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9화
“주문……하시죠.”
“네, 된장찌개 2인분 주세요.”
식당 주인이 돌아간 뒤에 권율이 물었다.
“오늘 퇴원한다고 했는데 표정이 별로인데요. 눈물이 글썽이는 게 기분이 안 좋아 보입니다.”
“글쎄요. 기분이 안 좋은 건 아닌 거 같습니다. 다른 이유가 있겠죠.”
얼마 뒤 평소보다 많은 반찬과 함께 구수한 된장찌개가 나왔다.
그리고 평소에는 없던 계란 프라이가 두 개나 나왔다.
“어, 이건 오늘 말도 안 했는데 나왔네요.”
“계란 좋아하세요?”
“네, 제가 여기 오면 자주 부탁했거든요. 좀 진상 같긴 한데 워낙 좋아해서요. 물론 돈은 따로 계산했습니다. 흠, 계란 후라이가 있으면 꼭 모친께서 해 주신 집밥 같은 느낌이 들어서요.”
“그렇군요.”
정훈은 고개를 끄덕이며 된장찌개를 한 숟가락 먹었다.
집밥의 포근함이 느껴지는 맛이었다.
권율의 선행을 알게 된 식당 주인은 어떻게 감사해야 할지 몸 둘 바를 몰랐다.
권율은 그런 사실을 모른 채 맛있게 식사했다.
정훈은 물끄러미 그를 보았다.
우직한 듯 단순한 사내.
정훈은 자신의 선택이 틀리지 않았음을 다시 한번 확인했다.
***
정훈은 어제저녁에 천진혁의 전화를 받았다. 만나고 싶다는 뜻을 비친 그를 위해 요양원으로 갔다.
오늘은 요양원 정원이 아니라 병실에 있었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컴퓨터에 정신이 팔린 그가 있었다.
정훈이 들어오는 것도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흠흠, 좋아 보입니다.”
정훈을 본 천진혁은 놀란 표정이었다.
“기척도 없어서 깜짝 놀랐습니다.”
“기척이 없었던 게 아니라 너무 열중하고 있던 거 아닙니까?”
“흠흠.”
부끄러운지 천진혁은 대꾸하지 않았다.
지난번과는 많이 달라진 듯했다.
무기력한 모습은 사라지고 활기가 넘치고 있었다.
“재미있습니까?”
“뭐가요?”
“지금 하는 일요.”
“네, 해킹하는 재미는 짜릿하죠. 할리퀸이랑 하는 대결도 스릴 넘치죠.”
정훈은 이제 더 시간을 끌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는 이제 이곳에 있을 필요가 없을 만큼 회복되었다.
“그럼 저를 좀 도와주시겠습니까?”
“제가 뭘 해야 합니까?”
“할리퀸과 함께 일송그룹을 쳐야 합니다.”
정훈의 말에 천진혁은 고개를 끄덕였다.
“일송그룹 회장님은 인자한 분이었습니다. 그의 본 모습을 안 지는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 소름 끼치도록 두려웠습니다. 후.”
그의 얼굴에 다시 공포가 번지고 있었다.
“함께하시죠. 그들을 괴멸시키지 않는 한 당신은 안전할 수 없습니다. 당신의 안전을 위해서 함께 하고 싶습니다. 그 천부적인 능력도 필요하고요.”
“더러운 손입니다. 그런데 함께 할 수 있습니까?”
천진혁이 자신의 두 손을 보며 말했다.
“더러우니 씻어야죠. 같이 하시죠.”
대답하지 않았다.
무거운 침묵이 둘 사이에 흘렀다.
“기회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힘 닫는 데까지 돕겠습니다. 어차피 당신이 살려 낸 목숨입니다. 당신에게 한번 걸어 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천진혁은 일어나 가방을 챙기기 시작했다. 가져갈 물건은 거의 없었다.
정훈은 가방에 있던 크리스털 재떨이를 꺼냈다.
그것은 본 천진혁의 표정이 급격히 굳어졌다.
“아버님 별명이 재떨이더군요.”
“네, 예전에 폭력 조직을 운영할 때 별명입니다.”
천진혁이 대답했다.
“유품이라면 유품이라서 가져왔습니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한동안 그것을 바라보던 천진혁은
떨리는 손으로 그것을 집어 들었다.
