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9화
자욱한 담배 연기와 여인들의 웃음.
이형중은 밀실의 문 앞에서 허리를 깊숙이 숙여 인사했다.
“들어와.”
여인들에게 눈짓하자 쪼르르 달려 나갔다.
“잘 지내셨습니까?”
“그래, 반응은?”
“대부업 신고가 반려되어 상당히 화가 나 있습니다. 제가 핸들링한다고 했습니다.”
“그래? 그럼 이제 승인하면 되겠군. 그럼 좀 너를 좀 더 신뢰하겠지?”
“제가 나서서 해결하면 지금 있는 사장 자리를 차지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래, 아직 그 모자란 놈이 사장이지?”
“예, 천성이 이쪽이랑 어울리지 않는데, 어떻게 여기서 버티는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그래, 네가 그랬지? 이 바닥은 잔인해져야 하는 곳이라고.”
“네, 돈을 벌기 위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아야 합니다.”
그 말에 송윤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잔인함이라······. 결국은 탐욕이지.”
혼잣말과 함께)] 송윤호는 생각에 잠겼다.
‘결국 돈, 탐욕이다. 모든 것을 가져야 한다.’
잠시 후 문이 열리며 초췌한 몰골의 남자가 끌려 들어왔다.
“죄송합니다. 내일 바로 입금하겠습니다.”
“어제까지였습니다.”
“그게, 계좌번호를 그쪽에서 잘못 주지 않았습니까? 제 잘못이 아닙니다.”
“그건 모르겠습니다. 약속대로 담보로 있던 회사는 제가 갖겠습니다.”
초췌한 얼굴의 남자 얼굴이 일그러졌다.
벌떡 일어난 그는 송윤호를 쏘아 보았다.
“이게 무슨 짓이야? 일부러 돈을 안 받은 거 아니야. 네 놈들이 다 짜고 한 짓이지? 내가 피땀 흘려, 청춘을 바친 회사야!”
“정 불만이면 법대로 하시면 됩니다. 소송을 거세요. 법원에서 공평하게 판결 내지 않겠습니까?”
“이런 빌어먹을 놈, 천벌을 받을 것이…….”
그의 짧은 말투가 이형중의 심기를 불편하게 했다.
벌떡 일어나 눈앞에 있던 탬버린으로 그의 머리를 후려쳤다.
그런 다음 송윤호를 향해 몸을 돌렸다.
살짝 고개를 숙이며 허락을 구했다.
송윤호는 흐뭇한 미소와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이형중은 차가운 은색 마이크를 잡고 남자의 머리를 여러 차례 내리쳤다.
“이봐, 말이 짧잖아. 하늘 같은 도련님이야. 만난 것만 해도 감사해야지. 최소한 네 억울함은 들어줬잖아”
- 퍼억
“으으으······.”
바닥에 피를 흥건히 흘린 남자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앓는 소리만 희미하게 들렸다.
송윤호는 그 광경을 보며 흐뭇하게 보았다.
좋은 칼을 얻었다.
“이리와 한잔해.”
“예 도련님.”
“잔인한데, 내가 많이 배워야겠는데.”
“죄송합니다. 도련님.”
“죄송은 무슨. 싸움 구경은 돈 내고도 하는데, 공짜로 좋은 구경 한 거지. 오늘 기분이 좋아. 돈 되는 회사도 하나 먹고 좋은 칼도 얻고, 칼춤도 구경하고 앞으로 종종 보여 줘.”
“네.”
짧게 대답한 이형중이 술잔을 들었다.
도련님의 얼굴을 힐긋 보았다.
얼음같이 차가운 웃음이 그의 얼굴을 스쳐 지나갔다.
***
윤정훈의 밀명을 받은 강상철.
이곳저곳을 통해 금감원 직원들을 접대했다.
불법 도박장에 있는 그들 옆에 자리해 돈도 잃어 줬다.
같이 술도 한잔하면서 안면을 텄다.
도련님의 지시대로 약간 호구처럼 행동했다.
그렇게 어렵지 않았다. 어차피 자신도 마음 좋은 호구였으니.
그래서 힘깨나 쓰는 공무원들이 그를 아주 좋아했다.
싫어할 이유가 없다.
돈 잃어 줘, 술 사 줘, 가끔 홍콩도 보내 주고.
“도련님. 상철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금감원 실무자들 많이 사귀었습니다.”
“잘했어요. 실무자들 급이 낮아서 그렇지, 중요합니다. 그 사람들 사인 없으면 일 안 됩니다. 그리고 언젠가 위로 올라갈 친구들이죠.”
