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8화
“술 한 잔 따르는 게 그렇게 어려운 일인가?”
반말이었다.
대한민국 산업은행장인 자신에게 저 젊은이가 지껄인 말이었다.
아무리 돈이 많아도.
‘미친놈인가?’
그런데 귀에 들리는 돈소리!
천만, 이천, 삼천.
비웃었다.
그깟 돈 신경 쓰지 않아도 될 만큼 충분했다.
그런데,
일억, 이억.
단위가 달라지니 마음이 흔들린다.
사람 마음이 간사하다.
저 빈 잔에 술 한 잔 따르면 몇억을 얻을 수 있다니.
돈이 이래서 좋은 건가?
처음 보는 애송이에게 두 손으로 공손히 술을 따르고 싶어졌다.
머리를 세차게 흔들었다.
하지만 숫자가 올라갈수록 손은 잔을 향해 갔다.
산업은행장 이명준은 술병을 들었다.
그가 마지막으로 들었던 숫자가 15억이었다.
비굴한 웃음을 얼굴에 가득 띄운 채 그에게 말했다.
“자, 한잔 받지. 술 한 잔 따르고 15억이라니 허허, 역시 현금왕의 손자야!”
반말로 술을 따르며 이명준은 자신의 자존심을 지켰다.
윤정훈의 술잔 가득히 술을 부었다.
그를 보았다.
얼굴에 피식하는 웃음이 지나갔다.
술잔을 잠시 본 다음 잔 속 가득한 술을 이명준의 얼굴에 끼얹었다.
이명준의 얼굴이 구겨졌다.
꽉 깨문 입술 안에서 꽈지직 하는 소리가 새어 나왔다.
“이……!”
“장난합니까? 공손히!”
잠깐 생각한 그는 곧 다시 술병을 손에 쥐었다.
무엇이든지 한 번이 어렵지 두 번은 쉽다.
다시 금액이 올라가기 시작했다.
새로운 조건이 덧붙였다.
“숫자가 무한정 올라가는 건 아닙니다. 이 행장.”
“알겠……습니다.”
비굴한 얼굴과 공손한 말투였다.
어느새 돈의 노예가 된 그.
그에게 중요한 건 자존심도 명예도 아닌 돈이었다.
10억에 살인도 해 주는 세상,
15억에 공손하게 술 한 잔 따르지 못할 이유? 없다.
한 손으로 술을 따라서,
앉아서 술을 따라서 실패.
……마지막으로 그는 일어서서 공손히 술을 따랐다.
정훈은 그것을 한잔 쭉 들이켰다.
“한 잔치고는 많이 비싼 술이군요. 마지막 숫자가 19억이었나?”
“네.”
정훈은 자신의 옆에 서 있는 그를 올려 보았다.
그의 눈에서 탐욕의 불길이 치솟았다.
온갖 모멸을 감수하고 19억을 몇 분 만에 벌었다.
“재물 운이 좋네요. 20억에 끝내려 했는데.”
“감사합니다. 약속은 지키셔야죠?”
“물론……. 그런데.”
“그런데라뇨?”
이명준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언제까지 준다는 말을 안 했네.”
-꽝
“나랑 장난하는 거야? 이 핏덩이 같은 놈이?”
그의 주먹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돈 앞에서 바로 자세를 바꿨다.
근본이 글러 먹은 놈이라고 생각할 때였다.
아니나 다를까 2년도 남지 않은 한 줌 권력에 취해 정훈을 향해 주먹을 뻗었다.
60이 넘은 나이, 손에 쥔 권력이 많아서 주먹은 한없이 느려 터졌다.
-퍽
정훈은 벽에 처박히며 쓰러진 이명준에게 다가갔다.
술병에 담긴 술을 그의 머리에 쏟아부었다.
“지금까지 네 놈이 한 더러운 짓들을 생각하면……. 최영훈 사장, 유시훈 사장, 민지윤 비서, 최은하 과장, 배현진 인턴…….”
사람들의 이름이 나올 때마다 이 행장의 얼굴이 파랗게 질렸다.
그가 돈을 뜯어냈던 사장들, 권력을 이용해 유린했던 여자들의 이름들이 정훈의 입에서 나왔다.
“19억을 언제 받을 수 있냐고?”
“……아, 아닙니다. 죄송합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글쎄, 내가 할 수 있는 용서가 있을까?”
