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5화
붉으락푸르락하던 조영진의 얼굴색이 원래대로 돌아왔다.
호통을 칠 것 같은 얼굴에서 순식간에 평온한 얼굴로 표정을 바꿨다.
노회한 정치인은 역시 빠르게 자신의 속내를 숨겼다.
“역시 대단해. 듣던 대로야.”
예상치 못한 반응이었다.
“네?”
슬며시 웃는 조영진의 모습에 당황했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내심 테이블을 뒤엎을지도 모른다는 걱정까지 했었다.
“권율 조합장 말도 그렇고, 주변에서 평판을 확인하니 범과 같은 기운이 느껴진다더니만.”
‘일부러 도발한 건가?’
다행이라 생각했다.
그의 도발에 밀려 꼬리를 내렸다면 흔한 도둑고양이 취급이었을 것이다.
“과찬입니다.”
“아니야, 이 조영진의 초면에 그런 무례한 표현을 한 사람은 자네가 처음이야. 허허허.”
“죄송합니다. 제가 너무…… 무례했습니다.”
“내가 먼저 도발했으니 사과하지. 쩌업, 그런데 냄새나는은 좀 그렇군, 크흠.”
“그건 저도 정말 죄송합니다. 어르신.”
스스로 생각해도 미안했던 정훈은 쑥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래 재건축 시공사를 노리고 있다고?”
“아닙니다.”
“그럼 뭘 원하나?”
“저희는 그냥 심사만 제대로 해 주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심사만 제대로라…… 제대로만 하면 자신 있다는 뜻이구만.”
정훈은 대답하지 않았다.
테이블을 두고 긴 침묵이 이어졌다.
“내 정신 좀 봐. 앞에 싱싱한 음식을 놓고 뭐 하는 짓인지. 자자 들지.”
“먼저 드시면 먹겠습니다.”
“허허허, 예의가 있는 친구군.”
조영진은 차가운 회 하나를 입안으로 집어넣었다.
“첫 회는 이렇게 양념 없이 먹어야 제맛이지. 그럼 이 고기가 싱싱한지 아닌지, 제대론 된 놈인지 단박에 알 수 있어.”
“네, 어르신.”
“자네도 마찬가지구만, 현정옥 여사랑 같이 왔다면 제대로 평가하기 어려웠을 거야. 그런데 이렇게 현 여사의 그늘 없이 보니 자네 본모습이 제대로 보이는군.”
“좋은 뜻으로 받아들이겠습니다.”
“허허허, 만나길 잘했어 정말. 사실 권율 조합장이 꼭 만나야 한다길래 내심 걱정이 됐어. 자네도 이유는 충분히 알겠지.”
“네, 어르신.”
“역시 사람이 나이가 들면 귀를 열고 살아야지. 내 편견에 사로잡혀 자네를 안 봤으면 큰 후회를 할 뻔했구만.”
“좋은 평가 감사합니다.”
고개를 꾸벅 숙이며 감사의 예를 표했다. 그리고 다시 입을 연 정훈.
“어르신, 시공사 선정은 사심 없이 제대로 해 주시는 겁니까?”
“사심 없이라…… 이봐.”
“네.”
조영진의 눈빛이 바뀌었다.
흔한 동네 어르신에서 드디어 무소속 국회의원의 모습이 나타났다.
이제 속내를 꺼낼 시간이 다가왔다.
“사심은 없네, 그런데 욕심은 좀 있어.”
“욕심이라면……?”
“내가 사람 욕심이 좀 있어. 내 사람이 훨훨 나는 걸 좋아해. 그래서 사람을 키울까 생각중이야”
정치인이 사람을 키운다. 결국 정치인으로 만든다는 말이다.
자신의 권력을 키우는 가장 방법, 자신의 세를 불리는 것이다.
정훈은 머리를 빠르게 굴렸다.
누구?
권율 조합장.
생각보다 쉬운 답이었다.
시공사 선정 이후 크게 할 일이 없는 조합.
능력 있고 청렴한 그를 정치인으로 만든다.
