
전 세계에 거대한 영향력을 행사하게 될 그들의 얼굴이 하나하나가 눈앞에 그려졌다.
“아저씨 혹시 미국 회사 중에 인터넷 송금 회사 아세요?”
“아니. 그쪽은 잘 모르는데. 한번 알아볼까?”
“네. 조금 자세히 알아봐 주세요.”
“그래 알겠다.”
정훈의 부탁을꼼꼼하게 메모한 그.
모니터에서 눈을 떼고 정훈을 보았다.
“자 그럼 이걸 어떻게 투자할까?”
정훈은 생각에 잠겨 그의 말을 듣지 못했다.
“정훈아”
“정훈아”
“네?”
“무슨 생각을 그렇게 골똘히 하는 거냐?”
정훈의 눈이 반짝이며 입꼬리가 올라갔다.
“아저씨, 저랑 미국 갈래요?”
당황한 임철수.
황급히 피곤한 표정을 지었다.
“뭐? 나 어제 마카오에서 왔어. 피곤해 죽겠다. 그런데 미국? 어우, 비행기만 12시간 넘게 타야 되는데…….”
그는 당황한 척하며 엄살을 피웠다.
하지만 슬쩍 지었던 미소로 보아 싫지만은 않은 것 같았다.
***
“손님 여러분, 우리 비행기는 곧 착륙할 예정입니다. 좌석 벨트를 매 주십시오. 감사합니다.”
일본 억양이 진하게 묻어 있는 영어가 흘러나왔다.
기장의 안내 방송이 나오고 난 다음 승무원들이 움직이며 벨트를 확인했다.
잠시 후 쿵하는 소리와 함께 거대한 비행기가 무사히 활주로에 착륙했다.
“우리 비행기는 캘리포니아 미네타 산호세 국제공항에 착륙했습니다…… 감사합니다.”
긴 비행시간과 시차로 정신을 차리지 못하던 은수가 안전 벨트를 풀고 크게 기지개를 켰다.
옆에 앉아 있던 데이비드는 여전히 서류를 보면서 해야 할 일을 체크하고 있었다.
그의 얼굴은 아직 밝아 보이지 않았다.
투자 제안을 한 회사로부터 아직 확답을 받지 못했다.
IT 버블 붕괴로 쉽게 투자를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의외로 명확한 답을 주지 않고 있었다.
수 싸움인지, 정말 투자에 관심이 없을 만큼 돈이 차고 넘치는지 판단하기 어려웠다.
어쩔 수 없이 미리 출발했다.
거부하면 회사에 돈이라도 던지고 나오고 싶은 심정이었다.
어쩌면 아무런 성과도 없이 되돌아가야 할 수도 있었다.
데이비드의 첫 번째 일, 그는 무슨 일이 있어도 성공시키리라 다짐했다.
정훈은 굳은 얼굴로 창밖을 보는 데이비드를 보았다.
자신만큼 이 일에 막중한 책임감을 느끼고 있다.
사람 일이라는 게 뜻대로 되는 일이 거의 없다.
잘 안될 수도 있다.
물론 투자를 할 수 있으면 좋다.
최소한 10배 이상의 이익을 얻을 수 있다.
하지만 더욱 중요한 건 사람을 얻는 것이다.
이번 투자의 최종목표.
그와 그들의 친구.
그건 최소 수천 배의 이익이며 정훈이 생각하는 제국의 초석이다.
그들과 함께 급성장하는 인터넷 제국과 다가올 모바일 세상에 유리한 위치를 점해야 한다.
“휴, 피곤하다. 이게 얼마 만에 밟아 보는 땅이냐?”
“아저씨, 피곤하세요?”
“이제 아저씨 말고 데이비드라고 불러. 아저씨는 너무 늙은 것 같다.”
“네.”
“근데, 너희들은 안 피곤하냐? 부럽다 부러워, 나도 저랬는데.”
데이비드는 정훈과 은수의 놀라운 회복력을 부러워했다.
그건 정훈도 마찬가지였다.
30대 후반의 피로에 쩐 몸과 지금은 비교할 수도 없을 만큼 좋았다.
놀라운 회복력으로 지치지도 않았다.
고등학생의 지칠 줄 모르는 미친 체력은 엄청난 장점이었다.
“잠시만.”
데이비드의 표정이 굳어졌다.
손에 쥐고 있던 그의 전화벨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울렸다.
거인으로 성장할 실리콘밸리 마피아.
아직 비상장회사인 ‘엑스닷컴’에 투자하려는 계획이 저 전화기에 달려 있었다.
현금왕의 천재손자, 재벌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