무릎을 꿇은 채 살려 달라고 빌고 있는 이명준 산업은행장을 본 정훈이 입을 열었다.
“아직도 19억을 받고 싶어?”
“아, 아닙니다.”
“아니야, 그래도 약속을 했으니 지켜야지. 19억을 받고 싶으면 저들에게 무릎 꿇고 사과해. 금전적인 보상을 포함해서. 그리고 뒤에 있는 사람들을 데려와.”
“그건…….”
머뭇거리는 그를 향해 정훈은 쐐기를 박았다.
“안 해도 상관없어. 요새 통제가 안 되는 인터넷 때문에 천지회가 꽤 골치 아프다고 하던데. 내가 아는 모든 걸 확 풀어 버릴까? 그럼 그 자리에서 바로 내려와야 할 텐데.”
“제발”
“1주일 주지. 당신 뒤에 있는 그 사람이랑 밥 한번 먹읍시다.”
“…….”
이명수 행장은 대답하지 않았다.
“뭐, 마지막 자존심 그런 겁니까? 그런 건 아까 지켰어야지. 마음대로 하세요.”
정훈은 손에 든 술병으로 그의 머리를 강하게 내리쳤다.
-윽
“당신이 한 짓에 비해 많이 참은 거야.”
“으으으.”
바닥에 쓰러져 벌레처럼 꿈틀거리는 그를 두고 밖으로 나왔다.
속이 후련했다.
그는 자신의 지위를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자신의 뒤에 선 자를 데려올 것이다.
정훈은 확신했다.
이제 그의 뒤에선 자들을 만날 차례다.
***
정훈은 곽현수와 함께 레전드 컴퍼니 사무실로 갔다.
점심시간이라 아무도 없었다.
깔끔하게 정리된 사무실을 보았다.
각자의 자리를 보며 사람들을 생각했다.
차영미, 이병석, 천진혁, 그리고 곽현수의 책상까지.
여전히 빈 곳이 많은 이곳에 더 많은 사람을 채워야 한다.
생각에 잠겨 있을 때였다.
“야, 너 이 새끼 죽었어!”
“윽, 아파요.”
차영미가 천진혁의 목에 헤드락을 걸며 사무실로 들어왔다.
“아, 그만 좀 해요!”
“내가 재활용 비우라고 했어? 안 했어?”
“알았어요. 오늘 비울게요.”
그 모습을 보고 정훈의 얼굴에 미소가 스쳐 지나갔다.
허물없이 가까워진 게 분명했다.
두려워하던 걸 직시하면 문제가 해결된다.
직시하지 못해서 두려움이 생길 뿐이다.
“흠, 사이가 꽤 좋아졌네요.”
“아니에요. 제가 저 집에서 들어가서 완전 가정부 역할을 하고 있어요.”
이병석의 말에 따르면 천진혁이 요리를, 설거지, 이병석은 청소, 빨래를 한다고 했다.
그럼 차영미는?
“전 아무것도 안 해요. 여왕벌이죠.”
생긴 건 여왕보다는 시녀에게 가까운데 여왕벌이라…….
사람을 얼굴로 평가할 수 없었다.
“사장님 덕분에 좋아진 것 같습니다.
영미는 진혁이를 친동생처럼 대해요. 그리고 진혁이도 영미를 가족처럼 많이 의지하고 있습니다.”
“진혁 씨 심리 치료도 잘 받고 있나요?”
“네, 의사 말로는 상당히 좋아지고 있답니다. 사회성 교육만 되면 정상인과 다를 바 없다고 합니다. 그리고 영미가 사소한 사회적 규칙들을 잘 가르쳐 줍니다. 그럴 땐 엄마처럼 따르죠.”
“잘됐네요. 두 사람이 서로 아픈 부분을 잘 보듬고 있어서 다행입니다.”
“사장님 덕분이죠. 사실 저는 반대했거든요. 사이가 완전히 틀어질 줄 알았습니다.”
“두려운 걸 마주하면 더 이상 두렵지 않습니다. 그 말대로 했을 뿐입니다.”
정훈은 그 말을 하고 자리에 앉았다.
그런 정훈의 뒷모습을 보며 이병석은 나이답지 않은 그의 삶에 대한 통찰과 지혜에 깜짝 놀랐다.
하긴 고아에서 생명의 위협을 딛고 여기까지 온 현금왕의 손자.
평범한 자신과는 완전히 다른 그의 인생.