올해 있을 재보궐 선거.
특히 전임 시장이 수십억의 비리로 구속된 상황.
나쁘지 않은 패라 생각했다.
“누구나 사람을 키우길 원합니다. 좋은 사람이라면 저도 돕고 싶습니다.”
“허허, 누군지는 자네도 이미 예상하고 있지 않나?”
역시 닳고 닳은 정치인 순식간에 정훈의 속내를 파악했다.
“네, 저 역시 좋은 분이라 생각합니다.”
“그럼, 낙후된 중부시를 위해 중앙 도서관 하나 크게 지어 주게.”
최소 200억이 들어가야 한다.
돌려받지 못하는 돈이다.
정훈은 다시 머리를 굴려야 했다.
“어르신이 사람 욕심을 내시니 저도 돈 욕심을 좀 내겠습니다.”
“욕심을 줄이고 기부를 하라 했는데 욕심을 낸다……. 말해 보게 무슨 욕심인가?”
“원래 마진 없이 들어가려 했던 사업입니다. 예상 공사비 7000억을 그대로 쓸 예정이었습니다. 부족한 이름값을 가격 경쟁력으로 메꾸려 했습니다.”
“그래도 사업을 하는데 남는 게 있어야지.”
정훈의 말에 의심스러운 눈빛이었다.
“선정되면, 중부건설의 이름이 남습니다. 앞으로 전국에 무수한 재건축 재개발 현장이 생깁니다. 5000세대를 성공적으로 분양한 회사. 이름값으로 좋다고 생각했습니다.”
“허허허, 이름 하나에 천억이 넘는 돈을 포기한단 말인가? 배포가 대단해.”
“어르신도 이름 하나에 200억을 투자하고 계시지 않습니까?”
권율을 시장으로 만들기 위한 프로젝트.
“그래서 저도 돈 욕심을 내겠습니다. 사람 욕심도 좀 내고.”
조영진은 눈빛을 반짝이며 정훈을 보았다.
“어르신 옛말에 선물과 복수는 기대 이상으로 하라는 말이 있습니다.
도서관이 어르신의 사리욕을 위한 게 아닌 걸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도서관 대신 최첨단 지식창업센터를 세우고 싶습니다.”
“뭐? 최첨단 지식창업센터?”
정훈의 말을 들은 조영진의 목이 타들어 갔다.
최첨단 지식 창업센터란 말이 그이 심장의 뛰게 했다.
오랜만에 긴장한 조영진이 자신 앞에 놓인 술잔 대신 물을 한 사발 마셨다.
“허허, 계속하게. 이거 오랜만에 목이 타네. 사람 이야기 듣다가 갈증이 생길 줄이야”
“지식 창업센터를 중부대학교와 연계해 첨단 산업 창업의 메카로 키우는 게 어떻습니까?”
조영진은 고개를 들어 윤정훈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아무 말 없이 자신의 잔에 술을 따랐다.
작은 소주잔이 마음에 들지 않아 보였다.
“율아, 글라스 하나 가져와.”
맥주컵을 넘치도록 채운 다음 한 번에 쭈욱 들이켰다.
“후우, 오늘은 소주가 얼음물보다 더 시원하구만. 답답한 가슴이 뻥 뚫리는 것 같아.”
“감사합니다.”
“빨리 졸업하게. 내 술 한 잔 주고 싶은데…… 아쉽구만. 내 먼저 일어서겠네. 율아. 먼저 간다.”
갑작스럽게 일어선 조영진의 행동에 정훈과 권율이 당황했다.
“벌써 가십니까? 이거 안 드십니까? 어르신 좋아하는 건데.”
“이 사람아 지금 못 먹을 만큼 배가 부른데…… 눈치하고는.”
문밖으로 나가던 조영진이 걸음을 멈췄다.
“적당히 욕심을 낸다면 모두가 즐거울 거야. 우리 중부시 시민들까지……. 최첨단 지식창업센터, 근래 들어본 단어 중에 가장 가슴 뛰는 단어군. 오늘 즐거웠네. 또 보세.”
