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3화
“첫 번째는 업계 1위를 쟁취하는 것이고, 두 번째는…….”
정훈은 주변을 돌아본 다음 침을 삼켰다.
“두 번째는 대한중공업 인수입니다.”
“네?”
이사들이 일제히 정훈을 보았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계획이었다.
“놀랄 것 없습니다.”
자본 규모 1조도 되지 않는 증권사에서 대형 중공업을 인수한다고 생각할 수 없었다.
규모도 규모지만 금융회사는 제조업을 영위하는 회사를 가질 수 없다.
“금산법 때문에 제한됩니다, 사장님.”
“우리가 감당하기에 규모가 너무 큽니다.”
“합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아직 어수선합니다.”
이사들이 부정적인 의견을 피력했다.
권영수가 조용히 손을 들었다.
주변이 조용해지며 모두 그를 보았다.
“가능할 것 같습니다.”
부사장으로 복귀한 권영수가 긍정적인 입장을 내자 모두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지금까지 윤정훈과 가장 대척점에 있던 남자였다.
“이유는요?”
정훈이 되물었다.
“사실 가능할 것 같기보다는 가능해야 합니다. 무조건. 다들 아시다시피 한국통신을 먹은 통신회사가 지금 어떤 상황인지 모두 알 겁니다. 공기업 매각은 거져먹기나 다름없는 겁니다. 그래서 무조건 성공해야 합니다. 두 번째로 예전 BHC 증권이라면 몰라도 지금은 업계 2위 신화증권입니다. 조금은 무리가 있지만 해 볼 만합니다.
마지막으로 금산법은 우리가 재무적 투자자로 들어가면 문제없습니다.”
순간 사람들의 탄식이 튀어나왔다.
모두 자신을 옛날 증권회사의 임원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상상력의 힘을 스스로 제한하고 있었다.
하지만 권영수는 신화증권의 크기로 생각을 키웠다.
순간 정훈은 생각했다.
‘저 사람이 저 정도로 커졌나? 역시 제대로 된 선택이었어.’
자신이 믿음이라는 기회를 줬다.
권영수는 그것을 놓치지 않고 자신을 발전시켰다.
생각보다 더욱 크게 성장한 권영수를 보자 문득 천진혁이 떠올랐다.
세계적인 능력자.
사람 고쳐 써도 될 것 같은 희망을 보았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윤정훈 사장님의 의견입니다. 낯뜨겁긴 하지만, 사장님이 지금까지 걸어온 발자취를 보면 인수는 가능합니다. BHC 증권 투자대회 1등, 증권사 합병을 통한 업계 2위로의 성장.
중부건설의 급성장.
지금까지 이룩한 성과가 놀랍습니다. 그런 분이 생각 없이 말씀하신 건 분명 아닐 겁니다.”
주변이 조용해졌다.
권영수의 말을 들은 이사들의 표정에서 해 볼 만하다는 의지가 깃들기 시작했다.
생각해 보면 틀린 말은 하나도 없었다.
대역전극을 이룬 투자대회.
합병과 수익률 극대화를 통한 성장.
모두 1년 만에 올린 성과였다.
“크흠, 과찬이지만 틀린 말은 없군요.”
정훈이 주변을 보며 말을 짧게 첨언했다.
“제가 마지막으로 이유를 덧붙이자면, 신화증권을 위해서입니다. BHC, 동서, 헤븐 증권이 합병한 신화증권은 아직 물과 기름처럼 제각각입니다. 그래서 신화증권의 아이덴티티가 없습니다.
‘불가능을 성공으로 이끄는 신화.’
이것이 우리 신화증권의 모토입니다. 이번 인수전은 신화 맨으로 거듭날 기회입니다.”
말을 마친 정훈은 침을 삼켰다. 그러고는 주변을 천천히 둘러본 다음 입을 열었다.
“이번 인수전의 책임자는…….”
정훈이 고개를 둘러보자 모두 고개를 숙이며 자신의 눈을 피했다.
모두 확신하지 못했다.
단 한 사람만이 정훈을 보고 있었다.
“자신 있습니까?”
“네. 결과로 보여 드리겠습니다.”
모두가 불가능하다고 손을 뗐다.
하지만 그는 물러서지 않았다.
무엇이 그를 이렇게 바꾼 걸까?
“그럼 잘 부탁드립니다. 권영수 부사장님.”