“항상 무서웠습니다. 이것이 내 몸을 부술 것 같은 공포에 짓눌려 있었습니다.”
“부숴 버리세요. 그럼 공포에서 해방될 수 있습니다.”
그 말을 들은 천진혁은 재떨이를 쥔 손을 높이 들어 올렸다.
그러고는 바닥에 강하게 내리쳤다.
퍼억
강한 파열음과 함께 산산이 조각났다.
천진혁은 부서진 재떨이를 보면서 말 못 할 만큼 큰 해방감을 느꼈다.
처음으로 마음 한구석을 지배하고 있는 공포에서 벗어난 순간이었다.
“고맙습니다. 이제 진짜 아버지로부터 자유로워졌습니다.”
“다행이군요.”
천진혁이 앞장섰다.
정훈은 그의 뒤를 보면서 생각했다.
할리퀸과 사이코 그리고 이병석, 최강의 조합이 만들어졌다.
***
정훈은 천진혁을 태우고 중부시에 있는 된장찌개 집으로 갔다.
집밥을 해 줄 수는 없지만 그만큼 마음이 따뜻해지는 밥을 사 주고 싶었다.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식당에 들어섰다.
“오셨습니까?”
“안녕하세요, 사장님. 아드님은 퇴원 잘하셨습니까?”
“네. 그날 케이크 선물 감사합니다. 아내도 아이도 너무 좋아했습니다.”
“별것 아닙니다.”
“가격이 중요하겠습니까? 마음이 중요한 거죠. 사실 그날 권율 후보님도 케이크를 보내 주셨습니다. 두 분 마음이 참 따뜻하십니다.”
“하하, 감사합니다.”
갑작스러운 칭찬에 정훈은 기분이 좋아졌다. 그 모습을 본 천진혁도 미소를 지었다.
함께하기로 한 사람이 자신과 달리 따뜻한 사람인 게 좋았다.
“된장찌개 2인분 부탁합니다. 그리고 죄송하지만, 계란도 두 개만 구워 주십시오.”
“금방 해 드리겠습니다. 잠시만 기다리세요.”
얼마 뒤에 검은 뚝배기에 담긴 된장찌개가 테이블에 올려졌다.
터지지 않는 노른자를 품은 계란 프라이가 정훈과 천진혁에게 하나씩 주어졌다.
“계란이군요.”
천진혁의 목소리가 미묘하게 떨렸다.
“좋아하십니까?”
“제가 편식이 심했습니다. 엄마가 이걸로 절 꼬드겼죠. 야채를 먹으면 계란을 주겠다며.”
천진혁이 쓴웃음을 지었다. 그의 얼굴에 그리움이 묻어 있었다.
“어머님은…….”
“모릅니다. 다만 옛날에 아비란 작자가 그룹을 위해 제물로 바쳤단 말은 들었습니다. 저처럼 버림받은 거지요. 남편에게.”
“죄송합니다. 제가 괜히 쓸데없는 기억을 떠오르게 했군요.”
“아닙니다.”
천진혁이 숟가락을 노른자 전체를 떠서 삼켰다.
그리고 눈을 감은 채 음미했다.
“사실 제가 약간 사이코패스 기질이 있습니다. 그렇다고 잔인하고 그런 게 아니라 타인의 감정에 무딘 편이었습니다. 사람들과의 관계를 어떻게 맺는지 어떻게 반응해야 하는지 어머니가 가르쳐 주셨습니다.”
“아주 그립겠습니다.”
천진혁은 대답하지 않은 채 밥을 먹기 시작했다.
천천히 음미하며 이 순간을 즐겼다.
정훈도 마찬가지였다.
기억나지 않는 그녀가 그리웠다.
식사를 마친 그들.
붉어진 눈을 애써 웃음으로 감추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사장님 계산할게요.”
“아닙니다. 오늘은 제가 서비스로 드릴게요. 참 권율 후보님은 어떻습니까? 당선되시겠죠? 그런 분이 꼭 당선되어야 하는데…….”
“저도 그랬으면 좋은데, 좀 고전하고 있습니다. 권율 후보님이 여기저기 쌓은 선행이 산더미 같은데 그걸 홍보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네? 왜요?”
