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6화
“그건 확실합니까?”
“뭘 말입니까?”
“비자금을 보장해 준다는 말요.”
“그럼요. 저는 돈에는 관심 없습니다.”
정훈은 돈에 무관심한 표정을 지었다.
“그런데 우린 돈이 없습니다. 어떻게 로비를 합니까?”
“여러분들 계좌로 10억이 들어갔을 겁니다. 그걸로 밥 먹고 선물 좀 사 주고 하세요.”
“네?”
황당한 표정이었다.
“그분들께 전해 주세요. 인수전이 성공적으로 진행되면 10억보다 더 큰 걸 기대하셔도 된다고요.”
“정말입니까?”
“네.”
그들이 가진 인맥. 하찮아 보일 수 있지만 어쨌든 이 자들을 대한중공업에 꽂은 사람들이다.
매각 결정에 핵심적인 역할을 할 게 분명했다.
서류를 심사하고 평가하는 데 있어서 숫자를 결정하는 사람들이다.
물론 위에서 찍어 눌러 헤븐그룹에 유리하게 조작할 수 있다.
하지만 무턱대고 찍어누를 수만은 없다.
물리법칙에 작용과 반작용이 있듯이,
어떤 조직이라도 견제와 균형이 작동하게 마련이다.
정훈은 거기에 희망을 걸었다.
“그러면 잘 부탁드립니다.”
“예, 알겠습니다.”
최 사장이 정훈을 보고 간절한 눈빛을 보냈다.
“저희와의 약속을 꼭 지켜주십시오. 부탁드립니다.”
정훈은 대답하지 않고 방을 빠져나왔다.
전화를 걸었다.
“할리퀸, 나왔어요. 잘 감시해요.”
“네, 사장님.”
“수고했어요. 덕분에 일이 잘 풀릴 것 같네요.”
“감사해요. 갑자기 왜 칭찬을 하시고 그래요? 어색하게.”
“그냥요. 기분이 좋으면 다 좋잖아요. 수고하세요.”
전화를 끊은 정훈은 생각했다.
‘사이코’가 원하고 ‘할리퀸’이 인정한다면 ‘사이코’는 우리와 함께할 수 있다.
당분간 칭찬으로 그녀의 기분을 즐겁게 해야겠다고 다짐했다.
‘잘생기면 상관없죠.’
그녀의 말을 떠올리니 천진혁의 꽤 잘생긴 얼굴이 생각났다.
며칠 뒤 경영진의 로비와 언론 플레이로 인해서 대한중공업 인수전은 중요한 변화를 맞이한다.
경쟁 입찰에서 제한 경쟁 입찰로 변경되며 적격성 심사가 강화되었다.
원래 아무나 참여할 수 있었는데 이번에는 중공업을 영위하는 회사만 참여할 수 있도록 변경되었다.
헤븐중공업을 가진 헤븐그룹은 안도했다.
다음으로 20대 대기업 집단은 특혜 문제로 입찰에 원천적으로 배제되었다.
결국 20대 안에 있다가 헤븐증권의 분리로 20대 밖으로 밀려난 헤븐그룹.
모든 것이 헤븐그룹에게 유리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
고등학교 3년에 마침표를 찍는 졸업식.
보육원 아이들 모두가 와서 정훈과 은수를 축하했다.
박다혜도 다가와 한 다발 꽃을 선물했다.
현정옥은 처음 그녀를 만났을 때 보였던 호감을 보이지 않았다.
탐탁지 않은 얼굴이었다.
졸업식의 점심은 중국집 짜장면으로 결정했다.
모두 중국집으로 가 식사했다.
정훈은 끝까지 보이지 않았던 철중을 기다렸다.
은수도 박다혜도 이유를 몰랐다.
정훈은 서울에 가면 오늘 오지 않은 철중을 만나야겠다고 다짐했다.
***
시간은 빠르게 흘렀다.
캠퍼스 곳곳에 분홍색 벚꽃이 만개했다.
벚꽃이 떨어지고 있었다.
그녀는 흩날리며 떨어지는 꽃잎에 정신이 팔려 있었다.
“거기, 학생. 수업 안 들을 거면 나가.”
“죄송합니다.”
창밖을 넋 놓고 보던 박다혜가 사과했다.
그녀 옆에 있던 정훈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2학년인 그녀가 1학년 교양 수업에 들어온 이유를 몰랐다.
말로는 재수강 수업이라고 했는데…….
수업이 끝나고 나갈 때 할머니한테 전화가 왔다.
“정훈아, 언제 오니?”
“이제 출발할게요. 오늘 발표 나죠?”
“그래, 다들 모여 있으니 그리로 오렴.”
