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2
오랜만에 찾은 바닷가 횟집.
정훈은 낡은 알루미늄 샷시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여전히 손님은 아무도 없었다.
테이블에는 신선한 횟감이 가득 차려져 있었다.
사장님도 늘 그렇듯 무심한 미소를 지었다.
“오셨습니까? 의원님 곧 도착하실 겁니다.”
“네.”
정훈은 상 앞에 앉았다. 전복과 멍게회 그리고 우럭회가 눈앞에 보였다.
아직 저녁을 먹지 않았다.
참기 어려울 만큼 맛있어 보였다.
-드르륵
문이 열리며 한층 젊어진 조영진이 들어왔다.
그리고 이순호 재무이사도 들어왔다.
“오셨습니까?”
“축하드립니다. 도련님!”
“축하하네.”
들어오자마자 덕담을 건넸다. 정훈은 쑥스러웠다.
“감사합니다. 다 여러분들이 도와주신 덕분입니다.”
“도움은 무슨, 혼자서 잘하던데.”
조영진이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저녁 아직 못 먹었지? 시장할 텐데 어서 먹지.”
술이 오가고 신선한 횟감과 정갈하게 차려진 기본 안주를 먹었다.
어느 정도 배가 찼을 때 조영진이 정훈을 보며 말했다.
“선재종합기계는 어떻게 할 텐가?”
“그냥 내버려 두려고 합니다. 제가 경영에 개입하지 않은 지금도 잘 굴러 가고 있습니다. 굳이 손댈 필요 없습니다.”
조영진도, 이순호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일송도 보고만 있을 건가?”
정훈은 조영진을 보았다.
그의 분위기가 바뀌어 있었다.
‘일송이 목적이었나?’
“아닙니다. 송지호가 회장에 취임한 지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 잠깐은 회장 자리를 즐길 수 있도록 해야죠.”
“크흠, 꽤나 자비롭군.”
조영진 의원이 살짝 비웃은 다음 말을 이었다.
“나는 걱정이네.”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천지회에서 일송을 아귀다툼하듯 나눠 가질 겁니다. 그러기 전에 송지호에게서 가치 있는 회사 모두를 가져올 계획입니다. 가능하면 전부를요.”
“역시 내 생각이 틀리지 않았어. 이미 준비하고 있는 건가?”
정훈은 고개를 끄덕였다.
조영진의 얼굴에 서렸던 근심은 순식간에 화색으로 변했다.
현재 일송그룹의 지주회사인 일송홀딩스는 한호그룹으로부터 오천억을 빌렸다. 그에 대한 담보로 주식 30퍼센트를 한호그룹에 제공하고 있다.
5천억을 갚으면 상관없겠지만 갚지 못하면 30퍼센트가 날아간다.
아니나 다를까 송철호가 잡혀간 이후 일송그룹은 급격한 자금경색에 시달리고 있다.
“의원님, 천지회에서 이미 작업 중인 것 같습니다. 아귀처럼 일송의 모든 것을 나눠 가지려 합니다. 이미 언론과 증권가 찌라시를 통해서 일송의 자금난 심하다는 유언비어를 퍼트리고 있습니다.”
“실체도 없는 유언비어가 사실이 되곤 하지. 곧 자금난에 빠지겠구먼.”
“네, 일송의 위기가 신화에겐 기화가 됩니다. 조만간 만나서 처리하겠습니다. 좋은 회사, 잘 골라 오겠습니다.”
정훈은 회귀 전의 기억을 떠올렸다.
일송그룹에는 돈 되는 회사가 많았다.
특히 첨단 산업 쪽으로 알짜배기 회사들도 즐비했다.
물론 지금은 적자를 보는 천덕꾸러기들.
정훈은 자신의 지식을 바탕으로 한, 남들과는 다른 입맛을 가지고 있었다.
“그럼 걱정 안 해도 되겠구먼. 흐흐흐.”
조영진은 만족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정훈은 여전히 의문이었다.
만나자고 한 이유가 이것뿐일 리 없었다.
“어른신, 오늘 저를 만나고 싶어 한 이유가 따로 있는 거 아닙니까?”
“내가 자네를 만나고 싶어 했나?”
조영진이 아닌 척 농을 쳤다.
“자네 눈치가 대단한데, 허허.”
조영진은 눈앞에 있던 술잔을 비웠다.