사람들의 걱정과 우려가 있었지만, 정훈은 그가 최선을 다할 것을 의심하지 않았다.
정훈이 자리를 뜬 회의실.
홍영호가 권영수에게 커피 믹스를 한잔 대접했다.
“부사장님, 될 것 같습니까?”
“물론. 사장님은 안 되는 걸 하지 않으시더군. 9.11테러 다음 날 오전 어떻게 해야 할지 정확하게 판단하셨잖아.”
“하긴, 그날 언제 떨어지고 오를지 정확하게 판단하셨죠.”
홍영호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분이 결단을 내린 사업이야. 가능하니까 해야지, 우린 신화증권 아닌가?”
“……하하, 언제 이렇게 사장님 라인으로 갈아 탄 겁니까?”
“크흠, 갈아타다니 이 사람아, 믿음에 대한 보답일 뿐이야.”
하긴 홍영호가 더욱더 잘 알고 있었다.
윤정훈 사장님의 부탁으로 그가 돌아올 수 있도록 설득했다.
그때도 홍 이사는 윤정훈 사장님의 부탁을 헛된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 상황을 보면 이번에도 그가 옳았다.
한 단계 성장한 인간이 자신 앞에 담담히 앉아 있다.
잠깐 생각을 하던 권영수가 고개를 갸웃한 뒤 입을 열었다.
“그런데 이번 인수전 어쩌면 우린 그냥 들러리 일 아닐까요?”
“네?”
“주연은 따로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드는데요.”
“주연은 당연히 사장님이겠지. 우린 최선을 다해 서포트해야지. 안 그래?”
“맞습니다. 우리 사장님 아무래도 더 바빠지실 거 같네요.”
“그렇겠지.”
조연은 주연을 위해 움직인다. 그들은 그가 빛날 수 있도록 최고의 조연이 되어야겠다고 다짐했다.
***
남산 언덕 귀퉁이에는 일송그룹 송철호 회장의 자택이 있었다.
천 평에 육박하는 넓은 대지.
안을 볼 수 없도록 높이 쳐진 담장은 비밀스러운 그룹의 분위기와 잘 어울렸다.
지하주차장의 문이 열렸고 최고급 롤스로이스가 안으로 들어갔다.
차에서 내린 천상수 헤븐그룹 천상수 회장은 심호흡했다.
송 회장님께서 주신 마지막 기회.
대한중공업 인수에 대한 계획을 보고하는 자리였다.
“……이상입니다. 회장님”
간략하게 보고를 마친 천 회장은 앞을 보았다.
송철호 회장은 품에 낀 여인에 정신이 팔린 것 같았다.
품 안에 있던 여인과 희희낙락대던 그의 표정이 변했다.
“상수, 자신 있나?”
섬뜩할 정도로 차가운 목소리였다.
“예,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그래야지. 이제 걸 것도 없으니까 제대로 해야지.”
“네. 회장님.”
송철호가 긴장한 그를 보고 빙긋이 웃었다.
“고생했다. 잘 준비했네. 검찰 쪽 움직여서 사장이랑 이사들 비자금 털고, 그다음에 파업하는 놈들이랑 폭력 사태 일으켜서 조합원들 경찰로 싹 밀면 문제없겠네.”
“예, 회장님. 그렇게 인원 정리하면서 노조까지 없애면 최소한 1조는 더 받습니다.
원래 대한중공업 노조가 강성으로 유명하지 않습니까.
그리고 지금 대한중공업이 가진 노른자 땅을 우리 헤븐 건설이나 회장님의 일송건설에서 아파트를 지으면 그것도 수천억을 당겨올 수 있습니다.”
“허허, 상수가 이번에 이를 제대로 이를 갈았구먼. 고생했다.”
“한잔해라.”
“감사합니다.”
천상수는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리며 두 손으로 잔을 들었다.
일어선 송철호는 그의 잔에 이천만 원이 넘는 양주를 콸콸 부었다.
“마셔.”
단번에 비웠다.
“이번에 실패하면 네 아들처럼 야산의 거름이 되는 거다. 잘 알지?”
“예, 회장님. 실패는 없습니다.”
“그래, 그래.”
분위기 좋은 술자리가 시작되었다. 오랜만에 긴장이 풀렸다.
그때 문이 열리며 두 사람이 들어왔다.
“회장님, 늦었습니다.”