“그놈의 왼손 타령이죠. 오른손은 몰라야 한다고 답답하게 고집 피우시고 있습니다.”
“참 그분 고집도 대단하시네요.”
식당 사장은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다.
“모르죠. 누가 남몰래 권율 후보님을 도울지도요.”
식당 주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많은 사람이 그분을 도울 겁니다. 저도 꼭 시장님이 됐으면 좋겠습니다. 다음에 만나면 응원한다고 꼭 전해 주십시오.”
“네, 사장님.”
그때 문이 열리며 어린 꼬맹이가 가게 안으로 들어왔다.
“아빠, 엄마!”
정훈은 지금 들어 온 아이가 사장의 아들인 걸 직감했다.
건강해 보였다.
자신의 호주머니에 있는 지갑에서 만 원짜리 하나를 꺼냈다.
아이의 조그만 손에 쥐여 주었다.
돈은 몰라도 좋은 것인지는 알고 있어 꽉 쥐었다.
“아프지 말고 건강해, 꼬맹이.”
“저 꼬맹이 아니에요. 칫.”
아이는 기분이 나쁜 투로 대꾸했다.
손에 쥔 만원을 꽉 쥐고 안으로 사라졌다.
그 모습에 사장님도 정훈도 천진혁도 모두 웃었다.
정훈이 돌아간 뒤 식당 사장은 고민했다.
어떻게든 권율 후보를 돕고 싶었다.
“지훈이 엄마.”
“네. 왜요?”
주방에서 설거지하던 그녀가 밖으로 나왔다.
남편 앞에 앉아 그의 얼굴을 보았다.
“왜 무슨 고민이에요?”
그는 지금까지 있었던 일을 그녀에게 말했다.
자신을 남몰래 도와준 권율 후보가 고전 중이라고…….
어떻게든 돕고 싶다고 했다.
그러자 선거법에 걸리지 않도록 조심해서 인터넷에 올리자고 제안했다.
눈이 번쩍였다. 지금까지 그 생각을 못 한 자신이 한스러웠다.
선거가 10일이 채 남지 않았다.
컴퓨터를 켠 그는 가만히 눈을 감았다.
지난 시간을 되새겼다.
희망에 가득 차 창업을 했던 일.
하지만 생각보다 손님은 들지 않았다.
좌절하고 싶었지만, 최선을 다해 하루하루를 살았다.
항상 맛있고 청결한 음식을 만들기 위해서 최선을 다했다.
그런데 아들이 백혈병에 걸렸다.
생활비도 부족했는데 병원비까지…….
눈앞이 막막했다.
극단적인 생각도 했었다.
그 무렵부터 갑자기 잘되기 시작한 식당.
자신의 노력이 드디어 빛을 본 것으로 생각했다.
손님들께 감사하며 하루하루를 보냈다.
아들은 어느새 건강을 되찾았고 생활은 안정되었다.
그 중심에 자신이 몰랐던 그가 있었다.
그가 자신을 돕기 위해서 남몰래 했던 노력에 감사의 인사를 하고 싶었다.
인터넷 게시판에 자신의 사연을 적었다.
중부시 후보로 출마한 사람이라고만 적었다.
***
정훈은 할머니의 호출을 받았다.
주인 없는 돈인 대한중공업의 비자금 170억.
그중에 그녀의 계좌로 70억을 송금한 것 때문이었다.
“할머니, 찾으셨어요?”
“앉아라. 쓸데없는 돈을 보냈더구나. 불필요하게.”
심통이 난 얼굴이었다.
“화나셨어요?”
“그래 녀석아, 화났지. 현금 왕을 무시해도 정도가 있지. 기껏 70억이 뭐냐, 선물이냐?”
“할머니랑 의논하려고요.”
“그래 아무 이유 없이 보내진 않았을 거고, 이 돈으로 뭘 하고 싶은 거야?”
“보육원을 좀 키워 보고 싶어요”
“어떻게?”
“우리 보육원에 전국에 있는 고아 중에 각 분야 뛰어난 인재를 모으고 싶어요.”
“흠, 사람을 키우고 싶구나.”
“네.”
