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5화
강철중은 분명히 할머니를 만났다.
‘왜? 할머니를 협박하려고?’
절대로 아니다.
냉면을 사 줬다고 했으니 우호적인 관계인 건 확실했다.
천지회 멤버가 되기 위해 일부러 자신을 자극하는 것일까?
자신을 제대로 친다면 천지회의 깊은 곳으로 들어갈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들어가면…….
그렇게 천지회에 잠입한다면 뭐가 좋을까?
철중 선배의 인생은?
며칠 전 그의 목소리에 가득 묻어 있는 짜증이 생각났다.
그는 너털웃음이 어울리는 남자였는데.
혼란스러웠다.
철중 선배의 의중을 확신할 수 없었다.
정훈은 한 가지 확실한 결론을 내렸다.
괴물이 되고 있는 강철중을 내버려 둘 수 없다.
주화입마에 빠지려는 사부님을 구해야 했다.
우선 그가 누구 편인지 확인해야 했다.
정훈은 자신의 손에 들린 가죽 가방을 책상 위에 툭하고 놓았다.
강철중이 그것을 보았다.
“이것도 압수하겠습니다. 윤정훈 회장님!”
“마음대로 하세요, 강철중 검사님.”
정훈은 그가 가방을 뒤져도 그 안에 있는 서류를 압수해도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가방 안에는 대한은행 입찰 계획서가 있었다.
계획서에는 미래저축은행이 제시할 인수예상 금액이 적혀 있었다.
‘1조 5천억.’
강철중이 저 숫자를 어떻게 보고 할지 궁금했다.
‘그대로? 올려서, 아니면 낮춰서?’
만약 낮춘다면 그는 자신이 인수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다.
정훈은 한호그룹 한판수 회장을 통해서 론스타의 입찰 예상 금액을 알 수 있다.
한판수는 연기군 땅을 얻기 위해 분명히 정훈이 원한 숫자를 알려 줄 것이다.
숫자 몇 개만 알려 주면 되는 간단한 일.
한판수가 거절할 리 없었다.
땅 욕심이 많은 한판수는 조직을 팔아서라도 자신의 이득을 추구할 것이 뻔하다.
생각에 잠겨 있을 때 강철중이 비아냥거리는 목소리가 들렸다.
“역시 우리 후배님 철저하네요.”
정훈을 향해 비꼰 그는 혼잣말을 했다.
“젠장. 별로 건질 게 없어. 여기는…….”
‘여기는?’
또 어디를 터는 거지?
다행히 신화 엠파이어 홀딩스도 이전 준비 중이다. 여기는 기껏해야 컴퓨터 몇 대뿐이었다.
“그래서, 인천에 있는 회사를 지금 털고 있는데……. 몇 번 털지도 않았는데 먼지가 가득해.”
‘인천에도 내 회사가 있었나?’
순간 머릿속에 한 이름이 스쳐 지나가며 떠올랐다.
‘젠장, 신화제약.’
이전 이름은 동훈제약.
천지회가 마약 생산을 위한 원료를 수입하기 위해서 만들어 놓은 유령 제약 회사였다.
분명 문제가 될 만한 내용이 가득할 것이다.
다행히 인수 이후에는 문제가 없지만 자칫하다간 자신이 이전의 문제까지 책임져야 할 수도 있었다.
정훈은 방치했던 사실에 후회했지만 이미 늦었다.
강철중 앞에서 당황하면 모습을 들킬 수 없었다.
이를 악물고 웃음 지었다.
“거기도 마찬가지입니다. 선배님도 알다시피 제가 꽤 꼼꼼하잖아요. 털어도 나올 게 없을 겁니다.”
“그래? 나도 궁금해서 그러니 열심히 한번 털어 볼게. 얼마나 나오는지 보자, 우리 후배님.”
“검사님, 아까운 시간만 날리는 게 보기 안쓰럽네요.”
“훗, 그 주둥이 조사실에서도 나불거릴 수 있는지 다음에 봅시다. 후배님!”
강철중이 정훈의 머리를 쓰다듬고 밖으로 나갔다.
압수수색을 마친 사무실에 남아있는 건…….
텅 빈 책상뿐이었다.
모두들 허탈한 표정이었다.
“괜찮아요. 걱정하지 마세요. 모든 회계 처리는 적법하게 이루어졌어요. 문제 될 건 아무것도 없습니다.”
“네, 맞아요. 우리 자료도 볼 수 없어요. 하드에 기록되어 있는 건 인터넷 검색 정도뿐이에요. 제가 모든 중요한 서류들은 해외 서버로 보내지도록 설정했어요. 그리고 하드도 제가 세팅을 해서 복원할 수 없어요. 하나도 건질 게 없을 거예요.”