“네, 할머니.”
전화를 끝내자 뒤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디 가?”
박다혜가 큰 눈을 깜빡이며 정훈을 올려다봤다.
‘흠……, 예쁘네.’
“오늘 중요한 일이 있어서요. 중부시에 가 봐야 해요.”
“뭐? 칫, 학교도 며칠에 한 번씩 나오면서, 얼굴 보기 어렵네. 잘생겼다고 너무 아끼는 거 아니야?”
투정 부리는 그녀가 귀여웠다.
“아니야. 그런 거.”
“어, 그건 반말인데…….”
하지만 싫지 않은 표정이었다.
그녀의 손을 꽉 쥔 정훈.
“언제까지 선배라고 할 수 없잖아. 나 갔다 올게. 박다혜.”
그녀의 얼굴이 붉어졌다.
“잘 다녀와.”
손을 흔들며 사라지는 정훈을 보며 박다혜도 손을 힘차게 흔들었다.
자신의 이름을 불러 준 그가 좋았다.
정훈은 학교 앞에서 대기하고 있던 차를 타고 중부시로 향했다.
곽현수가 천진혁의 근황을 알렸다.
난동은 줄어들었지만 무기력한 모습으로 먼 산만 바라본다고 했다.
아버지에게 버림받은 천진혁.
무기력한 그의 기분을 이해할 수 있었다.
나 또한 버림받은 채 성장했기 때문이다.
정훈은 그에게 깊은 연민이 느껴졌다.
“천진혁을 한번 만나야겠어요. 언제가 좋을까요?”
곽현수는 내키지 않는 표정이었다.
“안 만나는 게 좋습니다. 정신이 불안정해 무슨 짓을 할지 모릅니다.”
“괜찮습니다. 그의 실력으로는 저를 어쩌지 못합니다.”
“알겠습니다. 자리를 준비하겠습니다.”
“네, 그렇게 해 주세요. 요즘도 은수한테 계속 무술 가르치나요?”
“네. 무슨 문제라도?”
“아니요. 그냥요. 혹시나 은수가 잘못된 길로 가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요.”
“마음이 여려서 그러지 못할 겁니다.”
“네, 은수가 주먹도 마음도 많이 여립니다.”
지난 인생에서 은수는 여린 마음에도 불구하고 조폭이 되었다.
승승장구했었다가 순식간에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강철중 검사도 모르는 눈치였다.
그런데 이제는 내 곁에 있다.
은수의 운명이 바뀐 것이다.
은수가 스스로의 삶을 살게 되어 다행이라 생각했다.
거친 공장의 소음이 울렸다.
귀를 막은 정훈은 공장 안에 있는 사무실로 들어갔다.
“도련님, 안녕하세요. 저번에 뵙고 처음이네요.”
“네, 잘 지내셨죠?”
“그럼요. 어때요? 대학 생활은 재미있으세요?”
“네, 재미있습니다.”
김상식 사장이 정훈에게 인사했다.
정훈의 전화벨이 울렸다.
“여보세요.”
“손형수입니다.”
“네, 어르신.”
“제가 지인을 통해 알아봤는데, 유감이지만 인수전에 실패하셨네요. 저도 아쉽습니다. 다음에 창원에 오시면 연락 주세요. 제가 소주 한잔 사겠습니다.”
“네? 알겠습니다.”
전화를 끊자마자 또 전화벨이 울렸다.
이번엔 조영진 의원이었다.
“흠흠, 혹시 소식 들었나? 이번 인수전에 레전드 컴퍼니가 탈락했다 들었네.”
“아, 네”
“아쉽지만 어쩔 수 없게 됐어. 오늘 벚꽃이 참 예쁘더군 그걸로 위안이나 삼게.”
“알겠습니다. 어르신. 곧 연락드리겠습니다.”
전화를 끊은 정훈은 생각했다.
조영진 의원이 로맨티스트였나? 벚꽃 보면서 위안으로 삼으라니…….
그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말이었다.
“정훈아, 사람들한테 이야기 안 했냐?”
“아, 신학기라 바빠서 깜빡했네요.”
“이런 무심한 놈. 사람들이 걱정 많이 할 텐데.”
“뭐, 나름의 반전이라고 해 두죠.”
“축하합니다. 도련님.”
“축하는 제가 해야죠. 축하합니다, 김상식 사장님. 우리 미래중공업이 대한중공업을 인수했습니다.”
정훈은 김상식 사장과 두 손을 잡으며 악수했다.
그 모습을 본 현정옥도 감개무량한 반응이었다.
7조짜리 대기업을 낙찰받을 거라곤 생각도 하지 못했다.