“회장님, 잘 지내셨습니까?”
박현철 차장검사와 조재욱 부장 판사였다.
“그래, 앉아서 마셔.”
술과 여인 덕분에 기분이 좋아진 송철호가 술을 권했다.
“하는 일은 잘 되고?”
“네, 어르신. 얼마 전에 일송 장학회 친구들을 만났는데 이번 기수가 재주가 많은 것 같습니다.”
“그래? 재주가 많으면 잘 써먹어야지”
“네. 뼛속까지 잘 써먹도록 하겠습니다.”
“크하하하, 그래 잘 발라먹어. 그리고 그 친구들도 로열패밀리가 될 수 있다는 희망을 꼭 심어 줘. 냄새를 자주 맡으며 기대를 해야 일할 맛도 나지.”
“알겠습니다. 그건 또 제 전문 아닙니까? 하하하.”
몇 명의 여인이 더 들어오고 폭탄주가 오갔다.
의식은 희미했지만, 술자리의 밀도는 더욱더 짙어졌다.
여인의 품속에서 허우적대던 송철호 회장이 질문을 던졌다.
“이봐, 그 자식은 요새 뭐 해?”
“누구 말씀입니까?”
“그 싹수없는 그놈, 정훈이 그 자식.”
어르신이 정훈을 찾자 박현철의 다소 놀랬다.
윤정훈이 대신 정훈이란 이름을 불렀다는 것은 그만큼 관심이 있다는 뜻이다.
“네, 이번에 신화증권 출범한 다음으로는 조용히 있습니다.”
박현철이 대답했다.
“그래? 조용히 있을 놈이 아닌데.”
“제 그릇에 넘치는 큰 걸 가졌습니다. 소화하려면 시간이 좀 걸리지 않겠습니까? 어르신.”
조재욱 대법관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뭐? 그릇보다 넘쳐? 자네 아직 본 적이 없어서 그래. 그놈 그릇은 모르겠지만 욕심은 얼마나 많아 보이든지……. 헤븐 그룹을 통째로 집어삼키고 싶어 하는 것 같던데, 하하하.”
다른 사람들은 모두 따라 웃었지만 천상수는 웃을 수 없었다.
윤정훈 때문에 잃은 헤븐증권, 그리고 자기 아들이 떠올랐다.
“가만히 있을 놈이 아니야, 절대로. 상수야 잘 감시해. 진혁이 간 길에 윤정훈이도 따라 보내야지.”
“네, 회장님…….”
천상수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진혁이는 편안히 갔습니까?”
“그럼. 편안히 보냈지. 내가 그래도 한때 이뻐했던 놈 아닌가. 이름 없는 산속에 편안히 잘 쉬고 있으니 신경 쓰지 말아라.”
천상수가 입술을 깨물었다.
송철호는 그런 그를 보고 속으로 미소 지었다.
“진혁이 복수를 해야지. 윤정훈을 제물로 원하는 소리가 안 들리나?”
“들립니다. 윤정훈을 진혁이 제사상 앞에 놓겠습니다. 어르신.”
“그래 그런 복수심으로 윤정훈을 갈가리 찢어. 알겠지?”
“네”
천상수의 눈은 복수로 타올랐고 송철호는 그를 보며 재미난 구경이 난 것처럼 기뻐했다.
“그런데 그 녀석 설마 대한중공업을 노리는 건 아니겠지?”
“회장님, 그런 하찮은 놈이 손댈만한 덩치가 아닙니다”
박현철의 말을 들은 송철호가 혀를 찼다.
“쯧쯧, 그러니 당하지. 하찮은 놈이라……. 그 하찮은 놈이 헤븐증권을 먹고 동서증권까지 가져갔어.”
“크흠, 그건 그냥 운이 좋았던…….”
“퍼억”
술잔이 벽에 부딪히며 산산이 조각났다.
“운도 실력이야. 상대를 하찮게 평가하고 방심하다 일을 그르친 게 한두 번이야?”
“죄송합니다. 철저하게 대비하겠습니다. 너무 괘념치 마십시오”
송철호 회장에게 머리를 조아리며 말했다.
주변을 쏘아보며 인상을 쓴 송철호는 옆에 있던 여인을 취했다.
그의 얼굴이 조금씩 누그러지기 시작했다.
“잘해야 해. 그래야 너희들이 살아. 하하하 잘해, 잘.”