“궁금해서 그러네. 이 나라가 앞으로 어떻게 될 건지. 몇 수 앞을 본다는 자네 의견이 필요하네.”
‘뭐? 내가 점쟁이도 아닌데 어떻게 몇 수 앞을 봐?’
점쟁이라고 생각하는 걸까?
하지만 생각해 보면 그런 평판이 틀리지도 않았다.
그의 예측은 지금까지 단 한 번도 틀린 적이 없었다.
“대선 때문입니까?”
“그렇지. 그리고 더 이상 무소속으로 있을 수만은 없을 것 같네. 이왕이면 차기 여당에 붙어야 하지 않겠나?”
정훈은 조영진을 보았다.
그는 더욱 커야 할 사람인데 무소속이란 제약이 그의 성장을 막고 있었다.
자신은 다음 대통령이 누구인지, 얼마나 드라마틱한 결과로 당선되는지 알고 있다.
그래서 지금 상황에선 그의 당선을 믿지 않을 것이다.
어떻게 할까?
원하는 답을 주기로 했다.
그러면 조영진 의원은 앞으로 자신의 의견을 더욱 신뢰할 것이다.
“구한수 후보가 될 것 같습니다.”
일단 알려 줬다. 역시나 믿을 수 없는 표정이다.
하긴, 지금 누구도 정훈의 말을 믿지 못할 것이다.
대선후보로서는 믿을 수 없이 낮은 10퍼센트의 지지율.
여당에서도 후보를 교체하자는 이야기가 들끓었다.
정훈의 말을 들은 조영진은 당황한 표정이었다.
분명 정몽훈이나 이찬수가 되겠다고 생각하는 게 상식이었다.
“근거가 있나?”
‘근거?’
대답할 수 없었다.
사실이지만 이유를 몰랐다.
대답해 줄 수 없는 상황에서 아주 좋은 단어가 떠올랐다.
“여론입니다.”
“뭐? 지금 지지율이 바닥인데.”
“그리고 시대 정신입니다.”
“시대 정신이라…….”
조영진이 정훈을 보며 낮게 읊조렸다.
그것이라면 이해가 된다.
그가 시대 정신을 대변한다면 대통령이 될 수 있다.
하지만 솔직히 신뢰가 가지 않는다.
너무 기대가 컸던 건가?
혹시나 함부로 지껄이는 건 아닌지 의심이 들기도 했다.
조영진의 귀에 정훈의 목소리가 다시 들렸다.
“정치에 대해서는 잘 모릅니다. 다만 앞으로 누군가를 선택하시면 끝까지 그의 곁을 지켜야 합니다. 그것이 의원님이 더욱 크게 성장할 길입니다.”
흐음.
정훈은 그의 성격상 구한수에 끌리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확신하지 못하기 때문일 것이다.
앞으로 구한수가 겪을 풍파를 함께 넘는다면 그는 단번에 대통령의 최측근으로 올라설 것이다.
조영진이 정훈의 눈을 한동안 보았다.
“내 마음을 여러 번 확인한 얼굴이구먼.”
“죄송합니다.”
“아니야. 자네 말이 맞아. 구한수를 지지하고 싶은데 확신이 서지 않았어. 자네 말을 들으니 편안해지네.”
“감사합니다.”
“그럼 이제 술이나 마실까?”
모두 잔을 채웠다.
조영진도, 이순호, 정훈도.
서로 잔을 부딪쳤다.
차가운 알코올이 목을 타고 내려왔다.
정훈은 조영진을 보았다.
그리고 대선을 생각했다.
이번은 아니지만, 다음엔 가능하다.
앞으로 5년이면 자신의 힘으로 대통령도 만들 수 있을 것이라 확신했다.
***
송지호를 통해서 알게 된 사실 중 하나.
방산업으로 유명한 한호그룹이 일송그룹의 지주회사인 일송홀딩스 주식 30퍼센트를 담보로 잡고 있다.
정훈은 한호그룹으로가 그 문제를 논의하고 싶었다.
한호그룹 한판수 회장실에 들어섰다.
완전히 벗겨진 머리, 은색 안경을 쓴 그의 인상은 날카로웠다.
60이 채 되지 않은, 재벌 회장으로서는 아직 젊은 나이였다.
“안녕하십니까? 윤정훈입니다.”
“반갑소. 한판수요”
소파에 털썩 앉은 그는 정훈을 보며 말했다.