“아 그렇군요. 제가 그쪽엔 잘 몰라서······ 흠흠.”
“몰라도 됩니다. 다만 친하게 계속 만나세요.”
“알겠습니다.”
전화를 끊은 정훈은 다시 카페 안으로 다시 들어갔다.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이형중 앞으로 갔다.
테이블에 있는 시원한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쪽하고 빨아 먹었다.
카페인이 온몸을 타고 흘러갔다.
“어떻게 됐습니까?”
“다음 주 중으로 승인 날 거라고 합니다.”
“잘했습니다. 일을 상당히 빨리 처리하시네요”
“아닙니다. 도련님이 지원을 해 주셔서 쉽게 처리했습니다.”
정훈은 품 안에서 신용카드 한 장을 꺼냈다.
“선물입니다. 법인 카드라 생각하고 필요한 거 쓰세요. 접대도 이걸로 하면 됩니다.”
“감사합니다.”
이형중이 벌떡 일어나 감사의 인사를 했다.
정훈은 그를 보며 생각했다.
지난 삶에서 회사 사장이었던 자가 지금은 자신을 향해 머리를 숙이고 있다.
그 사람이 자신을 죽였었다.
복잡한 감정이 교차했다.
“잠시만요.”
정훈은 자신에게 걸려 온 전화를 받았다.
유민철이었다. 일부러 스피커 핸드폰으로 받았다.
이형중에게 정보를 흘려야 했다.
“도련님, 접니다.”
“네. 리오 틴호 회장이 자기 딸을 대리인으로 보낸다고 합니다.”
“왜죠? 설마 계약에 차질이 있는 건 아니죠?”
“네. 그건 아닌 것 같습니다. 그쪽 회장 건강이 갑자기 안 좋아져서랍니다. 일정을 미뤄도 된다고 했는데 빨리 계약하고 싶은 것 같습니다.”
“누구라도 탐낼 만한 것 아닙니까?”
“맞습니다. 흐흐흐.”
유민철이 기분 좋게 웃었다.
“그럼 수고 하십시오. 유 사장님. 참 요즘도 폐광 체크하고 있습니까?”
“네, 조심하십시오. 곧 대박 날 텐데 다치면 큰일입니다.”
“알겠습니다. 사장님. 감사합니다.
전화를 끊고 정훈은 유민철을 생각했다.
10퍼센트의 주주이자 사장.
이번 거래로 얼마나 많은 돈을 벌게 될까?
내부 고발로 힘들었던 삶.
비루한 광산 회사에서 재기를 모색했던 그가 곧 대박을 맞는다.
그런데도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성실하게 하고 있다.
믿음이 가는 자였다.
정훈은 자신을 위해 충성하는 자가 돈을 벌자 흡족해졌다.
이형중에게 자랑하면 그 소식이 누군가에게 전해질 것이다.
그리고 그는 분명 배가 아플 것이다.
“이번에 우리 신화개발 주식을 리오 틴토에 일부 매각합니다. 39프로를 1조에 산다더군요”
1조란 금액에 이형중의 눈동자가 세차게 흔들렸다.
자신은 만져 보지도 못한 금액이었다.
“대단하십니다. 도련님. 어떻게 그런······. 실력을 갖추셨습니까?”
“운이 좋았습니다. 그냥 좋은 일 좀 하다 보니 얻어걸린 거죠”
사람은 실력으로 쟁취한 것보다 운 좋게 얻은 것에 더욱더 배 아파한다.
정훈은 이 기쁜 소식이 널리 알려지길 원했다.
거기엔 이형중을 고용한 자도 포함되었다.
“도련님은 운을 타고났나 봅니다.”
“그런 것 같네요. 실력이 아무리 좋아도 운 좋은 사람은 절대 못 이기죠. 운이 최고입니다.”
정훈은 활짝 웃었고 이형중은 쓴웃음을 지었다.
지지리 운이 없었던 지난 일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도련님. 그런데 리오 틴토는 뭐 하는 회삽니까?”
“광산 회사입니다. 세계 3대 광산 회사 중 하나죠. 괴산에 있는 우리 바나듐 광산에 관심이 아주 많습니다.”
리튬과 함께 미래의 희귀자원인 바나듐. 지금도 괜찮은 가격이다.
하지만 쓰임새가 늘면서 미래에는 더욱더 상승한다.
“그렇죠. 신화개발 사장이 받은 스톡옵션이 10퍼센트니까······. 후우.”
정훈이 생각해도 놀랄 만큼 큰 금액이었다.