“그럼 그게 끝이 아니겠구나. 고등학교도 그쪽으로 방향을 틀어야겠지.”
정훈이 고개를 끄덕였다.
“할머니도 지금까지 남몰래 사람들을 키워 왔잖아요. 그 사람들이 지금 도움이 되는 것처럼 저도 그들에 휘둘리지 않는 사람들을 키우고 싶어요.”
“그래, 서둘러 시작하자꾸나. 불우한 환경에 있는 영재를 모아 엘리트로 키워 보자. 이왕 하는 거 제대로 해야지. 사립 초등학교랑 중학교도 설립해야겠어. 일송 장학생과 천지회의 그늘에 있는 자들에게 대적할 수 있도록.”
현정옥의 눈이 반짝였다.
“네. 시간이 얼마나 걸릴지 모르지만 필요한 일인 것 같아요”
“그럼, 필요하지. 언제나 사람이 중요한 법이다. 너도 네 주변을 잘 챙기도록 해.”
“네, 할머니.”
“참, 보육원 일은 어떻게 된 거야?”
곽현수가 할머니께 보고를 드리지 않은 것 같았다.
“전임 원장인 김현철이 천지회와 관련이 있었던 것 같아요. 원생 중 하나가 장부를 가지고 있었는데 중부시 조폭들에게 상납받은 금액이랑 대구에 있는 회사로 상납한 내역이었어요.”
“그래? 천지회 녀석들은 이 조그마한 시에도 손을 뻗치고 있었구나.”
“네, 그래서 지금 정리 중이에요.”
현정옥은 정훈을 보았다.
손자가 말하는 정리의 의미를 모르지 않았다.
걱정이 되긴 했지만 말리지 않았다.
어차피 그들의 과의 싸움은 피를 봐야만 하는 법.
“몸조심하거라.”
“네.”
“그리고 70억은 도로 가져가거라.”
“감사합니다.”
70억을 수중에 얻었다.
이것으로 무엇을 할까 고민하고 있을 때였다.
“정훈아, 참 예전에 로테칠성과 대서양을 추천하지 않았니?”
“네.”
“그게 10배가 올랐구나.”
그녀의 입술이 길게 늘어져 있었다.
할머니가 내 말을 듣고 주식을 매입한 것이었다.
“우연히 추천한 종목인데 매입하셨네요.”
“네 운을 시험해 보고 싶었는데 대운이 네게 깃들어 있구나.”
“감사합니다.”
“감사는 내가 해야지. 참 그리고 네 앞으로 두 종목을 10억씩 매입해 두었다. 20억이 200억이 되었구나. 허허허.”
“네?”
“일단은 로테칠성을 팔아서 네 앞으로 보내마.”
갑자기 170억이 생겼다.
정훈은 이 돈으로 무엇을 해야 할지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
선거를 1주일 앞둔 날이었다.
인터넷 게시판에 올라온 글 하나가 주목을 받았다.
중부시장 후보 중 한 명의 선행이었다.
누구인지 알 수 없었지만, 그가 한 선행은 사람들의 심금을 울렸다.
특히 식당사장의 자존심을 위해 남몰래 한 선행, 사람들은 그의 배려에 감동했다.
키다리 아저씨를 찾으려 했지만 그를 특정할 수 있는 단서가 너무 빈약했다.
중부시 후보 중에 된장찌개를 좋아하는 후보가 가장 큰 힌트였다.
50대 남자 중 된장찌개를 싫어하는 후보는 하나도 없었다.
사연이 전국적으로 알려지고 나서는 모두 된장찌개를 사랑하는 사람이 되었다.
입후보한 5명 중 4명은 좋아한다고 했다.
하지만 권율은 그럭저럭 가끔 먹는다고 했다.
사람들과 기자들의 질문에 그는 된장찌개를 좋아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중부시 사람들뿐만 아니라 대한민국 사람들이 그를 궁금해했다.
알려지지 않은 오래된 선행.
상대를 배려하는 마음 씀씀이.
조직을 따뜻하게 이끌 적임자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궁금증을 참지 못하던 네티즌 수사대가 움직였다.
백혈병에 걸린 아이를 둔 식당 주인과 그를 도운 인물을 찾기 시작했다.
현금왕의 천재손자, 재벌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