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현금왕의 천재손자, 재벌되다-73화 (73/200)

#073화

호텔 방 문을 열자 넓은 거실이 나왔다.

5명이 앉아 있었다.

국회의원 조영진,

선재종합기계 이선호

이름을 모르는 사람 세 명,

마지막 상석에 앉아 있는 저 사람은 그래도 성은 알고 있다.

명동 박 회장이 여기에 있는 게 이해되지 않았다.

상석에 앉은 걸 보면 그가 우두머리인 게 분명했다.

사채시장의 거물과 중공업 인수전, 돈 말고는 연결되는 지점이 없었다.

정훈은 박 회장을 보고 담담한 표정을 지었다.

갑작스럽게 자기 모습을 드러낸 이유가 궁금했다.

“흠, 축하하네,”

“영감님, 아니 회장님 반갑습니다.”

“그래.”

박 회장이 고를 끄덕였다.

정훈은 그의 맞은편 의자에 앉았다.

궁금한 게 많았다.

지난 생에 자신에게 베푼 그의 호의가 기억났다.

이유가 뭘까?

그는 내가 현정옥의 손자인 걸 알고 있었을까?

궁금했지만 눈앞에 앉아 있는 그는 대답할 수 없었다.

그는 내가 알고 있던 박 영감이 아닌 박 회장이었다.

“그런데 자네, 내가 박카스 좋아하는 거 어떻게 알았지?”

머리를 빠르게 회전했지만 딱히 떠오르는 생각이 없었다.

“어르신 중 열에 아홉은 그걸 좋아합니다.”

“그래서 길 가던 나를 붙잡고 그걸 준 거야?”

의심스러운 눈초리였다.

“네, 그냥 아는 분이 생각나서 그랬습니다.”

“그래? 좀 싱겁구먼, 난 또 자네가 내 정체를 알고 있다고 생각했지.”

“몰랐습니다.”

옆에 앉아 있던 조영진 의원이 축하했다.

“대단해, 복이 많은 건지 운이 많은 건지, 어떻게 그 광산을 1조 원에 팔 생각을 한 거야?”

“운이 좋았습니다.”

정훈은 자신을 잘 아는 사람들 앞에선 겸손한 얼굴을 했다.

굳이 드러내지 않아도 자신의 가치를 인정해 주는 사람들이었다.

“허허 운도 실력이야. 실력이 대단한 거지. BHC 증권, 대한 중공업, 신화개발까지 손대는 것마다 승승장구하는 중이구만. 영산미포조선은 아직 두고 봐야 되지만. 그 정도만 해도 재물 운 타고난 놈은 못 이기지.”

정훈은 슬슬 자신을 부른 이유가 궁금해졌다.

“오늘 부르신 이유가 있습니까?”

“선재종합기계를 맡아 주게.”

조영진 의원이 말했다.

지난번 이순호의 제안으로 낌새는 알고 있었다.

선재종합기계 국내 1위 중장비 제작 업체.

매출 2조.

결코 쉬운 물건도 아니고 그냥 가져가란 것도 아닌 게 분명했다.

이유를 알아야 한다.

그것을 모르고 공짜로 먹으면 큰일 날 수도 있는 게 인생이다.

“덩치가 너무 큰 것 같습니다.”

“7조짜리 회사를 먹은 사람 입에서 나올 말은 아닌 것 같은데.”

“오늘 광산 지분을 매각했습니다. 상대측과 해야 할 일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런 건 밑에서 하는 거지, 자네가 할 일이 아니야. 선재종합기계를 인수해서 잘 관리해 주면 선재중공업도 한번 생각해 보겠네.”

정훈은 박 회장의 얼굴을 보았다.

자신만만한 표정이었다.

무엇이 박 회장에게 뿌리 깊은 자신감을 주는지 이해 할 수 없었다.

그의 힘이 어느 정도길래 저런 확신이 드는지 궁금했다.

“자신 관리 공사가 대부분의 지분을 가지고 있습니다. 회장님께서 결정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닌 걸로 생각합니다.”

“크흠, 내가 모든 걸 말해 줄 수 없지만, 내 의지가 개입한다면 가능하니 그 점은 걱정하지 말게.”

그의 힘이 어디까지인지 확인해야 했다.