조영진 의원은 서둘러 밖으로 나올 수밖에 없었다.
차마 자신의 속내를 들킬 수 없었다.
열기를 식혀 줄 시원한 찬 바람이 필요했다.
바닷가를 천천히 걸었다.
그럼에도 쿵쾅대는 심장을 주체할 수 없었다.
이제 19살이 된 아이가 자신을 이렇게 흥분시킬 줄 상상도 못 했다.
오래전에 사라졌던 야망이 그의 얼굴에서 다시 빛나고 있었다.
***
헤븐그룹 회장실에서 오랜만에 아들을 본 천상수 회장.
일송그룹 어르신의 칭찬이 생각나 입이 귀에 걸렸다.
“진혁아 증권사는 잘 처리했더구나.”
“감사합니다.”
“어르신이 증권사 일 덕분에 너에 대한 기대가 크다.”
“저번 일은 운이 좋았습니다. 그 회사 보안이 너무 허술했구요.”
“녀석 겸손하기는. 어르신께서 다음에 밥 한번 먹자고 들어오라 하셨다.”
“네?”
처음 겪는 어르신의 인정, 식사 초대에 잔뜩 긴장했다.
“녀석, 그렇게 긴장할 것 없다. 좋으신 분이야. 허튼짓 안 하고 욕심내지 않고 그분 말대로만 하면 다 좋다. 사람이 말을 잘 들어야지. 괜한 고집을 부렸다가, 한순간에 가는 거 봐라.”
“네, 아버님 말씀 꼭 새기겠습니다.”
“참 그때 10분 만에 손실이 500억이었냐 천억이었냐?”
“네. 8분 만에 1000억이었습니다. 그래도 그 회사에 실력 있는 사람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막는 데 최소한 한 시간은 걸릴 줄 알았는데 10분만에 막더라구요.”
“녀석 한 시간이면 손실이 얼마냐?”
“아마 수천억은 날렸을 겁니다.”
“그 회사 보안팀을 칭찬해야 하나? 너를 10분 만에 막은 걸?”
“네. 그 회사 보안 프로그램은 허술해도 보안 능력자는 많은 것 같습니다. 개인적으로 좀 욕심이 납니다. 누굴지.”
“그래? 허허 뭐 이 아비가 모르는 내용이라 어렵구나.”
“아닙니다. 해킹 프로그램으로 가격을 약간 장난질 친 것뿐입니다.”
“하여튼 눈엣가시 같은 놈들 처리해 줘서 속이 시원하다 하셨어. 그리고 중부시 재건축은 잘 챙기고 있지?”
“네. 대의원들을 집중적으로 포섭 중입니다. 그리고 대의원들이 조합원들은 맨투맨으로 체크하고 있습니다. 다들 우리 헤븐건설에 우호적입니다. 시공 능력이나 브랜드 이미지 등을 생각하면 중부건설과 상대할 만한 사이즈가 아닙니다.”
“그래, 그렇긴 한데……. 윤정훈이 거기 있다. 그러니 항상 끝까지 방심하지 말거라.”
그의 이름이 튀어나오자 자신도 모르게 인상이 찡그려졌다.
하지만 곧 표정을 바꾸고 말 잘 듣는 아들이 되었다.
“네, 아버님”
“그 놈은 뭐 하느냐?”
“도서관에 틀어박혀 있다고 들었습니다.”
“그럼 그놈 주변 놈들도 잘 확인하고 있지?”
“……네, 잘 확인하고 있습니다.”
모처럼 좋은 분위기를 망치고 싶지 않아서 사소한 거짓말을 했다.
“방심하지 말거라. 이번 일에 실패하면 타격이 크다. 중부시 선거까지 연결되어 있다.”
“네, 아버님. 실망시키지 않겠습니다.”
“가 보거라.”
방을 나가는 천 회장은 아들 진혁을 흐뭇한 마음으로 바라보았다.
하지만 마음 한편에 떠나지 않는 불안함이 계속 신경 쓰였다.
