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2화
아침부터 모욕을 당한 천상수 회장은 두 손에 골프채를 꽉 쥐고 있었다.
- 퍼억
손에 쥔 골프채로 바닥에 엎드려 있는 보안실장의 엉덩이를 그대로 내려쳤다.
“엉덩이 올려라. 허리 부러진다.”
- 퍼억
다시 한번 둔탁한 소리가 들렸다.
“죄송합니다. 회장님.”
“그 봉고차로 주차장 입구 막은 것도 윤정훈이 한 짓이야?”
“네.”
“아는 놈이 그걸 내가 올 때까지 그대로 둬?”
- 퍼억
“오늘 재떨이 없는 걸 다행으로 생각해.”
“감사합니다.”
“나가.”
고통스런 얼굴로 엉덩이를 부여잡은 보안실장이 허겁지겁 회장실을 빠져나갔다.
천상수 회장은 이마에 맺힌 땀을 닦은 다음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후우, 왜 왔을까?”
천상수 회장이 아들을 보며 물었다.
이럴 땐 바로 대답해야 했다.
그러지 않으면 불호령이 떨어졌다.
윤정훈의 의도를 파악하지 못한 천진혁은 긴장했다.
다급한 마음에 그냥 생각나는 대로 대답했다.
“언론 플레이 좋아하는 놈입니다. 그냥 주목받고 싶어서 온 것 같습니다.”
천상수의 표정이 구겨졌다.
“상대를 얕보고, 수박 겉핥기식으로 파악하니까, 저번처럼 당하지. 밑바닥에 깔린 걸 봐. 윤정훈 그놈 보통 놈이 아니야. 그 속에 구렁이 10마리는 깔린 것 같아.”
“아, 알겠습니다.”
천진혁은 아버지의 굳은 표정에 잔뜩 긴장해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분명 뭔가가 있어.”
“제가 조사해 보겠습니다.”
“제대로 조사해. 아비는 이 말이 계속 거슬린다. 해킹에 의한 옵션 계약. 녀석이 뭘 알고 하는 건 아니겠지?”
“짐작일 뿐입니다. 증거는 절대 없습니다.”
“그래, 네 실력이면 믿을 만하지. 그런데 도대체 뭘 믿고 그렇게 자신만만한 얼굴이었지?”
의문스러운 표정이었다.
“허풍입니다. 기자들 앞에서는 당당해도 회장님 앞에서는 무릎 꿇고 빌 겁니다. 제발 계약 철회해 달라고. 아마 곧 연락이 오지 않겠습니까?”
“그래? 현정옥의 손자가 내 앞에서 무릎 꿇는다. 생각만 해도 기쁘구나. 푸하하!”
‘휴우, 다행이다.’
천진혁은 아버지의 웃음을 보고 안도했다.
“그럼 전 일어나 보겠습니다. 가서 한 번 더 확인하겠습니다.”
“그래, 가 보거라.”
회장실을 나온 천진혁은 전산실로 들어갔다.
비밀번호를 누르자 숨겨져 있던 문이 열렸다.
방 안에 있던 10여 명의 사람들은 그대로 모니터를 주시하며 자신들의 일에 열중하고 있었다.
“특이사항은?”
“없습니다.”
“BHC 증권에 심은 악성코드들 그대로지?”
“네, 저쪽은 전혀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잘 숨어 있습니다”
“아, 그리고 지난번 태산전자 주가 조작 어떻게 됐어?”
“500% 수익으로 100억 정도 당겼습니다.”
“많이 먹진 못했네.”
“네, 곧 1000억짜리 시작하겠습니다.”
“그래. 계획 다 되면 빨리 올려요.”
“넵.”
자리에 앉은 천진혁은 골똘히 생각했다.
비록 아버지에겐 말하지 못했지만 자신도 의심이 들었다.
‘해킹에 의한 계약을 이행한다.’
자신도 아버지처럼 그 말이 걸렸다.
그래서 다시 한번 악성파일을 체크했다.
하지만 아무 문제가 없었다.
자신만만한 그의 모습이 다시 떠올랐다.
허세라기엔 너무 당당한 모습이었다.
‘도대체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거지?’
해결되지 않는 의문만이 머릿속을 뱅뱅 돌고 있었다.
***
“여기 있습니다. 어르신”
만호가 가져온 신문을 펼친 현정옥은 근심 가득한 얼굴이었다.
“정훈이는 왜 천상수한테 가서 도발을 한 거야?”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워낙 생각이 깊으셔서.”
“생각이 깊기는 한데······. 너무 급한 건 아닌지 걱정이야.”