“2500억 정도 되는 겁니까? 도련님.”
이형중이 유민철의 지분 가치를 계산했다.
“그 정도 되겠네요. 그럼 들어가서 일 보세요. 저는 좀 앉아 있다가 가렵니다.”
이형중은 자리에서 일어나 인사를 한 다음 카페 밖으로 나갔다.
9월의 오후는 아직 더웠다.
신화개발 유민철 사장의 이천억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신화대부 사장으로 일하며 스톡옵션을 받으면 최소한 수십억, 아니 수백억을 받을 수 있다.
그런데 다른 선택을 한 것이었다.
‘송윤호가 아니라 윤정훈을 택했어야 했는데’
자신의 선택이 잘못된 걸 깨달았다.
후회가 파도처럼 밀려왔다.
***
“아버님, 윤호입니다.”
“들어오거라.”
서재에서 앉아 있던 송철호는 자기 아들을 보았다.
자신이 대부업체로 그를 보낸 이유를 알고 있는지 궁금했다.
“일은 어렵지 않느냐?”
“안 어렵습니다. 배우는 게 많습니다.”
“뭘 배우고 있느냐?”
“탐욕에 대해 배우고 있습니다.”
흡족한 대답이었다.
“탐욕을 배운다……. 지금까지 욕심이 없었느냐?”
“아버지 밑에서 부족한 것 없이 자랐습니다. 갖고 싶은 것 모두 가졌습니다. 그래서 탐욕스럽지 않았습니다.”
“그랬지. 이제 욕심이 생긴 거냐?”
“네. 갖고 싶은 게 생겼습니다.”
“어떻게 해야 하느냐?”
“독해지고 또 잔인해져야 합니다.”
송철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밑바닥 인생들이 가득한 대부업체로 자기 아들을 보낸 보람이 있었다.
그곳은 온갖 추악한 탐욕이 가득한 곳이었다.
그들보다 더 추악해지고 더 욕심을 가져야 천지회를 이끌 수 있다.
“너는 얼마나 잔인해졌지?”
“밑바닥 인생들을 수렁으로 집어넣었습니다. 돈을 갚지 못하는 자의 신체를 뺏었고, 회사를 집어삼켰습니다.”
“불쌍하지 않더냐?”
“옛날 같았으면 불쌍하게 생각했을 겁니다. 그런데 생각을 고쳤습니다. 돈을 갚지 않은 그들에게 어울리는 합당한 대가라고 생각합니다.”
“그래, 잘했다.”
오랜만에 아버지의 칭찬을 들어 기분이 좋았다.
송윤호는 다음 타깃을 아버지에게 말했다.
“윤정훈이 대부업에 진출하려고 합니다. 그것을 뺏겠습니다.”
송철호의 눈빛이 바뀌었다.
“아들아, 뺏기 전에 가질 수 없도록 해야 한다. 전쟁을 해서 이기는 것보다 먼저 무릎 꿇도록 만들어야지. ”
자신의 실수를 깨닫고 고개를 숙였다.
“알겠습니다.”
자신 없는 아들의 목소리를 들은
송철호는 이마를 찡그렸다.
“설마 대부업체에 진출하도록 가만히 둔 건 아니겠지?”
“······.”
“모자란 놈. 방심한 것이냐? 아니면 윤정훈과 경쟁해서 이겨 보고 싶었던 거야?”
송철호의 호통 소리에 송윤호의 얼굴에 땀이 맺혔다.
“죄송합니다. 생각이 짧았습니다. 대신 그의 것을 다 빼앗겠습니다. 아버지”
“······알겠다. 그가 가진 걸 다 뺏어 오거라. 돈도, 지위도, 그리고 네 여자도.”
박다혜를 생각하자 송윤호의 눈이 이글거렸다.
“알겠습니다.”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윤정훈을 나락으로 보내야 한다.
“일본 자금은 언제 들어오느냐?”
“11월쯤 들어옵니다. 때를 맞춰서 대부업 광고를 시작하겠습니다. 일본 쪽 전문가들에 의하면 꽤 수익성이 좋을 것 같다고 합니다.”
11월에 일본 야마구치 구미계의 나고야 쪽 자금이 들어온다. 재일 교포를 사장으로 세워 대부업에 진출할 계획이었다. 일본은 자본을 대고 일송은 인력과 장소를 제공하는 합작법인을 세울 계획이었다.
“그래, 서둘러야 해. 지금까지의 사채와 다른 제3금융권이다. 새로운 시장이 열리는 것이야.”