웃는 목소리로 다시 흥을 돋우었다.
“예. 회장님.”
무릎을 꿇고 있던 남자들의 우렁찬 목소리가 크게 울려 퍼졌다.
***
중부시장 보궐선거를 위해 비밀리에 준비한 사무실.
낡고 오래된 상가의 2층에 마련된 사무실을 방문한 조영진.
그는 지금껏 느껴보지 못한 분위기를 느꼈다.
전화벨이 시끄럽게 울렸고 사람들은 정신없어 보였다.
지난번 방문했을 때의 조용했던 적막함과는 다른 활기가 넘쳐흘렀다.
과장하면 오일장 같은 생기가 넘치고 있었다.
“나오셨습니까? 의원님.”
권율 조합장이 조영진을 맞이했다.
환한 얼굴이었다.
“분위기가 갑자기 너무 바뀐 거 아니야?”
“네, 어르신. 갑자기 여기저기서 전화가 옵니다. 참석해 달라, 강연해 달라. 그래서 지금 정신이 없습니다.”
“허허, 잘됐구먼. 곧 입후보할 사람인데 여기저기 불려 다니며 얼굴도장 찍어야지.”
“네. 어르신.”
권율이 주변의 눈치를 잠시 살핀 다음 조영진을 사무실 안쪽에 있는 방으로 데려갔다.
“어르신이 윤정훈 사장을 만난 뒤부터 불러 주는 데가 많아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가서 인사를 하면 약속이나 한 듯 다들 후원을 약속하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부족했던 돈과 조직이 제법 갖춰지고 있습니다.”
“다행이구먼.”
“혹시……. 윤정훈 사장에게 대가를 약속하신 게 있습니까? 그런 게 있다면 미리 좀 조율하는 게…….”
“어허, 이 사람. 나를 뭐로 보고. 그런 대가는 일절 없어.”
버럭버럭하는 조영진을 보며 권율은 안도했다.
자신이 아는 의원님을 그런 약속을 할 사람이 아니었다.
그런데 조영진은 불편했다.
대한중공업 조합장을 소개해 달라는 게 이 거래의 핵심이었다.
청탁도 아니다.
그냥 딱 한 번 만나게 해 달라고 했다.
그 대가로 너무 큰 지원을 받고 있다.
좋아해야 할지, 코에 꿰이는 건 아닌지 갈피를 못 잡고 있을 때였다.
“분위기가 아주 좋아 보입니다. 어르신.”
“아니, 자네가 여기 어쩐 일인가?”
“지나가다 들렀습니다. 여기 계실 줄은 몰랐습니다.”
“나도 마침 근처에 왔다가 들렀네. 권율 조합장 입이 귀에 걸렸어.”
권율 조합장이 정훈에게 인사를 했다.
“잘 지내셨습니까? 도련님. 참 축하드립니다. 전국 수석 인터뷰 재밌게 잘 봤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런데 그 빚쟁이는 뭡니까? 사람이 아니라고 하셨는데 다들 엄청 궁금해하던데요.”
“차차 밝혀지겠죠.”
정훈은 권율을 향해 웃음으로 대답했다.
“자네 덕분인 것 같은데.”
조영진이 묘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사무실이 잘 돌아가 좋지만, 혹시나 모를 청탁에 불안해하는 것 같았다.
정훈은 그를 안심시켜야 했다.
“선물입니다, 어르신. 선물은 대가가 없습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허허, 말을 참 재미있게 해 이 친구는. 내 속을 다 들여다보고 있는 것 같구먼.”
“과찬입니다.”
“참, 자네 오늘 시간 되나?”
“갑자기 왜?”
“나도 선물하나 하고 싶어서 그러지!”
“그럼 시간을 내야 하겠군요”
“그래 시간 좀 내게. 오늘 저녁에 내 오랜 친구를 만나기로 했어. 대한중공업에 다니는데 자네에게 소개해 주고 싶구먼.”
조영진은 정훈을 보고 웃었다.
그 모습을 본 정훈.
‘됐다. 이제 다음 단계로 진행할 수 있어.’.
속으로 안도했다.
드디어 조영진의 오랜 친구를 볼 수 있게 되었다.
정훈은 준비해야 할 게 많았다.
처음 만날 그를 위해 선물을 준비해야 했다.
현금왕의 천재손자, 재벌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