“선재종합기계는 그대로 두고 선재중공업만 갖고 싶습니다.”

불쾌한 기분이 얼굴에 그대로 드러났다.

“2조짜리 회사가 크다고 하면서 8조가 넘는 회사를 넘보나?”

“선재기계는 계획에 없었지만, 선재중공업은 이미 노리고 있었습니다. 사실 그것 때문에 영산미포조선을 인수했습니다.”

“뭐?”

박 회장뿐만 아니라 앉아 있는 사람들 모두 놀란 얼굴이었다.

하긴, 대부분의 사람이 같은 반응이었다.

적자투성이 영산미포조선을 인수한 이유를 누구도 알아채지 못했다.

“허허, 이제야 자네 수가 읽히는구먼. 하지만 선재중공업은 너무 일러. 선재 기계를 정상화하고 일자리를 만든다면 이야기가 달라질 거야. 나도 명분이 있어야 하지 않나. 자고로 무엇이든 때가 있는 법이지.”

박 회장의 말을 듣고 정훈은 결론 내렸다.

선재종합기계는 자신이 좌지우지할 힘이 있다.

하지만 선재중공업은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정도였다.

그것이 그의 한계였다.

결국 선재종합기계 인수는 다음 단계로 가기 위한 시험이었다.

박 회장은 출제자였고 정훈은 열심히 문제를 풀어야 하는 학생이었다.

시험도 지겹고 고등학교도 졸업했다.

상황은 자신이 만들어야 했다.

“오늘 제안은 못 들은 걸로 하겠습니다. 선재종합기계는 이미 잘 굴러가고 있습니다. 좋은 매수자가 나타날 겁니다. 그럼 저는 내려가 보겠습니다.”

정훈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박 회장은 표정을 찡그렸다.

“자네 아비와는 완전히 다르구먼, 정의를 우선했는데, 자넨 욕심이 더 앞서는 것 같군.”

정훈은 박 회장의 얼굴을 바라보았지만 그의 의중을 파악하기 힘들었다.

복합적인 감정이 그의 얼굴에 서려 있었다.

“얼굴도 모르는 제 아버지는 정의롭게 살려다 그렇게 빨리 가셨습니다. 하나밖에 없는 아들도 잃어버리고, 할머니만 남겨 두고 가셨습니다. 그래서 저는 탐욕스럽게 오래 살 겁니다. 회장님.”

“네 이노옴!”

박 회장의 일성이 정훈을 향했다.

“네 아비가 무엇을 위해 그랬는지……. 누구를 위해서 그랬는지 진정 모르느냐?”

“알고 있습니다. 실체도 없는 정의로운 내일을 위해서였겠죠. 하지만 중요한 건 살아남는 것, 성공하는 겁니다. 정의롭던 제 아버지는 실패했습니다. 저는 결코 그렇게 살지 않을 겁니다.”

정훈의 말에 박 회장은 대꾸하지 못했다.

그의 심장을 찌르는 말이었다.

실패했고 그래서 무수한 사람들이 고통을 받았다.

정의로운 방법으로 적들을 이 땅에서 몰아내고 싶었다.

그러나 그들은 야차보다 더 잔인한 방식으로 자신들을 도륙했다.

“내가 자식이 없다.”

“크흠, 어르신.”

조영진의 맞은편에 앉은 남자가 입을 열었다.

짧게 자른 단정한 머리와 거친 피부.

의지 가득한 눈빛.

가슴에 길고 날카로운 칼을 품은 무사!

“정보사 곽동식입니다.”

그는 역시 군인이었다.

“우리 모두 말할 수 없는 많은 사연을 가지고 있습니다. 나는 동생을 잃었고 당신은 부모님을 잃었고, 박 회장님도 아들을 잃었습니다. 실패했다고 그들이, 아니 당신 부친이 꿈꾸던 세상과 그들의 노력을 깎아내리지는 말았으면 합니다.”

그의 눈에 잠시 슬픔이 서렸다.

정훈은 할 말을 잃었다.

얼마나 많은 사람의 희생이 있었는지 몰랐다.

정훈은 흔들리는 마음을 다잡았다.

자신의 속내를 드러내선 안 된다고 다짐했다.

천지회를 무너트리기 위해선 정의감이 필요한 것이 아니다.

그들보다 더 많은 돈과 힘이 필요하다.