“단도직입적으로 묻겠소. 일송 때문이요?”
“네. 제가 오천억 드리겠습니다. 저에게 채권을 넘기시죠.”
“오천억에 넘긴다……. 그럼 윤정훈 사장은 오천억에 일송을 가질 수도 있겠군.”
“저는 가질 수 있지만, 한호그룹은 절대 가질 수 없습니다.”
정훈의 말에 그의 이마가 찡그려졌다.
“설마, 윤 사장이 일송을 지원하겠다는 말이요?”
“송지호가 돈 빌려 달라고 할 데가 저밖에 더 있습니까? 친구라 믿었던 천지회 식구들이 하이에나처럼 일송을 노리고 있지 않습니까?”
“그건 오해요. 사업하는 사람이 감상에 빠져서 일을 그를 칠 수 있나, 회사를 키우려고 하는 일이지.”
한판수의 말에 정훈은 기가 찼다.
친구, 동업, 파트너, 모두 헛소리다.
그들은 동료가 물에 빠지자 그가 가진 보따리에만 관심을 보였다.
심지어 뭍으로 올라오지 못하도록 물속으로 밀어 넣는 중이었다.
천지회는 언제나 저렇게 약탈하면서 회사를 키워 왔다.
그건 일송그룹도 똑같았다.
“흠”
한판수는 팔짱을 낀 채 생각에 잠겼다.
무엇이 자신에게 가장 이득이 될지 생각해야 했다.
“7천억에 팔겠소.”
“미친 건가요?”
정훈은 일부러 그를 도발했다.
“무례하군, 사회지도층에 어울리는 단어를 사용하는 게 좋을 거요.”
한판수는 위선적인 웃음을 지으며 정훈에게 충고했다.
‘위선덩어리, 썩어빠진 당신의 가식을 벗겨 드리죠’
정훈은 고개를 들어 한판수를 뚫어지게 보았다. 그리고 입을 열었다.
“사회지도층이라……, 그래서 따님은 백화점 직원 뺨을 수십 차례 때리고 무릎을 꿇렸군요. 사회지도층은 서민을 노예로 생각하나 봅니다. 그렇다면 따님의 행동은 사회지도층에 아주 잘 어울리는 일이네요. 지난번 언론에 난 클럽 사건도요.”
그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역시 소문대로 지극한 딸 바보였다.
그는 클럽에 뺨을 한 대 맞은 딸을 위해 십여 명의 조폭을 동원해 클럽을 난장판으로 만들었다.
“협상하러 온 거요, 도발하러 온 거요?”
한판수는 심호흡을 한 다음 정훈에게 말했다.
‘역시 쉽게 볼 자는 아니군.’
그는 여전히 자신의 포커페이스를 유지했다.
“오천억에 넘기세요. 아니면 내년에는 한호그룹이 일송처럼 될 겁니다.”
“무슨 말이지?”
“일송처럼 갈갈이 찢길 거란 말입니다.”
“뭐야? 이…….”
-퍽
한판수가 소파의 손잡이를 강하게 내리쳤다.
“뭐야? 어디서 버릇없이 지껄이는 거야!”
드디어 그의 페이스가 흐트러졌다.
한판수가 정훈을 쏘아, 보았지만 그도 밀리지 않았다.
“회장님, 선택하세요. 다른 천지회 회원들과 나눠 드시든지 아니면 나랑 나눠 먹던지.”
“뭐?”
파르르 떨고 있던 그의 눈썹이 점점 안정을 찾기 시작했다.
그는 나눠 먹자는 말을 둘이서 나누자로 정확히 이해했다.
“나눈다……. 그럼 사이좋게 절반을 나눠야겠구먼. 일송에서 자네가 원하는 건 뭐지?”
“먼저 원하는 걸 말씀하시죠. 저는 드시고 난 찌꺼기도 괜찮습니다.”
“중공업, 유통, 화학을 준다면 고려해 보지.”
일송의 60퍼센트를 차지하는 업체들이다.
중공업은 방산과 연결되어 있다.
한호그룹이 방산업체를 주력으로 삼고 있으니 이해가 갔다.
나머지도 한호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사업영역이다.
“그럼 남는 건 일송전자, 일송하이텍, 일송건설, 일송증권과 금융, 그것들이 제 몫입니까?”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예상대로다.’
숫자만 많을 뿐.
돈 안 되고 적자투성이인 일송전자와 일송하이텍.