차영미가 자신 있게 말했다.
천진혁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잘됐네요. 컴퓨터가 없어서 일을 못 하겠네요. 할 일도 없는데 오랜만에 점심이나 맛있는 거 먹으러 갑시다. 저기압일 때는 고기 앞으로!”
정훈은 축 처진 직원들을 다독였다.
“네, 좋아요. 족발 먹으러 가죠?”
차영미의 제안.
“점심엔 한우죠.”
천진혁이 말했다.
그리고 구석에 서 있던 곽현수도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를 표했다.
“한우나 먹으러 갑시다.”
모두 압수 수색으로 뒤숭숭한 상황을 한우로 잊고 싶었던 것 같았다.
점심시간에 갈빗살부터 꽃등심, 그리고 특수 부위까지.
네 명이 100만 원어치를 먹었다.
모두가 배를 두드리며 커피믹스로 입가심을 할 때 정훈이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다들 맛있게 드셨죠? 그럼 이제 사다리 타야죠?”
테이블 주변으로 싸늘한 냉기가 흐르며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농담입니다.”
정훈은 계산서를 들고 일어섰다.
모두의 굳은 얼굴이 펴졌다.
정훈은
조금 전 순식간에 굳어진 얼굴을 떠올렸다.
그들의 당황하는 모습에 남몰래 쾌감을 느꼈다.
정훈의 소소한 재미였다.
***
강철중은 정훈의 가방에서 빼 온 서류를 압수 수색물에 기록하지 않았다.
서류를 살펴보니 대한은행 인수계획서였다.
현정옥 여사의 미래저축은행이 인수전에 뛰어드는 게 분명했다.
강철중은 이 사실을 박현철에게 알려야겠다고 생각했다.
대신 금액은 낮추기로 했다.
1조 5천억 대신 1조 천억으로.
그러면 할머니의 미래저축은행이 인수하는 데 전혀 문제없다.
자신은 압수 수색도 열심히 했고 좋은 정보도 제공했으니 박현철의 신뢰를 한 몸에 받을 거라 생각했다.
서류의 마지막 부분을 조작해 1조 천억으로 만들었다.
그리고 신화제약을 털어서 나온 자료를 가공해서 약사법 위반으로 고소할 예정이었다.
허가와 다르게 약을 제조한 사실이 다수 발견되었다.
이전에 신화제약으로 인수되기 전 동훈제약일 때 벌어진 일이지만 상관없었다.
어차피 몇 조 원의 벌금을 때리지 않는 이상 정훈에게 타격은 없을 것이다.
검찰도 불러서 조사를 하고 괴롭히는 것이 박현철의 의도다.
박현철의 의도대로 행동하는 것이 지금 그의 신임을 얻기 위한 최선의 길이다.
강철중은 보고할 내용을 머릿속에서 다시 한번 더 시뮬레이션 했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문을 두드렸다.
“강철중입니다.”
“들어와.”
짙은 가죽 냄새가 코를 찔렀다.
새로 산 블랙톤의 가죽이 고급스러운 광을 내고 있었다.
“앉아.”
“감사합니다.”
허리를 깊숙이 숙여 인사한 강철중이 자리에 앉았다.
“하, 세상 좋아졌어. 철중아. 병아리 검사가 차장검사 방에도 들어오고.”
“영광입니다. 선배님.”
강철중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머리를 깊이 조아렸다.
“허허, 농담이야. 뭘 그렇게 긴장하고 그래.”
자리에 앉은 강철중은 서류 파일을 그에게 주면서 보고를 시작했다.
신화제약을 통해서 약사법 위반으로 조사를 하겠다고 전했다.
“역시, 네가 눈치가 있구나. 벌금 이런 거 하지 말고 조사만 해. 계속 불러서 아주 귀찮게 해.”
“네, 최대한 집요하게 괴롭히겠습니다.”
서류를 뒤적이던 박현철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흠 이게 다야? 생각보다 약한데……. 이 정도로는 초고속 승진은 어림도 없는데.”
박현철이 실망한 기색을 보이자 철중은 그에게 다른 서류를 내밀었다.
“윤정훈이 대한은행을 노리고 있습니다.”
“뭐? 그놈이? 역시……. 내 이럴 줄 알았어.”
박현철의 얼굴에는 불쾌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의 머릿속에서 대한은행은 이미 자신의 것이었다.
그걸 남이 인수하는 건 도둑질이다.
박현철은 자신의 것을 탐하는 도둑의 계획에 짜증이 났다.
