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현금왕의 천재손자, 재벌되다-68화 (68/200)

#068화

“내기? 무슨 내기 말하는 거요?”

“700억을 받으실 생각입니까?”

“크흠, 경영권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 정도는 받아야 합니다. 그렇지만 가격을 협상할 순 있습니다.”

“그럼 이렇게 하시죠. 내년에 700억 드리겠습니다.”

“그럼 지금 못 준다는 말입니까?”

“대신 지금 받으시려면 400억입니다.”

“그 말은 지금 인수대금을 지급하면 400억이고 내년으로 미루면 700억이란 말이죠?”

“네.”

정몽일은 생각했다.

1년을 기다리면 300억이다.

윤정훈은 생각했다.

내년이면 흑자가 난다. 그 돈으로 인수대금을 치르면 된다.

공짜로 사는 것이다.

“크흠, 좋습니다. 그럼 그렇게 하죠. 대신 보증을 서야 합니다. 내년에 부도라도 나면 돈을 받을 수 없지 않습니까?”

“맞습니다.”

권영수 사장이 나섰다.

“우리 신화증권에서 보증 섭니다. 700억 전액 보증 서겠습니다.”

“그럼 문제없습니다. 계약서 작성하시죠.”

권영수와 영산중공업 법무실에서 계약서를 서둘러 작성했다.

“좋은 회사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잘 키워 보겠습니다.”

“잘 부탁합니다. 아쉽지만 잘 키워 주십시오. 다양한 중형선박을 만들 수 있는 기술력도 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키울 생각입니까?”

정몽일이 물었다.

“하나만 할 겁니다. 딱 하나의 배를 만들어야죠.”

“네? 그럼 다른 건 다 버릴 생각입니까?”

정훈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정훈을 본 정몽일의 얼굴에 비웃음이 스쳤다.

“안 된다고 생각하시는군요. 사장님 해 보셨습니까?”

정몽일은 윤정훈의 마지막 말이 귀에 거슬렸다.

‘해 보셨습니까?’

아버지의 입버릇이었다.

‘해 봤어?’

정몽일이 생각에 잠겨 있을 때였다.

윤정훈이 말을 이었다.

“영산미포조선은 중형선박 분야에서 세계 제일의 강자가 될 겁니다.”

그의 목소리에 자신감이 묻어 있었다.

정몽일은 기시감이 들었다.

‘영산 중공업은 큰 거, 여기는 작은 거.’

정몽일은 윤정훈을 보았다.

아버지가 했던 말이 분명했다.

“그 말 어디서 들었습니까?”

“무슨 말요?”

“영산미포조선의 중형선박 분야를 세계 1위로 만들겠다는 거요.”

“제 생각입니다. 옆에서 큰 거 만드니 우리가 큰 거 만들긴 어렵고 중간 정도는 세계 1위 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옆에서 1등 하는데 우리라고 못 합니까?”

정몽일이 눈을 여러 번 깜빡였다.

윤정훈의 얼굴에 아버지의 얼굴이 겹쳐 보였다.

‘정태산.’

무일푼에서 대한민국에 최고의 그룹을 일군 사내.

그의 원동력은 무엇보다도 과감한 상상력과 추진력이었다.

‘윤정훈.’

그의 장점도 상상력과 추진력.

오늘 당장 계약하고 이 적자투성이 조선소에서 세계 제일의 회사를 그린다.

천지회는 어쩌면 가장 큰 적수를 만난 것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윤정훈 씨, 제 명함입니다.”

정훈은 정몽일의 명함을 받으며 그를 보았다.

정몽일의 눈을 가득 채운 적의가 사라져 있었다.

***

영산 미포조선 인수는 순식간에 완료되었다.

계약 체결과 함께 주식을 인수하였다.

윤정훈은 컨설팅 업체를 통해서 경영 전반을 확인했다.

아니나 다를까 껍데기뿐이었다.

돈이 되는 부동산도, 계열사 보유 주식도 없었다.

사람과 땅밖에 없었다.

신화증권 회의실에서 진행된 경영 컨설팅 결과는 암울했다.

보증을 선 증권사도 잘못했다간 700억을 지급해야 할 수도 있었다.

흑자를 내야만 했다.

정훈은 영산미포조선에서 올라온 임원진들의 얼굴을 보았다.

하나같이 정훈의 눈을 피했다.

“중요한 건 방향성입니다. 거기 영산미포조선에서 오신 분, 회사의 방향성에 대해서 생각하신 것 없습니까?”

임원 중 한 사람만이 정훈을 보았다.

“말씀하세요.”

“영산미포조선은 PC선에 집중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유는요?”