그나마 업계 1위인 일송증권과 20위 내에 들어가는 일송건설로 구색을 갖췄다.
짧은 순간에 자신에게 대단히 유리한 방향으로 안배했다.
매출액 기준 그룹의 40퍼센트 정도를 차지하고 있다.
적자는 90퍼센트.
하지만 정훈은 알고 있다.
증권과 건설은 곧 초호황을 맞이하고 일송전자와 반도체를 담당하는 하이텍도 흑자로 전환한다.
그리고 하이텍의 반도체 사업은 다음 단계를 위해서도 꼭 필요했다.
큰 반도체 회사 하나가 주인없이 떠돌고 있기 때문이었다.
한판수에게는 이 정도면 매우 만족할 만한 거래다.
천지회들과 나누면 10퍼센트도 챙기기 힘들지만 지금 그는 60퍼센트를 차지할 수 있다.
“좋습니다. 이렇게 하죠.”
정훈이 순순히 자신의 의견을 받아들이자 한판수는 깜짝 놀랐다.
하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대신 궁금한 부분을 물었다.
“어떻게 송지호를 물러나게 하는 거지?”
“어렵진 않죠. 천지회, 당신들도 마음만 먹으면 할 수 있지 않습니까?”
“크흠, 우리를 알고 있었군.”
“저는 생각보다 많은 걸 알고 있습니다. 지금은 중요하지 않으니 차차 이야기하고……. 궁지에 몰린 송지호는 곧 해서는 안 될 악수를 둘 겁니다. 누가 또 죽어야겠죠. 자신의 동생을 죽였던 것처럼.”
“뭐? 그게 무슨 말이야?”
한판수의 시꺼먼 동공이 좌우로 세차게 흔들렸다.
정훈의 말뜻을 정확하게 이해한 것이 분명했다.
‘송지호가 윤호를 죽였다. 거기다 송철호도 제거한다?’
그럼, 어떻게 되나? 머리를 굴렸다
공식적으로 새로운 수장 선거가 시작된다.
그리고 가장 유력한 건 자신이다.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지만 빨리 그렇게 됐으면 좋겠네.”
한판수의 속내가 눈에 훤히 드러났다.
차기 수장은 이미 한판수 자신이라 확신하는 눈빛이었다.
정훈은 그를 보고 옅게 웃었다.
“그럼 오천억에 채권을 인수하겠습니다.”
“그게 꼭 필요하나?”
“네. 그게 있어야 일이 진행됩니다.”
“계약서를 작성해야 하지 않을까?”
“물론 해야죠.”
정훈은 한판수와 계약서를 작성했다.
윤정훈이 일송을 차지하면 약속한 계열사를 양도한다는 내용이다.
“양도 금액은 미리 정하시겠습니까?”
“내가 갖고 싶은 건 대부분 상장 회사니까 그때 주식 가격으로 산정하지.”
정훈은 그의 눈빛에서 탐욕을 보았다.
한 푼이라도 싸게 가지기 위한 그의 욕망이 일렁였다.
“알겠습니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유동성 위기가 불거진 상황 주가가 내려가는 건 뻔했다.
중요한 건 싼 물건을 찾는 사람은 한판수 혼자만은 아니다.
***
윤정훈은 송철호를 면담했다.
변호사를 대동해서 접견해서 단둘의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회장님. 한호그룹에 맡긴 담보로 맡긴 주식 30퍼센트 저한테 넘기시죠. 오천억에 사겠습니다.”
“뭐? 그걸 어떻게 너한테 넘겨”
“이미 채권은 제가 인수했습니다. 오천억 저한테 갚으면 됩니다. 주식으로 퉁 칠 거면 안 갚아도 됩니다.”
그의 짧은 신음이 이어졌다.
“제가 최고의 변호사들로 구성해 도와드리겠습니다. 집행유예는 힘들지만 5년 안으로 받게 하겠습니다.”
“풉, 이놈아, 지금 내 마음은 네 놈을 씹어먹고 싶어. 내 아들을 죽인 게 네 놈 아니냐?”
“송윤호를 죽인 건 당신의 아들입니다. 이해는 합니다. 카인이 아벨을 죽였든 형이 동생을 죽인 거죠. 인정하기 싫으실 겁니다.”
정훈의 눈빛이 타올랐다.
서늘한 목소리가 입에서 쏟아졌다.