“아마 계획이 있지 않겠습니까?”
“자네한테는 뭐 이야기한 거 없어?”
“전혀요. 계획이 있으면 절대 말씀해 주시지 않으세요. 보안이 중요하다면서······. 우리 도련님, 비밀이 많습니다.”
“비밀은 무슨 능력이 뛰어난 거지.”
“네, 어르신. 도련님 능력도 아주 뛰어납니다. 아주요.”
현정옥은 정훈이 하는 일이 너무 궁금했다.
하지만 물어봐도 가르쳐 주지 않아 답답하기 짝이 없었다.
몰래 뒤를 밟을까 생각했지만 괜히 훼방을 놓을 수도 있다는 생각에 그만두었다.
한편으론 걱정이 되었다.
너무 전면에 노출되어 그들의 타깃이 되는 게 아닌가 불안했다.
저들도 지난 재건축 사건 이후로 칼을 갈고 있을 게 분명하다.
이제 저번처럼 쉽게 이길 수 없는 싸움이 기다리고 있다고 생각했다.
자신의 손자가 혹여나 실패하더라도 좌절하지 않기를 바랐다.
“이봐, 자네가 잘 지켜봐. 실패해도 잘 다독여 주고.”
“알겠습니다. 하지만 웬만해선 실패하질 않으셔서······. 지난번 전교 1등 내기부터 재건축 수주전까지 승률이 백전백승입니다.”
만호는 불안해하는 현정옥의 심기를 달래려고 정훈을 잔뜩 칭찬했다.
“아참, 도련님이 말씀하신 투자 대회 말입니다.”
“그래. 그건 어떻게 됐어?”
“지금 5위라고 합니다.”
“뭐야? 5위······. 이 녀석이 쓸데없이 자리를 걸어서 일을 키웠어. 자네 가서 정훈이 좀 불러오게”
“아, 알겠습니다.”
***
“할머니 부르셨어요?”
“거기 좀 앉거라. 증권사 투자대회 성적은?”
“지금 5위예요.“
현정옥은 충격받은 표정이었다.
“1등에 사장직을 걸었잖으냐. 어떻게 할 것이냐?”
불안한 눈빛이었다.
“걱정하지 않아도 돼요. 제가 무조건 이깁니다.”
현정옥은 손자의 말을 믿을 수 없었다.
“1위인 최준기 상무가 98프로, 네가 15프로, 70%이상 차이가 나는데.”
“……생각보다 크네요. 전 한 방이 있습니다.”
정훈의 무덤덤하게 대답했지만 현정옥은 걱정이 가시지 않았다.
“한 방? 어떤 거? 아니면 할미가 좀 가르쳐 줄까?”
“괜찮아요.”
“쉽지 않은 상황인데…… 휴우.”
그녀의 긴 한숨이 정훈의 귀에 들어왔다.
“못 믿으시겠어요? 할머니, 저를 믿으세요.”
“그래, 그래 우리 손자를 믿어야지.”
현정옥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아, 할머니 그리고 저 돈이 좀 필요해요.”
“뭐? 얼마나?”
“많이요, 아주 많이.”
“괜찮다, 말해 봐.”
“100억 정도요.”
현정옥은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정훈을 보았다.
“갑자기 100억은 어디에 쓰려고?”
정훈은 100억이란 금액을 듣고도 눈도 깜짝하지 않는 할머니를 보며 과연 현금왕이라 생각했다.
“투자를 하려구요.”
“투자라……. 수익률은 얼마로 생각하냐?”
“6개월에 100%요.”
정훈은 1000%라고 하면 믿지 못할 게 뻔해서 수익률을 낮춰서 말했다.
“100%?, 쉽지 않을 텐데.”
현정옥이 웃었다.
“빌려주세요. 6개월만 쓰고 돌려 드릴게요.”
“담보는 있느냐.”
“물론이죠.”
현정옥의 순간 머릿속에 연기군에 있는 땅이 생각났다.
“그럼 이렇게 하자. 지금 하고 있는 투자대회 1등을 하거라. 그러면 100억을 선물로 주마. 대신 실패하면 연기군에 있는 땅을 팔겠다. 어때? 해볼 테냐?”
정훈은 손자를 믿지 못하는 할머니가 안타까웠다.
‘1등은 이미 따 놓은 건데…….’
할머니가 자신을 믿을 수 있도록 좀 더 노력해야 된다고 생각했다.
정훈은 할머니의 제안을 덥석 받으면 안 된다고 느꼈다.
자신에게 불리한 조건의 내기다.
순식간에 70% 이상의 격차를 뒤집기는 쉽지 않다.