“지금 우리 회사는 배 만드는 도크도 작고 중국 저가 업체의 추격도 만만치 않습니다. 하지만 석유화학 운반선에 집중한다면 승산이 있습니다.”

기다리던 대답이 나왔다.

실제로 이 회사는 석유화학 운반선에 집중해 세계 1위의 중형조선소로 도약할 예정이다.

이미 내부에서는 나아가야 할 방향성을 제대로 잡고 있다.

“좋습니다. 그렇게 하시죠. 성함이?”

“마태훈 이사입니다.”

“다른 분들은 의견 없습니까?”

“곽철호 이사입니다. 저는 반대입니다. 비록 도크는 작지만 다양한 종류의 선박을 만들 수 있는 기술을 가지고 있습니다. 소품종 대량생산에서 다품종소량생산이 제조업의 흐름입니다.

기술력은 가진 우리 영산미포는 다양한 선박 제조를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부사장도 곽 이사의 의견에 동의했다.

정훈은 그들의 눈에 서린 자신감을 읽었다.

익숙함, 관성.

해 왔던 건 잘 할 수 있다.

하지만 돈이 되냐는 다른 문제였다.

정훈은 다시 마태훈을 보았다.

“마 이사님, 자신 있습니까? 선택과 집중.”

“네, 그쪽으로 가야만 중국의 거센 추격을 뿌리치고 우리가 살아날 수 있습니다.”

“알겠습니다. 그럼 선택과 집중으로 방향을 잡죠.”

“안 됩니다. 우리가 가진 기술을 버리는 건 회사를 버리는 겁니다.”

마태훈의 의견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물러서지 않을 기세였다.

정훈은 마태훈에게 힘을 실어야 했다.

“마태훈 이사님의 의견을 수용하지 못하는 게 아니라 안 하는 거죠? 나이도 어리고 후배라서 인정하기 싫은 모양입니다.”

“…….”

“그럼 제가 마 이사님에게 힘을 좀 드리겠습니다.”

정훈은 마태훈의 눈을 보았다. 확신에 차 있었다.

“이제부터 마태훈 이사님이 영산미포조선의 대표 이사입니다.”

그의 말에 흠칫 놀라는 기존 사장과 이사들이었다.

상대적으로 젊은 마태훈은 다른 이사들보다 서열이 낮았다.

다른 말로 너희들 나가라는 뜻이었다.

“안 됩니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부사장 한태영이 강하게 반대했다.

“한태영 부사장님.”

“네.”

“이 회사의 주인은 누굽니까?”

“물론 회사의 주인은 윤정훈 도련님이지만…….”

“그럼 주인 말을 들으세요. 네?”

“아무리 그래도 독단적으로 사장을 정할 수는 없습니다. 이사회 의결을 거쳐야 합니다.”

“그런 법적인 건 저는 모릅니다.”

몇몇 이사가 부사장에 동의하며 일어섰다.

“임명을 재고해 주십시오.”

“…….”

정훈은 조용히 그들을 보았다.

영산조선에서 잔뼈가 굵은 실세들.

일거에 쳐 내야 했다.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나 그들의 눈을 하나하나 마주했다.

기세등등.

그들의 눈에 정훈은 아는 것 하나 없는 애송이에 불과했다.

하지만 정훈이 가진 돈의 힘을 그들은 몰랐다.

“지금 일어서 있는 여러분, 전부 해고합니다. 자, 반대하시는 분 또 있습니까?”

회의실은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부당 해고입니다.”

“그건 법원에서 이야기하시죠. 나가세요.”

문이 열리고 신화증권 경비들이 들어와 그들을 조용히 밖으로 안내했다.

냄새가 심한 이사 몇 명을 잘라야 했는데 잘 됐다.

최대 주주이지만 나이 때문에 얕잡아 보던 그들.

정훈은 그들에게 자신이 가진 돈의 힘을 보였다.

“자 반대하실 분은 저쪽으로 나가시면 됩니다.”

모두 고개를 숙였다.

“그럼 마태훈 이사님을 사장으로 임명합니다. 알겠습니까?”

“네.”

조용한 목소리로 동의를 표했다.

“그럼, 일들 보세요.”

회의장을 나온 정훈은 사장실로 가 소파에 털썩 앉았다.

“도련님 여기 물 있습니다.”

목이 탔던 정훈에게 물을 권했다.

바짝 말라 있던 입안을 시원하게 적셨다.

“감사합니다.”

“잘하셨습니다. 초반에는 강하게 밀어붙여 기강을 세워야 합니다.”

“권 사장님이 제 마음을 정확하게 아시네요.”