더욱이 헤븐그룹과 일송그룹 송철호 회장의 방해를 이겨 내고 얻어 낸 기업이다.
“다들 앉아서 잠깐 점검해 보죠”
“제가 정리를 하겠습니다. 미래중공업 김상식 사장님 지분, 현정옥 여사님의 미래중공업 지분, 그리고 윤정훈 사장님의 개인 자금과 재무적 투자자로 참여한 신화증권 맞습니까?”
“네.”
자리에 참석한 신화증권 권영수 부사장이 대답했다.
“그럼 이제 대한중공업은 미래중공업과 합병합니다. 새 사명은 어떻게 됩니까? 도련님.”
“신화 중공업입니다.”
“알겠습니다. 지분은 현정옥 여사님 20%, 윤정훈 도련님 40%, 김상식 사장님 20%, 마지막으로 신화증권 20%. 이렇게 지분을 정리하겠습니다.”
“알겠습니다.”
김상식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정훈은 김상식을 보며 말했다.
“큰 결단을 내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게 어떻게 보면 제가 회사를 뺏는 것 같아 기분이 좀 그렇습니다.”
“아닙니다. 절대로, 아닙니다. 제가 감사해야죠. 중부시에서 사업하는 사람들치고 중부건설의 신화를 모르는 사람이 없습니다. 매출 100억이 넘는 회사가 1년 만에 수천억의 매출을 올리고 있습니다. 지금 중부시에서 사업하는 사람들 전부 다 도련님과 줄을 대고 싶어서 난리입니다.”
“과찬입니다. 다들 주변에서 도와준 덕분입니다.”
정훈은 겸손한 자세를 취했다.
“오늘은 겸손하지 않아도 된다. 정훈아. 잘했다.”
현정옥이 정훈을 꼭 안았다.
“할머니가 큰 도움이 됐어요.”
“도움은 무슨 구경만 했지.”
모두 자리에 앉아 티브이를 보았다.
“대한중공업 인수전의 승자는 미래중공업이었습니다……. 새우가 고래를 삼켰다는 평입니다.”
앵커의 멘트가 정훈의 귀에 맴돌았다.
‘새우가 고래를 삼켰다.’
천지회라는 고래를 삼켜야겠다고 다시 한번 다짐했다.
정훈은 주변을 한번 보았다.
모두 들뜬 얼굴이었다.
정훈이 결정해야 할 것이 있었다.
“신화중공업 초대 사장을 부탁드립니다.”
정훈이 김상식을 보며 말했다.
정훈의 말을 들은 그의 얼굴에 자신감이 가득했다.
고개를 돌 권영수 부사장을 보았다.
“그리고 권 부사장님도 이제 승진하셔야죠.”
“네?”
갑작스러운 승진에 살짝 놀란 권영수, 하지만 직장인이 승진을 마다할 리 없었다.
벌떡 일어나 인사했다.
“감사합니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마치고 서울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할머니에게 잠시 성북동에 머물자고 말했다.
왠지 모를 불안함 느낌 때문이었다.
저들의 위협에 대비해 안전한 곳에 머무를 필요가 있었다.
할머니도 동의하셨다.
조용한 차 안에서 현정옥이 정훈에게 말했다.
“김상식 괜찮겠냐?”
“네, 할머니 평도 나쁘지 않고 성실한 사람이잖아요.”
“그건 그렇지.”
“잘할 겁니다.”
“참, 오늘 신화 그룹 출범식을 하지 그랬니?”
역시 할머니였다. 나의 계획을 이미 알고 있었다.
“오늘은 중부건설 사장님도 없어서요. 다 같이 모이면 그때 이야기하죠. 그래도 다들 알고는 있을 것 같아요.”
“그래, 벌써 그룹을 만들다니, 정말 대견하다 정훈아.”
“아니에요. 참 할머니 저 할머니 의견을 묻고 싶은 게 하나 있어요.”
“뭐?”
“대한중공업 임원이 200억의 비자금을 가지고 있었어요. 어떻게 할까요?”
할머니가 정훈의 표정을 잠깐 살핀 다음 입을 열었다.
“눈먼 돈이구나.”
“네.”
“그건 먼저 먹는 놈이 임자지”
정훈은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할머니도 자신과 생각이 같았다.
흥청망청 쓸 바에 좋은데 쓰는 게 낫다.
차창을 보던 정훈은 자신의 손바닥을 물끄러미 보았다.
자신의 수중에 있는 것들을 생각했다.
토지, 건물, 주식 등등.
그리고 세 개의 회사.
중부건설, 신화증권, 신화중공업.