정훈에게는 쉬웠지만 다른 사람들에겐 불가능한 격차다.
그래서 약간 고민하는 척이 필요했다.
“……고민이네요. 1등을 못 하면 제 20만 평을 뺏길 수도 있다고 생각하니······.”
잠깐을 고민한 정훈이 다시 입을 열었다.
“좋아요. 그럼 할머니 100억과 제 땅을 걸죠. 다음 주에 끝나는 투자대회에서 1등 하면 되죠? 너무 쉬운데요. 사장 자리도 지키고 돈도 100억 얻고. 흐흐흐.”
정훈은 자신 있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허허, 자신 있느냐?”
현정옥의 눈에는 여전히 근거 없는 자신감이었다.
“네, 그런데 할머니는 저를 좀 더 믿으셔야 합니다.”
“좋다. 1등을 하거라. 그럼 땅도 돈도 다 지킬 수 있겠지.”
여전히 믿지 못한 채 씁쓸한 표정을 한 현정옥을 보았다.
쓸데없이 자신을 걱정하는 할머니가 안쓰러웠다.
‘100억을 빌리려 했는데, 공짜로…….’
정훈은 너무 기뻤지만 내색할 수 없어서 아쉬웠다.
현정옥은 곧 쓰라린 실패를 맛볼 손자가 안쓰러웠다.
70%는 자신의 상식으로는 1주일 만에 뒤집을 수 없는 수익률 차이였다.
‘할미가 땅 팔아서 명동에 번듯한 건물 사 줄게.’
그들은 서로가 서로를 애틋하게 걱정하는 피로 이어진 혈육이었다.
***
“상무님, 내일 결과 나오는데……. 슬슬 준비해야죠. 이번엔 제대로…….”
직원들이 모두 그를 보고 있었다.
“크흠, 그래요. 그날 저번에 갔던 그 집 삼겹살 맛있던데 거기로 갑시다.”
자유로운 복장과 두발에 비해 씀씀이는 자유롭지 않은 최준기 상무.
직원들의 표정이 급격히 어두워졌다.
누가 봐도 1등이 예상되었다.
현재 수익률 89%로 1등이었다.
2등은 65%의 윤정훈 사장.
날고 기는 증권맨들을 따돌리고 2등을 차지한 그.
지난주 15%였던 수익률이 순식간에 65%까지 올라왔다.
직원들 모두 감탄했다.
특히 지난주 급등주를 매수하며 1등과의 차이를 24%로 줄였다.
놀라운 수익률이었다.
하지만 여전히 24%.
내일까지 뒤집긴 불가능하다.
“그래도 삼겹살은 좀…….”
“제가 소고기를 못 먹어서.”
“아, 알겠습니다.”
작년 회식에서 소고기 흡입하는 걸 분명히 봤는데…….
1등 상금 1억을 차지할 사람이 요 앞에 있는 삼겹살집이라니.
최고급 일식집은 아니라도 소고기 정도는 기대했었다.
급격하게 다운되는 분위기.
모두들 회식 생각은 접고 업무에 집중했다.
“크흠, 사무실 분위기가 좀 이상하네요.”
그를 본 모든 사람이 자리에서 일어서며 고개를 숙였다.
“나오셨습니까?”
최준기 상무가 정훈에게 다가와 정중하게 인사했다.
“네, 다들 앉으세요. 오랜만에 나온 김에 인사차 들렸습니다.”
정훈은 그대로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참 회식 장소는 잡으셨습니까?”
“네?”
최준기가 직원들의 눈치를 보았다.
“현재 승률이 85%, 1등 할 것 같은데요.”
“지금은 89%입니다.”
숫자에 예민한 최준기.
“또 올랐습니까? 좋겠습니다. 그럼 좋은 회식 장소 잡으셨어요? 요 앞에 일식집 괜찮던데 거기로 하시죠. 저도 좀 얻어먹게.”
“요 앞에 있는 삼겹살집으로 정했습니다. 사장님도 꼭 참석 하십시오.”
“1등 상금이 1억인데 안 됩니다. 최소한 1인당 30만 원은 쓰셔야죠. 정 아까우시면 1등 안 하시면 되죠.”
둘 사이를 지켜보던 직원들이 기대를 품기 시작했다.
사장 말인데 상무가 꼬리를 내려야지.
“그게……. 제가 생선을 못 먹어서.”
그 말을 들은 직원들이 다시 한번 고개를 저었다.
저번 회식에서 자연산 회를 흡입하던 최준기의 모습을 생각했다.
“어쩔 수 없죠. 대신 제가 1등 하면 일식 오마카세로 하죠.”