고통 속에서 얻은 값진 지혜라고 생각했다.
“시작할까요?”
정훈이 고개를 끄덕이자 천진혁은 안광을 뿜으며 회의를 시작했다.
“이번 인수전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천지회의 공격을 방어하는 것입니다. 자산관리공사의 최고가 낙찰 발표 이후로 다양한 곳에서 공격이 들어오고 있습니다. 입찰 마감일까지 조건만 변경되지 않으면 승산이 있습니다.”
“중요한 건 예상 공격 지점이겠죠?”
“네, 국세청과 검찰을 통해서 아마 신화증권으로 공격할 것 같습니다.”
“대비책은요”
“문제가 없도록 철저히 몇 번이고 검토했습니다.”
“전체 문서를 전산화해 해외 서버에 보관했습니다.”
“그들이 자료를 조작할 수도 있습니다. 그 점도 고려해 주세요”
“그리고 원하신다면…….”
천진혁이 차영미를 힐긋 보았다.
정훈도 고개를 돌려 그녀를 보았다.
“원한다면 박살 낼 수 있어요. 국세청, 검찰 서버 모두요.”
눈에 서린 광기를 보아 진짜 가능한 것 같았다.
솔깃한 제안이었다.
한편으론 ‘그렇게 허술한 건가?’ 하는 생각이 들 때였다.
“저랑 영미 누나, 그리고 병석이 형이 있으니까 가능한 일입니다.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그리고 우리나라는 아직 보안에 대한 관심이 적어 아주 허술합니다.”
“오케이, 그런데 호칭이 많이 바뀌었네요.”
“아, 네.”
천진혁이 쑥스러운 듯이 웃었고 곽현수는 감정 상한 얼굴이었다.
“이거 원 혼자 사는 사람 서러워서 살겠나. 나도 그 집에 좀 낍시다.”
“저야 환영이죠!”
차영미가 환영의 제스처를 하자 곽현수는 고개를 저었다.
다시 천진혁이 회의를 진행했다.
“공격 루트는 예상이 되는데 언제인지가 문제입니다. 빨리 왔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검찰에서도 꼭 오면 좋겠는데.”
진혁의 말에 차영미는 사악한 미소를 지었다.
“저는 세 군데 다 왔으면 좋겠어요. 검찰, 경찰, 국세청, 아 국정원도 오면 대한민국 기밀 대부분을 손에 쥐는 거죠.”
그녀의 말은 압수수색으로 그들이 컴퓨터를 들고 가 내부 인트라넷에 연결하는 순간 모든 정보가 해외에 있는 우리 서버로 전송된다고 했다.
은밀한 프로그램이라서 쉽게 발견할 수 없다.
프로그램은 자칭 천재 이병석이 만들었다.
“기다려 보죠. 참 저번에서 폐광에서 발견한 자료는 다 해석했습니까?”
정훈이 묻자 곽현수가 대답했다.
“네, 천지회에서 키우는 아이들에 대한 내용이었습니다. 천지회 키즈들이죠. 똑똑한 아이들은 엘리트로, 운동 신경이 좋은 아이들은 군대로 들어가 블랙 요원들로 키워지고 있었습니다.”
“위치는요?”
“추적 중입니다. 아직 정확하게 나오진 않았습니다. 그리고 장부에서 납품실적이 있어 조사해 보니 아무래도 마약 공장 같습니다.”
“흠, 아무래도 이번 인수전이 끝나면 해야 할 일이 많을 것 같은데요. 그 천지회 키즈부터 공장까지 힘이 많이 필요하겠군요.”
“네 박창수 씨가 준비하고 있습니다. 최정예로 모으겠습니다.”
“네, 좋아요. 그럼 오랜만에 소고기나 먹으러 갈까요?”
정훈의 제안에 차영미는 천진혁을 힐긋 보더니 고개를 저었다.
“사장님, 오늘 시간 되시면 우리 집에 초대할게요. 무이자 대출로 영혼까지 끌어모아 산 집, 구경은 하셔야죠. 우리 진혁이 요리가 끝내줘요!”
정훈은 시계를 보았다.
다혜와 함께하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좋아요. 오늘은 일찍 마치죠. 참 제 일행도 데려가도 되죠?”
“누구요? 은수 씨요?”
차영미가 환하게 미소 지었다.
“그럼 스칼렛도 오는 건가요?”
천진혁과 이병석이 입술이 길게 늘어졌다가 순식간에 무표정하게 바뀌었다.