“대한은행 인수는 어떻게 진행되는 거야?”
“미래저축은행을 통해 인수를 추진하고 있습니다. 현정옥이 가진 개인 자금과 저축은행의 자금을 활용할 것으로 보입니다.”
“흠…… 이렇게 되면 싸게 먹기 어려워지는데…….”
“……. 제가 한번 압수 수색을 진행해 볼까요? 아니면 금감원 통해서 압박하라고 하겠습니다.”
“놔둬, 저축은행으로 인수한다는 게 말이 돼? 분수를 모르고 설치는 거지. 일단 저축은행 내사 진행해. 인수전 끝나고 부실 대출 같은 걸로 엮어서 공중분해 시켜 버려.”
“네. 그렇게 준비하겠습니다.”
“그래, 철중아 아주 잘했어. 계획대로만 착착 되면 동기 중에서 1번으로 초고속 승진하는 거야.”
“감사합니다. 선배님.”
둘 사이에 어색한 정적이 흘렀다.
할 말이 없던 박현철이 물었다.
“거 신화제약은 어디 있어?”
“인천 연수구청에 임대해 있었습니다. 직원도 얼마없는 작은 회사입니다.”
“연수구청? 거기에 내 제약회사도 있는데.”
“아니 회사도 가지고 있습니까? 대단하십니다.”
철중은 깜짝 놀란 척 하며 두 손으로 엄지를 치켜세웠다.
“아니 인마, 앞으로 내 거 될 거니 내 거잖아. 하하하”
“맞습니다. 선배님. 원하는 거 마음에 드는 거 말씀만 해 주시면 제가 잘 요리해서 선배님 앞에 예쁘게 갖다 바치겠습니다.”
“허허, 녀석. 아부가 대단해.”
박현철이 흡족한 표정을 지었다.
“선배님 말씀하신 그 회사 꽤 괜찮은 회사인가 봅니다. 하늘 같은 선배님이 관심을 가지는 걸 보면.”
“허허허, 사람 좀 그만 띄워, 이 녀석아 날아가겠다. 의료 쪽이라 잘 모르는데 신기술 가진 회사로 앞으로 떼돈을 벌 거라는데.”
“네? 그럼 저도 좀……. 어떻게 손가락이라도 담글 수 있도록 부탁드려도 되겠습니까? 선배님.”
벌떡 일어나 머리를 조아렸다.
박현철은 그의 과장된 몸짓이 아주 마음에 들었는지 입술을 길게 늘이고 있었다.
“뭐? 이런 싸가지가……. 하하하, 하여튼 철중이 넌 사람을 아주 재밌게 해! 오늘 저녁에 한잔할까?”
“영광입니다. 그럼 제가 미리 가서 세팅해 놓겠습니다.”
“그래, 우리 좆 판사님도 부르고 재벌 회장님 한판수 그 새끼도 불러.”
“네, 존경하는 선배님. 그럼 이만 가 보겠습니다.”
철중은 일어나서 머리를 깊이 숙인 다음 방을 나갔다.
“에이 썅!”
혼잣말을 내뱉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아무도 없는 걸 확인한 그는 허공에다 대고 발길질을 몇 번 했다.
누군가의 머리통을 세차게 짓이기며 짓밟고 있었다.
잔뜩 찡그린 얼굴로 사무실로 간 그는 컴퓨터를 켰다.
박현철이 말한 회사를 검색했다.
‘셀토바이오.’
연수구에 있는 벤처기업으로 기술력이 뛰어난 회사였다.
주변을 다시 한번 살핀 후 휴대전화를 꺼냈다.
“신화제약 옆에 있는 회사를 천지회 놈들이 노리고 있습니다. 나라에 도움 되는 바이오 신기술이 목표입니다. 분명히 작업이 들어가 있을 겁니다. 정훈이 도움을 주면 좋은 기회가 될 것 같습니다.”
강철중은 조심스럽게 문자를 보냈다.
그리고 밀실을 세팅하러 출발했다.
***
대한은행 매각 발표가 난 다음 언론에서는 대한은행 부실을 집중적으로 조명했다.
강성노조도 언론에서 문제를 삼았다.
매각 발표와 동시에 파업에 들어간 대한은행.
아니나 다를까 검찰에서는 경찰을 동원해 대규모 유혈 진압을 완수했다.
불법 파업을 엄단한다는 명목이었다.
대한은행 노조위원장은 불법 파업 혐의로 체포되어 있었다.
김수호 검사 말에 의하면 사돈의 팔촌까지 털었지만 쓸 만한 게 나오지 않은 상황이라고 했다.