하지만 정훈의 말을 들은 사람들은 실망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긴 한숨이 여기저기 터져 나왔다.
하지만 아주 작은 희망을 품은 누군가가 외쳤다.
“사장님, 파이팅.”
정훈도 그 소리를 들었다.
“그렇죠, 파이팅. 아직 끝난 게 아닙니다.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다. 다들 아시죠?”
“아, 네.”
끝난 건, 끝난 거고 죽어 가는 걸 살리기는 하느님도 쉽지 않은 상황이었다.
따 상, 두 번의 상한가가 아니고선 뒤집기 어려웠다.
“따상이면 제가 이깁니다.”
“사장님, 꼭 이기세요.”
장지원 대리가 주먹으로 화이팅을 하며 영혼 없는 격려를 했다.
“네, 당연하죠. 내일 다 같이 오마카세 먹읍시다. 그럼 전 가 보겠습니다.”
정훈이 사라진 사무실.
“야, 아무리 그래도 삼겹살은 좀 심한데”
“저 인간 돈 잘 안 쓰잖아”
“그래도 1억인데“.
“혹시 아냐, 일식 오마카세 먹을지”
“말이 되는 소리를.”
“그러게, 사장님이 이기면 내 성을 간다.”
“공짜 삼겹살에 감사하자.”
사내 메신저에는 최준기에 대한 악담과 윤정훈 사장에 대한 일말의 희망이 뒤섞인 메시지가 오가고 있었다.
***
“홍영호 이사님,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자신의 방으로 찾아와 차기 사장으로 밀어 달라는 권영수 부사장.
“크흠, 아직 결과도 나지 않았는데…….”
홍 이사는 확답을 주지 않았다.
“지금 상황이면 최 상무가 1등입니다. 아까 확인했을 때 89%랑 65%였습니다. 1등을 못 하면 사장직을 내려놓는다고 했으니…….”
“흠, 65%라……. 그것만 해도 대단하긴 한데, 사장님은 왜 1등에 사장직을 거셨는지. 안해도 될 일을 벌여서…….”
홍 이사는 안타까운 표정이었다.
“자리는 다 주인이 있는 법입니다. 자기 게 아니라고 생각한 거죠. 하여튼 홍 이사님도 저 좀 도와주십시오. 홍 이사님이 저를 추천하시면 현 여사님도 뭐라 하지 않으실 겁니다.”
홍 이사는 김칫국부터 마시는 권영수 부사장을 어이없이 쳐다보았다.
그렇다고 마땅한 대안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다들 사장 자리를 꺼리는 상황이었다.
누가 이 배의 선장이 되고 싶을까?
홍 이사는 65%의 수익률을 다시 한번 생각했다.
지금 2위.
어린 나이에 날고 기는 증권사 직원들을 제치고 2위에 올랐다.
최상무야 워낙 괴물 같은 자라서 어쩔 수 없다고 해도 가히 천부적인 재능이었다.
안타까웠다.
어쩌면 발군의 실력과 강단을 보인 윤정훈이 BHC증권을 구할 수 있을지도 모른단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이제 와서 뒤집기는 불가능하다.
따 상을 두 번 맞아야만 뒤집을 수 있는 수치.
고개를 저었다.
“알겠습니다. 내일 결과 보고 이야기하시죠. 그럼 제가 좀 일이 밀려서.”
“아, 네. 그럼 잘 부탁해요. 홍 이사님.”
홍영호는 밀린 일을 처리하다가 다시 윤정훈 사장을 생각했다.
쓸데없이 헤븐증권에 가서 도발이나 한 그.
이해가 되지 않는 일들의 연속이었다.
가서 계약 해지를 사정해도 아쉬운 상황에 상대를 불쾌하게 했으니 영락없이 1000억을 지불해야 한다.
“휴우.”
한숨이 저절로 나왔다.
시계를 보니 2시 30분.
이제 얼마 안 있으면 장이 끝난다.
실시간 기사를 검색하다가 눈에 띄는 소식을 클릭했다.
제목만 봐도 급등할 게 보였다.
‘선애제약 개발 신약 미FDA 신약 승인.’
“신약 개발 성공에 FDA 허가까지……. 이런 건 따 상은 기본이겠네. 우리 사장님 이런 걸 좀 사 놓으시지”
최소 3~4배 이상 올라갈 수 있다.
몇 번의 상한가도 보장된 공시였다.
홍영호는 아쉬운 듯 입맛을 다셨다.
그런 다음 밀린 업무를 다시 처리하기 시작했다.
현금왕의 천재손자, 재벌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