차영미가 서늘하게 웃고 있었다.
“아뇨, 제 친구를 소개해 줄까 해서요.”
“네, 환영입니다.”
정훈은 곽현수에게 자동차 키를 받아서 그녀에게 갔다.
도서관에 도착해 전화를 걸었다.
얼마 뒤 계단에 있는 창문으로 그녀가 고개를 내밀었다.
팔을 세차게 흔들었다.
“정훈아!”
정훈이 있는 곳까지 달려와 그의 품에 와락 안겼다.
정훈도 그녀를 꼭 껴안았다.
“보고 싶었어, 다혜야”
그녀가 정훈을 올려다보며 큰 두 눈을 깜빡였다.
오늘따라 유난히 붉은 그녀의 입술.
까치발을 세우며 조심스레 다가오는 박다혜의 입술에 정훈은 자신의 입술을 가져다 댔다.
주변의 시선은 아랑곳하지 않고 긴 시간 그녀를 느꼈다.
“하, 평소랑 다르게 조금 거치네……. 너, 오늘 남자다웠어.”
발그레한 볼을 한 그녀는 싱긋 웃으며 정훈의 품 안겼다.
정훈은 그녀를 롤스로이스에 태웠다.
서울대 최고의 미인에 상위 0.1퍼센트만 탈 수 있는 차량,
사람들의 질투 어린 시선이 느껴졌다.
그런 시샘을 뒤로한 채 차영미의 집으로 향했다.
10억이 넘는 그녀의 집은 크고 깔끔함 그 자체였다.
레전드 컴퍼니 사무실과 비슷하게 아이보리 원톤의 단정하고 차분한 분위기였다.
모두 다혜를 환영했다.
처음 본 사람들은 그녀의 미모에 감탄했고
그녀 옆에 선 정훈을 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잘 어울리는 두 사람이라 생각했다.
공부에 지쳐 있던 다혜도 수다를 떨며 즐거워했다
우리는 거대한 전쟁을 앞두고 짧지만 여유로운 시간을 보냈다.
***
윤정훈이 선재중공업에 관심이 있다는 소문이 퍼져나갔다.
그리고 바로 공격이 시작되었다.
예상보다 거칠게 공격했다.
신화중공업으로 국세청과 고용노동부 근로감독관, 그리고 검찰 압수 수색이 들어왔다.
신화증권으로도 검찰 수사관들이 들이닥쳤다.
신화미포조선에서도 행정감 독이 들어왔다.
동시다발적인 공격.
정신을 차릴 수 없을 만큼 밀어붙여졌지만 개의치 않았다.
신화미포조선이 의외였지만 중요하지 않았다.
모두 철저하게 대비되어 있었다.
어서 압수 수색해서 그들의 서버에 이병석이 만든 악성코드가 숨어들길 기도했다.
그러면 국세청의 모든 자료가 들어온다.
검찰이 가지고 있는 자신들의 비밀 정보도 손에 넣을 수 있게 된다.
정훈은 일련의 사건 속에서 일송그룹 송철호의 불타는 의지를 느꼈다.
그렇다면 겁먹은 척해 주는 것도 어린 사람의 예의다.
전화를 걸었다.
“윤정훈입니다. 송 회장님.”
“자네가 웬일인가?”
목에 힘이 잔뜩 들어가 있었다.
“꼭 이렇게까지 해야 합니까?’
“흠흠, 내 것을 노리는 사람을 싫어해서. 이거 미안하게 됐네.”
“지금이라도 손 떼겠습니다. 압수 수색만큼은 중단해 주십시오.”
“크흠, 이미 시작한 거, 내가 좋은 로펌을 알려 주겠네.”
“회장님!”
“그럼 이만 끊네. 하하하.”
정훈은 끊긴 전화기를 물끄러미 보았다.
‘노친네 눈치도 없어서 연기인지 진짜인지 구분도 못 하네.’
자신이 생각해도 이 정도면 할 만큼 했다고 생각했다.
필요 없는 서류는 다 가져갔고 회계장부 뒤져 봐야 아무것도 나올 게 없다.
그럼 이제 오늘 나온 사냥개들을 혼내야 할 시간이었다.
실패한 사냥, 주인을 대신해 자신이 제대로 혼내야겠다.
정훈은 천진혁에게 전화를 걸었다.
현금왕의 천재손자, 재벌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