자신의 사무실으로 돌아온 천진혁은 묘하게 기분이 나빴다.
분명 어르신과 아버지의 칭찬으로 흡족한 기분이 들어야 했다.
이 찝찝한 기분의 원인을 곰곰이 생각한 결과.
윤정훈
특히 자신을 은근히 못 미더워 하는 아버지의 표정이 생각났다.
윤정훈이 혹시 일을 망칠까 봐,
자신이 그를 제압하지 못할까 염려하는 모습은 분명 자신을 무시하는 것이다.
답답했다.
이번에 제대로 밟아 주리라 다짐했다.
더러운 기분을 풀고 싶어 인터폰을 눌렀다.
“준비해서 들어와”
***
“할머니, 들어가도 돼요?”
“그래, 들어오거라.”
“얼굴 보기가 왜 이리 힘드냐.”
“내일 재건축 시공사 선정 날이라 많이 바빴어요. 이제 기다리는 일만 남았어요.”
“지금이 제일 긴장된 순간이겠구나.”
“네, 이제 할 일은 없으니 생각이 많아지네요.”
“녀석, 참 바닷가에는 웬일로 갔더냐? 겨울 바다 보러 간 건 아닐 테고.”
행선지는 말해도 누구를 만났는지 이야기하지 않은 건가?
현수 아저씨가 생각보다 입이 무겁다고 생각했다.
“조영진 의원을 만났습니다.”
할머니의 눈이 커졌다.
“돈에 휘둘릴 사람이 아닐 텐데.”
“그쪽에서 먼저 보자고 했습니다. 그리고 시공사 선정 대가로 도서관을 지어달라 했습니다.”
“그래? 그렇게 하기로 했냐?”
“아니요. 청년을 위한 지식 창업센터를 짓기로 했습니다.”
“흐음, 아주 잘했어. 선물은 기대 이상으로 해야지. 조영진이 그걸 원한 이유가 있었을 텐데.”
“권율 조합장을 올 연말에 있을 시장 선거에 출마시키려고 합니다.”
“그걸 위해서…….”
현정옥은 생각에 잠겼다.
“좋은 거래일 것 같습니다. 우리는 시공사 선정을 얻고 그쪽은 권율 시장을 얻고.”
“그렇긴 하지만, 정치인은 언제 얼굴을 바꿀지 몰라 그래서 걱정이지.”
“네, 할머니 항상 조심하겠습니다.”
“정훈아, 사람을 믿지 말거라. 특히 정치인은 더욱더. 오직 상황만을 믿어야 한다. 상황이 너를 배신하는 거야. 그래서 항상 상황을 유리하게 가져가야 해.”
“네 새겨들을게요.”
“몇 수 앞을 내다본다니 다행이다.”
“아니요, 그냥…….”
“녀석 할미 앞에서까지 겸손 떨 거 없다…….”
현정옥이 인자한 웃음을 웃었다.
“할머니, 이제 3학년 올라가면 열심히 공부할 생각인데, 선물 하나 사 주시면 안 돼요?”
“갑자기 무슨 선물?”
“신문을 보니 좋은 회사가 하나 나왔던데요?”
현정옥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너, 이 할미 머릿속에 들어와 있는 것이냐?”
“네?”
“아니다. 혹시 만호가 일러 주던?”
정훈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허허허, 현수 말이 틀리지 않았네. 몇 수 앞을 내다본다. 그래, 곧 그것이 필요할 때지.”
그녀가 시계를 보았다.
4시 50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지금쯤 넣었겠구나.”
“네?”
“네 선물, 이 할미가 네 선물을 준비했거든. 그런데 너도 그것을 생각하고 있을 줄은 몰랐단다……. 허허허”
“할머니, 설마 그 선물이?”
온몸에 전율이 올랐다.
정훈은 오늘 처음으로 현정옥 여사의 실체를 파악한 것 같은 기분이었다.
지금까지 마음씨 좋은 할머니라고만 생각했다.
가끔은 버럭하고 드라마를 좋아하는.
그런데 그녀도 남몰래 전쟁을 준비하고 있었다.