다 합쳐도 아직 10조 미만이지만 그룹 체제를 갖추었다.
그 생각에 정훈의 얼굴이 조금 상기되었다.
꿈도 꾸지 못했던 것들이 현실이 되고 있어 즐거웠다.
창밖에는 벚꽃이 아름답게 지고 있었다.
헤븐중공업 사람들이 저 벚꽃을 보며 아쉬움을 달래길 기도했다.
***
레전드 컴퍼니로 가는 차 안에서 정훈은 유리가 준 장부를 보았다.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이름과 숫자로 되어 있었다.
아니 문자와 숫자라고 해야 하나?
수영-3720489592323443098989
훈기-2939423042938982039323
.
.
.
암호가 분명했다.
이걸 풀어 줄 만한 사람이 필요했다.
이런 암호를 쓰는 사람은 누굴까 궁금해진 정훈.
“아저씨, 요즘도 암호 쓰는 사람들 있죠?”
“네. 있습니다. 간첩이나 스파이들이죠. 아니면 특수부대 출신들도 사용합니다.”
“특수부대…….”
정훈은 그가 왠지 특수부대 출신일 것 같았다.
아직 자신의 과거에 대해서 하나도 말하지 않았지만, 그는 걸음걸이에서부터 잘 훈련된 군인의 기운이 느껴졌다.
곽현수에게 장부를 보여 줬다.
“이거 한번 봐주세요. 혹시 해독할 만한 사람이 있을까요?”
장부를 받아든 곽현수의 동공이 살짝 흔들렸다.
“도착했습니다. 도련님. 이건 제가 한번 보겠습니다.”
“중요한 것 같으니 잘 챙기세요.”
“네 도련님.”
정훈은 차에서 내려 레전드 컴퍼니 사무실로 올라갔다.
곽현수는 그런 정훈을 물끄러미 보았다.
그리고 장부를 펴 읽기 시작했다.
‘누가 이걸 사용하는 거지? 분명 우리 소속인데.’
곽현수는 의문스러운 표정을 한 채 장부를 해석하기 시작했다.
***
“사장님 축하드려요.”
할리퀸, 차영미가 신이 나 있었다.
“고마워요.”
정훈은 이병석을 보았다.
“덕분에 잘 해결됐습니다. 협박 전화를 생각보다 잘하셨나 봐요. 대한중공업 임원들이 열심히 한 걸 보니까요.”
“우리 병석 씨가 원래 성우가 꿈이어서 목소리 연기는 엄청나게 잘해요. 저한테 거짓말하다 몇 번 걸려 얻어터진 다음에는 훨씬 더 많이 늘었어요”
‘칭찬인가?’
판단할 수 없는 멘트였다.
대한중공업 3인방이 신라호텔에 모여 있을 때 받은 전화는 사실 이병석의 전화였다.
차영미가 곳곳을 해킹해 그들의 신용카드, 법인카드, 통화 내역을 통해 알아낸 사실들이다.
최사장이 친구 부인과 붙어먹은 건 모두 충격이었다.
헤븐그룹에서 굳이 전화하며 협박할 필요가 없었다.
문제를 만드는 게 그들의 목표였다.
있지도 않은 책임자를 처벌할 생각은 전혀 없었다.
“하여튼 고마워요. 할리퀸은 대한중공업 사장이 가지고 있던 비자금 170억 여기 두 군데로 이체해 줘요.”
하나는 레전드 컴퍼니 계좌고 다른 하나는 할머니의 계좌였다.
할머니와 70억의 사용처에 대해 논의를 해야 했다.
볼일을 마친 정훈은 주차장으로 내려갔다.
곽현수가 열심히 장부를 보고 있었다.
역시 그가 알고 있는 것 같았다.
“아는 암호군요. 이해했죠?”
곽현수가 정훈에게 물었다.
“이거 누가 적었는지 알 수 있습니까?”
“희망보육원 원장이던 분이 쓰셨어요. 김현철이라고. 아는 분인가요?”
고개를 갸웃거린 그.
“아니요……. 이건 특수부대에서 쓰는 암호입니다. 지금 해독 중인데, 아무래도 상납 자금을 정리한 것 같습니다.”
“네? 상납 자금요?”
역시 생각대로였다.
일반적인 보육원이 아니었다.
이제야 모든 게 이해되었다.
할머니가 나타나자마자 모습을 감추고 대리인을 내세워 계약한 이유가 바로 이거였다.
냄새가 나기 시작했다.
‘상납이라…….’
정훈은 머리를 굴리기 시작했다.
언제나 처음엔 돈의 흐름을 좇아야 한다.
현금왕의 천재손자, 재벌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