“컨설팅 결과도 선택과 집중해야 한다고 했고, 마태훈 이사가 그중에서 제일 청렴하지 않았습니까? 혹시 다 계산된 건 아니죠?”

권영수가 설마 하는 표정으로 질문했다.

정훈은 그를 보며 웃기만 할 뿐 대답하지 않았다.

할리퀸과 사이코의 도움으로 영산미포조선 임직원들의 뒷조사는 순식간에 끝났다.

그리고 신화증권 직원들을 통해 영산미포조선의 하청 업체들을 조사했다.

이름 없는 회사들이 나왔다.

외국 회사들이었지만 페이퍼 컴퍼니였다.

그곳으로 들어간 돈이 천지회의 비자금으로 의심되었다.

정훈은 추적을 시작했다.

***

어느덧 무더위가 가고 9월이 시작되었다.

늦더위가 여전히 기승을 부렸다.

늦은 오후, 명동 거리를 걷고 있을 때 은수가 제안했다.

“야, 배고픈데 컵라면이나 먹을까?”

“안 덥냐? 하여튼 넌 컵라면 귀신이야.”

“그냥, 옛날 생각도 나고.”

“저기, 학생”

30대 안경을 쓴 남자가 은수에게 말을 걸었다.

“네?”

“혹시 연예인 생각 있으면……. 여기로 전화 줘요.”

“아 알겠습니다.”

“아직 소속사가 있는 건 아니죠?”

“여러 군데 제의는 있는데 아직 고르지는 않았어요. 생각해 보고 전화 드릴게요.”

“꼭 전화 줘요.”

이로써 10번째 길거리 캐스팅을 받는 은수, 어깨에 힘이 잔뜩 들어가 있었다.

“야, 유세 좀 그만 떨고 라면 먹어, 다 퍼지겠다.”

“헤헤, 좋은 걸 어쩌냐?”

“그럼 한번 해 보는 게 어때?”

은수는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자신의 한계를 알고 있었다.

음치에 발 연기.

컵라면을 다 비운 정훈은 창밖을 보았다.

초라한 행색의 노인이 길을 걷고 있었다.

고무신에 개량 한복, 어울리지 않는 낡은 중절모를 쓴 노인.

정훈이 그의 얼굴을 뚫어지게 보았다.

분명히 그가 맞았다.

‘박 영감님?’

지난 생에 자신에게 많은 도움을 준 사람이었다.

박카스를 좋아하던 그였다.

“잠깐 나갔다 올게.”

박카스를 손에 들고 밖으로 뛰어나갔다.

“어르신.”

그를 불렀다.

정훈의 얼굴을 본 박 영감은 흠칫 놀랬다.

“나 불렀나?”

“네.”

“……왜?”

회귀 전의 인자했던 얼굴과 다른 굳은 표정이었다.

“저 이거 드세요. 날도 더운데……. 목이 마르실 것 같아서요.”

“공짜라서 받기는 하네만 실없는 청년인가? 아니면 돈 아까운 줄 모르는 건가?”

정훈을 위아래로 쭉 훑었다.

“자네, 미친 건 아니지?”

“왜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길을 걷다가 처음 보는 사람한테 선물을 받았어. 예쁜 할멈이면 괜찮은데 스무 살 된 자네가 주면 미친놈이라고 하지 않을까?”

“그렇긴 하네요. 어르신이 제 돌아가신 할아버지 같아서 드리는 겁니다. 의심 안 해도 됩니다.”

“뭐? 돌아가신 할아버지? 알겠네. 잘 마시겠네.”

“네. 어르신. 감사했습니다.”

“감사는 내가 해야지.”

정훈은 무심히 자신의 길을 가는 노인을 향해 깊이 인사했다.

지난 생, 고독한 자신에게 한 줄기 위안이었던 자.

자신에게 많은 충고를 주었던 박 영감에게 주는 초라하지만 진심이 담긴 선물이었다.

‘저 자식이 나를 어떻게 알고?’

박카스 뚜껑을 따고 한 번에 다 마셨다.

박영호는 정훈에게 받은 음료수를 다시 한번 보았다.

내가 이걸 좋아하는 걸 어떻게 알았지?

고개를 갸웃거렸다.

현정옥의 손자인 윤정훈이 자신에게 인사를 하는 것도 이상하고 박카스를 준 건 더 이상했다.

시계를 보았다.

약속 시간에 늦을 것 같아 걸음을 서둘렀다.

방 회장이 공짜 술을 사 준다는데 안 갈 수 없었다.

지독스럽게 아껴 이룩한 부.

사대천왕 중에서도 가장 거대한 부를 가진 박영호는 묘한 기분으로 늘 모이는 막걸릿집으로 갔다.