그러면 그 돈과 힘 앞에 천지회에 충성하는 사람들이 무릎 꿇을 것이다.

“유감입니다. 저는 제 아버지만 희생된 줄 알았습니다.”

“그들을 이 땅에서 몰아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똑같은 일이 반복됩니다. 이 땅에 정의를 바로 세워야 합니다.”

곽동식은 신념에 찬 얼굴이었다.

“정의를 바로 세운다. 어떻게 세울 겁니까?”

정훈이 물었지만 대답하지 않았다.

그때 상황을 지켜보던 선재종합기계 이선호가 나섰다.

“윤정훈 씨에게 나쁘지 않을 거라 생각했습니다. 당연히 감사할 줄 알았죠. 2조짜리 회사입니다. 그래서 아주 당황스럽군요. 쉽게 받아들일 줄 알았는데. 선재종합기계를 거절하는 이유가 있습니까?”

“딱히 없습니다. 다만 선재중공업에 집중하고 싶습니다.”

“선재중공업은 원한다고 가질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정의로우면 가질 수 있습니까?”

누구도 대답하지 않았다.

조영진 의원이 나섰다.

“미안하지만 잠깐만 나가 있어 줄 수 있나? 불러 놓고 미안하구먼.”

“괜찮습니다.”

정훈은 자리에서 일어나 방을 나섰다.

*

“박 회장님 이렇게 된 거 저 친구에게 맡기는 수밖에 없습니다.”

조영진이 박 회장을 설득했다.

“그렇게 한 번에 일을 진행하려다 또다시 저들의 습격을 받으면 큰일이야. 자네도 알지 않나.”

“그건 그렇지만…….”

“이번에는 안심하셔도 될 것 같습니다.”

곽동수가 끼어들었다.

“현수 통해서 듣는데, 천지회와 관련된 조폭들을 쓸면서 은밀히 힘을 키우는 중이라고 합니다.”

“그래?”

박 회장은 정훈이 한 의외의 일에 만족한 얼굴이었다.

“어르신, 저 친구의 추진력을 봤을 때는 순차적으로 하는 것보다는 한 번에 진행하는 게 더 좋습니다. 이미 거대한 회사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선재기계 인수한 다음에는 집중적인 견제가 들어올 게 뻔합니다.”

“흠…….”

박 회장이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침묵이 이어졌다.

결단을 내려야 한다.

저들이 방산 회사를 가져가면서 전쟁 위기를 유도할 수 없도록 해야 한다.

지금 그들의 앞에 놓인 선택지는 오직 한 사람뿐이었다.

***

호텔 복도에서 잠시 생각을 정리하고 있을 때 문이 다시 열렸다.

안으로 들어간 정훈은 아까처럼 박 회장의 맞은편에 앉았다.

“선재종합기계를 논리를 외국인들이 있습니다. 검은 머리 외국인. 들어보셨습니까?”

모를 수 없었다.

자신이 검은머리 외국인이었다.

레전드 컴퍼니가 아직 한국에 본격적인 투자를 하진 않았지만, 외국인으로 가장하여 한국에 들어올 계획이었다.

“네, 알고 있습니다.”

“선재종합기계를 노리른 검은 머리 외국인들이 있습니다. 천지회의 자금이죠. 그들을 막아야 합니다.”

“이유가 있습니까?”

“선재종합기계는 중요한 방산업체입니다. 방산업체를 자신들의 통제에 두려는 겁니다.”

“박 회장님이 인수하시면 되지 않습니까?”

“견제가 심합니다. 그래서 새 인물이 나서야 하는데 윤정훈 씨가 적임자죠. 우리는 이걸 먼저 성공한 다음 선재중공업을 인수하려 했습니다. 우리도 제일 중요한 건 선재 중공업입니다. 거긴 대형 함정을 만들 수 있는 업체입니다. 그들이 그곳까지 장악하면 무서운 일이 벌어질 수도 있습니다.”

“무서운 일이라면”

“가능성은 희박하지만……”

“크흠, 그 부분은 알 필요가 없는 것 같습니다.”

곽동식이 이순호를 제지했다.

“아, 죄송합니다. 하여튼 그렇습니다. 우리는 순차적으로 가려고 했습니다. 동시에 일을 진행하다가 잘못되어 천지회에서 다 가져가면 큰일이거든요.”