앞으로의 전쟁에 초석이 될 회사.
“녀석, 이 할미가 더 놀랍구나. 왜 그것을 선물로 달라고 한 거야?”
“그게…… 할머니와 같은 이유입니다.”
정훈은 굳이 말하지 않아도 할머니와 같은 이유라고 직감했다.
할머니도 정훈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그 시각 BHC 증권 매각 주간사인 LCL 증권에 중년의 남자가 들어왔다.
손에는 두툼한 서류가 있었다.
창구로 가 말을 걸자 직원이 그를 보고 사무적인 태도로 말했다.
“번호표 뽑아 오세요.”
“흠, 그게 아니고 BHC 증권 입찰 제안서를 제출하러 왔습니다.”
그 말을 들은 직원의 눈동자가 일순 파르르 떨렸다.
그녀는 곧 고개를 뒤로 돌렸다.
뒤에 있던 부장이 벌떡 일어나 어딘가로 급히 전화를 걸기 시작했다.
의문의 이유로 갑자기 매물로 나온 BHC 증권 인수에 그녀가 도전장을 내밀었다.
***
2001년 1월 20일 조지 W. 부시가 제43대 미국 대통령으로 취임하며 8년의 빌 클린턴 행정부 시대가 막을 내렸다. 성추문에도 불구하고 재선에 성공해 비교적 안정적으로 국정을 이끌었던 클린턴. 하지만 8년 주기 징크스를 깨지 못한 민주당은 공화당의 부시에게 정권을 이양해야만 했다.
그날 대한민국 중부시 주공 아파트 2층 재건축 사무실에는 사람들이 끊임없이 들락거렸다.
추운 날씨에도 사람들은 자신들의 권리를 포기하지 않았다.
어떤 회사의 아파트를 선택하는가에 따라 자신의 재산 총액이 바뀐다.
누구도 포기할 수 없는 직접적인 권리였다.
정훈은 상가 앞 카페에서 권율 조합장을 만났다.
“잘 지냈습니까? 도련님.”
“네, 조합장님.”
“분위기가 좋습니다. 어차피 이 구역은 조영진 의원님이 꽉 잡고 있습니다. 그제 대의원들과 일일이 통화하셨고 어제도 다시 한번 단도리 쳤습니다.”
“감사합니다.”
“제가 고맙죠. 사람 앞일은 모른다고 그날 죽을 뻔한 저를 구해 주고…… 또, 크흠 이르긴 하지만 시장 후보까지…….”
그의 얼굴이 활짝 펴졌다.
건설회사에서 불명예 퇴진했지만 신뢰받는 조합장으로,
그리고 이제 곧 시장 후보가 될 사람.
드라마틱한 인생이다.
정훈은 불과 몇 달 사이에 권율이라는 사람의 크기가 달라졌음을 실감했다.
“고맙습니다. 제가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것도 다 조합장님 덕입니다.”
“어이구, 갑자기 왜 이러십니까? 부담스럽게…….”
“아닙니다. 오늘 해야 할 일이 있어서 먼저 일어나겠습니다.”
“아 참, 저녁에 회식에는 참석하시지요. 사람들에게 소개를 하는 게 어떻겠습니까?”
“글쎄요. 그건 생각을 좀 해야겠습니다.”
“궁금해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알겠습니다.”
“이미 다 결정된 선거입니다. 걱정 말고 들어가 쉬고 계십시오. 투표도 요식 행위입니다.”
정훈은 그럴 리 없다고 생각했지만 일말의 불안감을 가지고 있었다.
더 이상 벌어질 일은 없다.
투표가 끝나고 개표만 이루어지면 모든 게 완벽해진다.
‘재건축 시공사 중부건설 확정.’
“그럼 가 보겠습니다.”
몸을 돌려 밖으로 나갈 때였다.
정훈은 자신을 괴롭힌 불안의 이유를 확인할 수 있었다.
재건축 단지 상가 앞 골목에 십여 대의 봉고차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멈춰 섰다.
현금왕의 천재손자, 재벌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