지금 고등학생 자녀와 대학생 자녀를 털고 있다고 했다.
그걸 빌미로 대한은행 인수에 노조의 협조를 요구하고 있는 상황이라고 전했다.
천지회 놈들은 정말 똑같은 수법만 사용했다.
정훈의 방으로 황석과 강상철이 보고하러 왔다.
“회장님, 금액은 예정대로 하시겠습니까?”
“네, 70조짜리 은행입니다. 1조 5천억도 공짜 아닙니까?”
“맞습니다.”
“지금 사용하는 임시 사무실은 불편하시죠?”
“괜찮습니다.”
“이번 인수전 끝나면 아마 공사가 끝날 겁니다.”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금감원 쪽 분위기는 어떻습니까?”
“좋지 않습니다. 론스타 쪽으로 많이 기울어져 있습니다. 저축은행 인수 때와는 분위기가 많이 다릅니다. 몸을 잔뜩 사리고 있습니다. 은행이란 게 금액으로만 인수할 수 없는데 걱정이네요.”
강상철도 황석도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걱정하지 마세요. 자본력과 저축은행과의 시너지를 생각하면 인수전의 승자는 우리가 분명합니다. 그리고 제게는 필승의 카드가 있습니다.”
“네? 필승의 카드라는 건?”
“상대의 가격이죠.”
두 사람이 고개를 끄덕였다.
인수전에서 상대의 입찰가를 안다는 것은 확실한 장점이다. 물론 인수전에서 가격이 모든 것을 결정하는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미래저축은행을 선택하는 것이 가장 합리적이었다.
현정옥 여사의 미래저축은행과 함께한다면 대한은행은 거대 금융 그룹으로 도약할 수 있다.
하지만 뚜껑을 열어 봐야 결과를 알 수 있는 상황이었다.
그때 정훈의 휴대폰이 울렸다.
발신 번호가 표시되어 있지 않았다.
‘누굴까?’
“한판수요!”
“네, 회장님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땅에 대한 집요한 욕심이 그를 움직였다.
“흠흠……”
“말씀하시죠. 얼마입니까?”
“1조 2천억이요. 계약은 반드시 지키길, 안 그러면 이번에는 멱을 따 버릴 테니”
“물론입니다. 회장님. 결과 발표 나는 날 바로 도장 찍죠.”
정훈은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철중 선배가 배신한 게 아닌 걸 확신했다.
자신을 배신했다면 론스타의 가격은 1조 5천억 이상이어야 한다.
그런데 그 밑이라는 건 철중 선배가 가격을 잘못 알려 줬다는 이야기다.
정훈은 마음으로 안도의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잃어버렸던 친구를 다시 찾은 순간이었다.
그리고 인수전에서도 가격으로 확실한 우위를 점할 수 있게 되었다.
“정치적인 요소도 비가격적인 부분도 중요하지만 그래도 가격이 제일 중요할 겁니다. 황 팀장님. 예정대로 1조 5천억으로 입찰하세요. 그리고 강상철 팀장님은 집중적으로 로비하시고요.”
“알겠습니다.”
둘은 동시에 대답한 다음 밖으로 나갔다.
황석은 입찰 서류를 제출했고 강상철은 그날 저녁부터 끈질기게 조르며 금융위원회, 금감원, 그리고 대한은행 관계자 등등 인수와 조금이라도 연관 있는 사람들에게 로비를 했다.
그리고 오늘 오후 입찰 결과가 발표된다.
***
박현철은 기분 좋은 인사와 함께 사무실로 들어갔다.
들어가자마자 한 통의 전화를 받았다.
그리고 그는 전화기를 들고 그대로 바닥에 찍어 내렸다.
구둣발로 수차례 찍어 내리며 전화기를 산산조각 냈다.
“후우, 후우”
거칠게 숨을 내쉬던 그는 호흡을 차분하게 가다듬었다.
그리고 천천히 전화기를 꺼냈다.
비릿한 웃음을 지었다.
“철중아, 나다.”
아주 상냥한 목소리였다.
“네, 선배님.”
“오늘 점심이나 같이 먹을까?”
“알겠습니다. 어디로 갈까요?”
“중부시 외곽에 있는 수금재로 와.”
강철중은 의문스러웠다.
‘점심 먹으러 가기에는 너무 멀리 가는 것 같은데’
“가서 낮술이나 하자. 오늘 오후에 좋은 일도 있을 예정이야.”
강철중은 지나치게 상냥한 그의 목소리가 너무 낯설었다.
중부시로 가는 것도 불길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하늘 같은 차장 검사님의 제안.
자신이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현금왕의 천재손자, 재벌되다.