“실패하면 큰일이죠. 하지만 성공하면 됩니다. 선재 중공업 인수 준비하겠습니다. 그리고 선재종합기계도 같이 하겠습니다.”

“실패하면요?”

“일할 때 실패부터 생각합니까? 분위기를 보니 저 아니면 할 사람도 없지 않습니까?”

모두의 표정이 구겨졌다.

들키고 쉽지 않은 자신들의 약점이 드러난 순간이었다.

정훈도 그들의 당황한 표정을 놓치지 않았다.

박 회장은 나설 수 없고 그에 필적할 만한 자금력을 가진 자는 없다.

오직 자신만이 박 회장을 대신할 수 있다.

정훈은 상황을 주도하고 싶었다.

할머니의 말이 생각났다.

‘정훈아 사업은 남의 돈으로 하는 거야.’

“박 회장님이 인수대금의 40퍼센트를 책임져 주십시오.”

“뭐? 40퍼센트나?”

박 회장이 정훈을 한 참 보았다.

그러고는 슬며시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현정옥의 손자구먼. 정의롭진 못해도 돈 냄새는 타고났구먼“.

“그게 무슨 뜻입니까? 어르신?”

이선호가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제 돈을 안 쓰겠다는 거 아닌가. 도둑놈 심보지. 허허허.”

“어차피 저밖에 나설 사람이 없는데 제가 돈까지 댈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 순진한 정의감보다는 정훈이 너의 욕심이 더 필요할지도 모르겠구나. 마지막 순간에 네 힘이 필요할지도.”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정훈도 마찬가지였다.

자기 돈은 위기의 순간에 사용되어야 한다.

자리에서 일어난 정훈은 박 회장에게 말했다.

“저는 실패를 모릅니다. 선재중공업 인수하겠습니다. 많은 도움 부탁드립니다.”

판이 바뀌었다.

자신들의 얼굴마담으로 사용하려던 윤정훈.

그가 앞으로 있을 인수전의 주인공이 되었다.

박 회장은 대답하지 않았다.

정훈의 이채가 서린 눈만 보았다.

자신은 실패에 대한 두려움이 앞섰다.

윤정훈이 할 수 있을까 하는 불안이 더 컸다.

하지만 그밖에 없었다.

그는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방을 나선 정훈은 전화기를 꺼냈다.

“할리퀸, 정보사 곽동식, 선재종합기계 재무이사 이선호, 조영진 의원, 그리고 명동 박 회장 관련해서 싹 털어 봐요. 재밌는 게 나올 것 같아요.”

“네, 사장님.”

정훈의 말을 들은 할리퀸의 목소리가 들떴다.

***

“회장님께서 찾으십니다, 도련님. 축하합니다.”

한현동 비서실장은 일송그룹 송철호 회장의 둘째 아들 송지호에게 전화를 걸었다.

“실장님 도움이 컸습니다.”

“아닙니다. 도련님.”

“윤호는 치료를 잘 받고 있습니까?”

“네, 도련님 지시대로 최상의 상품을 공급하고 있습니다.”

“다행이네요. 너무 많이 주지 말라고 하십시오. 불쌍한 동생 우울하지 말라고 주는 선물입니다. 재미만 줘야지. 약물 중독으로 죽어 버리면 서로 피곤하지 않습니까?”

“네, 주의하라고 이르겠습니다.”

“그럼, 지금 바로 올라가겠습니다.”

전화를 끊은 일송그룹 기획조정실장 송지호의 얼굴에 웃음이 가득했다.

드디어 눈엣가시 같던 동생을 보냈다.

근본도 없이 집 안으로 들어온 놈.

어울리는 방법으로 집안에서 몰아냈다.

흡족했다.

아버지가 얼마 만에 자신을 부르는지 기억이 가물가물했다.

회장실로 향해 길게 난 복도를 보았다.

그 길을 걸으며 다시 한번 다짐했다.

이 길은 자신의 것이다.

온몸에 힘을 꽉 주었다.

다시 잡은 기회, 이번에는 절대 실수하지 않는다.

회장실 문을 두드리며 크게 외쳤다.

“회장님 기조실장입니다.”

“들어와.”

현금왕의 천재손자, 재벌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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