“그런데 영감. 당신이 내 부모를 죽인 건 사실이야. 마음 같아선 송지호처럼 당신 사지를 갈기갈기 찢고 싶은데…… 참는 거야.”
정훈의 꽉 쥔 두 주먹에서 피가 새어 나왔다.
“…….”
정훈의 서릿발처럼 차가운 눈빛에 송철호가 흠칫 몸을 뒤로 젖혔다.
숨을 고른 정훈이 다시 입을 열었다.
“나오셔서 일송을 되찾아야 하지 않습니까? 아니면 현금이라도 챙기셔야죠.”
“일송을 가지겠다는 거구나.”
“정확히는 한호그룹과 반반입니다.”
“얼마를 줄 것이냐?”
“지분 30퍼센트 칠천억에 사겠습니다. 그럼 오천억은 한호로 가고 나머지 이천억은 회장님 계좌로 갑니다.”
“생각해 보마”
“그럼 오늘부터 변호사 보내 드리겠습니다. 회장님 체면에 국선 변호사가 뭡니까? 송지호도 너무 하네요. 아무리 자신을 버린 아버지라고 해도, 쯧.”
“그만하고 가 보거라.”
정훈이 자리를 떴다.
송철호는 지금 일송홀딩스 지분 말고는 가진 것이 아무것도 없다.
송지호에 의해 일송의 측근들 모두 손발이 잘렸다.
그리고 천지회 놈들은 모두 자신을 버렸다. 아니 이곳에 있다간 그들에게 살해될 게 뻔하다.
천지회 회원들이 일송을 노리고 있는 건 뻔한 이치였다.
쓰러진 동료의 소지품을 갈취하는 것은 천지회의 덕목이었다.
더 생각할 것도 없었다. 다음 날 다시 윤정훈을 불렀다.
“김수호 검사, 비주류 출신이던데……. 자네 라인인가?”
“네, 제 사냥개입니다. 제 말만 듣습니다. 저 말고는 누구의 뜻도 따르지 않습니다.”
“그럼, 부탁하겠네. 지난번 말대로 하지. 그리고 감옥에서의 내 안전도 보장해 주게. 나를 노리는 사람이 많아.”
“알겠습니다.”
‘마지막 부탁은 못 들어주겠습니다. 그쪽엔 당신들과 달리 인맥이 없어서.’
정훈은 일송홀딩스 주식 30퍼센트를 얻었다.
송지호가 가진 지분은 10퍼센트 보다 자신이 더 많이 가지고 있었다.
***
증권가에 퍼지는 유언비어는 걷잡을 수 없이 확산하였다.
일송그룹의 유동성 위기는 이제 경제 신문에서도 기정사실이 되었다.
송철호가 부재한 상황.
언론도 제멋대로 일송을 헐뜯었다.
일송그룹에서 계열사 중 상장된 중공업, 유통, 화학의 주가가 반 토막이 났다.
모두 한호그룹이 배후에서 조종 중이었다.
그리고 위기를 감지한 은행들이 이빨을 드러냈다
“대출금을 회수하려 합니다.”
“뭐? 얼마야?”
“다음 달에 돌아오는 어음이 천억입니다.”
“그룹에 천억이 없어?”
“유언비어 때문에 돈 줄 사람들은 주지 않고 달라는 사람만 넘쳐나고 있습니다.”
“이런……. 병신들이 일을 어떻게 하는 거야!”
자신이 가진 지분은 기껏해야 10퍼센트, 나머지는 대부분을 아버지가 가지고 있었다.
해결 방법은 주식을 매각해야만 이 위기를 해결할 수 있다.
아버지는 절대 주식을 팔지 않을 것이다.
아버지를 만나야 했다.
하지만 그는 면회를 거부했다.
송지호도 이제는 어쩔 수 없었다.
자신을 사랑하진 않았지만 아버지였다.
아버지가 계셨던 서재로가 그의 책상을 만졌다.
낡고 오래된 원목 가구.
세월의 흔적만큼 고풍스러웠지만, 자신의 스타일은 아니었다.
시간의 흔적들을 지우고 싶었다.
하긴 아버지와 자신의 기억은 상처와 흉터로 남아 있을 뿐, 절대 따뜻하고 감상적인 추억은 아니었다.
창밖을 한참 바라보던 그는 무겁게 전화번호를 눌렀다.
현금왕의 천재손자, 재벌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