“알겠습니다. 최대한 서두르겠습니다.”
“선점! 먼저 차지하는 놈이 확장하기도 쉽다. 명심하거라”
“알겠습니다. 아버지”
“참, 윤정훈 그놈은 요즘 뭐 하고 있지?”
“리오 틴토에 신화개발 지분을 매각한다고 합니다.”
“리오 틴토? 호주 광산 회사 말이냐?”
“네, 그쪽에 신화개발 지분을 매각한다고 합니다.”
송윤호의 말을 들은 그의 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분명 그 폐광산이었다.
일송이 소유한 광산은 아니었다.
마약 제조를 위해 임대했던 것.
가지려면 가질 수 있었다.
폐허와 다름없는 광산과 채굴권을 가진 회사를 산 윤정훈.
처음엔 그를 비웃었다.
그런데, 그 폐허가 돈이 되었다.
20억을 주고 산 회사…….
-꽝, 꽝, 꽝
손바닥으로 자신의 책상을 여러 차례 내리쳤다.
어리석음을 탓할 데가 그곳뿐이었다.
윤정훈이 가진 운이 부러웠다.
“지분을…… 얼마에 판다고 하더냐?”
“39퍼센트를 1조에 매각한다고 했습니다.”
- 퍼억
송철호의 손에 있던 유리잔이 산산이 조각났다.
“아, 아버님, 괜찮으십니까?”
이글거리는 눈으로 아들을 보는 그.
“윤정훈의 모든 것을 빼앗거라, 하나도 남김없이.”
송철호의 얼굴이 화염처럼 타올랐다.
***
추석이 지났다.
명절 동안 할머니는 방에 누워 계셨다.
이유를 물었지만 대답해 주지 않으셨다.
언제나 추석만 되면 몸이 아프셨다.
준비했던 신화대부 프로젝트는 거의 완성되었다.
완벽한 마지막을 위해 디테일한 부분을 체크하고 있었다.
강상철의 역할은 생각보다 중요했다.
그는 사채업과 어울리지 않았다.
마른오징어를 짜듯 채무자를 비틀어야 하는 게 사채업이다.
그런데 그는 사람들과 어울리는 걸 좋아했다.
술 마시고 도박하면서 친하게 지내는 게 그의 천성이었다.
광고 담당자들을 만났고, 싹싹한 직원들을 고르고 갈등을 중재했다.
그는 적이 없는 사람이었다.
사람의 실력을 인정하고 능력 있는 자를 가까이 두려고 했다.
그래서 이형중을 추천했을 것이다.
명백히 그의 실수였다.
정훈은 이형중에게 사장을 맡겼다.
그가 하는 일이란 그저 옛날처럼 고객에게 돈을 빌려주고 고율의 이자를 뜯어 내는 것이었다.
강상철과 달리 이형중은 능력이 아주 뛰어났다.
흡혈귀처럼 피를 끝까지 빨아먹었다.
그는 합법적인 대부업체의 사장보다는 명동 뒷골목의 사채꾼으로 더 성장할 사람이었다.
신화대부는 추석 전에 금융감독원 등록업체가 되었다.
그사이에도 강상철은 접대하며 실무자들과 친분을 쌓았다.
이형중은 여전히 윤정훈과 신화대부에 관한 정보를 송윤호에게 전달하기 바빴다.
그것을 이미 알고 있던 정훈은 그에게 중요한 정보를 가려서 제공했다.
명동에 새로 사무실을 준비했다.
강상철의 사무실로는 밀려드는 고객을 맞이하지 못할 게 뻔했다.
근처 1층에 시중 은행처럼 깔끔한 인테리어로 준비 중이었다.
본격적으로 고금리 대부업을 시작해야 했다.
몇 년 뒤에 있을 사회적 비난이 신경 쓰인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이 무주공산을 내버려 두면 일본자금이 명동을 점령할 게 뻔했다.
누군가는 손대야 한다.
그래서 선점하기로 결심했다.
“티브이 광고는 언제 시작합니까?”
“다음 주에 시작합니다.”
강상철이 앞으로의 일정을 보고했다.
이형중은 모르는 사항들이었다.
그는 기껏해야 강상철의 사무실 옆에서 대부업을 확장하고 있는 줄 알고 있다.
이제 다음 주면 오픈한다. 대대적인 티브이 광고와 함께 정식으로 등록된 대부업체가 등장하는 것이다.
일본 자금이 들어올 틈을 주지 않아야 한다.
그리고 드디어 1주일이 흘렀다.
현금왕의 천재손자, 재벌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