***

명동 신화 대부 사무실에 있던 정훈은 신화개발 유민철 사장의 전화를 받았다.

“도련님, 리오 틴토 회장이 한국으로 온답니다.”

“이유는요?”

“샘플 광석의 바나듐 함유량이 너무 좋아서 계약을 빠르게 진행하려고 하는 것 같습니다.”

“좋은 소식이네요. 아, 사무실 인테리어는 잘 진행되고 있습니까?”

“네, 중부건설에서 나온 사람들이 열심히 하고 있습니다.”

“알겠습니다. 요즘도 폐광 순찰하고 있습니까?”

“하고 있습니다.”

“혼자 다니지 마십시오. 이제 곧 대박 터질 일만 남았는데 몸조심해야죠.”

“알겠습니다. 도련님. 사무실 정리되면 연락드리겠습니다. 한번 내려오십시오. 제가 대접하겠습니다.”

“네.”

전화를 끊은 정훈, 리오 틴토 회장이 직접 날아올 거란 생각은 하지 못했다.

천지회를 쫓다가 발견한 광산은 이제 곧 백조가 되어 훨훨 날아갈 것이다.

그 모습을 본 송철호 회장이 얼마나 배가 아플까 생각하니, 입꼬리가 저절로 올라갔다.

하지만 지금은 굳은 표정을 지어야 할 상황이었다.

금융감독원에 신청한 대부업체 신고가 반려되었다.

“어떻게 된 겁니까?”

“그게……. 저도 이유를 모르겠습니다.”

정훈이 손바닥으로 책상을 내리쳤다.

“대부업체 신고가 어려운 게 아니지 않습니까? 그거 하나 제대로 못 합니까?”

“죄송합니다.”

정훈이 강상철을 보며 씨익 웃었다.

강상철은 정훈을 보고 미친놈이라 생각했다.

“좀 이따가 제가 소리치면 조금 전처럼 쩔쩔매면 됩니다.”

“네……? 알겠습니다.”

강상철은 조금도 이해할 수 없는 표정이었다.

“너무 신경 쓰지 마세요. 금융위원회 승인은 위에서 나서야 합니다. 강 사장님이 핸들링할 수준이 아닙니다. 구청 신고랑은 차원이 다른 문제입니다.”

“알겠습니다. 그래도 잘해 보고 싶었는데 안 돼서 아쉽습니다.”

“강 사장님, 술 좋아합니까?”

“네.”

“도박도 좀 합니까?”

“네.”

“좋아요. 금감원 사람들이랑 좀 놀아 주세요. 돈도 잃어 주고, 술도 사 주고, 홍콩도 보내 주면 됩니다. 그럼 잘 될 겁니다.”

정훈은 테이블에 천만 원 뭉치를 툭하고 던졌다.

“열심히 해 보겠습니다.”

“아, 영수증 잘 챙기세요.”

“네 도련님.”

잠시 후 이형중이 사무실로 들어왔다.

“강 사장님, 도대체 왜 승인이 안 난 겁니까?”

정훈은 소파 팔걸이를 손바닥으로 내리쳤다.

약속대로 강상철은 식은땀을 흘리며 안절부절못하는 표정을 지었다.

“죄송합니다. 도련님. 이유를 모르겠습니다.”

“죄송하다는 말보다는 뭔가 해결책이 필요합니다.”

정훈의 질책에도 불구하고 강상철은 이렇다 할 해결책을 말하지 못했다.

이마에 맺힌 땀만 닦고 있었다.

그 상황을 보던 이형중이 입을 열었다.

“제가 나서도 되겠습니까?”

“어떻게요?”

“금감원 직원들과 식사를 좀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오해가 있다면 풀고 서먹하다면 친해지는 게 좋지 않았습니까?”

“강상철 씨.”

“네, 도련님.”

“일은 이렇게 하는 겁니다. 알겠습니까?”

“네, 보고 배우겠습니다.”

연신 땀을 닦던 강상철이 나지막이 대답했다.

정훈은 품에 있던 봉투를 탁자 위에 툭 하고 놓았다.

“이형중 씨, 오백만 원입니다. 쓰세요. 밥 먹고 술 사 주고 원하는 걸 해 주세요. 그러면 우리도 원하는 걸 얻겠죠.”

“네, 도련님.”

이형중은 테이블에 올려진 두툼한 봉투를 품에 넣었다.

‘불쌍한 놈, 자기보다 못한 놈을 추천했어야지.’

이형중은 옆에서 안절부절못하는 강상철을 보며 비릿한 웃음을 지었다.

현금왕의 천재손자, 재벌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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